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Chapter 10. 대원칙 (3)
홀로그램의 객관식 질문.
OX 질문이나 주관식 질문과 같이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기능이지만…… 앞선 두 가지와 조금 궤를 달리하는 부분도 있었다. 객관식 질문은, 내게 답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OX 질문은 정말 간결하게, 맞냐 아니냐로만 답을 일러준다.
주관식 질문은 즉각 효용이 있어 보이진 않는 답을, 지나고 나서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는 식으로 서술해준다.
하지만 객관식 질문은…… 이건 홀로그램이 제시해주는 정답이라는 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알려주는 건 선택지뿐으로 거기서 오답을 고르고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건 순전히 내가 해야 할 몫이지.
그리고, 만약 내가 답을 제대로 고르기만 한다면.
객관식 질문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OX나 주관식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나다.
이내 홀로그램이 몇 줄의 문장을 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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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세계의 수호자>의 주인공 이시혁과 히로인 정세빈,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이도진, <킬 더 이블>의 등장인물 이세아. 네 사람이 동시에 생존할 방법이 무엇인가.
[보기] (질문자 이도진을 기준으로 서술합니다.)
a.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을 교체시킨다
b. 특성 ‘검은 심장’을 완전하게 각성한다
c.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파괴한다
d. <킬 더 이블>의 주인공과 싸워 패배한다
➀ a, c
➁ b, d
➂ b, c
➃ a, b, d
➄ a, c,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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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그램을 보며 나는 떠오른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로서는 정답을 가늠할 수 없지만 아주 쓸 만한, 향후 내 행보의 지침이 될 정보들을 얻은 것만은 분명했다.
a부터 d까지의 보기엔 아마 함정이 숨어 있겠지.
그러나 함정 역할의 보기라 해도…… 그것들에서도 뭔가를 추측해낼 여지는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로 보기 a.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을 교체시킨다.
저 보기가 함정이거나, 실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설령 현시점에서는 세아가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주인공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고.
두 번째로 보기 b.
특성 ‘검은 심장’을 완전하게 각성한다.
이건 함정이냐를 떠나서 실제로 가능한 일일 확률이 높다.
소유자인 나도 정확한 효용을 알지 못하는,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 보정 ‘검은 심장’.
그건 앞으로 개화해 진면모를 보여줄 가능성이 크고, 그에 따른 파장이 있으리라 추론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보기 c.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파괴한다.
<세계의 수호자>의 작가였지만, 나는 이런 아이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원래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미래에 만들어질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파괴해야 한다는 정보가 함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템이 존재하거나 존재하게 될 가능성 자체가 없는 게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홀로그램이 아예 거짓으로 지어낸 아이템만 아니라면.
그러면 나는 저걸 손에 넣어야 한다. 어쨌든 내가 가지고 있어야 파괴하든 사용하든 결정할 수 있으니까.
네 번째로 보기 d.
<킬 더 이블>의 주인공과 싸워 패배한다.
다른 보기들도 아리송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 감이 안 오네. 내가 <킬 더 이블>의 클리어 보상을 받는 조건,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과는 안 맞는데…… 다른 보기들과 함께 고려해보면 또 어느 정도 해석의 여지가 생기고.
“후우…….”
한숨을 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생각해본들 당장은 단서를 구체화하기 어렵고,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방을 나가보니 세아가 계량용 컵에다 물을 받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까 나랑 저녁 먹을 때보다 눈이 퀭하고 표정이 지루해 보인다.
방문 열리는 소리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중간고사 공부하고 있어? 배고프면 야식이라도 만들어 줄까?”
“괜찮아. 먹고 있어.”
짧게 답한 세아가 몸에 가려져 있던 왼손을 들어 보였다. 안에 시럽이 든 젤리 몇 개가 손에 쥐어져 있다. 저거 내가 예전에 사 온 것 같은데…… 언제 사준 거더라?
요새는 집에 오면서 생각날 때마다 한두 개씩은 세아 먹으라고 군것질거리를 사니까. 얘가 또 있으면 있는 대로 먹다 보니 화이트데이 이전이랑 비교해서 과자 섭취량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그렇다고 잘 먹는데 안 사주긴 싫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형국.
원인 제공자인 주제에 나는 타이르듯 세아에게 일렀다.
“먹는 건 좋은데 양치 꼭 하고 자.”
“……오늘 안 잘 건데.”
조용조용히 받아치더니 커피 내리는 기계에 커피 가루를 한가득 집어넣는다. 이윽고 미약하게 끓는 소리가 났다. 커피가 다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터라 세아는 다시 자기 방에 들어갔고, 나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빠른 손놀림으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다 내려진 커피를 잔에 따르고,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와 같이 쟁반에 올려 세아 방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대답 대신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방 안 조명은 어둑하고 책상에 놓아둔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다.
초콜릿 쿠키를 우물대던 세아가 내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 시선을 보내길래 책상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밤에 과자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샌드위치 같은 거 먹어. 모자라면 더 만들어 줄 테니까.”
“그것도 살찌는 건 똑같…….”
볼멘소리처럼 하던 말을 멈춘 세아가, 이내 조용하게 이른다.
“……고마워.”
줄 거 줬으면 공부 방해 안 되게 나가줘야 하겠지만…… 나도 오늘 머릿속이 복잡해서 대화를 좀 더 하고 싶었다. 그나마 아까 애 달래준 것에 자신감을 얻어 세아에게 슬쩍 물었다.
“안경은 왜 껴?”
테가 얇고 알이 없는 검은 안경. 시력도 좋으니까 안경을 낄 필요는 없을 텐데. 샌드위치로 손을 뻗던 세아가 답했다.
“집에선 이거 안 끼면 공부 잘 안 돼.”
“아, 그래……?”
그런 걸 보통 핑계라고 하지 않나.
마음속으로 얼핏 드는 생각은 말 그대로 마음속으로만 삼키고 다시금 물었다.
“근데 너 살찌는 거 신경 쓰여? 별로 안 찐 것 같은데.”
과자를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내가 보기엔 예전이랑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볼이 아주 약간 빵빵해진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지금이 더 보기 좋은 것 같고.
그러자 세아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벌써 1학년 때보다 교복 확실히 작아졌어.”
“그래? 새로 사게 돈 줄까?”
“아냐. 1학년 때 좀 크게 입었던 거라서 괜찮아.”
이것도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세아에게 물었다.
“오빠가 공부 좀 봐줄까? 마법역학은 시험문제를 아니까 안 돼도, 다른 과목은 도와줘도 되니까.”
이번 주말이 지나면 제일고 중간고사 기간이다.
실기도 실기지만 필기시험이 대체로 끔찍하게 어렵다고 악명이 자자한데, 내가 알기로 세아는 필기에서 부족한 점수를 실기로 만회하는 타입이었다.
졸업한 지는 몇 년 지났어도 교과서 어디를 중점으로 봐야 하는지 정도는 기억나고, 그런 만큼 이번 중간고사에선 진지하게 전교 1등을 노려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건만…… 약간 솔깃해하는 듯하면서도 세아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내 힘으로 할 거야. ……전교 1등.”
이런 말 듣고 좋아하지 않을 보호자는 그리 많지 않겠지. 기꺼운 마음에 저절로 손뼉을 치니 세아가 눈을 흘기며 이른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
“응, 공부 열심히 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파이팅!”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세아 방의 문을 닫은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흐뭇하고 기쁘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침울했다.
만약 저 착하고 예쁜 애가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라면.
그래서 내가 결국에는 저 애의 마음을 여태까지 그리 했던 것보다도 더 많이 상처 입히고,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로서 저 애와 싸워야 한다면.
물론 절대로 그런 걸 원치 않지만.
그런데도 세아가 주인공이 아닐 거라고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
<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가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4.1%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미수령 보상]
1) 신체 포인트 5p
2) 소질 포인트 0.6p
3) 스킬 (랭크 B~C, 항목 중 택일)
4) 소제목 및 태그 변경 권한 1회 (변경 이전의 정보를 반드시 포함해야 하며, 요청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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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세아가 주인공일 확률이 높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주인공을 교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킬 더 이블> 2권은 이미 시작했다. 소제목은 ‘영웅의 제자’.
지금도 진행률이 오르는 중이고, 어차피 보상 수령엔 제한시간이 존재한다.
더 망설이다간 늦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순간 결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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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의 고유 퀘스트 보상 중 ‘소제목 및 태그 변경 권한 1회’를 사용합니다.
-<킬 더 이블> 2권의 소제목이 ‘영웅의 제자들’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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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인정하는 것조차 넘어서, 나 자신도 쓰레기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내 동생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덜어내기 위해서 타인을 끌어들이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내가 세운 대원칙에 어긋나지 않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전부 다 할 거야.
세아를 위해서라니 어쩌느니 위선을 떠는 게 아니다. 그 애는 내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내가 걔를 소중하게 여겨서 못 참는 것뿐이며, 기실 내겐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하루 이틀 그랬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홀로그램이 나타난 그때.
그 직후부터, 나는 단 한 순간도 이기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
4월 19일 월요일 아침.
아침마다 공들여 손질하는 머리칼을 평소와 달리 질끈 묶은 진유리는 결의에 찬 눈으로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두꺼운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일고 중간고사.
월요일 시험 과목들의 이론을 그녀가 직접 정리해놓은 비법 노트였다. 정리 자체는 완벽에 가까웠고 적은 내용도 달달 외우다시피 한 상태. 그런데도 진유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페이스 흐트러지면 안 되는데…….’
막판 스퍼트를 올려야 할 지난 주말에 예기치 못한 타격을 입은 게 뼈아팠다. 토요일은 사실상 공부를 못 하다시피 했고, 어제 일요일도 퇴원해서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다. 진유리 본인은 밤을 새워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부모님이 제발 좀 자라고 철통같이 감시한 탓에 그것도 썩 여의치 못했고.
저도 모르게 침울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곤 배웅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어디 안 좋아?”
“……아냐, 다녀올게요.”
어렵사리 기합을 넣은 진유리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려던 그때.
“딸, 잠깐만.”
신문을 들고 안방에서 나온 아버지 진철민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왜요?”
문손잡이를 잡고 멈춘 진유리에게 그가 일렀다.
“오늘 학교 가면 아버지 말 좀 전해주렴.”
“어떤 거 말씀이세요?”
누구에게, 무슨 말을 전해달라는 걸까. 진유리는 의아해하면서도 이어질 부탁을 기다렸고…….
“……네?”
진철민의 당황스러운 말에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