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Chapter 8. 학회 (3)
“서 교수, 오랜만이네.”
서상욱 교수와 악수한 그가 재차 내게 시선을 향했다. 그즈음 나도 그들이 서 있는 곳에 다다랐고, 한태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자주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라지도 않았으니 신경 쓸 것 없다.”
“허허…….”
우리 둘 사이에 낀 서상욱 교수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말이 떠돌긴 했으나 그래도 딸의 약혼자인데 이렇게나 냉대할 줄은 몰랐단 것처럼.
그때 기골이 장대한 한태강이 서상욱 교수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보다 서 교수, 듣자 하니 이놈이랑 공동으로 연구를 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논문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서상욱 교수와 내가 대등한 기여도로 연구를 진행했단 것 정도는 오늘 학회에 참석하는 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상욱 교수의 말로는 우리가 듣기에 상당히 불쾌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데…… 한태강이 그걸 지적한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를 주저자로 내세운 것 아니냐는 거지. 뭘 원하는진 알 수 없으나 어떠한 이득을 노리고서.
이 질문에는 서상욱 교수도 표정을 굳히고 정색하며 답했다.
“물론이지요. 애초에 도진 군의 발상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못 했을 연구입니다. 실험 데이터도 도진 군의 기여가 없었다면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고요.”
“……그런가? 내 호기심이 지나쳐 서 교수에게 실례를 저질렀군. 아무쪼록 주의 깊게 들어 보겠네. 그리고 너는…… 이쪽으로 진로를 정한 거면, 오늘 언행을 신중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니까.”
“조언 감사히 새기겠습니다.”
충고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 못마땅해하며 두어 번 혀를 찬 한태강이 길드원들을 데리고 건물 내로 향한다.
그다음에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서상욱 교수가 내게 일렀다.
“오늘 발표를 들을 사람들 90% 이상은 저렇게 여기고 있을 거라네. 나는 내 연구가 폄하되는 것도 싫지만, 내가 하지 않은 건데 했다고 오해받는 것도 영 내키지 않으니 자네가 확실히 증명해줘야 해.”
“맡겨주세요.”
나는 종전보단 훨씬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답했다.
대놓고 저런 말을 들으니 나도 기분이 좋진 않았고, 그런 걸 떠나서라도 한태강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인제 와서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겠지.
하지만 과거에 그토록 나를 아껴준 사람이니까.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묵묵히 지켜보고, 그렇게 수년을 지켜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엔 나를 포기해버린 사람이니까.
만약 나에 대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오늘만큼은 그걸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답할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봐야 더 큰 배신으로 이어지는 기만에 불과할지라도…… 오늘만큼은.
오전 아홉 시경, 서상욱 교수와 나는 학회가 열리는 대강당에 들어섰다. 오후 한 시까지 1부를 진행하고, 점심 식사 이후 오후 여섯 시까지 2부가 마무리되는 일정. 우리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다.
“원래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라지 않나. 대충 들어보니 우리 절반이라도 되는 연구가 없구먼그래. 다들 놀기만 했는지 이번은 영 신통치 않아 보이는데……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아, 저야 뭐 겸허한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
서상욱 교수와는 나 둘만 앉아 있었다. 다른 곳은 최소한 서너 명 이상 연구를 진행했고, 우리는 둘뿐이었으니까.
그가 자신만만하게 건넨 말을 나는 겸손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동의하고 있었고.
솔직히 아예 상대가 안 된다.
발표된 연구는 죄다 마법 효율을 올리는 데 그쳤고, 기발하다고 해 본들 구성체 연결 회로를 간략화하는 정도다.
해마다 출시되는 플래그십 전자기기의 평범한 성능 향상.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게 없었다. 반면 우리가 준비한 결과물은 아예 시장 자체를 변혁시킬 만한 수준이고.
“한데 논문이나 발표가 이해는 잘 되는가? 자넬 의심하는 건 아닌데…… 알다시피 마법역학이라는 게 워낙 포괄적이다 보니 모든 걸 보는 즉시 이해하긴 어렵거든. 애매한 부분은 내가 설명해줄 수 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대로 이해하고 있어요.”
“으음…… 그렇지?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구먼.”
얼마 전이었다면 부분적으로 외계어처럼 들리는 말이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8.7까지 올린 지능 수치. 암기력과 이해력을 포함해 ‘지능’에 속하는 능력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성장을 이뤄냈으니까.
얼핏 들은 단어와 문장조차 명확히 잘 떠오른다.
처음 들은 정보라 해도 기존에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정답에 가깝게 추론할 수 있다.
이전엔 떠올리기 쉽지 않았을 발상들이 계속해서 샘솟는다.
아직 내 본연의 지능으로 완벽히 체화하지 못했는데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갔고, 덕분에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레벨의 석학들이 자리한 이곳에서도 아무 무리 없이 그들이 내어놓은 연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간혹 개량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이기도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시계는 오후 다섯 시 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유는 이십오 분 남짓. 힘차게 일어선 서상욱 교수가 내게 말했다.
“제대로 한번 보여주지.”
“네.”
단상으로 올라가자 박수가 쏟아졌다. 학회 회원이 칠십여 명, 국내외 길드에서 참관을 위해 온 헌터들이 삼십여 명.
도합 백 명에 달하는 시선이 나와 서상욱 교수를 응시하고 있다. 기대보단 의구심이라 표현하는 게 더 알맞을 눈빛.
마이크를 쥔 서상욱 교수가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발표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마법역학이라는 장대한 학문의 극히 일부분이나마, 결코 그 이전과 그 이후가 같아질 수 없는, 크나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각자 한 사람씩 전달받은 논문을 빠르게 훑더니 경악에 찬 눈길로 나와 서상욱 교수를 번갈아 쳐다본다.
논문 제목, <범용적 방어 구성체에 관한 연구>.
뜬구름 잡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 논문의 결론은 이러했다.
모든 방어 구성체가, 실은 원리적으로 하나라고.
그리고…….
서상욱 교수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저는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마법역학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적인 학자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수 있음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의 발상과 분석이 없었다면 이 연구는 결코 시작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이가 나를 주목했고,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심경으로 서상욱 교수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감지한 그가 씨익 웃는다. 아니, 이런 건 대본에 없었잖아요.
서상욱 교수가 진행 과정을 정리했다.
“논문이 길지 않으니 짧게 끝내고 의문스러운 점에 대한 질의응답을 중점으로 두겠습니다. 여기 이도진 선생님에게 여쭤보시면 상세하게 답해줄 겁니다.”
이윽고 발표가 시작됐다. 기껏해야 십 분 미만.
그게 끝나자마자, 수십 명의 학회 회원들이 제각기 질문을 쏟아냈다.
***
한태강은 묵묵히 정면을 바라봤다. 36 영웅 중에서도 상위권.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이들을 통틀어 의심의 여지 없이 능히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
다만 그는 복잡한 마학 이론 같은 것엔 취약했다. 물론 그런 걸 알 필요도 없었고. 알기 쉽게 설명해줄 이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오늘처럼 학회에 온 경우엔 대략 이런 식이었다.
저 발표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면 각성자들의 전투력 향상이 가능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영원 길드가 선점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그 정도만 알면 결단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고, 계약을 성사하는 측면에서도 영원 길드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한태강은 그런 예감을 내심 되뇌며 동석한 부하에게 물었다.
“실질적인 경제 효과는?”
“……당장은 추산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용화된다면, 적어도 C급 이하의 방어구 시장은 완전히 재편되리라 추측됩니다. 덧붙여서…… 저희가 들은 그대로라고 가정할 시, 방어 마법의 교육 커리큘럼 자체가 달라질 연구입니다.”
그때 누군가의 질문을 받은 이도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장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개량하기에 따라 A급 상당의 방어 구성체, 또 그것을 활용해 제작된 방어구에까지 전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자 방금 한태강에게 답한 길드원이 격동을 감추지 못하며 답변을 정정했다.
“대표님께는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말해보게.”
“정세빈 명예 교수님 사후로, 지난 십 년 이내로, 마법이라는 분야를 통틀어 무조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발견입니다. 이론과 실질적인 효과를 전부 통틀어서 말입니다.”
“후우…….”
한태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 그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걸, 저 애가 했다고…….’
단상 위에 서 있는 이도진은 여유로운 태도로 쏟아지는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미 발표에 허락된 시간이 지났건만 누구도 그딴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질문하고, 답변을 듣고 감탄하고, 미친 듯이 종이에다 문장을 써 내려가고, 바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그런 광경들만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이도진을 보며 한태강은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시혁과 정세빈.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아꼈던 일 년 후배들.
이도진의 표정에서 이시혁이 엿보인다. 이도진의 목소리에서 정세빈이 엿보인다. 더는 그럴 수 없게 된 줄로만 알았는데.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십여 년 전, 당시엔 가까운 곳에 살았던 두 가족이 모여서 식사하며 나누었던 대화.
<세라 이리로 잠시 와봐라. 도진이도.>
<부르셨어요?>
일찍부터 어른스러웠던 그의 딸 한세라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는 표정을 지었던 이도진이 졸래졸래 걸어왔다.
그의 아내, 이시혁과 정세빈 부부. 셋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가운데 한태강은 먼저 이도진에게 물었다.
<도진이 넌 이다음에 크면 언제 결혼하고 싶니.>
아내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걸 왜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냐는 듯이.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던 이도진이 답했다.
<결혼이요? 음, 스물다섯이나 서른? 그때쯤이면 했을 것 같아요.>
그러자 한세라가 반론을 제기했다.
<서른 살은 어중간하잖아. 할 거면 스물다섯이나 마흔다섯이지.>
<야, 마흔다섯은 좀 너무 늦잖아.>
<그냥, 내 의견은 그래.>
둘의 대화를 들으며 두 쌍의 부부가 미소 지었다.
이도진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한세라의 당돌한 속뜻을 알아냈다.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간 다음 네 사람은 뜻을 모았다.
<스물다섯 살이 좋겠네요.>
정세빈의 제안.
<계약식은 당신이 마련해주면 되겠고…… 선배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시혁의 질문.
<나야 좋지.>
한태강이 흔쾌히 답했다.
<계약 술식이랑, 서면으로도 써놓는 게 어때요?>
한술 더 뜬 아내의 결정.
얼마간 지나서 아이들에게 말을 꺼내자 예상했던 것처럼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 여름에 만료되는, 마법과 법적인 구속력을 동시에 갖춘 약혼이 이루어졌고, 아직 어렸던 이세아까지 일곱 명 모두가 행복해했다.
그때는…… 모든 게 다 잘 될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약속한 스물다섯의 여름이 가까워진 지금.
일곱 명 중에 셋이 없어졌고, 남은 네 사람은 불행해졌다.
한태강은 딸아이가 파혼하기를 바란다.
그가 친자식처럼 아끼는 이세아는 오빠와 많이 멀어졌다.
이도진은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였고, 한세라는 약혼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지 않고 있다. 파혼하겠다고도 하지 않고, 하지만 그다음을 이어나가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지경이 돼서야…….’
초고위 각성자인 한태강은 회장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하나하나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연구에 대한 화제 이외에도 다른 말들이 점점 들린다. 대체로 이도진에 대한 감탄이었고, 그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문장이 될 터였다.
방황하던 천재가, 자신에게 남은 길을 기어이 찾아냈다고.
좌중이 싸해진 건 그 직후였다.
“어험, 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깐깐한 인상의 중년인. 한태강이 알기로 서상욱 교수와 학문적 라이벌이자 원수나 마찬가지인 앙숙이었고, 그가 서상욱 교수와 이도진을 한눈에 담으며 물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한데…… 진위를 떠나서 이 연구에서 기여도가 어떻게 책정되었는지, 그 부분을 자세히 듣고 싶구려.”
단순한 의혹을 넘어 부정적인 감정이 짙게 스민 눈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