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Chapter 10. 대원칙 (2)
***
밤 늦은 시각. 서울의 한 대형 병원에 들어와 있던 이세아는 얼핏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으음, 음…….”
잠꼬대라 표현해야 할까. 새침하게 예쁜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우물대는 모습. 급기야 웅얼거리는 수준을 넘어 ‘말’에 가까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하, 지 마, 요…… 잘못…… 했, 어요…….”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소릴 내는지 궁금해하던 이세아는 이내 측은함을 담은 눈빛으로 정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그만…… 용, 서…….”
환자복 차림으로 얇은 이불을 덮고 병상에 누운 진유리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아줄 사이는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는 이세아였지만 매번 뻔뻔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던 진유리가 저만치 두려워하는 걸 보니 딱하긴 했다.
‘……무서웠나 보네.’
아버지네 회사에서 주최하는 경매에 참석했다가 테러범들과 맞닥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진유리는 그들 가운데 한 명과 싸우기까지 했단다. 이세아도 잠깐 마주쳤던 토끼 가면을 쓴 여자. 그녀에게 제압당해서 납치되기 직전이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이세아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큰 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한 명이 더 있었지…….’
토끼 가면과 함께 도주한, 무늬 없는 흰 가면을 쓴 남자. 알고 보니 그자는 테러조직 팬텀 내에서도 보스 다음 서열의, 대단히 흉악무도한 범죄자라고 했다. 염의준을 살해한 직접적인 흉수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실은 진유리뿐만이 아니라 이세아 본인도 오늘 죽을 고비를 넘긴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딱히, 모르겠어.’
팬텀의 단원들과 대면했을 때 그녀는 이상하게도 별로 겁을 먹지 않았었다. 당황해서 공포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순수한 의미로, 그다지 겁이 안 났다.
‘유령 나오는 공포 영화 같은 거 하나도 안 무서워해서 그런가?’
그런 것관 아예 차원이 다른 실제 상황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영문을 모를 노릇이라 이세아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으으…… 흐윽, 흐으윽…….”
점차 고조되던 진유리의 잠꼬대가 드디어 절정으로 치달아갔다. 누운 자세에서 양팔을 하늘 위로 내뻗으면서, 그녀가 꿈속에서 마주했을 누군가에게 숫제 애원을 했다.
“싫어…… 오지 마…… 안 가…… 너랑…… 너랑, 가는 거 싫다고…….”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인지. 팬텀의 아지트로 끌려가는 꿈을 꾸는 걸까. 무슨 악몽인지는 몰라도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이세아가 슬쩍 오른손을 뻗어냈다. 손이 가닿을 목표 지점은 진유리의 어깨.
‘일단 깨우자.’
의사에게 듣기론 좀 더 자야 한다지만…… 아무렴 저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몸에 해롭겠는가.
한데 그 직후.
“으흣, 아, 아앗!”
신음 같은 비명을 내지르던 진유리가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시선으로 좌우를 번갈아서 보더니 이윽고 이세아 쪽을 바라본다.
“……이세아?”
우연에 우연이 겹쳐 납치당하던 애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병실에까지 따라오게 됐지만…… 그들은 같은 학년 친구들을 모두 통틀어도 가장 사이가 안 좋은 축에 속하는 사이였다. 해서 이세아는 사담은 제외하고 본론만 일러줬다.
“경매장 기억 나?”
“아, 경매장, 어…….”
“테러범들이 너 기절시키고 도망치다 사람들 쫓아오니까 버리고 갔어. 마침 그 앞에 내가 있어서, 너희 부모님이랑 여기로 온 거고.”
“아…….”
“두 분 다 잠깐만 나가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금방 오신댔어.”
호랑이도 저 부르면 온다고 병실 문이 덜컥 열렸다.
“유리야!”
“아이고, 내 새끼…….”
진유리의 부모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진유리의 얼굴을 매만져댔고, 아버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이세아는, 세 가족이 서로를 지극히 애틋하게 여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진유리보다 예쁘지 않고, 진유리보다 부자가 아니고, 진유리보다 성적이 낮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런 것들은 지금까지 과하게 의식한 적도 없고, 전혀 분해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지금 눈에 비치는 광경은……. 저건 무척이나 분명하게, 이세아의 마음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더 보고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진유리의 부모님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우리가 정신이 없어서 여태 붙잡아 두고 있었네. 늦었는데 집에 가봐야지. 당신이 좀 데려다주고 와요. 딸도 친구한테 인사하고.”
어머니의 재촉에 진유리가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뗐다.
“잘 가. ……고마워.”
“……그래.”
어색함의 극치라 할 만한 인사. 진유리의 아버지, 진철민이 병원 입구까지 따라 나와서는 이세아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너무 고맙고 밤도 늦었는데 친구 데려다줘도 될까?”
“아뇨,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아, 그럼 택시비도 하고, 우리 유리랑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달라고 용돈이라도 주고 싶은데 그건 괜찮을까?”
이세아는 일순간 고민했다. 부모님의 지인들에게 용돈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게 있었으나 진유리의 집안은 이 나라 경제의 최전선을 이끌어가는 기업.
용돈이랍시고 주는 게 단위가 세 자릿수를 넘어가면 그걸 어떻게 사양해야 할지 곤란해질 듯했고, 그러나 진유리의 아버지는 의외로 정도란 걸 아는 사람이었다.
세 자릿수는커녕 두 자릿수조차 아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오만 원 지폐를 한 장 건넨 진철민이 이세아에게 재차 일렀다.
“아저씨 전에 본 적 있지? TV 말고, 학교에서.”
“네.”
기억나는 건 두 번이고, 아마 세 번 마주쳤겠지.
제일중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제일고 입학식. 진철민은 가진 부를 앞세워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았고, 그가 진유리를 보러 제1 아카데미에 방문한 것도 그 세 번이 전부다.
제일중 입학식 당시야 누가 누군지도 제대로 몰랐으니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입학식에선 진유리와 나란히 서 있는 진철민을 본 적이 있다.
“아저씨도 세아 친구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우리 딸이 하도 얘기를 많이 해서.”
“……제 얘기를요?”
이건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진유리가 자신을 라이벌로 여기는 건 알았지만 집에서까지 그걸 언급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진철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가 중학교 가서부터 어찌나 공부를 열심히 하던지. 왜 그러냐고 넌지시 물어보면 가끔, 세아 친구 얘기가 나왔거든.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세아는 이 순간 결심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진철민은 그의 딸과 이세아 자신의 강의실 난투극 사건을 모르는 듯하니, 그건 이후로도 비밀로 남아야만 한다고.
진유리에게도 그 점을 언급해두어야겠다고 이세아가 다짐하고 있는데, 진철민이 미안해하는 투로 일렀다.
“우리 유리가 하도 예뻐하면서 키워서 그런지 철없는 행동도 하고 그러지만…… 아무쪼록 너무 심하게는 다투지 말고 지내주면 아저씨는 참 고맙겠구나. 아저씨도 집에서 따끔하게 혼을 낼 테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면 더 좋고.”
“……네.”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기야 진유리가 아무리 비밀로 감춘다 해도 진철민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겠지.
그런데도 이세아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건…… 결코 이세아가 진유리를 위기에서 구해줬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딸을, 진유리를 너무나 많이 아끼니까. 진유리가 착하고 반듯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하니까. 그것에 이세아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 그 이유가 가장 크겠지.
저 멀리 택시가 보였고, 이세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고. 언제 기회 되면 아저씨가 유리 통해서 집에 한 번 초대할 테니까 맛있는 거라도 먹고 가렴.”
“……네.”
택시에 탄 이세아는 유리창 바깥을 쳐다봤다. 진철민이 허겁지겁 병원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각성자가 아니기에 이세아가 보기엔 몹시 느린 걸음. 하지만 자식을 보러 가는 저 걸음만큼 다급한 뜀박질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냐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삐 도로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도진의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고…….
‘……아.’
그녀의 휴대전화는 모르는 새에 방전되어 전원이 꺼져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진 이대로 있을 수밖에 없겠지.
“…….”
이세아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눈 주위가 뜨거워져 있다. 화가 나고, 그보다 더 속상하고 온몸이 아팠다.
‘왜 안 받았어……?’
가족이라면서. 진유리만 위험했던 게 아닌데. 자신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어째서 진유리만 부모님에게 둘러싸여 있고, 자신은 받지도 않는 전화를 몇 통씩이나 걸다가 혼자 택시를 타고 쓸쓸히 집으로 향하는 걸까.
그야 머리론 이해가 된다. 동생이 오늘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한 건 그도 알지만, 서울 내에서 테러범들이 활보했단 건 모를 수도 있다. 여자친구와 뭔가를 계속해서 하고 있어서, 소식조차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런 가정은 그녀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오빠가 연락 없이 그녀를 걱정시켰고, 동생이 위험한 일을 겪은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알려줬으면 했던 당시에.
이세아가 오빠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이 순간.
이도진은 어느 때도 보이지 않았고, 이세아의 마음은 이미 멍들었다.
집 근처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쓸쓸히 걸었다. 오빠가 귀가하면 뭐라 말해야 할까. 테러범들과 만났다고,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원망해야 할까. 그러고 싶었지만, 또 마음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도진은 미안해하며 사과할 거고, 자신은 그 모습에 오히려 화가 나 짜증을 낼 거고, 괜히 상황만 더 이상해진다.
이세아는 지금 그런 걸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했고…….
그리고.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이도진이 애타는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이세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차악-
그녀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인기척을 들려온 곳을 바라본 이도진이 서둘러 뛰어온다. 병원으로 돌아가던 진철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간절해 보였다. 아니, 애초에 비교한다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진철민은 자신의 딸을 아끼고, 이도진은 자신의 동생을 아끼는 거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러니 비교할 수도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되는 거다.
그녀의 앞에 다다른 이도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괜찮아?”
이세아는 반문했다.
“……어떻게 알았어?”
“폰 켜보니까 부재중 와 있고, 기사랑 제타 같은 데도 얘기가 나오고 너도 거기 있었다고 해서…….”
“그래서…… 바로 온 거야?”
이도진이 더없이 미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꺼져 있길래. 병원 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벌써 나왔대서 기다리고 있었지. 너 어디 다친 데 없고 괜찮- 아니, 잠깐만.”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세아로선 그 연원을 명확히 짐작해내지 못하는, 그런데도 정말로 애달파 보이는 감정을 눈에 담아 이른다.
“전화 곧장 못 받아서 미안해. 걱정 많이 했을 텐데. 오빠가 미안해.”
“……됐어.”
퉁명스럽게 답한 이세아가 앞장섰다. 뒤따라온 이도진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저녁은 먹었어? 다친 데 없는 것 같아도 놀랐을 텐데 검사해봐야-”
“나 배고파.”
거짓말은 아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못 느끼고 있었으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을 전달하는 말은 아니었다.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도진도 그걸 눈치챘는지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활기가 돈다.
“집에 재료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아니면 시간 좀 늦었어도 너 좋아하는 거 시켜먹을까?”
“그냥 밥 먹고 싶어.”
함께 귀가한 그들은 거실의 불을 켰다. 이도진은 식사부터 준비하겠다고 부엌으로 향했고, 이세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휴대전화부터 충전했다. 그리고 전원이 켜진 직후.
우웅- 우우웅-
부재중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문자가 몇 번이나 도착했다. 모두 이도진의 연락이었고, 메시지도 와 있었다.
이제 봤다고, 늦게 연락해 미안하다고, 전화가 꺼져 있는데 보면 답장해달라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세아야, 다 됐으니까 밥 먹으러 나와.”
바깥에서 들린 말소리. 방에 들어와 어느새 이십 분이 넘게 지나 있었고, 밖으로 나오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를 비롯해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차려진 채였다. 이도진과 나란히 앉아 숟가락을 쥔 이세아는 흘끗 그를 쳐다봤다.
“왜?”
“……아냐.”
묻는 말에 둘러댄 이세아는 콩나물국을 한 입 떠먹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나마 한세라에게 사과했다.
‘나중에 말할게…….’
여자친구 만날 거면 최소한 파혼하고 만나라고,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따뜻한 콩나물국을 먹고 나니, 적어도 오늘만은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이세아는 다른 말을 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비록 늦었지만.
마음에 멍이 들어버렸지만.
이도진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합쳐서, 이세아는 그래도 오빠에게 고마웠다. 자신을 걱정한 사람이 그라서 좋았다.
“오빠가…… 너한테 맨날 미안할 행동만 하네.”
씁쓸하게 웃은 이도진이 다시 전한 사과. 그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이세아는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
서연희는 홀로 밤거리를 걸었다. 팬텀 멤버들을 돌려보내고, 악마의 손을 없애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서울 중심부로 들어와 있는 상태.
“하아…….”
문득 한숨이 나왔다. 서운해할 일이 아님을 이해하나 혼자 낙담하는 것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일이 꼬이려니까 그렇게 되네.’
친구들과 놀러 나간 이세아가 하필 경매 장소 근처에 있었다니. 이도진에게 그걸 들은 서연희는 단원들부터 해산시켰다. 그리고 악마의 손을 없애며 그와 짤막하게 나눈 대화.
‘토끼요.’
‘응? 걔가 왜?’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글쎄……?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노코멘트.’
‘걔가 빈 소원. 저랑 관련 있어요?’
‘이것도 노코멘트인데,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만 알려줄게.’
‘뭔데요?’
‘토끼가 빈 소원은, 팬텀에 들어오고 나서 정한 거야.’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그녀가 일러줄 수 있는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이도진은 질문을 이어나가고 싶은 듯했으나 당장 급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어 이후를 기약했고.
그즈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여보세요?”
서연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운하고, 이해한다.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수화기 너머에서 이도진이 일렀다. 집 앞에서 이세아와 만났다고. 그런대로 달래줄 수 있었고 서연희에게 미안하다고.
<내일도 괜찮고, 다음 주말도 괜찮아요. 하루 비워둘 테니까 원하는 만큼 부려먹어요.>
“진짜? 너 감당할 자신 있어?”
<감당이 안 되면 되도록 해야죠. 지은 죄가 있는데.>
“흐응…… 그래? 그럴 각오가 돼 있단 말이지?”
이젠 아쉬움보다 기대가 커졌다. 이렇게나 금방 풀리는 걸 보이면 버릇이 잘못 들 텐데,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분이 좋아진 것을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퍽 부드러운 분위기로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가, 이도진이 물었다.
<한 번씩 그럴 때 있잖아요. 잘해보려고 하다가 더 꼬이는 것 같고, 내가 이거 해도 되는 건지 확신 안 서는 때.>
“난 그럴 때 없는데?”
<아, 좀 있다고 쳐요. 아무튼, 그럴 때가 있으면, 누나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선택지가 뭔데?”
<원래 하고 싶었던 대로 할지,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확실한 길을 찾을지. 둘 중에요.>
“이상한 걸 묻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
싱거운 목소리로 반문한 서연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깜깜한 밤을 밝히는 도시의 불빛을 등진 채로 그에게 일렀다.
“도진아, 그거 알아?”
<어떤 거요?>
“내가 살아오면서 본 모든 사람 중에서…… 네가 독보적으로, 제일 욕심이 많아.”
그러니 그는 변하지 않을 거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있는 힘껏 해나가겠지.
서연희는 그런 이도진을 응원했다.
***
이런저런 할 일을 다 마치고 샤워로 몸을 씻어낸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면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
-현재 보유한 OX 질문은 3회입니다.
: <킬 더 이블> 1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추가 보상으로, OX 질문 3회를 주관식 질문 1회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 <킬 더 이블> 1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 추가 보상으로, 주관식 질문 1회를 객관식 질문 1회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OX 질문 3회를 주관식 질문 1회로 치환했습니다!
-주관식 질문 1회를 객관식 질문 1회로 치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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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마치고,
나는 아까 서연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본 모든 사람 중에서 네가 독보적으로 제일 욕심이 많다고.
나도 인정해.
그러니까…… 그렇게나 욕심이 많은 나는, 어떤 것과도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세아와 부모님의 소생 둘 중 하나를 택하기를, 어쩌면 그 둘을 다 지키고 내 목숨을 포기하기를 홀로그램이 바란다 해도.
난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살 거야.
세아는 나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거야.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다시 살아나실 거야.
우리 가족 네 사람 전부 다,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러길 원한다.
그건 절대로 바뀌지 않을,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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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세계의 수호자>의 주인공 이시혁과 히로인 정세빈,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이도진, <킬 더 이블>의 등장인물 이세아. 네 사람이 동시에 생존할 방법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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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이 선택지를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