#30화. Chapter 8. 학회 (1)
‘응?’
이세아는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진유리가 낼 법한 목소리나 대답이 전혀 아니었고, 게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까진 없을 텐데.
흡사 스프링을 방불케 하는 탄력으로, 그대로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일으킨 그녀가 엉거주춤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아…….”
도로 자리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기색.
백수십 명의 학생들과 교수진이 자신만 보고 있자 그제야 이도진에게 되묻는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몇 페이지라고 말씀하셨죠?”
일견 침착한 말투였으나 얼굴이 새빨개져 있고, 그녀가 무척 당황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이도진이 의도치 않게 추가타를 날렸다.
“아뇨, 몇 페이지가 아니라 출력과 저항 사이의 기본 공식만 말해주면 됩니다. 진유리 학생이라면 외우고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물어봐서 생각이 안 난다면 책을 찾아봐도 괜찮아요.”
“아, 공식이요…….”
말끝을 흐리던 진유리가 조금 평정을 되찾았는지 입을 뗐다.
“그러니까…… 마력의 출력과 시전자가 받는 저항에서 변수가 되는 요소는 크게, 어……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는-”
“쟤 왜 말하라는 공식은 안 말하고 교과서만 줄줄 읽냐? 자기는 책 통째로 다 외웠다고 자랑하나?”
“…….”
유해빈이 속닥인 험담을 이세아는 으레 그러했듯 한 귀로 흘려넘겼다. 그보다는 진유리의 상태가 더 신경 쓰였다.
‘……왜 저러지?’
자기 책상과 먼 곳에 있는 이도진. 그 사이 허공에다 시선을 두곤 교과서 내용만 읊어대는 중이고, 그조차 정확하지 않아 부분부분 빠뜨리거나 틀린 내용이 보인다. 결국 진유리가 대여섯 문장째를 말할 즈음 이도진이 나섰다.
“진유리 학생?”
“네? 네, 교수님!”
“기본 공식만 말해주면 되는데…… 답해줄 수 있을까요?”
“아…….”
이내 강의실이 조용해졌고, 학생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는 말을 이세아는 들을 수 있었다.
‘쟤 오늘 어디 아픈가?’라는 식의 의문. 진유리를 지목한 이도진도 은근히 난처해하는 눈치였다. 별로 복잡한 공식도 아니니 당연히 알 거로 생각하고 시킨 걸 텐데 저렇게 버벅거릴 줄 알았겠는가.
몇 초간 침묵하던 진유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진유리 학생. 괜찮으니까, 170p 아래에서 다섯 번째 줄부터 끝까지 읽어봐 주겠어요?”
이세아가 살펴보니 그쪽에 이도진이 물은 공식이 쓰여 있었다.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 그러나 지금만큼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진유리가 교과서를 읽어 나갔다.
예상치 못한 이변이 벌어지긴 했으나 그날 수업도 잘 마무리됐고, 다음 수업을 듣고자 이동하던 도중.
“오빠 있잖아.”
“……오빠?”
나직이 반문한 이세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함께 걷고 있는 유해빈을 흘겨봤다. 그러자 되려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대충 알아들어. 내가 오빠가 있겠냐? 너희 오빠 말이야.”
“……학교에선 교수님이잖아.”
“아, 그래, 이도진 교수님. 거 참, 되게 깐깐하게 구네. 아무튼, 교수님 은근히 좀 착하시지 않냐?”
“갑자기?”
이세아는 고개를 돌려 방금 빠져나온 강의실을 바라봤다.
질문을 다 받아주고 나서도 학생들 여럿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도진이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곤 싱긋이 웃었고, 이세아는 문득 어떤 말을 떠올렸다.
오빠의 약혼녀인 한세라.
그녀가 창안해내고 이세아에게도 알려줬던 표현.
앞의 수식어와 그걸 받는 단어가 정반대로 대비되지만, 또 막상 같이 붙여놓고 이도진을 지칭하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실로 마법 같은 표현.
이세아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착한 쓰레기.”
“엥?”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문한 유해빈이 황당해하며 그녀를 질책했다.
“아니,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렇지…… 오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내가 한 말 아냐.”
그 말을 처음 들려줬을 때 한세라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기가 사라졌고, 나중엔 ‘착한’보다 ‘쓰레기’의 비중이 너무 높아진 것 같다고 옅게나마 허탈해했다.
그래도 오래 봐 왔으니 이세아는 한세라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 그때쯤엔 이미…….’
약혼자에 대해.
이도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거의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으리라.
한데 유해빈이 의아해하는 눈치로 재차 물었다.
“그럼 누가 한 말인데? 내가 본 교수님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해도 사람 되게 괜찮아 보이는데.”
“…….”
이세아가 말없이 노려보자 유해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꿍얼댔다.
“아, 네. 자기는 욕해도 남이 오빠 욕하는 건 못 참겠다 이거지?”
“알면 앞으로 자제해.”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후의 두 번째 수업이 열리는 곳에 다다랐고, 이세아는 진유리를 눈여겨봤다.
‘……이번엔 멀쩡하네.’
제일 앞쪽에서 수업도 열심히 듣고, 필기는 얼핏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체계적으로 하고, 교수의 질문엔 빠짐없이 손을 드는 데다 실습에서도 아주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
지난 사 년간 알아온 진유리였고, 해서 이세아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오빠 때문이라고?’
믿기 힘들지만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자면 그랬다. 열성적인 자세로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진유리를 바라보며 이세아는 의문을 품었다.
‘쟤가 머릿속이 꽃밭이고 그런 애는 아닌데.’
그야 성격은 극단적으로 안 맞지만 그런 방면의 평가는 객관적으로 내릴 수 있었다.
제1 아카데미의 익명 커뮤니티에서 이도진과 몇 살 차이가 어쩌고 떠들어대는 말들. 진유리는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터였다.
설령 관심이 있다손 치더라도 크나큰 문제였고.
이세아는 조용히 되뇌었다.
‘쟤는 아냐…….’
한세라라면 이도진에게 과분한 상대라 해야겠지.
실제로 약혼이 깨지지 않고 그 이후의 과정이 진행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생각이었다.
한세라가 아니라 해도, 교수로 건실하게 살아가다 결혼할 사람이라고 누굴 데려온다면, 열린 마음으로 대할 자신은 있었다. 이것도 가봐야 아는 거긴 하지만.
그러나 진유리는 처음부터 아니다.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거다.
그녀의 뇌리에 두려운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오빠와 결혼한 진유리가 팔짱을 끼고, 저 새침하면서도 화려한 이목구비에 부드럽고 상냥한 웃음을 띠고, 자신을 ‘이세아’가 아니라 다른 호칭으로 부르게 된다면…….
“우욱, 쓰읍-”
순간적으로 흘린 침음성. 앞선 강의와 달리 대충 듣는 시늉만 하던 유해빈이 그녀에게 물었다.
“왜?”
“속 안 좋으니까 말 시키지 마.”
그러자 유해빈이 별안간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이세아 토할 것 같대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세아에게로 쏠렸다. 유해빈을 어떻게 응징할지를 고심하며 그녀는 겨우 사태를 수습했고, 잠깐 강의에 공백이 생긴 그 시점.
진유리는 마음속으로 자문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마법역학 수업에서 보인 추태가 그녀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이도진과 최대한 눈이 마주칠 일이 없는 자리로 옮기도록.
자연스럽게 몸이 굳었다. 이도진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고 생각이 멈췄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꿈에서…… 봤었나?’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꿈에 그가 나온 것 같기는 했다. 자세한 상황도 기억나지 않았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대단히 인상적인 언행을 보여줬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진유리는 그런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 나간 것도 아니고.’
일곱 살이나 연상에다 미성년자와 성인이다.
학생이고 교수다.
여기까지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심지어 그는…….
진유리는 흘끗 이세아를 쳐다봤다.
차분한 걸 넘어서 어떨 땐 싸늘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 그러나 진유리가 보기엔 또래에서 비견할 사람을 찾기 힘들 만큼 단정한 이목구비.
자신을 하찮은 우민 보듯 올려다보는 그녀를 ‘이세아’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르게 된다면…….
“우욱…….”
이세아와 마찬가지로 급격히 속이 안 좋아진 진유리가 얼굴을 찌푸렸고, 두 사람의 망상에 가까운 걱정과는 별개로 오후의 두 번째 수업도 끝이 났다.
저녁 여섯 시에 가까워진 시각.
교정을 걸으며 이세아는 휴대전화를 다시금 확인했다.
-오빠: 오빠 오늘도 좀 늦을 것 같아
-오빠: 금방 끝내고 가서 저녁 차려줄 테니까 먼저 가 있어 (17:40)
서상욱 교수와 진행하는 연구에서 크게 진척이 있었단다. 다음 달 학회에 논문을 발표할 계획이라 했고, 마무리 작업 때문에 어제도 여덟 시가 다 돼서 귀가했으니 오늘도 다르지 않겠지.
교문을 나서기 직전, 이세아는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
교수 연구동 쪽의 창가에 선 이도진이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시 멈춰서 있던 이세아는 교복 상의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손을 턱 부근까지 어색하게 올린 다음, 집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세아를 바라보며 나는 여러 사람에게 묻고 싶은 심경이었다. 원래 동생이란 애들은 다 이렇게 귀여운 건지.
다른 집이 어떤지는 내가 모르겠는데, 그래도 내 동생만큼 귀여운 애는 찾기 어려울 거라는 확신은 드네.
그즈음 휴식을 마친 서상욱 교수가 일렀다.
“자, 두어 시간만 더 힘내지.”
어제부로 실험 데이터는 거의 다 확보했다. 세부적인 조정과 논문을 완성하는 일만 남았는데…… 서상욱 교수의 말로는 학회 일정에 맞추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단다.
4월 8일 목요일. 그 이후로는 팬텀 활동도 재개해야겠지. 가서 한태강을 만나는 것만 아니라면 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 텐데.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종이를 유심히 보던 서상욱 교수가 흥미진진해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논문 내용만 공개돼도 떠들썩할 텐데 자네가 주저자로 올라가 있는 게 밝혀지면 놀랄 사람이 많을걸세. 나야 쭉 봤으니 알지만…… 낙하산이니 뭐니 의심하는 인간들 입도 뻥끗 못 하게, 무슨 뜻인지 알지?”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 걸 보여주는 거야 문제가 안 된다.
만나기 곤란한 사람들과 특허나 사업 얘기 같은 게 오가게 되면 서로 민망할 듯해서, 문제라면 그게 문제지.
어쨌든 지금은 열심히 해야 할 때였고 어느덧 오늘 목표 지점까진 마무리가 되어 서상욱 교수가 말했다.
“이만 퇴근하고 내일 하세나.”
연구실을 나선 우리는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나눴다. 한데 차에 탑승해 막 교문을 나서려던 그때.
“교수님!”
웬 인영이 차 유리창을 두드렸다. 다름 아닌 유해빈이었다.
허락의 의미로 고갯짓하니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유해빈이 돌연 궁금해하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근데 교수님, 착한 쓰레기란 별명은 어떻게 생기신 건지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세아는 말을 안 해주더라고요.”
“……세아가 그래?”
“아뇨, 자기가 지은 별명 아니라고만 하던데요.”
……다행이네. 세아까지 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으면 가슴이 좀 많이 아플 뻔했다. 물론 얘한테는 자초지종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고.
“그런 사람 있어. 너는 몰라도 된다.”
“남매가 거절할 때 표정이 진짜 똑같네…….”
불만스럽게 투덜댄 유해빈이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아, 그리고 진유리는 딱히 주의할 것 없겠던데요?”
“그래?”
나도 그렇게 판단하곤 있었지만 얘가 확언해줬다면 좀 더 안심해도 되겠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 애한테 걸었던 인식지배 스킬. 타인의 사고에 강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내게 있어 안성맞춤인 능력이지만 부작용이 없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말도록 개입할 수는 있으나 감정까지 완전히 차단하긴 어려웠다.
진유리의 마음속에는 내가 그날 보여줬던 모습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겠지. 다만 원인을 찾을 순 없을 테고, 시간이 흘러 그 감정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할지는 나로서도 미지수였다.
“걔 교수님한테 푹 빠진 것처럼 보이던데…… 그렇진 않겠죠? 저야 무슨 마법 쓰신 건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냥 나 보면 움찔하는 정도지.”
그날의 사건 하나로 그만큼 감정이 변화하긴 요원할 터. 다른 사건들이 이어지면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걔랑 그런 식으로 엮일 일이 있으려고.
“이왕 탔는데 태워다줄까?”
“여기서 다시 내리면 괜히 의심받을걸요.”
“그것도 그러네.”
넉살 좋게 답한 유해빈과 함께 나는 차를 몰아나갔다.
한데 바로 그때.
우우웅-
“어? 교수님 전화 왔는데요.”
유해빈이 휴대전화를 내게 넘겨줬다. 오른손으로 받아든 나는 발신인을 확인했고…….
“…….”
“안 받으세요?”
“후우…….”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 화면에 떠오른 이름 때문에.
거기엔 ‘한세라’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