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38화 (38/207)

#38화. Chapter 9. 악마의 손 (4)

서브 퀘스트의 제한시간은 첫 각성자를 살해하고 나서부터 줄어들었다. 아홉 명을 죽이는 데 주어진 여유는 60분.

일이 어그러지면 조금 빠듯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네.

콰악!

두 번째 놈을 죽이고 남은 제한시간은 57분.

3분이 걸렸다.

퍼억!

세 번째 놈의 목을 잘라내고 남은 시간은 54분 30초. 아까보다 빨라서 2분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네 번째는 2분.

다섯 번째는 1분 40초.

여섯 번째는 운이 좋아서 50초.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까지 죽이는 데 다시 2분.

+

-현재 진행률: 8/10

-남은 제한시간: 47분 51초

+

불과 십오 분이 지나기도 전에 목표치의 80%를 달성했다. 마침 시프의 범죄자 열세 명 가운데 생존자도 두 명. 보스인 칼리드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조직원 하나였다.

칼리드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단 것처럼 넋이 나가서 중얼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너희 정체가 영웅 놈들이기라도 한 거냐!?”

혼잣말처럼 들리던 것이 끝에 가선 의혹을 담은 추궁으로 변했고, 나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놈에게 반문했다.

“그게 중요한가?”

우리가 36 영웅인지 궁금해하는 것보단 곧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게 훨씬 중요할 텐데.

사실 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다. 칼리드가 외친 말이 지칭하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격전을 펼쳤음에도 은빛 머리칼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토끼 가면. 어쩌면 놈은 그녀의 활약에 더욱 경악하는 건지도 몰랐다.

피슈웅-

“커흑! 쿨럭, 커허어억…….”

내가 쏘아낸 마력이 양발이 잘려 도망갈 수 없는 범죄자의 목을 꿰뚫었다.

+

-현재 진행률: 9/10

-남은 제한시간: 47분 23초

+

칼리드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나는 흘끗 토끼 가면을 바라봤다.

얘가…… 이렇게나 강했던가?

물론 강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팬텀의 정식 단원으로 활동할 수 없으니까. S급 각성자와 맞붙어 크게 밀리지 않는 정도는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토끼 가면은 오늘 그 수준을 가볍게 넘어선 능력을 보여줬다는 뜻이다.

저 정도면 나도 무조건 이긴단 장담은 못 하겠는데…….

단순히 실력만 놓고 보면 36 영웅급에 근접했고, 더군다나 토끼 가면은 오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시프의 조직원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는 데에 집중했지.

한데도 이만큼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줬다는 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여태까지 지닌 힘을 대부분 감추며 활동했거나.

그녀가 서연희와 계약하며 빈 소원이 이번 임무나 그에 연관된 사람과 대단히 밀접한 연관이 있거나.

나는 둘 다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그리고 후자는…….

지난번 회합까지 고려해보면 사건보다는 사람과, 구체적으론 나와 관련 있을 공산이 분명하게 존재했고.

토끼 가면.

여우 가면과 마찬가지로 서연희가 내게 신상을 알려주지 않은 단원.

너는…… 누구지?

내가 상념을 이어나가는 동안 다시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아아아앗-

피싯! 서걱!

너무도 가늘어 맨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아진 마력의 칼날이, S급 각성자 칼리드의 사지를 잘라낸 것이다. 몸을 지탱할 수단을 잃고 땅에 떨어진 그에게 토끼 가면이 다가간다.

“끄윽, 으윽…… 너희는…… 커억!”

원독에 찬 말을 흘리던 칼리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토끼 가면이 뻗은 마력에 성대가 잘려 더는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게 됐기에. 그녀가 연이어 손을 휘둘렀다.

퍼걱! 스아악!

마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인체 기관이 모두 무력화됐다.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인 칼리드를 내려다보던 토끼 가면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고,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이 처리할 거라지 않았느냐고 눈으로 묻는 것만 같다.

미리 말을 해두긴 했지. 최소한 열 명은 내가 숨통을 끊어야만 한다고.

나는 그녀에게 일렀다.

“가자.”

“……알겠어요.”

피를 줄줄 흘리는 칼리드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부여잡은 나는 대로변으로 나섰다.

험악한 싸움이 치러지고 있음을 알았는지 일반인처럼 보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고 각성자 요원인 듯한 자들만 급히 달려와 우리를 포위했다.

여기서 더 일을 벌이는 것보단 가서 하는 게 여러모로 낫지 싶네.

콰앙!

아무 말 없이 땅을 박차니 토끼 가면이 따라왔다.

우리의 목적지는 저기 멀리 보이는 건물. 악마의 손이 경매로 나오는 회장이었다.

+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1권 태그: [아카데미] [로맨스 X] [캐릭터 중심]

-진행률: 94.7%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남은 진행률은 겨우 5퍼센트가량. <킬 더 이블> 1권의 끝이 머지않았다.

1권 마지막은 기대감을 심어주는 게 정석이니까.

남은 시간 동안, 틀림없이 사건이 일어날 터였다.

***

오후 아홉 시에 다다른 시각. 대명 그룹에서 주최하는 경매가 열리고 있는 회장 내부.

제1 아카데미 고등부 2학년이며 대명 그룹 회장 진철민의 딸이기도 한 진유리는 평소보다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경매장 한쪽에 앉아 있었다. 나름대로 성숙하게 행동하려 하나 내심으론 투덜거리면서.

‘……집에 있을걸.’

이런 경매장엔 난생처음 와봤다. 솔직히 별로 재미는 없었고, 더 정확히 표현하면 굉장히 지루했다.

이것도 나중에 다 인맥이 된다고 아버지 진철민이 반강제로 끌고 온 자리. 이럴 줄 알았다면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귀가했을 텐데.

중간고사도 며칠 안 남았고 집에서 시험공부나 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을 터였다.

그나마 딱 하나 큰 수확이었다 싶은 건…….

‘아까 목소리 안 떨었겠지?’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진유리는 회장 왼편에 자리한 사내를 바라봤다.

190cm를 훌쩍 넘긴 신장에 멀쩡한 정장을 괜히 위협적으로 만드는 덩치. 표정마저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어린아이가 보면 절로 울음을 터뜨리겠다 싶을 만큼 무서운 인상이다.

하지만…… 그 사내는 진유리가 존경하기로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무신 한태강.

이십여 년 전, 지금은 작고한 그의 아내와 함께 악마의 군주를 쓰러뜨린 영웅.

현시점에선 어쩌면 세계 최강일지도 모른다고 일컬어지는 이 나라의 수호신.

경매가 시작되기 전 그와 대화를 나눈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열심히 하라고 하셨지…….’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이시혁처럼 뛰어난 검사가 되는 것.

정세빈처럼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것.

진유리는 그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루고 싶었고, 노력하지 않고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니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잡담이 오가던 회장이 그즈음부터 조용해졌다. 이동식 탁자에 올려진 검은빛의 손. 반투명한 보호막에 감싸인 그 손이 단상으로 향하고 있기에.

서서히 스미는 장내의 긴장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진유리는 시큰둥한 눈길로 검은 손을 응시했다.

‘크게 쓸모도 없다던데.’

아버지 진철민에게 듣기론 그랬다. 실용성 있는 재료라기보단 두고두고 감상할 미술 작품 쪽에 가깝다고.

A급 이상의 무구를 만들 수 있다고 하나 그런 것쯤이야 진유리도 집에 풀세트로 갖추고 있다. 성능이 지나치게 좋다 보니 본신의 성장을 막을까 봐 사용하지 않는 거고.

‘이세아 걔는 거의 보급형만 쓰잖아.’

형편이 부족해 그런 건 아니겠지. 그쪽이 훈련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게다가 이세아는 그 외의 부분에서도 무척 검소한 편이었다. 고작 오백 원 차이 나는 매점 햄버거 둘을 놓고 고민하다 더 싼 걸 고르는 장면도 여러 번 봤으니까.

‘가풍이 원래 그런가?’

진유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시혁과 정세빈도 학교에서 나눠주는 보급형 장비만 쓰며 둘이 수년간 각축전을 벌였다고 한다.

라이벌이라는 걸 제외하고도 그들은 정말로 형편이 어려워 전교 1등이 받는 장학금이 필요했다나.

아무튼, 진유리가 고급 장비를 몸에 주렁주렁 걸치지 않는 데는 그녀가 존경하는 사람 1, 2위와 그들의 딸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관계는 여전히 최악에 가까우나 가족을 제외하고 그녀가 가장 의식하는 건 역시 이세아겠지. 거기다 최근엔 한 사람이 추가됐고.

‘이도진…… 교수님.’

이세아의 오빠.

마법역학 수업의 교수.

진유리 자신으로선 얼굴만 보면 흠칫하고, 말이라도 걸면 아예 정신이 멍해지고, 요즘 자꾸만 꿈에 나오는 사람.

벌써 3주 이상 돼가는 일이며 나아질 기미도 없이 되려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듯했다.

‘내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쪽 방면의 조예라 해본들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은 것과 영화 같은 데서 본 것밖에 없지만 그 정도쯤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절대 좋아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고.

마주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무슨 사랑이겠는가.

그러니까…… 사랑은 아니다. 그냥, 시선이 가는 것뿐이다. 진유리 자신은 전혀 그런 걸 원하지 않았고.

가령 E급 균열 내에서 하루 동안 지내기 vs 이도진과 3박 4일 오붓한 밀착 여행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녀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택하겠지.

‘균열 들어가기 전에 식량이랑 포션 잘 챙기고, 대비도 철저히 해서…… 그러면 하루는 괜찮겠지? 그 사람이랑 3박 4일이나 같이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할 테니 사실상 무의미한 가정을 고심하던 진유리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자각했다.

“……아.”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망상을 떨쳐낸 그녀는 정면을 바라봤다. 진행자가 악마의 손에 관한 소개를 끝내고 본격적인 입찰을 시작하려는 와중이다.

‘이게 다 이세아랑 이도진…… 교수님 때문이야.’

속마음으로도 차마 존칭을 생략하지 못한 그녀는 경매에 집중하려 했다. 이게 마지막 차례니 끝나면 곧바로 귀가해 밀린 공부를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쿠우우웅-

진동 같은 소음이 일었다. 회장 내부가 아니라 바깥.

쿠웅, 쿠우웅-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경매장에 있던 헌터 한 명이 한태강에게 달려가 귓속말했다. 언뜻 눈살을 찌푸리던 한태강이 뭐라 지시했고, 대여섯 명의 헌터가 나서고자 움직인다.

“참석자 여러분, 대단히 죄송하오나 잠시 경매가 지연됨을 알려드립니다. 회장 외부에 다소 문제가 있어 십 분간 휴식한 이후, 경매를 재개하고자 하니 부디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본인도 당황한 듯하나 애써 차분한 어조로 진행자가 전달한 말. 참석자들이 저마다 불안해하며 수군거렸고, 진철민이 진유리에게 살짝 눈짓했다.

‘왜 그러시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가벼운 사건은 아닐 터.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진유리는 회장 외곽으로 향했다. 헌터 몇 명이 바삐 달려나가는 게 얼핏 보였고, 그녀를 따라온 진철민이 심각한 목소리로 일렀다.

“우리 딸, 아빠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한다. 지금 바깥에 테러-”

바로 그 순간.

쿠웅!

경매장을 나서려던 헌터들이 보이지 않는 뭔가에 가로막혔다. 젊은 여성의 것인 듯한, 여유로운 웃음이 회장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잠시 뒤.

스으으으…….

허공에 세 개의 안개가 일렁였다.

회장 뒤편의 출입구와 앞쪽 양옆에 자리한 두 개의 출입구.

바깥과 통하는 공간을 죄다 틀어막듯 안개가 움직였고…… 점차 짙어진다.

이내 그 틈새로, 가면을 쓴 그림자 셋이 등장했다.

용을 닮은 가면.

밝은 빛깔의 여우를 본뜬 가면.

가면 파티에서나 쓸 법한, 화려한 디자인의 가면.

티익.

용 가면이 손가락을 튕겼다.

“으허억!”

경매에 참석한 일반인들이 숨을 크게 내뱉었다. 부지불식간에 이 공간 전체로 작용한 마력의 압박.

각성자들은 버텼지만, 이어서 여우 가면이 손을 떨쳐낸다.

“크윽…….”

각성자들마저 움직임을 멈췄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겠지. 여우 가면의 능력이 그들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힘겹게 입을 뗐다. ‘팬텀’이라고.

‘팬텀? 저자들이?’

진유리는 세 개의 가면을 번갈아 쳐다봤다.

철권 염의준을 살해한 일로 최근 들어 한층 유명해진 테러조직. 그러고 보니…… 그들은 임무 시에 전원 가면을 착용한다고 들었다.

한태강이 나선 건 그때였다.

“흐읍-!”

나직한 기합성. 그러나 그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쿠아아아아아앙-!

용 가면의 마력, 여우 가면의 제지. 그것들이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느릿하게 걸어 나가며 한태강이 일렀다.

“겁을 상실했군.”

팬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화려한 디자인의 가면을 쓴 여성이 마주 걸어온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입가. 사근사근한 웃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격돌하기 직전.

콰앙-!

회장 뒤편의 문이 열렸고, 무늬가 없는 흰 가면과 토끼 가면을 쓴 이들이 나타났다. 흰 가면은 손에 사람 몸통 정도 크기의 시뻘건 물체를 들고 있었다.

‘저거 혹시…….’

그게 실제 사람이란 걸 깨달은 진유리가 입을 벌렸고…….

퍼어어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흰 가면이 쥐고 있던 물체가 터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본 한태강이 읊조렸다.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콰앙-!

그가 주먹을 내뻗었다.

***

그리고 그 무렵.

오랜만에 친구들과 외출한 이세아는 문득 휴대전화의 진동음을 들었다.

우우우웅…….

화면을 켜자마자 보인 건 각성자 전용의 알림 앱.

거기에, 심상치 않은 경고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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