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40화 (40/207)

#40화. Chapter 10. 대원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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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끝났습니다!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달성률에 따라 클리어 보상을 산정합니다. (A+ 랭크)

1) 신체 포인트 5p

2) 소질 포인트 0.6p

3) 스킬 (랭크 B~C, 항목 중 택일)

4) 소제목 및 태그 변경 권한 1회 (변경 이전의 정보를 반드시 포함해야 하며, 요청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상기 네 가지 보상을 제한시간 내에 수령해 주세요. (제한시간: 29일 23시간 59분 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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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이 끝났다. 내가 세아와 마주한 그 순간에. 그리고 홀로그램이 다음 진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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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가 시작되었습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0.1%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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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현기증이 밀려왔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토끼 가면에게 전한 눈짓. 내 의중을 깨달은 그녀가 진유리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가방을 뒤적여 휴대용 검을 꺼내던 세아가 진유리의 몸을 받아냈다. 나와 토끼 가면은 이미 저만치 달리는 중이었고.

“저기다!”

“거리 유지하면서 쫓아가!”

뒤편에서 각성자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나름대로 속도를 내며 추격해 오는 듯했으나 날이 깜깜했고, 우리에겐 도주 경로가 확보되어 있다.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은 데다 기실 저쪽도 은근히 소극적인 태도였다. 설령 추격 인원에 S급 각성자가 있다 해도 우리와 싸우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여길 테니까.

그저 더 이상의 테러 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주위를 경계하는 정도에서 추적이 그쳤고, 나와 토끼 가면은 회의 때 약속해둔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변두리의 폐공장.

거기 도착한 다음에야 나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벅, 저벅.

구석진 곳에 세워진 낡은 철골 어귀로 향한 나는 토끼 가면이 보지 못하게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고, 가면을 살짝 벗고,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티잉, 치익-

타는 소리가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소엔 많이 펴봐야 하루에 대여섯 개비. 이걸로 여섯 개비째니 더 필 생각이 안 드는 게 맞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연이어 담뱃갑에 손을 넣으며 나는 상념을 이어나갔다. 하루 이틀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만, 당장 가진 정보들을 모아봐야 했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

제1 아카데미 고등부 2학년이며 마검술 전공. 성별은 여자.

그건 어쩌면 진유리가 아니라 내 동생 세아일지도 모른다.

원래는 반반 정도로 보고 있었다.

염의준의 장례식 즈음에야 진유리일 가능성이 크다고 애써 안심하려 했지만, 사실 세아일 가능성도 존재하고, 되려 그럴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껏 생각해왔다.

첫 번째 이유는 진행률.

<마신의 탄생>이 끝났다는 홀로그램이 떴을 때, <킬 더 이블> 1권의 진행률은 벌써 5%를 넘기고 있었다. 두 소설의 시점이 조금쯤 겹쳤다는 거겠지.

만약 그날 아침 세아가 집을 나선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면…… 주인공과 만났다는 홀로그램이 장례식장에서야 나타난 것도 설명된다.

그리고…… 1권 진행률은 줄곧 세아의 행적을 중심으로 상승했다.

그야 명확하진 않다. 진유리가 주인공이라 해도 앞뒤가 아예 맞아떨어지지 않는 건 아니고, 세아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중에도 진행률이 오르긴 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진행률의 상승은 세아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이어서 두 번째 이유.

진유리와 유해빈. 제일고에 균열이 발생했던 날.

근거라기보단 메타적인 판단에 더 가깝지만…… 최종보스에게 제압당하고 벌벌 떠는 주인공이란 게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그런 소설을 누가 본다고.

설령 <킬 더 이블> 1권에서 그 부분이 감춰졌다 한들 나를 볼 때마다 진유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까지 지면상 숨길 순 없겠지. 그리고 그런 건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조연이 담당할 복선이라면 몰라도.

유해빈이 팬텀에 입단한 것 또한 내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향후 주인공의 뒤통수를 칠 그 애는 진유리보다 세아와 친하니까. 내 동생을 배신하는 편이 더 극적이겠지.

다음으로 세 번째 이유.

유해빈에 관련한 추론과 비슷한 논리고, 실은 이쪽이 더 확실하다. 나와 세아의 관계. 여동생과 오빠.

진유리가 주인공이라면 라이벌의 오빠가 최종보스다.

세아가 주인공이라면 오빠가 최종보스다.

나로선 도저히 내키지 않는 가정이지만…… 후자의 구도가 훨씬 흥미롭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걸 다 종합해서.

그냥,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사건과 그에 따른 판단이 내게 속삭였다. 진유리가 아니라 세아가 주인공이라고.

진유리를 조속히 제거하면 문제가 발생하느냐는 OX 질문에 홀로그램이 답한 건 그 애가 주인공이란 근거가 되어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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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3)

-질문 내용: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를 조속히 제거할 시 위험이 미치는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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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3)

-질문 내용: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이세아를 향후 중심 사건에서 배제해도 무방한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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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3)

-질문 내용: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인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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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3)

-질문 내용: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이세아인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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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 질문 (1/3)

-질문 내용: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 복수의 인물인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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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와 진유리. 둘 중에 주인공이 누구인지 추측해낼 수 있는 질문은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론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세아가 주인공일 가능성을 더 크게 뒀다. 오늘 사건에서 진유리가 있을 때 진행률이 거의 끝까지 오르는 걸 보고 잠깐 기대를 품었지만…… 기어이 세아와 마주친 다음에야 1권이 끝나버렸다.

그러니 아마도 7할 이상. 내 동생 세아가 주인공이리라.

“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부모님을 살리고 싶다는 소원.

그건 내가 <킬 더 이블>의 최종 승자가 되어야만 현실로 이루어지는데.

최종 승자란 건 주인공과 대립해 이겨냈단 뜻일 텐데.

세아가 주인공이라면.

내가 부모님을 살리려면.

나는 내 동생을 쓰러뜨려야 한다.

세 개비째 담배를 꺼내문 나는 홀로그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그림인가?

홀로그램은 답하지 않았고, 나는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까지 내가 안간힘을 쓰며 헤쳐왔던 것처럼.

절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만 모든 게 착착 흘러가진 않을 거야.

그런 각오를 뼈에 사무치게 새기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등 뒤에서 인기척 같은 게 느껴졌다.

담배를 절반가량 피우다가 불을 끈 나는 가면을 제대로 쓰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목격한 광경.

“…….”

토끼 가면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같이 와놓곤 말 한마디 안 걸고 내버려 둔 게 미안해 나는 슬쩍 담뱃갑을 내밀었다.

“하나 가져갈래?”

얘가 담배 피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얼마 전부터 피우기 시작했을 수도 있고, 내가 가끔 담배 피울 때마다 유심히 쳐다본 걸 고려하면 호기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흡연자인 처지에 ‘넌 이런 거 피우지 마라’라고 충고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못 되고, 정확히는 그 반대였다. 같이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 좋지.

머릿속이 워낙 복잡해서 얘랑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자기 필요할 때 빼고는 도통 입을 여는 일이 없는 애지만 담배 피울 때는 대체로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그 점을 노린 제안이었는데…… 토끼와 알아오며 내가 들은 것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 번에 많이 피우는 거, 몸에 엄청 해로워요.”

“어, 어?”

그러더니 세 번 손을 휘두른다.

치익, 치익, 치이익-

필터까지 다 피운 담배 두 개비와 절반만 피우고 끈 한 개비. 셋 다 토끼 가면의 마력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마력의 발출이 험악해 보인 건 내 기분 탓이려나.

증거 남기면 안 되니 나도 없애려고 했는데…….

어색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고, 때마침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살금살금 오느라 늦었네요.”

용 가면을 쓰고 등장한 유해빈이 너스레를 떨며 건네온 말. 나는 그 애에게 물었다.

“보스랑 여우는?”

“글쎄요? 제가 제일 먼저 나왔고, 저랑 다른 데로 워프했으니까……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요? 일단은 별일 없이 끝났을 거예요.”

태평한 목소리로 답한 유해빈이 자초지종을 일러줬다.

***

‘이거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른데?’

뻥 뚫린 하늘 너머로 사라져가는 이도진을 보며 유해빈은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팬텀 단원으로서의 첫 활동이라 한껏 기대하며 참가했건만 적들이 너무 시시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헌터들. 일반적인 기준으론 상당한 강자들이겠지만 유해빈을 위기로 몰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반대로 동료들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고.

‘우리 도진 씨야 그렇다 쳐도…….’

날랜 몸놀림이 특기이리라 예상했던 토끼 가면은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몰랐지만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마력을 지닌 초강자였고, 비록 그녀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하나 여우 가면도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이다.

보유 마력. 그것을 활용하는 기술. 전투 상황에서의 판단력. 모든 부문에 걸쳐 능히 최상위 각성자라 할 만했다. 구체적으로 평가한다면 S급 헌터와 36 영웅의 중간 어디쯤일까.

그리고, 개중에서도 유해빈이 가장 놀란 건 정체불명의, 이도진과 무척 미묘한 관계인 듯한 보스의 힘이었다.

‘이세아 오빠보다 더 세겠다 싶긴 했는데…… 한태강이랑 일대일로 싸우는데도 딱히 안 밀리네?’

엄밀히 따지면 한태강이 우세한 게 사실이었다. 이도진이 지원해주던 조금 전까진 대등하다 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미세하게나마 보스가 밀렸다.

그러나 상대가 한태강이라면 그렇게 버티는 것만 해도 놀라운 위업이겠지. 온 세상의 각성자를 전부 그러모아도 기껏 열 명 안팎만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때 마법으로 전달된 보스의 전언이 들려왔다.

[할 일은 얼추 다 했고, 우리도 슬슬 물러날까?]

유해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도주할 방법은 정해뒀다. 단원 둘은 공간 마법으로 워프. 보스는 경로를 추적하지 못할 때까지 막아주겠다고.

‘마지막으로 힘 좀 써야겠네.’

재잘거리듯 되뇐 유해빈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쿠웅-

육중한 소음이 일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 전체를 휩싸며 타오르던 불길이 그 마력에 반응해 더욱 기세를 떨친다.

타앙!

긴장한 헌터들이 유해빈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용 가면을 쓴 저 범죄자가 대단히 뛰어난 마력 지배력을 가졌다는 건 확실하니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다만 유해빈의 실제 목적은 공격이 아니라 그들을 떨쳐내는 것 자체였고.

슈아아악-

허공의 공간이 찢겨 나갔다. 냉큼 그곳으로 몸을 날린 유해빈은 당황한 헌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봅시다.’

학교를 졸업하고 헌터로 활동하다 보면 저들과도 얼굴을 마주치겠지. 자신이 용 가면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워프 마법이 발동되기 직전. 유해빈은 문득 옆을 바라봤다.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있담?’

금빛 털의 여우를 본뜬 가면을 착용하고, 본인의 머리칼은 그보다 훨씬 아름다운 금발인 여성.

그녀의 근처에도 워프 마법이 열려 있지만 어째선지 회장 내에 머물러 있다.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유해빈은 곧 결론을 내렸다.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자고.

‘자기 알아서 하겠지.’

성장한 이후엔 균열 너머 세상의 저항군을 이끌기로 예정되어 있던 유해빈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런 기습 작전에서 뭘 지켜야 할지는 잘 알고 있다.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

보스와 여우 가면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진 모르겠고, 알 필요도 없다. 공연히 나섰다 일이 꼬이면 그게 더 큰 실책이니까. 유해빈이 워프 공간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자 남은 건 두 사람.

여우 가면과 서연희가 대화를 나눴다.

[넌 안 가니? 적당히 하다 갈 거고 걱정할 필요 없는데.]

[……호흡 두 번. 막지 말고 피해요.]

짤막한 조언. 서연희는 일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세 번이 아니라 두 번?’

그러나 되묻기 전에 여우 가면이 워프 공간으로 뛰쳐 들어갔고, 이 상황에서의 조언이라면 자신이 아는 정보보다 그녀의 말을 신뢰하는 편이 낫겠지.

서연희는 한태강을 응시했다.

“후우…….”

그가 숨을 한 번 내뱉었다. 힘을 모으는 거라기보다는 재정비를 위한 것처럼.

“후우우…….”

재차 숨을 내쉰 한태강이 서연희를 본다. 어차피 수뇌인 너만 잡아 들이면 다른 놈들도 머지않아 소탕될 거라는 것처럼.

바로 그때.

터어엉!

아무런 기척도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서연희와 한태강 사이의 거리는 십여 미터 이상.

주먹을 뻗는다 해도 절대로 닿을 리 없는 거리다.

그러나 공간을 뛰어넘어,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하는 주먹이 날아왔고, 서연희는 내심 상찬을 건넸다.

‘저 애도 실력이 늘었네?’

이십여 년 전까진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의 호흡이 필요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급박한 전투 와중에 세 번의 호흡. 길다면 지나치게 긴 준비 시간에다 자주 사용할 수도 없는 기술이었지만, 그에 걸맞게 위력만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한태강이 내뻗은 주먹.

저건 맞받아치거나 방어하면 안 되는 기술이다.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마력이 많건, 얼마나 방어를 단단히 하건 상관없다. 그런 걸 죄다 무시하며 자신의 힘을 온전한 형태로 전달하니까.

심지어 악마의 군주조차 저 기술을 받아내려다 심장이 꿰뚫렸고, 대응할 방법이라곤 오직 하나였다.

‘피하면 그만이지.’

서연희는 오늘 했던 것 중 가장 성의 있게 발을 굴렀다. 피싯-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간 주먹이 불타는 벽에 닿았고, 한태강이 서둘러 기합성을 냈다.

“흐읍!”

쿠오오오오오오오-

붕괴를 앞두고 있던 건물이 결국 소멸했다. 원기둥을 닮은 마력의 폭발이 하늘의 구름 너머까지 솟구쳤고, 의심스러운 눈길로 서연희를 노려보던 한태강이 대뜸 물었다.

“나를 아나?”

무신 한태강을 모르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면식이 있냐고 추궁하는 걸 테고,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최고 기술이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지 아는 사람이란 건 눈치챘겠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서연희는 피식 웃기만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에 뜬 달이 삼분지 일가량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하려는 일쯤 크게 무리하는 것도 아니겠지.

슈우우우우…….

서연희의 육신이 붉은 안개로 화했다. 잠시 지켜보던 한태강이 들이닥쳤다.

쿠아앙!

그가 내지른 공격에도 안개는 흩어지지 않았다.

자유롭게 일렁이며 상공으로 점점 올라갈 뿐이었다.

‘이대로 놓칠 순 없지.’

한태강이 힘을 모았다. 무슨 마법인지 몰라도 추격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리라. 끝까지 쫓아가서 정체를 밝힐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날아오르려던 그 순간.

슈아아아아-

붉은 안개의 중심부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나타났다.

한가운데 동공만 새까만 눈이 그에게 경고한다.

시간을 끌면서 싸우는 건 딱 여기까지만이라고.

따라와도 좋지만…… 그럴 거라면 죽음을 각오하라고.

한태강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 건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강자를 알아보는 그의 직감이 확고히 이른 것이다.

저건 결코 허세가 아니라고. 유리한 싸움이 되지 않을 테니 대비를 단단히 하라고.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가 멈칫한 찰나에, 붉은 안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한태강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하늘을 묵묵히 관조했다. 마력의 여파가 감지되지 않는다. 붉은 눈동자로 화한 게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는 증거일 터.

‘어떻게 한 거지?’

팬텀의 보스. 그자는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악마, 혹은 놈들과 계통을 같이하는 무언가.

한태강은 그런 걸 알아볼 조예가 없었지만, 의견을 구할 사람이라면 알고 있었다.

‘한 번 찾아가 봐야겠어.’

심정웅. 심가의 전대 가주이자 36 영웅의 최연장자. 얼굴을 맞댈 때마다 꺼림칙해지는 노인이지만…… 그라면 그럴듯한 추측을 내어놓으리라.

한편 회장을 나선 서연희는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연기와 불길 탓에 매캐한 공기만 가득했던 곳을 벗어나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계획한 대로 일도 잘 풀렸고, 마무리 작업만 끝내면 달콤한 보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지.

장생종으로서 지닌 권능을 일부분 발현한 그녀는 전능자에 근접한 감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서울 전체가 그녀의 시야에 담겼고, 마력의 흐름 역시 선명하게 잡혔다.

‘꽤 공을 들여놨네?’

유해빈과 여우 가면.

두 사람을 이동시킨 워프 마법을 역추적하고자 마법사들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안, 헛수고야.’

장난스레 중얼거린 그녀는 이리저리 손을 휘둘렀다. 그 손길에 따라 마법사들이 촘촘히 짜두었던 추적망에 하나둘씩 착오가 발생했고, 그들은 서연희의 개입을 알지 못했다.

‘이쪽으로는 안 갔나 보다 하겠지.’

추적망을 계속 흐트러뜨리며 그녀는 두 곳을 살폈다. 서로 다른 위치로 보낸 유해빈과 여우 가면이 주의를 기울여 가며 목적지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 애들은 잘 하는 것 같고…… 조금만 더 봐주면 되겠네.’

이삼십 분쯤 지났을까. 유해빈과 여우 가면이 목적지에 당도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단 걸 알아차린 마법사들이 추적망을 복구하려 했으나 워프 마법의 흔적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 서연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폐공장으로 날아갔다. 즐거운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도진이한테 뭘 해달라고 하지?’

이번 일은 그녀도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악마의 손을 공원에 버려둔 것부터 이렇게 추적을 무산시킨 것까지.

‘나처럼 해달란 거 다 들어주는 누나가 걔한테 있겠어?’

물론 이도진의 부탁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가져다 바칠 사람은 찾아보면 여럿 있겠지만…….

‘걔가 원하는 건 보통, 들어주기 어려운 거니까.’

능력 면에서도, 속마음을 터놓는 측면에서도, 그녀가 주목해야 할 정도의 인재는 찾기 힘들 터였다.

이번엔 특히 큰 도움을 줬으니 대가로 뭘 해달라고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던 서연희는 폐공장에 들어서며 활기차게 외쳤다.

“다들 수고했어!”

한데 그 직후.

‘어라?’

이도진과 유해빈.

여우 가면과 토끼 가면.

넷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서연희는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이윽고 이도진이 그녀에게 일렀다.

“보스.”

“왜? 문제라도 생겼어?”

“일 끝났으니 단원들은 돌려보내고,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음, 나야 환영인데…….”

그럴 생각이긴 했다. 다 집에 보내고, 둘이서 오붓하게 뒤풀이를 즐기려 했으니까. 분명히 그러려고 했는데…….

‘애가 좀 심각해 보이네?’

어째 그녀가 바란 것처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진 못할 것 같다는, 썩 달갑지 않은 예감이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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