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Chapter 8. 학회 (5)
“…….”
한태강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이도진을 응시했다.
어쩌면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도진과 자신의 관계를 떠나서 당장 결정하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니까. 심사숙고해보겠단 대답은 각오하고 있었고, 추가로 제안할 말도 떠올려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단호하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거절하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크흠…….”
“음, 어험…….”
놀란 건 한태강뿐만이 아니었다. 이도진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당황하며 침음한다. 이런저런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한태강의 영원 길드가 가장 우위에 있단 게 명확했으니까. 설마 일언지하로 거절할 줄은 몰랐던 거다.
영원 길드가 경쟁에서 낙오했다면 그다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라 판단했는지 각자 눈을 빛내며 이어질 대화에 주목했고, 서상욱 교수만이 태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둘이선 합의가 됐던가…….’
내심 짐작하며 한태강은 무겁게 입을 뗐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너와 서 교수가 원하는 조건은 최대한 맞춰주려고 한다. 보기 드문 수준의 연구인 만큼 사측에서도 해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고, 한번 이야기를 들어본다고 해서 손해가 될 일은 없으리라 장담하지.”
그러나 이도진이 힘있게 답했다.
“아니요, 어떤 조건이든 저희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음?”
아까 전까지와 성격이 다른 의아함이 좌중에 스몄다. 단지 한태강이 껄끄러워서, 영원 길드와의 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는 게 아니란 뉘앙스였으니까.
이도진과 서상욱이 잠시 눈을 마주쳤고, 모든 이들에게 선언하듯 이도진이 말했다.
“저희는 방어 구성체의 사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을 겁니다. 각성자 개인이 활용하는 것 외에도 방어구와 경비 시설, 서적이나 연구 등 모든 분야에서요.”
“뭐라고……?”
이 발언엔 한태강도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였다.
그냥 가져다 쓰라고. 필시 천문학적인 수준일 이득을 포기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구성체가 널리 보급되는 데만 힘쓰겠다는 뜻.
서상욱이 덧붙였다.
“특허권 자체는 보유할 겁니다. 정도를 넘어서는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그런 부분에선 감독이 필요하겠지요. 다만 우리가 얻는 수익금은 모두 방어 구성체의 보급과 연구를 위해서 환원할 계획입니다. 나야 혼자 사는 처지에 돈을 더 벌어봐야 쓸 데도 없고, 여기 이도진 선생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에요.”
잠자코 듣고 있던 누군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찬사를 받아 마땅할 뜻이나 그런 거라면 규모가 큰 기업과 연계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보급 속도가 확연히 늦어지겠죠. 두 배나 세 배, 혹은 그 이상까지. 저희는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이도진이 단호히 답하자 모두 침묵했고, 이후로 진행된 대화는 으레 그러하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승자 한 명을 결정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향후 이도진과 서상욱이 펼쳐나갈 청사진에서 그들과 가장 밀접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구애.
꽤 길게 이어진 자리는 오후 여덟 시를 훌쩍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연구의 공개. 그에 따른 파장. 각성자 협회를 매개체로 해서 방어 구성체를 최대한 빨리 보급할 방법.
국내뿐 아니라 외국 정부나 길드와도 회담이 오가야 할 테고 골치 아픈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이도진과 서상욱의 뜻이 확고한 이상 일이 틀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을 터였다.
구두로나마 국내 보급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약속받은 한태강은 묵묵히 이도진을 살폈다. 시선을 알아챈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사무적인 이야기는 끝났고, 단번에 거절한 걸 죄송하게 생각한단 듯이.
한태강은 짤막하게 일렀다.
“다음에 볼일이 있을 때 연락하마.”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저씨.”
마지막엔 ‘대표님’이 아니라 ‘아저씨’였다. 지난 수년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호칭. 면박을 주지도 못하고, 살갑게 답하기도 어려웠던 한태강은 대답 없이 건물을 나섰다.
그즈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 ‘한세라’. 올해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그의 딸이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방금요.>
한태강이 알기로 딸이 거주 중인 뉴욕은 지금 이른 아침이었다. 잠기운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명료한 목소리로 한세라가 물었다.
<학회는 마치셨어요? 바쁘시면 나중에 전화 드리고요.>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거는가 했더니.”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한세라가 옅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겸사겸사해서요. 도진이한테 잘 봐 달라고 부탁해둔 게 있는데, 얘기가 잘 끝났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세라 너는…… 미리 알고 있었니?”
한세라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연구가 괜찮았나 보네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지. 한태강은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만 삼켰다. 오늘 그가 본 장면들을 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장은 가늠이 되지 않았기에. 그보다는 한세라가 무엇을, 어떻게 짐작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한데 딸아이의 대답은 그의 짐작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그냥, 딱히 근거라 할 건 없었어요. 그냥, 도진이가 십 년 만에 뭘 해본다니까. 그러면 절대로 시시한 일은 아닐 거라고. 그냥, 그렇게만 생각한 거예요.>
“…….”
‘그냥’. 근거 따윈 필요 없이 진리처럼 믿었다는 말.
한태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기대를 못 버렸냐고 나무라지 못했고, 잘 알아봤다는 칭찬을 건넬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정확하게는 방금 나눈 대화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문제로.
“네가 귀국하면 그놈을 한번 부를 생각이다.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자꾸나.”
<……네, 그럴게요.>
“너도 아침에 바쁠 텐데 이만 끊거라. 아버지가 또 연락하마.”
그리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통화가 끝나려던 그때.
문득 한세라가 말했다.
<맞다, 아빠.>
“말해보렴.”
조금 멋쩍어하는 어조. 딸아이로선 드물게도 명료하지 못한 기색으로 말이 이어졌다.
<전에 말씀하신 거요. 일부러 염색하거나 렌즈를 끼지는 않으려고 해요. 엄마한테 물려받은 거고,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는데…… 굳이 바꾸는 편이 더 이상하잖아요?>
선선히 동의해주던 이전과는 상반된 태도. 미약하게 의구심이 들면서도 한태강은 딸의 뜻에 반대하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리 해도 되겠지.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니까.”
<고마워요.>
이내 부녀간에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전화가 끊겼고,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지나 차에 탑승하며 한태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6월. 한세라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할 시기.
지금껏 그날이 오길 기다려왔건만…… 어쩐지 오늘은 마음이 복잡했다.
***
어느덧 자정에 다다른 시각.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나는 적잖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술에 만취해 얼굴이 벌게진 서상욱 교수가 내게 으름장을 놓고 있어서.
“자네 진짜 이럴 텐가?”
“어, 음…… 교수님. 실례지만 많이 취하셨습니다.”
“취했지, 내 살면서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이 없었는데 당연히 취해야지. 끄윽- 이 서상욱이가, 마법역학에 평생을 바쳤는데, 와이프는 나 같은 미친놈이랑 더는 못 살겠대서 이혼 서류에 도장 쾅 찍어주고, 자식도 없이 마법역학 그거 하나만 보고 마흔다섯 살 지금까지 살았는데, 나한테 오늘만큼 기쁜 날이 어딨겠나. 그러면 취해야지, 도진이 자네도 나랑 같이 취해야 하고. 내 말 틀렸나? 끄으윽…….”
“…….”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을 벌써 열두 번이나 듣고 있었다. 그야 당신은 혼자 사니까 외박하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면 될지 모르겠는데…… 난 아니라니까 그러네. 우리 집에선 귀여운 토끼 같은 동생이 오빠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다행히 힘에선 내가 우위에 있었다.
은근슬쩍 서상욱 교수와 함께 도로변으로 접근한 나는 기회를 노려 택시를 잡았다.
“어? 여기서 더 안 마시고 다른 데로 옮길 텐가? 그러면 내가 아는 데가 있는데, 그게 어디였더라-”
횡설수설하는 서상욱 교수를 뒷좌석에 밀어 넣은 나는 택시 기사님께 주소를 일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까 집 주소를 들어뒀거든.
“으음? 우리 집에서 마시려고? 그것도 좋-지.”
“기사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아니, 도진 군. 자네는 왜 안 타나? 이보게, 도진이!”
하지만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택시는 열심히 바퀴를 굴려 도로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 겪어봐야 안다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술이 들어갈 때부터 본인 주사가 심하니 상태 안 좋다 싶으면 억지로라도 보내랬는데…… 알고 보니 세계적인 석학이 이후 자신이 벌일 추태를 예견한 선견지명이었다.
대리 기사님을 요청해 집 근처로 도착한 나는 편의점에서 먹을 걸 잔뜩 샀다. 바나나 우유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켜 얼추 술기운을 지워내고 현관문을 열자…….
“…….”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세아가 잠기운이 가득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왜 거기 있어. 방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잘 거야.”
이불을 몸에 감은 채로 비척비척 일어난 세아가 흡사 유령 같은 발걸음으로 자기 방에 들어갔다.
여기까지 왔으면 오늘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고 볼 수 있겠지. ……한 가지만 빼고.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니 날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텅 빈 허공에다 대고 마력을 발현했다.
위잉, 위이잉-
두 개의 구성체가 나타났다.
하나는 오늘 발표에서 선보인 방어 구성체. 다른 하나는 검은빛이 감도는 구성체.
깜깜한 방 안에서, 나는 그 둘을 서로 가까이 가져갔다.
피싯! 퍼걱-
약한 스파크가 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복합 계통의 혁신적인 방어 구성체. 그게 검은 구성체와 맞닿자마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깨져버린 거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내가 드러내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견고한 방패를 뚫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창이었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A)
+
제일고에 균열이 발생한 날, 실은 그 시점에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실험 데이터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밤잠을 아껴가며 연구를 거듭한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방어 구성체와 대비되는 이 검은 구성체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방어 구성체의 보급화. 필요하다. C급을 넘어서 B급. B급을 넘어서 A급. 그 이상의 초고위 마법까지도.
이제 막 각성한 어린아이에서 S급 헌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내 방어 구성체를 자기 마법의 근간으로 삼고, 그것이 부여된 방어구를 착용해야 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언젠가 수많은 이들 앞에서 내 정체를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내가 펼쳐낸 마법 하나로 그들의 방어를 완전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수 시간 전, 발표를 마치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차후 공개할 논문의 첫머리에 적을 문장. 이 연구를 정세빈과 이시혁, 내 부모님을 위해서 바친다고.
정말 거짓 하나 없이 온전한 진심이었다.
모든 건 그분들을 위해서.
설령 그분들이 원하시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결심을 환영하듯 메시지가 나타났다.
+
<킬 더 이블> 1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4월 18일 자정까지 서울 내에서, A급에 상당하는 각성자 열 명을 참살할 것 (시작 시점으로부터 제한시간 한 시간 이내)
-클리어 보상: OX 질문 1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되거나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아마 이번 퀘스트를 끝으로 1권이 마무리되겠지.
진행률 측면으로 봐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은 자명했다.
+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1권 태그: [아카데미] [로맨스 X] [캐릭터 중심]
-진행률: 83.7%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잔혹한 홀로그램을 응시하며 나는 나직이 되뇌었다.
“……할 수 있어.”
그걸 위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
4월 10일 토요일, 이른 새벽.
여느 때처럼 빗자루를 들고 공원을 청소하던 미화원은 언뜻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응?”
공원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 비닐로 된 검은 봉투 하나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언뜻 불길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쓰레기통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안에 손을 넣어 봉투를 집어 올렸고…….
“으아악!”
그 직후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봉투를 내동댕이쳤다.
투욱.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밖으로 빠져나와 땅에 닿았다.
손톱이 길고 손가락이 무척 가느다란, 그러나 칠흑처럼 새까매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