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46화 (46/207)

#46화. Chapter 11. 중간고사 (4)

면역체.

학술적인 정식 용어로는 ‘마력 자가면역반응 구성체’.

혹은 그러한 증상과 그걸 겪는 각성자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가면역이라는 명칭대로 그들은 체내 마력을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며, 당연히 일반적인 각성자들에겐 저주나 다름없는 증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력 감응력이 크게 저하돼 마법 속성을 원활히 다루지 못하게 된다.

마력 활용력이 크게 저하돼 마법 계통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출력과 회복력, 보유량의 성장세 등 마력과 관련한 모든 측면에서 다른 각성자들보다 대단히 불리한 출발선에 서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처음 마력을 각성할 당시부터, 사실상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증상이기에 이걸 치료한단 건 마력을 완전히 잃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각성자 스스로 자신이 면역체 보유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방법도 없고, 일반적인 각성자 대비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그 어떤 정밀검사로 살피더라도 단출하고 냉정한 결과만 전해 듣게 되겠지. ‘재능이 없다’라고.

그렇다면 면역체라는 증상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는가. 그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면역체 보유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할 만큼의 재능을 지닌 각성자들이 아주 드물게나마 존재했기에.

마력 효율이 떨어지는 정도에 그치면 알기 어렵지만, 매우 희박한 확률로 그걸 넘어설 때는 타인의 마력과 구성체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자신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이나 똑같이 외부의 마력으로 인식하니 상대적으로 간섭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방금 진유리의 흡수 구성체가 다른 아홉 명의 구성체를 모두 끌어당기려 한 것처럼.

그런 면역체는 족히 A급을 상회하니 ‘엿보는 눈’ 특성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고.

시전자로서도 의도적으로 발현하기는 힘든 천운.

그러나 천 년의 마학 역사에서 다른 면역체 보유자들이 우연한 사건을 통해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유리도 오늘 우연히 자신을 드러냈으며…….

그래서 나는 이 순간, 거의 전율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저주 같은 족쇄를 단 채로 진유리가 지난 수년간 보여준 성취가 눈부셨으니까.

대체 타고난 재능이 어느 정도였고, 얼마나 노력했기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물론 이 애는 앞으로도 영원히 재능이 부족할 거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데 있어 세아와 유해빈보다 훨씬 뒤떨어질 거다.

본래 백만 분의 일보다 희박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겠지만 면역체라는 족쇄에 짓눌려 고통받을 거고,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거두기도 어려울 거다.

하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씩 나아가면.

얘한텐 재능의 한계란 게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각성자 개개인이 타고나는 재능. 언제든 꺼내어 쓸 수 있는 체내의 마력이 아니라 다루기 까다로운 외부 마력을 운용하는 감각으로만 살아가야 하기에, 타고난 재능에 속박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강해질 수 있다.

여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면역체 보유자들은,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거나 만족해 멈추지 않았다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한 세대 최강을 논하는 뛰어난 각성자로 성장했다.

현시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면역체 보유자.

36 영웅의 한 사람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각성자 샬럿 테이트처럼.

진유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족쇄에 속박된 상태로 계속 안간힘을 쓴다면.

비록 느린 속도겠지만 진유리가 걸어갈 길엔 한계라는 결승선이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백만 분의 일을 넘어 천만 분의 일, 일억 분의 일을 지나 십억 분의 일까지.

노력에 대한 척박한 대가를 언제까지나 거머쥘 수 있게 될 거다.

……라는 논지의 이야기를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희망적인 표현으로 가다듬어, 오후 두 번째 실기시험을 마치고 연구실에 들른 진유리에게 일러줬다.

내게 설명을 맡긴 서상욱 교수는 벌써 퇴근한 터라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의 빛이 창문을 타고 어스름히 전해져오는 연구실엔 진유리와 나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내가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마시라고 건네준 녹차엔 입도 대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던 진유리는 그제야 짧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요약하면 그런 뜻이지.”

수업 때야 학생들 전원에게 말하는 거니까 원칙적으로 존댓말을 쓰지만 둘만 있을 때는 오히려 그게 어색해 나는 말투를 편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확신을 담아 이르자 진유리가 재차 물었다.

“힘든 건 당연했던 거고…… 그래도 노력하면 앞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앞으로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는데…… 그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란 거죠?”

“불가능한 거 아니야.”

“진짜 너무 힘들었는데, 도저히 안 되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었는데,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하니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되길래 계속 그렇게 했는데…… 앞으로도 힘든 거 꾹 참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는 거죠?”

“네가 원하면.”

묻는 말이 점점 길어짐에 따라 차분하던 목소리도 갈수록 흔들렸다. 그러나 눈이 새빨개져 있으면서도 진유리는 울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상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 내일 시험 과목 공부해야 해서……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도 될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도 돼.”

“네……. 감사합니다.”

한 번 더 공손히 인사한 진유리가 연구실을 나섰다.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한 것 같지만 마지막 목소리는 울음기가 섞여 나왔고, 정신이 없는지 문도 확실하게 못 닫고 나갔다.

이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조용한 복도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으흡…….”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울음을 참는 소리.

“크흥, 아흐윽, 에흑, 헥, 흐극!”

콧물을 킁, 하고 들이마시다가 숨이 모자랐는지 기침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꾹질까지 하는 소리.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차마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히잉, 우에에에엥’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전혀 웃기지 않고, 쟤도 어지간히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싶네.

“후우…….”

진유리와 내 몫의 컵 두 개를 씻어내며 나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했던 건지 알 수 없어서.

+

<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21.3%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월요일 밤부터 사흘간 상승한 진행률은 7%가량.

2권도 어느새 초반을 지났고, 세부적으론 마법역학 실기시험 전후부터 수치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2권의 태그인 [성장].

진유리가 면역체 보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한국으로 부른 유럽의 36 영웅 세 사람 중에 면역체 보유자이자 세계 최강의 마검사, 샬럿 테이트가 포함된 것.

본래 2권의 소제목이었던 ‘영웅의 제자’.

그 모든 게 애초에 연관된 것이었을까.

세아가 아니라 진유리가 주인공이었을까.

그녀가 샬럿 테이트의 제자가 될 예정이었고, 내가 2권 소제목을 ‘영웅의 제자들’로 바꿈으로써 변화가 생기게 된 걸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세아를 사건의 핵심으로 끌어들인 걸까.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세아가 주인공이고, 소제목을 바꿈으로써 진유리가 면역체 보유자라는 사실이 좀 더 일찍 밝혀진 것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능성.

나는 그중에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었고,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원칙이 여전히 내 안에 건재했다.

만약 내가 만인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면.

그때 나와 맞설 주인공은 내 동생 세아가 아니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진유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공개적으로든 암중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가진 능력도, 명성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부디 그녀가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영웅으로 성장해나가면 좋겠다고, 나는 이기적으로 바랐다.

***

쏴아아-

세면대 아래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진유리는 시선을 돌려 거울을 응시했다.

새빨개진 눈이 어느새 퉁퉁 부어 있었고, 오늘 화장을 하고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려 귀신 같은 몰골이 되었다면 더 창피했을 테니까.

‘……울기 전에 연구실 나왔는데 그건 아닌가?’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린 진유리는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학생들도 교직원들도 보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울어도 될 테고 마침 다시 울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꾹 참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우우웅-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켜서 보니 제타 앱의 알림이 와 있었다.

-

글쓴이: 익명 (글쓴이)

날짜: 4/22 18:34

제목: 노력충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재능충?!

내용: 유리멘탈 드디어 밑천 다 털렸나 했는데 역전 만리런 뭐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익명 1: 야 재능충은 아니지 ㅡㅡ

└익명 2: ㄹㅇㅋㅋ 면역체 보유자면 걍 개고생 확정인데; 레벨 제한 없어지는 대신 경험치 1/10만 받는 수준일걸

-익명 3: 근데 유리멘탈 지금까지 꾸역꾸역 전교 2등 유지한 것도 신기하네... 진짜 어케 한 거임??

-

‘유리’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글이 게재되면 자동으로 알림이 울리게 설정해놓아 보게 된 글.

진유리는 댓글로 제기된 의문에 자조적으로 일렀다.

‘……어떻게 했긴.’

그냥, 죽어라 열심히 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졸리고 지칠 때마다 스스로 뺨을 때려가며 열심히 했다.

단지 그뿐이다.

지나온 나날을 되새기며 진유리는 발걸음을 이어나갔고, 운동장을 거의 지나쳤을 때쯤엔 조금쯤 평정을 회복한 상태였다.

‘일단, 내일 시험부터 다 치고 생각하자.’

면역체 보유자니 뭐니 재능이 있느니 없느니 당장 해야 할 일과 거리가 먼 것들은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둬야겠지.

제일중 시절부터 이어져 온 16연속 필기 1등 기록을 17로 늘리는 게 급선무였다.

각오를 다잡으며 진유리는 교문을 나섰고, 한 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세아……?’

지루해하는 듯한 표정. 이세아와 진유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

“…….”

둘은 어떤 인사도 없이 서로 못 본 척했다.

‘청춘 드라마도 아니고.’

면역체 보유자란 게 밝혀져서 축하한다느니, 힘내라느니, 너한테 경쟁의식을 느껴왔고 이제부터도 지지 않겠다느니,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다.

진유리는 그저 마음속으로 다시금 다짐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배우는 게 어려워질수록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그런데도 여태껏 한 것처럼 해나갈 생각이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그러면 된다고 했으니까…….’

자연스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도진. 이세아의 오빠, 더불어서 마법역학 교수.

오늘 면역체를 발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사람.

그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증해줬다.

마주치면 무서운 사람이지만 안목은 확실할 테니 안심하고 믿으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

진유리는 문득, 이젠 이도진을 생각해도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되짚어 보니 연구실에서도 그랬다. 이도진과 단둘이 있었는데. 꽤 오래 대화를 나눴는데.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는지 심장은 조금 세게 뛰었던 것 같지만.

그리고 이젠 이도진이 무섭지 않은데도, 자꾸 생각이 나는 건 그대로다. 계속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뭐…… 나쁘진 않아.’

실기시험에서 단순한 족쇄 이상의 힘을 발휘했던 면역체. 진유리는 그걸 의지대로 꺼낼 수 없다. 영국의 영웅 샬럿 테이트는 아예 그 힘을 자신의 특기로까지 활용한다지만 그녀에겐 지나치게 먼 얘기.

‘그러니까…….’

그 계기가 되어줬던 이도진을 자꾸 떠올리는 건 면역체 훈련을 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곱씹어볼수록 괜찮은 생각 같았다.

부쩍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진유리는 줄곧 이도진을 생각했다.

상냥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 수 있다고 응원해준 그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이젠 무섭지 않았고, 그러나 너무도 인상적인 사람이라는 건 예전과 같았고, 그래서 진유리 자신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도진을 생각하며 그녀는 살며시 웃고 있었다.

***

4월 23일 금요일.

학교에 출근하지 않은 나는 서상욱 교수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방문할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

도착 예정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우…… 제법 긴장이 되는구먼.”

몸을 부르르 떨던 서상욱 교수가 내게 물었다.

“도진 군, 자네는 한 번씩 뵌 적이 있나?”

“네. 이래저래 한 번씩은, 만나 뵌 것 같습니다.”

그즈음 공항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자들이 쉼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집단 수십 명이, 공항 입국장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선두에 서 있는 세 사람.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여성.

영국의 영웅, 샬럿 테이트.

그녀보단 약간 나이가 많이 보이는 흑발의 남성.

프랑스의 영웅, 아르노 뒤레.

50대를 훌쩍 넘긴 듯한 초로의 남성.

러시아의 영웅, 안드레이 일린.

저들 가운데 한 명 있다.

내가 죽여야 할, 확인된 일곱 명의 배신자 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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