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Chapter 9. 악마의 손 (2)
“저건가요?”
검은 손을 바라보며 그녀가 건넨 질문. 답한 건 한태강이었다.
“그래, 지난주 토요일에 발견됐다.”
“잠깐 봐도 될까요?”
36 영웅을 이끄는 리더였던 이시혁과 정세빈. 그 둘만 제외하고 나머지 서른네 명 사이엔 위계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개인마다 지닌 강점이 뚜렷했고, 그걸 인정하며 함께 싸워나갔으니까.
그로부터 이십 년 넘게 시간이 흘러 각자의 위치가 많이 달라졌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서연희라는 마법사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면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으나 지닌바 재능만을 놓고 보자면 그 정세빈과도 어느 정도 견줄 수 있던 천재.
그녀가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 이젠 명확히 아는 이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녀가 내릴 판단이 주요한 근거가 되리란 점이겠지.
원형 탁자 가까이 다가간 서연희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흘려낸 마력이 검게 물든 악마의 손을 휘감는다.
슈우우우…….
부드러운 바람이 일고, 무언가를 살피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던 서연희가 단정적인 어조로 입을 뗐다.
“활용 가치가 없는 쓰레기네요. 아무리 길어봐야 닷새도 못 갈 거예요.”
“허허, 자네는 그리 봤던가? 나는 일주일은 넘기리라 보았는데.”
마도 명문 심씨 가문의 전대 가주이자 36 영웅의 한 명인 심정웅. 구체적인 기한에선 차이가 났으나 그도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었고, 서연희가 냉정히 확언했다.
“잘라놓고선 보존 처리를 했을 뿐이에요. 날이 갈수록 마법이 흩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거고, 앞으로 닷새만 지나면 이건 그저 악마의 잘린 시체 일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될 거예요.”
“그래도 써먹을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텐데.”
각성자 협회의 수장인 윤의성이 아쉬워하며 던진 질문. 서연희는 단출하게 답했다.
“잘 가공하면 괜찮은 무구 정돈 만들 수 있겠죠. 이번 주 내로 작업에 착수하면 A급 위도 바라볼 수 있을 거고요.”
“음, 결정됐군. 신속하게 시작해야겠어.”
“누가 가질 거죠?”
좌중을 둘러보며 서연희가 물었다.
기실 여기 모인 이들에게 A급 무구는 조금 탐이 나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악마의 시체로 만든 것이라는 상징성. 그 점을 고려한다면, 원하는 이들이 더러 있겠지. 의견을 낸 건 대명 그룹의 회장 진철민이었다.
“마침 돌아오는 토요일에 저희 쪽에서 주최하는 경매가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순서로 놓으면 제법 좋은 그림이 나올 듯싶은데, 영웅분들께선 어찌 보시는지……. 물론 수수료나 제반 비용은 모두 제가 맡겠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제때 잡는 것도 역량이다. 제안할 틈을 엿보던 다른 기업인들은 한발 늦었다며 내심 아쉬워했고, 서연희는 야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진철민을 힐끗 내려다봤다.
‘도진이가 가르치는 애. 이름이 진유리였던가?’
그가 몇 번 언급한 이름. 염의준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온 학생이기도 했고, 서연희가 기억하기로는 진유리의 아버지가 바로 저자였다.
‘애는 학교에서 교수님 속 좀 썩이는 것 같던데, 아버지는 똘똘하네.’
굳이 대화의 흐름을 조절하지 않아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 참관 중이던 정계 인사들과 각성자들을 대표해서 심정웅이 정리했다.
“경매 낙찰금으론…… 재단이라도 하나 만들지. 본래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물건 아니겠나. 재단 관리야 낙찰자와 의성이 자네가 공동으로 맡아주면 될 테고.”
“하하, 저는 나서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협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악마 놈 손 따위를 가져서 무엇하려고.”
“뭐…… 분부대로 하지요. 한 선배는 생각 있으십니까?”
윤의성과 한태강. 그들은 36 영웅의 구성원임과 동시에 같은 학교를 나온 일 년 선후배 관계이기도 했다.
학년에서 독보적인 위치였던 한태강과 달리 윤의성은 이시혁과 정세빈, 그리고 또 한 명에 밀려 매번 4위에 머물러야 했고.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죽었고, 바로 아래의 염의준도 얼마 전 사망했으니 역대 최고의 황금세대라 불리었던 그들의 학년에서 생존한 영웅은…… 결국에는 윤의성 하나밖에 없게 됐다.
한태강이 묵묵한 표정으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네가 알 필요 없다.”
“어휴, 저 성격 하고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좀 살갑게 대해주면 안 됩니까?”
둘이 티격태격하는 거야 일이 년 일도 아니었고, 서연희는 남은 본론을 꺼냈다.
“나한테 더 묻고 싶은 건 없나요?”
“있지, 있고말고.”
그녀의 말을 받은 심정웅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물었다.
“자넨 누군지 알겠나?”
악마의 손을 잘라내고 그걸 인적이 드문 공원에 버려둔 범인. 검은 손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냐는 질문이었고, 서연희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잘린 단면이 깨끗한 걸 봐서는 완전히 제압해서, 혹은 죽인 다음에 잘라냈단 것만 추측할 수 있겠네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악마가 출현했고, 놈을 쓰러뜨린 자가 이걸로 뭘 노리는진 저도 궁금한걸요.”
“으음, 자네와 내가 모른다면 다른 누구에게 물어도 마찬가지겠지. 이보게, 한 대표.”
“네, 어르신.”
“경매에 참여할진 자네 자유에 맡길 테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가줄 수 있겠나?”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범인의 의도는 모른다. 그러나 시시한 음모에 겁먹을 거였다면 36 영웅이란 칭호는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으리라.
이십여 년 전에 패배해 꽁무니를 뺀 악마든 뭐든, 무신 한태강이 자리한 곳에서 함부로 날뛸 수는 없으리라.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고 난 다음, 서연희는 짤막하게 통보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맡으니까…… 좀 탁해서요.”
“한 선배, 저 친구 지금 우리 욕하는 겁니까? 자기는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사는데 우리는 권력에 눈이 벌겋다고?”
윤의성의 말을 무시한 한태강이 서연희에게 눈짓했고, 심정웅이 흐릿한 목소리로 이른다.
“살펴 가게나.”
“다음에 또 뵙죠.”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나선 서연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속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를 눈앞에 두고서, 그걸 사람 취급하며 대화하는 건 몹시 곤욕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당장 손을 쓰고 싶은 걸 참은 이유는…… 그녀의 몫이 아니기에.
‘그 애가 해야 할 일이야.’
일찍이 36 영웅이라 일컬어졌던 자들. 싸움이 끝났을 때는 벌써 열두 명이나 죽어 있었다.
이후로 이십여 년. 작년까지 여섯이 더 죽었다.
수명이 다한 자연사, 병환으로 인한 요절, 재해로 알려진 타살.
남은 건 18인. 그녀 자신을 제외하면 열일곱 명.
그중에 확인된 배신자만 일곱 명에 달했고, 최근에 염의준이 사망해 생존자는 여섯으로 줄게 됐다.
‘몇 명이 더 있으려나…….’
확인된 자들만 일곱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일곱 명 가운데 하나가…… 방금 그녀가 나선 회장 안에 있었다.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서연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 순간 정말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보세요? 퇴근했니?”
거처를 나선 직후부터 시종일관 싸늘하던 그녀의 표정이 화사하게 물들었다. 목소리엔 더없이 기쁜 기색이 깃든다. 서연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절대 상상하지 못할 태도.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진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방금요, 세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토요일 오후 6시 정각. 준비해둬.”
그즈음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화 상대가 기다리던 사람이 온 것이겠지. 그가 갑자기 말투를 바꿔서 말했다.
<응, 알겠어. 그때 보자.>
‘얘 연기하는 것 좀 봐?’
서연희는 문득 자제하기 어려운 장난기가 동하는 걸 느꼈다.
요즘 그녀가 애용 중인 신분의 나이는 스물세 살.
그보다 두 살 연하니 설정에 맞춰서 반말을 쓰는 거겠지.
반말을 듣는 건 솔직히 나쁜 기분이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신선해서 좋았지만…… 왜 저쪽에서 반말을 써야 하는지까지 따져보면 조금, 뭐랄까, 심술이 났다.
서연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목소리를 산드러지게 꾸며, 애정을 듬뿍 담아 답했다.
“응, 그날 기대할게. 집 조심히 들어가, 오빠♡.”
<……!>
그리곤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수습을 어떻게 하건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이내 가던 길을 멈춘 그녀는 가슴에다 손을 얹었다. 심장이 조금쯤, 세게 뛰고 있었다.
‘창피하긴 하네.’
저쪽에선 그리 생각지 않는 듯하나 그녀에게도 부끄러움과 체면이란 게 존재했다. 이 정도만 해도 그녀로선 상당히 과감하게, 적잖이 용기를 낸 것이라고 해야겠지.
‘다음에 또 해볼까?’
이보다 더 어린 모습으로 변장하게 되면 다시 시도해보자고 마음에 새겨놓은 서연희는 산뜻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서두를 것도 없다. 시간이야 한참이나 남아있으니까.
***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걷는 것도 좋아하고, ……애교가 많으시네.”
침묵 속에서 차를 몰아가던 길.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세아가 일렀다. 다른 날처럼 여자친구 아니라고 변명해본들 역효과만 날 상황.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세아가 재차 추궁했다.
“예쁘지?”
‘예뻐?’도 아니고 ‘예쁘지?’였다. 확신에 가까운 단정적인 말투. 그 부분을 지적하니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쁜 사람만 만나잖아.”
“…….”
오빠란 호칭을 생략한 걸 보니 기분이 좋진 않은 모양이네. 원래도 아주 기분 좋을 때만 빼면 잘 안 불러주긴 하는데, 아무튼.
집에 거의 도착해갈 무렵, 세아가 의도찮게 흘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만나?”
“……토요일 저녁? 밥은 해놓고 나갈게.”
“됐어, 나 친구들이랑 놀다가 올 거야.”
그리곤 휴대전화를 꾹꾹 누른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메신저 앱으로 세라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일러바치려는 건 아니겠지만 무언으로 시위하는 것 정도는 되겠지.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귀가한 나와 세아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이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에게 차후 어떤 식으로 복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휴대전화가 아니라 마법적인 수단으로 전송한 홀로그램. 토요일 경매에 참석할 이들의 명단이었다.
나는 세세하게 적힌 신상명세를 차례로 훑었다.
경매를 주최하는 대명 그룹.
유명 길드들의 핵심 전력들.
악마의 손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부호들과 기업가들.
그리고 한 명.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험한 인물.
영원 길드의 한태강. 그가 A급 헌터들을 대동해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할 것이라 했다.
적어도 현시점에선 맞서고 싶진 않은 상대인데.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을 막아선다면…… 그러면 싸워야겠지.
이윽고 서연희가 보낸 홀로그램이 하나 더 나타났다.
경매에 참석한다고 확정할 순 없으나, 공개되는 정보에 따라서는 그걸 원할지도 모르는 이들. 다시 말해 초청장을 보낼 후보들.
두 개의 홀로그램을 시야에 담으며, 나는 선택했다.
+
<킬 더 이블> 1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4월 18일 자정까지 서울 내에서, A급에 상당하는 각성자 열 명을 참살할 것 (시작 시점으로부터 제한시간 한 시간 이내)
-클리어 보상: OX 질문 1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되거나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추가 보상이 존재하며, 공개성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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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서브 퀘스트 하나 달성하고자 내가 기꺼이 먹잇감으로 삼을 자들. 그들을, 내 손으로 직접 골랐다.
그리고 쏜살같이 며칠이 흘러 맞이한 4월 17일, 토요일 오후.
“오빠 다녀올게. 좀 늦게 올 거야.”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잡으며 나는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