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Chapter 9. 악마의 손 (3)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어딜 가도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이따금 가는 번화가의 중심부. 아기자기한 분수대가 꾸며진 광장에서, 나는 서연희와 만났다.
연락이야 매일 하지만 또 우리가 자주 만나는 건 아니다. 4월엔 며칠 전 삼겹살 먹은 날에 이어 두 번째니 열흘에 한 번꼴인데…… 직장인 기준으로는 아주 적게 본 것도 아니려나.
나도 제일고 취직하고 나서부터 확 줄어든 거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현실감 있는 설정이다.
서연희는 오늘 옷차림이 무척 화사했다. 계절은 완연한 봄. 그에 맞춘 듯 품이 넉넉하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장신구를 걸치지도 않고, 화장도 옅게 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살며시 손을 흔든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 그녀가 아마 ‘ㅗ’ 발음을 내려고 한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아, 진짜 나 경고했어. 나 그렇게 부르지 마요.”
황급히 다가선 나는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과 옅게 반짝이는 틴트가 손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세아 기분 맞춰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게다가 그런 걸 떠나서, 저 사람이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눈앞에서 보면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이상한 점은 당연히 여유롭게 피했어야 할 서연희가 내 손길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단 건데…….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진심을 담아 경고하고 손을 떼자 서연희가 당황스러워하는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고, 이어서 조금 난처하단 기색으로 물었다.
“음…… 도진이라고 부르는 게 싫니?”
“……아.”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도진. 거기에도 ‘ㅗ’ 발음이 들어가기는 하지.
그즈음 내 돌발행동의 이유를 눈치챈 건지 서연희가 눈가를 가늘게 좁힌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추궁했다.
“너 은근히 그런 거 좋아했구나?”
“……뭘 좋아한다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아니고, 바쁘니까 빨리 갑시다.”
그 뒤에 서연희가 무어라 답했는지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여러 번 교통수단을 바꿔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른 우리는 거기서 다시 수 킬로미터를 날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반경 수백 미터 내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숲길. 덩그러니 버려진 오두막에 들어가 오후 여섯 시를 넘길 때까지 시간을 보내자 허공에 빛무리가 일렁였다.
위유웅, 스아아아-
도합 세 개. 그곳들에서 저마다 가면을 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고, 공교롭게도 셋 다 동물 가면이다.
용, 토끼, 여우.
평소보다 조금 체구가 가녀려지고 안개를 전신에 휘감고 있는 용 가면, 유해빈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보스, 선배님 안녕하세요! 다른 두 분은 실제로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여우 가면의 차분한 대답. 자기 필요할 때만 빼고 입을 꾹 다무는 게 주특기인 토끼 가면은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섯 명 다 왔으니…… 계획을 다시 설명할게.”
서연희가 오두막 중앙의 탁자로 향하며 일렀다. 나와 그녀는 단원들이 오기 전에 미리 외견과 체격을 바꿔뒀고, 오늘은 서연희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모자로만 얼굴 가리고 수행하기엔 좀 바쁜 일이 될 테니까.
검은 펜을 든 그녀가 탁자 위에 올려둔 종이에다 글씨를 써가며 말했다.
“크게 둘로 나눌 거야. 나랑 여우, 용은…… 말하자면 미끼 역할. 셋이서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내 귀염둥이랑 우리 토끼가 불안 요소를 다 제거하고, 일이 잘 풀리면 그 시점에서 작전이 끝나겠지만 안 되면 그때부터는 다섯 명이 같이 움직일 거야. 예상되는 소요 시간은 60분 이내. 이것도 최대로 잡은 거고, 빨리 끝내면 더 좋겠지?”
복잡한 작전이랄 건 없었다. 서연희 쪽은 그쪽대로 할 일 하고, 우리 쪽도 할 일 알아서 하면 그만이니까.
나랑 토끼는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 싶은데…… 다른 셋이 걱정이지. 귀찮은 일은 저쪽에서 다 맡아주기로 되어 있어서.
그러나 유해빈이 쾌활한 어조로 힘차게 답했다.
“문제없네요. 못 나가게 붙잡아두기만 하면 된단 말씀이죠?”
“요약하면 그런 느낌이겠네. 인명부는 다들 보고 왔지?”
경매장 내에 자리할 헌터들. A급만 족히 열 명에, 사실은 그들 전원보다도 한태강 한 사람이 더 주의해야 할 인물일 터. 토끼 가면이 그 부분을 자세히 물었다.
“영원 길드의 한태강…… 그 사람은 누가 맡죠?”
“아,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얘가 알아서 할 거니까.”
재잘거리듯 말한 서연희가 펜을 쥐지 않은 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주 자연스럽게,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내 목선을 건드렸고,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여우 가면이 단조로운 어조로 의견을 냈다.
“상황을 지켜보다가 누군가 한 사람은 개입해야 할 때는 제가 나서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럴 일이 생기면.”
생긋 웃으며 되받은 서연희가 대화를 정리했다.
“악마의 손이 경매에 올라오는 게 오후 아홉 시. 귀염둥이랑 토끼는 여덟 시 반쯤에 출발하면 되겠고…… 우리 셋은 그러고 조금 있다가.”
거기까지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인식에 작용하는 결계를 걸어놓았으니 외부인이 들어올 염려는 없지만 그렇다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
서연희는 의자에 걸터앉아 콧노래를 흥얼대는 중이고, 여우 가면과 토끼 가면은 서로 대각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이 분쯤 지났을까.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유해빈이 내게 귓속말했다.
“교ㅅ- 아, 선배님.”
“말해.”
“그으, 있잖습니까…….”
왼쪽과 오른쪽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궁금해하며 묻는다.
“저 둘은 사이가 안 좋나요?”
여우 가면과 토끼 가면을 뜻하는 말이겠지. 나는 내가 아는 대로만 답했다.
“그냥, 서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나 보던데.”
서연희가 신입이라며 데리고 왔을 때부터 쭉 그랬지. 작전 수행 중에는 또 합이 잘 맞는 것 같지만 그 외의 상황에선 아예 투명인간처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자 유해빈이 알 만하다는 듯이 속닥거렸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요. 왜, 사교성 살짝 아쉬운 애들 있잖아요. 친해지기 좀 어려운 사람들.”
“……너 지금 누구 생각하냐.”
이게 겁도 없이 내 앞에서 우리 세아 욕을 하네.
그러나 유해빈이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어? 선배님도 그런 사람 한 명 아시나 보네요?”
“……정신 집중하고 싶으니까 다른 데 좀 가라.”
수업 시간에 마땅히 응징을 가하자고 머릿속으로 기록한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양손 주먹이, 나도 모르는 새에 쥐어져 있다.
“후우…….”
오늘, 이 손으로 열 명을 죽여야 한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목표만이 뚜렷했고, 다른 모든 건 내가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선택한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여태까지는 그러려고 안간힘을 썼고, 오늘도 그러고 싶다.
이윽고 맞이한 오후 여덟 시 반. 내게 다가온 서연희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줬다.
슈우우우…….
전신에 감돌던 안개가 주변과 동화됐고, 나 자신조차 내 모습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게 됐다.
“마력을 끌어내면 풀릴 거야. 그건 상관없지?”
“충분해요.”
맨 처음의 일격. 그때까지만 몸을 감출 수 있으면 이후로는 거리낄 게 없겠지.
서연희가 토끼에게도 은신 마법을 걸어줬고, 우리 둘은 오두막 입구 부근에 나란히 섰다.
“선배님, 고생하십쇼!”
유해빈이 응원하듯 외쳤다.
“조심해요.”
여우 가면이 낮게 건넨 말.
“나중에 봐.”
서연희의 살가운 배웅.
스아아아아-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세로로 갈라졌다. 나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이내 해가 져 깜깜한 하늘이 나를 맞이했다.
***
마력이라는 축복이 이 세상에 찾아온 지도 벌써 천 년이 넘게 지났다. 그간 양지에서는 내로라하는 길드와 명가들이 탄생했지만, 마력을 지닌 이들이 뜻을 품고 모인 집단은 그것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째서 하고 싶은 걸 참으며 살아야 하지?
그런 생각을 품은 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많았다.
사사로운 감정싸움으로 동료를 해친 자들. 지금 가진 것 이상의 재화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머쥐고 싶어 하는 자들. 그저 남을 괴롭히며 고통스럽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까지 좋아하는 자들.
세월이 흐르며 그들도 뜻을 합쳐 모이게 되었다.
정식 명칭으로는 마력 특수범죄조직이라 불리는 집단들.
그리고…….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프’는 그중에서도 제법 유서가 깊은, 창립한 지 올해로 이십 년이 넘어가는 범죄집단이었다.
단체 명칭처럼 빼앗는 것을 좋아하는 각성자들이 중심을 이룬 조직. 그들이 탐을 내거나, 혹은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거라면 재산이나 생명을 포함해 뭐든지 좋았다. 그들은 그것을 빼앗는 일에서 크나큰 보람을 느꼈고, 정신에 작용한 마력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특히 악명을 떨치는 이는 조직의 보스인 칼리드였다. 시프의 모든 구성원을 통틀어서 가장 강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욕망에 정신이 지배당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
통상적인 기준으로 S급을 넘어선 각성자이며 시프 내에선 그와 견줄 만한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 현지 시각으로 오후 아홉 시에 근접해갈 무렵.
대명 그룹이 주최하는 경매 장소에서 불과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은신하고 있던 칼리드는 수하 조직원들을 둘러보며 일렀다.
“슬슬 가봐야겠군.”
그들이 이 먼 나라에 방문한 이유는 하나. 악마의 손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각성자 협회에서 실용상으로는 쓸모가 많지 않은 물건이라 밝힌 바 있으나, 칼리드는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쓸모가 없을 리 있겠나.’
며칠 전에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 손은 사실 어마어마한 위력의 무구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재료라고.
제보자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자료도 함께 제공했으며, 신원 또한 확실했다.
근래 들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A급 테러집단 팬텀. 그들이 칼리드에게 제안한 것이다. 힘을 합쳐 악마의 손을 훔쳐내자고. 그리고 찬찬히 들어 보니 거부하기 힘든, 대단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결행할 시각은 오후 여덟 시 오십 분.
‘놈들이 한태강의 주의를 끌어주면…….’
시프는 악마의 손이 경매장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그걸 훔쳐내기만 하면 된다. 그 방면에선 전 세계의 모든 범죄조직을 그러모아도 칼리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을 테고, 시프를 고른 것도 그 이유 때문이겠지.
“다들 준비는 끝났나?”
그의 물음에 조직원들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번 일은 필시 근 몇 년 중에서 가장 큰 건이 될 테니까.
흐뭇하게 수하들을 바라본 칼리드는 내심 팬텀을 조소했다.
‘너희는 협조자를 잘못 택했어.’
팬텀은 분명 강하다. 그들 조직의 이인자는 얼마 전 파티장에 난입해 철권 염의준을 살해했고, 심지어 정체불명의 보스는 JR 길드의 수장 둘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니까.
전성기의 36 영웅 두엇쯤은 되는 전력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한태강은 다르지.’
염의준? 조셉 레너드? 릭 가델? 우습기만 했다.
그들 셋이 힘을 합치더라도 무신 한태강을 쓰러뜨리긴 요원하겠지.
팬텀의 보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태강과 싸운다면…… 그의 생각으론 겨우 일 분이나 버티면 잘한 축이었다.
결론적으로, 칼리드는 악마의 손을 탈취하자마자 잠적할 작정이었다. 팬텀은 쫓아올 여유가 없을 터. 설령 쫓아온다고 해도 모조리 죽여버리면 된다. 한태강을 상대하고, 그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힘을 대부분 소모했을 테니까.
칼리드가 시프에서 가장 뛰어난 조직원, A급에 상당하는 각성자 열둘을 데려온 건 팬텀과 싸울 것까지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됐군.’
시곗바늘이 오후 아홉 시 정각에서 십 분 모자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씩 웃은 칼리드는 으슥한 골목을 지나 앞장서 걸었다.
저벅, 저벅.
등 뒤에서 조직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다가, 잠시 소리가 끊겼다.
서걱-
그 대신 들리는 소리. 무언가 잘려나가는, 칼리드에겐 너무도 익숙한 소리. 비명은 그보다 조금 늦게 터졌다.
“끄아아아악-!”
칼리드는 뒤를 돌아봤다. 오른팔이 잘려나간 조직원 하나가 비틀거리며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는 검은 아지랑이 두 개가 일렁이고 있다.
곧이어 안개가 걷혔다. 사람의 그림자가 둘. 무늬 없는 흰색 가면과 앙증맞은 토끼 가면.
콰앙!
흰 가면이 팔이 잘린 조직원 쪽으로 쏜살같이 접근했다.
터억. 멱살을 잡고 위쪽으로 들어 올린다. 손에 힘을 주는 듯하더니…….
퍼어어어억!
폭발하듯 조직원의 몸이 터져 나갔다.
남은 조직원 열한 명과 칼리드. 그들이 한 곳으로 모였다. 칼리드는 극히 짧은 순간에 함정이었단 걸 알아챘고, 대응을 고민했다. 후퇴할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지. 그때, 흰 가면이 나직이 일렀다.
“덤벼.”
칼리드는 퇴각과 전투 사이에서 고민하던 저울추가 후자로 확연히 기울어진 걸 느꼈다. 왜 그런지까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흰 가면이 그의 정신을 슬쩍 충동질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수적으로 유리하니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단 것만 명확했다.
다만 조직원 중에선 순간적으로 겁먹은 이가 있었다. 그가 뒷걸음질했고, 토끼 가면이 양손을 떨쳐냈다.
“으허억!”
뒤편의 조직원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의 팔뚝과 등에서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골목에서 큰길로 나서려면 거쳐야만 하는 공간. 그곳에 어느새 투명한 마력의 실이 그물처럼 쳐져 오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었기에.
이젠 물리적으로도 후퇴가 어려워진 형국. 칼리드는 험악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놈 다 죽여서, 저 가면을 벗겨버려.”
싸움이 시작됐다.
***
+
<킬 더 이블> 1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4월 18일 자정까지 서울 내에서, A급에 상당하는 각성자 열 명을 참살할 것 (시작 시점으로부터 제한시간 한 시간 이내)
-클리어 보상: OX 질문 1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되거나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추가 보상이 존재하며, 공개성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현재 진행률: 1/10
-남은 제한시간: 57분 23초
+
나는, 결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일이다. 안 하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내가 자식처럼 소중히 아낀 내 소설의 주인공과 히로인. 내게 도저히 갚아주지 못할 사랑을 준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분들을 살리지 않고는,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리고.
정해진 건 딱 거기까지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지, 그건 내 선택에 달려 있다.
홀로그램이 내게 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 한 번도 퀘스트를 거부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쩌면 수행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페널티가 존재한다면 그것만 감당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기꺼이 열 명의 각성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내 선택이었고,
누굴 죽일지 고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서연희가 남몰래 가지고 있던 악마의 시체. 그것의 팔을 잘라서 공원에 버려둬달라고 부탁했다.
경매에 나오도록 유도했고, 범죄조직 시프에 거짓 정보를 제공해서 한국으로 오도록 일을 꾸몄다.
A급 각성자 열 명.
죽여야만 한다면, 적어도 그런 자들이길 원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타인의 목숨 하나를 살릴 수 있다 해도, 알량한 자기 목숨만으론 여태 빼앗은 목숨의 십 분의 일조차도 감당해내지 못하는 그런 자들.
나는,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었다.
<세계의 수호자>의 작가.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
그리고.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할 일을 선택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등장인물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일일이 서술하는 소설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야.
홀로그램을 노려보며 되뇐 나는 손을 뻗어냈다.
콰악!
심장이 터지는 소리.
홀로그램이 갱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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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률: 2/10
-남은 제한시간: 57분 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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