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43화 (43/207)

#43화. Chapter 11. 중간고사 (1)

진유리가 황당해하며 되물은 말.

그녀를 넌지시 보던 진철민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재차 일렀다.

“딸 친구, 세아한테 전해주려무나. 중간고사 끝나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너무 늦게 말하면 시간이 안 날지도 모르니까 오늘 중으로 물어보고 시험 끝나는 날 같이 오렴. 금요일에 마치지?”

“저 걔랑 안 친한데요…….”

진유리는 난처하단 심경을 가득 담아 거부했다.

이세아를 사적으로 초대하고자 말을 거는 것.

함께 집에 돌아오는 것.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것까지.

셋 다 그녀로선 무척 버거운 임무였으니까.

해서 나름대로는 있는 힘껏 거부했건만, 진철민이 마치 그럴 줄 알았단 것처럼 가볍게 답했다.

“안 친하면 또 어때.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그으, 걔도 부르면 불편해할 거예요. ……아마.”

“세아 친구는 괜찮다고 하던데?”

“……이세아가요?”

진유리가 놀라자 그가 물 흐르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토요일에 배웅해주면서 말은 해뒀거든. 주말 지나고 딸한테 말해서 밥 먹으러 오라고 해도 되겠냐니까 흔쾌히 알겠다고 하더구나.”

물론 진철민은 그렇게 제안하지 않았고 이세아도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진철민은 시기를 명확히 한 게 아니라 ‘언제 기회 되면’이라고 했다. 인사치레로 다음에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말하듯,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여길 만한 느낌으로.

이세아는 결코 흔쾌히 응하지 않았다. 시간 나면 밥 먹으러 오라길래 거기다 대고 싫다고 할 수 없어서 알겠다고 답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실관계를 정정해줄 이세아는 없었고, 교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대화만 전해 들은 진유리는 의아해하면서도 아버지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걔가 온다고 한 거면…….’

저쪽에서 꺼리지 않고 오겠다는데 정작 자신이 발을 빼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오늘 아니면 내일, 걔한테 말해놓을게요.”

진유리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선 뒤, 진철민은 아내를 보며 기껍게 웃었다. 딸아이의 심중은 손에 잡힐 듯이 훤히 읽히나 이번만큼은 부모로서 참견하는 게 옳을 듯했다.

거대 기업을 이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아온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진유리와 이세아.

지금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둘이지만…….

‘일단 친해지기만 하면, 평생 인연이 이어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진유리의 아버지인 그는, 딸이 그런 친구와 가까워지길 바랐다.

***

제일고는 기본적으로 하루 4교시 수업이다.

월-목은 오전과 오후에 두 시간 수업을 두 번씩.

금요일은 특수 목적 교육기관으로서의 강의 외에 일반 교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일정도 그에 따라 나뉜다.

월요일엔 월·수 과목의 필기시험.

화요일엔 화·목 과목의 필기시험.

수요일엔 월·수 과목의 실기시험.

목요일엔 화·목 과목의 실기시험.

마지막 금요일엔 일반 교과 과목 시험을 몰아서 치르게 된다.

금요일 시험이야 진유리처럼 필기 1등을 노리는 우등생이 아니면 신경 쓰는 학생들이 극히 드문 실정이지만 월-목은 이야기가 달랐다.

필기 30%와 실기 70% 비중. 그 시험의 성적으로 향후 입단할 길드와 계약 조건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특히 두려워하는 건 월·화요일의 필기시험이었다.

실기보다는 비중이 작지만 제법 변수가 될 수 있고, 시험의 난도가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이어서.

마법역학처럼 이론이 뒷받침되는 강의는 원래 어렵다. 실전적인 마학이나 무기술 계통 강의조차 몹시 까다롭게 문제를 낸다.

실기야 평소에도 곧잘 하니 이럴 때만이라도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라는 게 출제자들의 의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원하는 ‘제대로’와 학생들의 ‘제대로’ 사이엔 머나먼 간극이 존재했다.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는 학생들 기준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맞출 수 있다.

30점 정도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면 오지선다의 선택지에서 두세 개쯤은 힘겹게나마 날릴 수 있다.

나머지 20점은 교수들의 기준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맞출 수 있는 문제였고, 학생들의 기준으론 ‘이걸 맞추라고 낸 건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레벨이었다.

그래서 필기시험을 버리는 결단력 있는 학생들도 드물진 않았다. 50점만 맞추고 나머지 문제들은 그간 갈고닦은 운에 맡겨 총점 60점 이상을 노리는 것이다.

현명하다면 현명한 선택이라 해야겠지.

그리고…….

유해빈이 알기로 지난 수년 동안 이세아는 그 현명한 부류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분명히 그랬었는데…….

“나랑 답 좀 맞춰봐.”

1교시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시험지를 팔랑팔랑 들고서 걸어온 이세아가 제안한 말. 유해빈은 놀라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랑 답 맞춰보자고?”

미심쩍어하는 물음에 이세아가 눈을 흘겼다. 내가 답 맞춰보잔 게 그렇게 이상하냐는 힐난조로 유해빈을 잠시간 쏘아보더니, 대뜸 시험지를 내민다.

“너 시험지도 줘.”

“아니, 뭐…… 원하면 보여줄 수는 있는데…….”

‘너 멘탈 나가지 않을까?’라는 말을 유해빈은 마음속으로만 삼켰다.

이세아는 여태 한 번도 시험이 끝난 다음 자가채점을 한 적이 없었다. 시험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 아래의 서랍에 넣어버리거나, 어떨 땐 분노에 찬 손길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쓰레기통에 날리기도 했다.

그녀의 필기 점수대는 60점에서 65점 사이. 실기가 10위 안쪽이니 만회가 되긴 하나 필기만 놓고 보면 중상위권이라고 하는 것도 잘 쳐주는 거겠지.

따라서 이번에도 그녀의 시험지에 1/3 이상 주룩주룩 슬픈 비가 내리리라 예상했는데…… 어째 생각했던 것과 판이한 결과가 나왔다.

“어? ……어?”

한 문제씩 시험지를 비교하던 유해빈은 당황에 찬 목소리를 흘렸다. 써낸 답이, 거의 비슷했다. 객관식 문제는 물론이고 킬러 문제인 주관식까지도.

자신의 점수를 100점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세아는 90점. 게다가 100점을 장담할 수는 없으니 어쩌면 이세아 쪽이 더 높은 점수일지도 모른다.

“으음…….”

적잖이 흡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쯤 아쉬워하는 듯한 이세아를 멍하니 쳐다보던 유해빈이 물었다.

“너 뭐냐?”

“집에서 공부했어.”

“오빠한테 과외받았다고?”

유해빈은 그런 뜻으로 이해했다.

설마하니 시험문제를 유출하진 않았겠지만 이도진이 공부를 도와줬다면 저 아득한 점수 상승도 꼭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

‘우리 도진 씨가 그 정도 능력은 되시지.’

한데 이세아가 태연하게 부정했다.

“집에서 공부했다니까. 나 혼자서.”

그러더니 오른손을 쫙 펼쳐 보여준다. 검지와 중지 부근, 손바닥에도 새까만 잉크가 묻어 있었고, 그녀가 나직하지만 당당한 어조로 말한다.

“오늘도 밤새고 왔어.”

“그런다고 전부 90점 맞을 거면 애들 누가 공부 안 하겠냐? 어, 음…… 진짜 놀랍고 신비롭네…….”

하면 되는 애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유해빈이 재차 감탄하고 있는데 이세아가 확인하듯 물었다.

“너도 세 문제는 정확히 답 모르지?”

“너랑 답 다른 거?”

서른 문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세 문제.

유해빈도 운이 좋으면 두 문제는 맞겠지 싶은 것들이었다.

“몰라? 쟤랑 답 맞춰보면 얼추 나오긴 할 건데.”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교실 맨 앞자리였다. 머리칼을 질끈 묶은 진유리가 두꺼운 노트를 넘기고 있다.

“……그래?”

단출한 대답. 이제 너한테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이세아가 척척 걸어갔고, 유해빈은 이번에도 놀랐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진유리 쪽이어서.

‘쟤 왜 저래?’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무력충돌을 방지하고자 유해빈은 그녀를 쫓아갔다.

“……?”

다가온 인기척에 진유리가 시선을 돌렸고, 이세아가 그녀에게 묻는다.

“10번 답…… 2번이야, 3번이야?”

“뭐?”

진유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걸 사이좋게 확인할 만한 관계가 아니니까. 유해빈은 친구로서 거들어주기로 했다.

“난 2번, 얘는 3번. 유리멘탈 너는 몇 번 했냐?”

“…….”

미묘한 표정이던 진유리가 자기 시험지를 보지도 않고 일렀다.

“난 5번 했는데?”

“……그럼 20번은? 1번이야, 4번이야?”

“……난 3번.”

나머지 한 문제도 세 사람의 답이 달랐다.

곧바로 분석해서 뭐가 정답인지 알아보기엔 시간이 촉박했고, 이세아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에 앞서 또렷한 목소리로 진유리에게 말했다.

“……대답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야, 이세아.”

느닷없이 불러세운 말. 이세아는 무슨 일인가 하면서 진유리를 쳐다봤다. 날 선 말로 시비를 거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보단 쉬이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이…… 조금 망설이는 느낌.

얼마간 침묵이 흘렀고,

이내 진유리가 아주 빠른 말투로 내뱉었다.

“너,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기로 했던 거, 아빠가 중간고사 끝나고 금요일 어떠시냐는데, 시간 돼?”

“……엥?”

“밥……?”

지켜보던 유해빈뿐 아니라 이세아까지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

4월 19일 월요일, 오후 일곱 시 무렵.

차를 대놓고 운전석에 앉은 내 귓가에, 마력으로 전달된 유해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세아 오늘 시험 다 90점 넘었을걸요? 진짜 선배님이 과외 안 해준 거 맞으시죠?]

“헷갈리니까 교수님이라고 해.”

[에이, 이건 학생 교수 사이가 아니라 보고하는 건데 정확하게 해야죠.]

“아무튼, 세아 점수가 그렇게 잘 나왔나? 나한텐 별말 안 하던데.”

저녁에 애를 태우고 귀가했다가 약속이 있다고 나온 참이었다. 괜히 부담만 주겠다 싶어 잘 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랑도 안 하고 부루퉁하지도 않길래 대충 60점쯤 받았나 싶었지.

나와 유해빈 사이의 의사를 전달해주던 서연희가 피식 웃으며 의견을 냈다.

“시험 끝나고 나서 말해주려는 거 아닐까?”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보스. 그때 가서 공개하는 게 임팩트가 있죠. 선배님 섭섭해하지 마시고요.]

차마 섭섭하지 않았다고는 못 해서 가만히 있으려니 유해빈이 말을 이었다.

[진유리도 뭐, 주의해야 할 변화가 있는 것 같진 않으니까 안심하시고…… 아, 이세아가 이건 말해줬어요?]

“또 뭔데.”

짚이는 게 없어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빠인 나한텐 말 안 하고 유해빈 쟤는 아는 사실이 여러 개라는 게 좀, 화가 난다.

[금요일에 이세아 진유리네 집에 밥 먹으러 간대요. 걔 설마 이거도 오빠한테 말 안 했나?]

“처음 듣는다…….”

[앗, 아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런 말이었다.

[진유리네 아빠랑 얘기가 됐다던데요? 이세아도 처음엔 뭔 소린가 하는 눈치던데 결론적으로는 알겠다고 했고요. 금요일에 시험 끝나면 그 집 가서 밥 먹을 건가 봐요.]

병원에 있을 때 오간 대화인 듯싶었다.

대명 그룹의 회장 진철민. 얕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나무랄 데 없는 인품이란 평판도 자자하다.

계산적인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말 세아한테 고마워서 권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그쯤 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유해빈에게 일렀다.

“그래, 수고했다.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 언제, 어디서요? 비싼 거도 상관없어요?]

“원하는 거 아무거나 말해. 요새 학교 매점에서 비싼 거 한 오천 원 하나?”

[아, 아…… 진짜 개오바-]

“농담이고, 의심 안 사게 볼 일 있으면 어디 좋은 데서 사줄 테니까 또 일 있으면 연락해.”

[네! 데이트 잘 하세요, 선배님! 보스도 파이팅!]

내가 뭐라 답하려던 찰나, 절묘하게 통신이 끊겼다. 조수석에 앉은 서연희가 기특하단 표정으로 일렀다.

“애가 싹싹하고, 난 해빈이 영입한 거 참 마음에 드는데, 도진이 너는?”

“저도 뭐, 괜찮아요. 기회만 있으면 슬금슬금 동네 아는 형처럼 대하려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애가 붙임성이 있으니까.”

“동네 아는 형? 글쎄…… 그건 아닐걸?”

서연희가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느낀다니까 그러네. 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고 나는 다시 차의 시동을 켰다.

“뭐 먹고 싶어요?”

지난번에 내가 미안한 행동을 했으니까.

오늘 식사를 대접하고, 오는 주말엔 날 잡고 시간을 비워서 답례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서연희가 무척 난감한 답을 되뇌었다.

“난 아무거나?”

“그냥 정해주면 안 돼요?”

“음, 그러면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긴 한데.”

“뭔데요?”

“너 먹고 싶은 거.”

“……나중에 싫다고 하지 마요.”

뜨끈한 국밥집으로 데려가면 어떨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애써 자제하고 둘이 분위기 있게 식사할 곳을 몇 군데 떠올렸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데가…….

바로 그때.

우우웅-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서상욱 교수.

“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아, 도진 군. 전화 괜찮은가? 잠깐이면 되는데.>

서연희가 괜찮다는 투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말씀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우리 방어 구성체 말일세. 외국에서도 화제인지 이런저런 데서 한국으로 올 거라지 뭔가. 나도 방금 정확히 소식을 들었네.>

“아,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거야 당연한 수순이니 놀랄 것도 없는데.

어째 목소리가 평온하지 못해 물은 것이었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이어서 설명했다.

<그쪽에서 방문할 인원 중에…… 36 영웅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더군. 최소한 한 명에, 많으면 세 명 이상 말일세.>

나는 그제야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 이거면 놀라지 않는 게 더 신기하지.

“누가 올지 확정이 나진 않은 거죠?”

<그쪽도 인원을 확정하려면 며칠 더 걸릴 거라고 하던데…… 기술 교류이니만큼 우리 쪽의 의견도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했네. 사실 나보단 자네가 판단할 적임자고 해서 급하게 연락했지.>

“아뇨,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은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아, 그래, 그래. 젊은 사람이 퇴근했는데 사람도 만나고 해야지. 잠정적인 리스트랑 단체 구성을 메일로 보내줄 테니 내일 출근 전에 확인만 한 번 부탁하겠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만하면 대화가 정리되었다 싶었는데, 문득 서상욱 교수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어험, 사적인 일이라 실례일지 모르겠는데…… 혹시 애인이랑 만나고 있나?>

“……네?”

순간적으로 반문하니 그가 허허 웃으며 일렀다.

<아니, 아닐세.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렇게만 들어도 알겠구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둔 모양인데 내일 학교에서 봄세.>

그리곤 전화가 뚝 끊겼고, 옆에서 다 듣고 있었을 서연희가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린다.

“연구원 개인 시간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네.”

“그러게요…….”

“자, 일 얘기는 마무리됐지?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가자. ……응?”

내가 반응이 없자 서연희가 눈을 깜빡인다. 나는 둘러대며 차를 몰아나갔다.

“아니에요, 뭐 먹을지 생각 좀 하느라고요.”

실제로도 고민하긴 했지. 다만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

<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14.2%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일요일부터 이틀 동안 진행률이 10%나 올랐다.

그간 세아와 진유리에게 있었을 이벤트는 중간고사가 사실상 전부일 테고, 변수를 폭넓게 고려해도 충당하기 어려운 상승이다.

그러니까…… 다른 시점이 있었겠지.

2권의 소제목은 ‘영웅의 제자들’.

서상욱 교수의 말에 따르면 36 영웅 중에 최소한 한 명이 한국으로 온다. 그자와 관련한 얘기가 지면으로 서술되었으리라.

그리고 <킬 더 이블> 2권에서 내가 달성해야 할 고유 퀘스트는…….

“좀 거리가 먼데 바다 가서 회나 먹고 올래요?”

“회? 난 좋은데…… 너 시간 괜찮겠어?”

“빨리 가면 여덟 시, 회 먹는 데 두 시간 잡고 열 시, 오는 데 한 시간 잡고 열한 시. 그 정도면 괜찮죠.”

“그래? 좋아, 가자.”

반색하는 서연희와 함께 나는 도로를 달렸다. 머리가 복잡한 건 사실이지만, 이 순간도 내게는 중요하니까.

***

같은 시각.

한태강은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보기 드문 체구인 그의 눈높이로 둘러봐도 도저히 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넓은 저택.

그곳의 대문이 열리더니 중년인 한 명이 나와 그를 안내했다.

“들어오시죠.”

안내자와 걸으며 한태강은 저택 안의 정경을 살폈다.

바위 하나, 풀 한 포기, 서까래 기둥 하나까지도 마력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부인에겐 철통같은 요새.

침입자에겐 피하기 어려운 죽음을 선사할 감옥.

복잡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수수한 목조 건물이 나타났고, 중년인이 그에게 일렀다.

“안에 계십니다.”

중년인이 자리를 뜬 다음 한태강은 목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공기가 무거웠다. 마력의 파장이, 손에 잡힐 듯이 짙었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긴히 여쭐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르신.”

끼익-

안쪽의 방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터억, 터억.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둔탁한 소리.

모습을 드러낸 건 앙상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한태강을 지긋이 응시하던 노인이 정갈한 어조로 묻는다.

“무슨 일로 여길 찾았나 했더니…… 자네 표정이 아주 볼만하구먼.”

말로 하는 것보단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한태강은 곧장 손을 떨쳤다.

촤아악-

붉은 빛무리가 허공을 마치 안개처럼 수놓았고,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현상을 아시겠습니까.”

“흐음…….”

노인이 침음했다.

36 영웅의 한 사람. 한태강이 자리한 이곳, 심가의 전대 가주인 심정웅.

그의 허허롭던 눈빛에, 별안간 불꽃 같은 열망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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