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Chapter 8. 학회 (2)
세라한테 연락이 온 게…… 내 기억으론 올해 첫날 이후로 처음이다.
내 쪽에서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워낙에 바쁜 애고, 근황이라고 해 봐야 얘한테 털어놓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니까.
갓난아기일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단순히 어른들끼리 흥에 겨워 말이 오간 수준을 넘어, 실재하는 구속력을 갖춘 관계로까지 이어진 내 약혼자.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생판 모르는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어쩌면 그보다도 더 못한, 그런 사이가 됐다.
물론 그렇게 된 건 모두 내 책임이다.
그래서 나는 세라에게 항상 미안했고, 또한 마음 한편으로는 얘를 대하는 게 불편했다.
나와 가깝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나를 속속들이 잘 안다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결국엔 멀어져야 하고, 아직은 관계를 끊어낼 수 없고, 그런데도 여전히 호감이 가는 사람이 내 목소리와 표정에서 많은 걸 읽어낸다는 건…… 그건 정말로 난감한 일이어서.
그래서 결론적으로, 솔직히 전화를 받기 싫었지만, 그래도 안 받는 건 차마 못 할 짓 같아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휴대전화를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여보세요?”
그러자 톤이 조금 낮고 차분한, 듣는 사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가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내게 묻는다.
<어차피 받을 거면서 왜 그렇게 뜸을 들여?>
“아, 운전 중이었어.”
<아하, 그래?>
얘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나도 한세라라는 애를 잘 안다. 내 변명을 믿진 않지만, 일일이 캐묻는 건 별로 멋이 없으니 이대로 넘어가겠다는 의사 표현.
그런 의지가 내게 정확히 전달됐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과거에 우리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서로 다 알고, 이해하고, 혹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으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내 세라가 알 만하다는 듯이 물었다.
<수업은 한참 전에 끝났을 거고, 연구실에 있다가 퇴근하는 건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왜 모르겠어. 그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걸.>
“제타 관리도 아직 네가 해?”
<그냥, 바빠서 자주는 아니고.>
“……그래?”
거기까지 대화를 주고받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일다가…… 내가 먼저 화젯거리를 꺼냈다.
“요즘은 좀 어때? 아저씨한테 들으니까 여름에 귀국할 거라던데.”
<6월에 졸업하면 바로 갈 거야. 슬슬 취직해야지.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만하면 낙하산이라고 욕은 안 먹겠지 싶어서.>
“굳이 유학까지 안 가도 됐을 텐데.”
세라는 똑똑하다. 그 앞에 어떤 화려한 수식어를 가져다 놓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두뇌가 명석했고, 각성자로서 지닌 재능도 대단히 출중하다.
내가 알기로는 대학원을 졸업하면 바로 한태강이 이끄는 길드 영원의 중진을 맡기로 돼 있는데, 낙하산이라는 건 단순히 겸손이고 영원이 아닌 세계 어느 길드나 회사라 해도 환영할 인재다.
하지만 세라가 확신이 깃든 어조로 부정했다.
<여기로 오고 나서 내가 그전에 몰랐던 걸 보고, 배우고, 반성한 게 꽤 많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너한텐 올해가 그런 시기인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네. ……친구로서.>
“그냥, 그럭저럭 살고 있어.”
<……그래?>
이젠 정말로 나눌 이야기가 없어졌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편했던 이들은, 서로가 편하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게 된다. 서로 그전엔 어떤 방식으로 대화했는지를, 단 한 순간에 잊어버리게 된다. 나는 그걸 세라와 멀어지면서 깨달았다.
결국 이어진 건 우리 본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말이었다.
<얼핏 들으니까 다음 달 학회에 너도 참석한다는 말이 있던데. 연구원 자격으로?>
“응, 뭐 그거 비슷하게.”
<우리 아빠도 거기 가시니까 괜찮은 결과물 내면 잘 좀 봐줘.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쪽이 대우가 제일 좋을걸?>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닌데…… 말이나 해볼게.”
<그래 주면 고맙지.>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세라가 이야기를 정리했다.
<운전 중이라는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나 귀국하면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봐.>
“그래, 연락해. 나도 연락할 테니까.”
형식적인 답에 이어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그때.
문득 세라가 물었다.
<맞다, 도진아.>
“응?”
<나 귀국해서 취직하면 이미지 문제도 있고, 염색할까 생각 중인데…… 그런 걸 다 떠나서, 나한테 어울리려나? 너랑 나는 오래 알았으니까, 객관적인 판단을 묻는 거야.>
이건 비교적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고, 나는 완곡하게 내 의견을 전달했다.
“글쎄, 상상이 잘 안 가네.”
<……그래? 아무튼, 알겠어. 다음에 연락하자.>
그리고 정말로 전화를 끊기 직전.
세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우리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띠리릭-
휴대전화를 손에서 내려놓으니 유해빈이 흥미가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교수님, 누군데 표정이 그렇게 심각하세요? 일부러 이름은 안 봤거든요. 목소리도 아련함 그 자체던데.”
“제타 만든 사람.”
“네? 그게 누군데요?”
“네가 몰라도 되는 사람.”
“에이, 그러지 말고 힌트라도 좀 주시지.”
“제타 만든 사람.”
“이건 뭐,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이없어하며 투덜거리는 유해빈을 사는 곳에다 태워준 나는 얼마간 지나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섰다.
“배 많이 고프지? 금방 저녁 차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딱히, 괜찮은데.”
화이트데이 이후로 부쩍 군것질이 늘어난 세아가 과일 푸딩을 우물거리며 답했다.
그러나 내 동생이 밥 안 챙겨 먹고 영양 불균형에 빠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가뿐히 무시한 나는 저녁상을 차려냈고,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언뜻 궁금한 게 있어 세아에게 물었다.
“세라랑 요새 연락해?”
“그냥, 가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나 문자 와. 바쁠 때는 한 달 가까이 안 올 때도 있고.”
“그럴 땐 네가 연락하고?”
“……보통은.”
오늘따라 밥 한 숟갈 뜰 때마다 물을 한 모금씩 들이켜는 세아가 짧게 답했다. 내가 먹어봐도 음식 간이 세긴 하네. 넋 놓고 있다가 간을 지나치게 한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기특하게도 설거지를 담당하고자 하던 세아를 방으로 쫓아낸 나는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대화를 많이 나눴더니 마음이 복잡했고, 나도 모르게 옛날 일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 나는 불현듯 전생을 자각했다.
사고 수준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이 내가 집필한 소설이라는 걸, 내 부모님이 그 소설의 주인공과 히로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걸 나 혼자 아는 비밀로 간직했고, 세라는 그러기 이전부터 이미 내 곁에 있었다.
서연희처럼 존재 자체로 내가 작가로서 쏟은 노력과 애정을 증명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고 전생을 깨닫고 나서야 만난 세아처럼 이 세상이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존재 자체로서 말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세라는, 단지 내게 소중한 존재다.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함께 있었다. 전생을 자각하고 나서도 계속 친구로 지냈다.
좋은 친구. 소중한 사람.
그 관계를 깨뜨린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대학을 일찍 졸업한 세라가 미국으로 가기 직전,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단둘이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라는 처음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세라라는 사람에게 있어 이도진이란 친구는 정말로 소중하고 항상 응원하는 사람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미워한다고. 경멸하고, 혐오한다고.
세라는 내가 누굴 만나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그에 관련한 대화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차츰차츰 자기와 멀어지려 하는 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전과 다를 바 없이 나를 대해줬다.
그날 단 한 번.
그날 밤에만 내가 모르던 본인의 감정을 드러냈고,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면서도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이미 가까운 사이라 말하기 힘든 관계가 되어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더더욱 멀어졌다.
세라가 유학을 떠나고 일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연락을 주고받은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간 귀국하지 않았으니 마주친 적도 없고.
나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화인처럼 남아있는 말을 되뇌어 봤다. 고등학교 시절, 방황하며 엇나가기만 했던 내게 세라가 전했던 충고이자 부탁.
네가 노력하지 않는 게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면, 실패해도 널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하지 못했다. 절대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없었으니까.
착한 쓰레기. 맨 처음 그 별명을 붙여주며 세라는 기뻐했던 것 같다. 자기한텐 안 그러니까. 걔도 그때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날에는 진심으로 말해줬다. 내가, 자기한테 쓰레기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유학을 가 있는 동안 드물게 전화 통화를 하고 메시지로 연락하면서, 우리는 친했던 시절처럼 말투를 꾸몄다. 겉으로만 그랬다. 상대방의 심부에 가닿지는 않으면서.
세라가 귀국하면…… 그조차도 못 하게 되겠지.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우웅…….
메신저 앱. 꽤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 세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세라: 맞다, 이걸 말 안 했네. (21:23)
-한세라: 필요하면 제타 회원으로 등록해줄까?
-한세라: 너한테도 지분 있잖아.
-한세라: 학생들 쓰라고 만든 거니까 글이나 댓글은 쓰지 말고. (21:24)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이도진: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한세라: ㅋㅋ 거절은 안 하네.
-한세라: 계정 만들어서 넘겨줄게. (21:25)
제1 아카데미 익명 커뮤니티. 통칭 제타.
중학교 일학년 겨울방학 땐 둘이서 그걸 만드는 데 빠져서 살았다.
학생들끼리만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어야지 않겠냐며 세라가 아이디어를 냈고, 나는 흥미본위로 창안자의 말에 따랐다.
앱을 만들고, 회원을 들이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둘 즈음에 대균열이 발생했었지.
내겐 아직 어제 일처럼 선명한, 옛날이야기였다.
***
뉴욕 현지 시각으로 3월 30일 오전 8시 30분경.
맨해튼에서 가장 고급에 속하는 아파트의 최상층에 머무르고 있는 한세라는 사뿐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침실 한쪽에 자리한 전신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표현해도 모자랄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용모. 얇은 슬립 원피스만을 걸친 몸의 곡선이 눈부신 자태를 그려냈다.
손에 쥔 휴대전화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욕실에 놓아뒀던 염색약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시험 삼아 오늘부터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으니까.
샤워기를 튼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더운물을 전신에 흘려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
4월 8일 목요일 오전.
본래라면 학교에 출근해야 할 날이지만 나는 서상욱 교수와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러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서상욱 교수가 재차 내게 확인했다.
“나는 운만 띄워줄 테니 자네 재량껏 발표해도 좋아. 질문이 많을 텐데, 다 박살을 내버리라고. 기대해 보겠네.”
“교수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죠.”
그즈음 멋들어진 건물이 시야에 나타났다. 주차장에 차를 정차하고, 준비한 결과물들을 모두 챙긴 서상욱 교수와 나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됐다.
“오, 한 대표님 오셨습니까.”
서상욱 교수가 알은체하며 성큼성큼 다가선 곳.
영원 길드의 수장이자 36 영웅의 일인. 무신 한태강이 무뚝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