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Chapter 12. 희생 (1)
올해 2월까지 36 영웅은 정확히 절반, 18인이 생존해 있었다.
한국이 다섯 명.
심정웅, 한태강, 윤의성, 염의준, 서연희.
유럽이 셋.
안드레이 일린, 아르노 뒤레, 샬럿 테이트.
중국과 일본이 하나씩.
북미와 중남미가 다섯.
그 외의 나라들에서 셋.
그렇게 열여덟 명이며 홀로그램을 통해서 알아낸 배신자의 수는 일곱이었다.
이름을 아는 건 염의준을 포함해 한국의 배신자 둘과 미국의 한 놈으로 셋.
배신한 동기와 정황까지 상세히 파악한 건 염의준 하나.
그리고 세아가 개학한 3월 초.
나는 염의준을 죽여 마침내 첫 번째 복수를 이루어냈다.
생존한 영웅은 17인으로 줄었고, 확인된 배신자 중에서 살아있는 놈들도 여섯으로 줄었다.
한국 1/4
북미와 중남미 2/5
중국과 일본 1/2
유럽 1/3
그 외의 나라들 1/3
물론 여섯 명 말고 더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 명쯤 남았을 수도 있다.
나야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솔직히 지금으로선 승산이 절반 이하라고 봐야겠지. 팬텀의 전력을 상정한다 해도.
그리고 확인된 배신자 여섯 중 한 명, 유럽의 영웅을 살해하는 건…… 현재 내 힘으론 지극히 까다로운 임무가 될 터였다.
간단한 이유다. 그들 셋 다 엄청나게 강하니까.
36 영웅을 기준으로 해도 중위권 이상이라 평가될 만큼, 아주 강하니까.
먼저 프랑스의 아르노 뒤레.
그는 전투 능력에 중점을 두고 단련한 마법사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조건, 충분히 준비된 영역 내라면 능히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자다.
두 번째로 러시아의 안드레이 일린.
간단한 수식어 하나로 그를 설명할 수 있다. ‘유럽의 한태강’이라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샬럿 테이트.
훤칠한 키, 근육이 탄탄하게 붙은 체형, 본래 나이보다 십 년 이상 젊어 보이는 데다 생생한 활력이 감도는 얼굴 생김새.
겉보기엔 활달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성인 여성으로만 보이며 실제 성격도 외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저들 세 명 중에서 그녀가 가장 위험하다고. 가장 강하다고.
이십여 년 전, 샬럿 테이트는 서른여섯 명의 영웅 중 가장 약했다. 36 영웅이 아니었으나 그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지닌 S급 헌터들도 있었다.
나이도 가장 어린 축이었고, 당시의 그녀는 전성기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성장 가능성과 면역체 보유자라는 상징성. 그 두 가지 요소가 크게 작용했기에 36 영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다른 영웅들은 반수 이상이 쇠락했다.
노화, 훈련 부족, 실전 부족, 재능의 한계. 다양한 이유로 <세계의 수호자> 작중 시점보다 명백히 약해졌다.
샬럿 테이트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녀는 늙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나마 아직 육체적인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의 훈련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전 경험을 더욱 쌓아나갔다.
영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균열은 원칙적으로 샬럿 테이트에게 보고되며, 자신의 실전 감각을 가다듬어줄 수 있는 수준의 균열이라면 그녀는 거의 무조건 참여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녀에게는 재능의 한계라는 게 존재치 않는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면역체 보유자로서, 그녀의 성장은 끝을 모른다.
면역체라는 속박조차 뛰어넘어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는, 자기 자신이 끝없이 강해지는 것에 중독됐다.
저기서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내 쪽으로 걸어오는 저 여자는, 갖은 노력 끝에 면역체의 저주를 이겨냈으나, 또한 마력이라는 힘 그 자체에 미쳐버렸다.
그래서, 다른 걸 다 포기하고서라도 단 한 걸음을 내디디고 싶어 한다. 부디 어제보다 조금 더 강해질 수 있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면역체 보유자.
아마도, 역사상 가장 강한 면역체 보유자.
세계 최강의 마검사, ‘소드 퀸’ 샬럿 테이트.
필시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강할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많이 컸네…….”
포옹을 풀고 나를 찬찬히 뜯어보던 그녀가 그리움처럼 중얼거린 말. 뒤따라온 아르노 뒤레가 급히 끼어들었다.
“로티, 너만 반가운 게 아니니 그만 붙잡고 저리 비켜. 계속 들러붙어 있으면 내가 통역마법을 끄고 싶어질지도 몰라.”
아르노 뒤레의 핀잔에 이어 안드레이 일린도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정말 몰라보겠군. 하긴, 벌써 십 년이 지났는데 당연한 건가…….”
아르노 뒤레의 마법 덕분에 의사소통에 불편함을 겪을 일은 없었다. 서상욱 교수와도 한 명씩 인사를 나눈 다음, 우리 다섯 일행은 공항을 빠져나와 제법 덩치가 큰 SUV에 올라탔다. 자주 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차고, 운전할 사람도 나였다.
조수석에는 서상욱 교수, 2열엔 샬럿 테이트와 아르노 뒤레가 탔고, 3열엔 안드레이 일린.
“다른 분들은요?”
시동을 걸기에 앞서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술 교류를 위해 한국에 온 건 36 영웅 세 사람만이 아니니까. 내로라하는 각성자와 연구진이 그들을 수행했고, 입국장에서 보니 내가 아는 얼굴도 몇 명 있었는데.
“여럿이 몰려다니면 번잡하니까. 따로 가면 돼.”
내 질문에 시원스럽게 답한 샬럿 테이트가 재차 나를 응시하며 아련한 미소를 짓는다.
시선은 내게로 향해 있으나 그녀가 보는 건 내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흔적을, 내 얼굴에서 찾아내고 있겠지.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제안했다.
“그럼 출발할까?”
“연구소부터 들를까요?”
이 정도 거물들이면 국빈 대접을 받으며 이런저런 일정에 참석해야겠지만 역설적으로 36 영웅쯤 되는 거물들이기에 허례허식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환영 행사, 기자회견, 정부 최고위 인사들과 만찬 등의 모든 절차를 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가까이 둘 사람이라고 해본들 나와 서상욱 교수 정도겠지. 사적으로야 국내의 다른 36 영웅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고 내가 그들에게 소개해줄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현시점에선 방어 구성체의 기술 교류 외에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래서 곧장 연구소로 향하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샬럿 테이트가 무척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천만에. 그 전에 들러야 할 곳부터 간 다음에.”
다른 두 사람도 눈짓으로 동의했고, 내게 갈 곳을 일러줬다.
그들이 제일 먼저 가야 한다는 곳. 그건 내 부모님의 추모 광장이었다.
“……감사합니다.”
짧게 전한 나는 차를 몰아나가며 ‘감사’란 감정을 마음 한구석에 미뤄뒀다.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에. 그리곤 최소한 한 명분 이상의 증오를 다시금 되새겼다.
뻔뻔하게 연기하고 있을 한 놈, 혹은 둘이나 셋 전부. 마땅한 때가 오면 반드시 단죄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오후 네 시쯤 남산공원의 추모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방문한 사람들이 제법 보였고, 몇몇은 우리를 알아본 듯했으나 말을 걸진 않았다.
부모님의 동상 앞에서, 나와 세 영웅, 서상욱 교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침묵 속에서 각자 마음으로 건네는 말이 끝나고, 샬럿 테이트가 내게 물었다.
“여긴 자주 오니?”
“아뇨, 부끄럽게도 4월에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름대로 바쁘기도 했고 조만간 올 생각이긴 했지만 그런 건 변명거리가 못 된다.
자주 못 온 거 죄송해요. 배신자를 달고 온 것도, 그거도 죄송해요.
내가 그런 말들을 되뇌고 있는데 아르노 뒤레와 안드레이 일린이 넋두리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때’는 재밌었지……. 그렇지 않습니까?”
“재밌다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닌 듯하지만, 그리운 건 나도 마찬가지군.”
“아,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이건 나밖에 모르는 일일 텐데, 리와 세브가 크게 싸워서 한동안 서로 본척만척했을 때 있잖나. 실은 그때 내가 아주 적절한 조언을 해줬지. 옆에서 보고 있으려니 마실 것 없이 감자만 목구멍에 욱여넣은 것처럼 가슴이 갑갑하더라고. 어차피 화해할 거면서.”
멀찍이 서서 듣고만 있던 서상욱 교수가 내게 귀띔으로 물었다.
“리와 세브가 누군가? 맥락상으로 듣기엔…….”
“제 부모님 부르는 거 맞습니다.”
‘이시혁’이 발음하기 어렵다고 성만 떼서 ‘리.’
‘정세빈’은 성도 이름도 둘 다 낯설다고 세빈을 바꿔서 ‘세브’.
사교적인 성격의 아르노 뒤레는 36 영웅 모두에게 별칭을 지어줬다. 본인 외에는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세 영웅이 뜻밖에 옛날이야기로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도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서상욱 교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말하자면 숨겨진 사료에 귀를 쫑긋 세우면서도 영웅 세 명과 나란히 대화하고 있는 나를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본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뎅, 데엥-
종이 다섯 번 울렸다.
오후 다섯 시가 됐음을 알리는 종소리.
우리는 동상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리, 세브. 다음에 또 보자고.”
입 밖으로 인사를 꺼낸 건 아르노 뒤레뿐이었다.
나를 비롯한 다른 네 명은 각자 마음으로 작별을 전했고, 광장을 빠져나가던 중에 샬럿 테이트가 물었다.
“동생은 학교에 갔지?”
“네, 오늘 시험이라 끝나고 친구 집에 놀러 간다네요.”
“그래? 그 앤 옛날에 정말 귀엽고 어렸는데. 귀국하기 전에 얼굴을 봤으면 좋겠네.”
“지금도 어리고 귀엽죠. 한 번 기회가 있으면 데리고 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일러두고 화제를 돌렸다.
세아와 진유리가 이자들을 만나서 제자가 되는 건 확정적으로 벌어질 일이겠지만…… 그래도 당장 만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비록 피하기 어려운 일이라 해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며칠 추이를 지켜봐도 늦지 않을 거야.
한데 바로 그때.
띠링-
홀로그램이 내 판단을 부정했다. 오늘 밤까지 행동에 나서는 걸 추천한다고.
+
<킬 더 이블> 2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4월 23일 오후 9시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와 이세아, ‘소드 퀸’ 샬럿 테이트, ‘몽상가’ 아르노 뒤레,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까지 총원 5인을 한 자리로 불러모을 것
-클리어 보상: <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세부조정 권한
+
샬럿 테이트만이 아니라 다른 두 영웅까지 다섯 사람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걸까.
게다가 여태 본 적 없는 종류의 보상이기도 했다.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세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라…….
어쩌면 2권 소제목을 바꾼 게 영향을 준 걸지도 모르겠네.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플롯을 이끌어나가 보라고, 홀로그램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왕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여기서 발을 빼는 것도 썩 내키지 않기에, 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 샬럿.”
“왜?”
“제가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제 굉장히 특별한 일을 겪었거든요. 특히 샬럿이 들으시면 관심이 생길 것 같은데…… 가면서 자세히 얘기해 드릴까요?”
이 시점에서 내가 어떤 말을 꺼낼지 눈치챈 건 서상욱 교수 정도겠지.
그가, 나를 흐뭇해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같은 시각.
홀로 적진에 걸어 들어간 이세아는 외로운 분투를 펼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