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Chapter 12. 희생 (3)
***
4월 23일 금요일, 오후 일곱 시 무렵.
서상욱 교수의 개인 연구소 내부 휴게실에서 나는 샬럿 테이트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두 영웅과 서상욱 교수는 따로 논의할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고, 그녀와 내가 마주 앉은 탁자 위에는 자그마한 마력 구성체가 둥둥 떠올라 있다.
내가 이번 달 초에 발표한 연구. C급 이하 마법에 통용되는 범용적 방어 구성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냈을까…….”
벌써 몇 번은 들은 감탄을 다시금 되뇐 샬럿 테이트에게, 나는 여러 번 했던 대답을 이번에도 되돌려줬다.
“제 어머니의 이론을 실제로 구체화했을 뿐입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
“발상으로는 마력이 없는 사람도 자기가 각성자가 돼서 1급 마법사까지 올라갈 거로 생각할 수 있어. 이건 네가 해낸 결과니까 그걸 부정하진 마. 연구자가 지나치게 겸손하면 이거 하나 보겠다고 한국까지 날아온 우리가 뭐가 되겠어?”
그러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나, 서상욱 교수, 샬럿 테이트, 안드레이 일린, 아르노 뒤레. 우리 다섯 명이 연구소에 도착한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넘었고, 연구를 살핀 영웅 세 사람이 입을 모아 확언했다.
이 방어 구성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혁명적인 발견이라고. 자신들이 머나먼 나라까지 찾아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확신을 얻었다.
내가 이 방어 구성체에 숨겨둔 함정. 그건 나 자신이 공개하지 않는 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거다.
A급 특성 ‘엿보는 눈’으로 C급 이하에 통용되는 방어 구성체에 설치한 함정이니까. 제아무리 경지가 높은 마법사라 해도 구조상 완벽한 이 구성체를 의심하진 않으리라.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술 교류를 위해 방문했다곤 하나 그들과 딱히 논의할 거리도 없었다.
방어 구성체를 전 세계에 보급하겠다고 이미 선언했으니까. 유럽이 다른 대륙보다 미세하게 일찍 도입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기 위한 준비는 36 영웅들이 아니라 그들이 이끌고 온 일행들이 해주겠지. 서상욱 교수가 남자 둘을 데리고 간 것도 사업과 관련한 이유가 아니라 자기 연구를 36 영웅의 시선으로 평가받을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오늘 단단히 들뜬 것 같던데.
다만 샬럿 테이트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는 데다 나와 조금 더 나눌 이야기가 있어 이곳에 남게 됐고.
그녀가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리로 불렀다는 애 이름이 진유리랬지?”
“진유리 맞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등생인데, 그 애가 면역체 보유자일 확률이 굉장히 높아요.”
“뭐, 직접 보면 알겠지. 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도 다시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 애가 면역체 보유자라는 걸 확인해 주세요. 어느 정도 재능인지 알아봐 주시고. 조언도 몇 마디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게 단가?”
짧게 반문한 샬럿 테이트가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나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일단은 그 애를 한 번 봐주시는 것만 부탁드릴게요. 샬럿이 흥미가 생기시면, 다음은 부탁이 아니라 거래를 제안하고 싶거든요.”
“나야 네 동생, 세아도 십 년 만에 볼 수 있으니 상관은 없어. 그 진유리라는 애랑 네 동생이 라이벌이라고 했나?”
“네, 뭐…… 요즘은 그나마 가까워진 것 같은데, 친구라기보단 라이벌이죠.”
한데 그때.
피식 웃은 그녀가 왠지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내가 왜 네 동생도 같이 오라고 한 줄 알겠어?”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단순히 그 애를 보고 싶어서 부른 것만은 아닌 듯하고 유리와 연관이 있겠다 싶네요.”
“두고 보면 알 거야.”
그녀도 그쯤에서 말을 아꼈고, 문득 유리창 너머에서 차량이 진입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간 부산한 소음이 일더니 이내 여섯 명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구에서 만나서 이리로 데려왔다네.”
서상욱 교수의 설명.
아르노 뒤레와 안드레이 일린은 흥미로워하는 눈길로 나머지 셋을 응시하고 있다.
“…….”
조용히 눈을 깜빡이다 샬럿 테이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세아.
“구, 굿 이브닝!”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인 발음으로 인사를 건넨 진유리와 침중한 기색인 진철민.
나와 샬럿 테이트까지 여덟 명이 모였고,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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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4월 23일 오후 9시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와 이세아, ‘소드 퀸’ 샬럿 테이트, ‘몽상가’ 아르노 뒤레,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까지 총원 5인을 한 자리로 불러모을 것
-클리어 보상: <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세부조정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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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쉬운 퀘스트. 그러나 보상은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홀로그램이 아무 이유 없이 선심을 베풀었다는 건 너무 낙관적인 판단이겠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샬럿 테이트가 진유리와 세아에게 다가갔다.
“통역마법이 있으니까 한국어로 편하게 말해. 세아는 날 기억하나?”
“……네.”
애 표정을 보아하니 기억 잘 안 나는 것 같은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눈길로 세아를 내려다본 샬럿 테이트가 진유리 쪽으로 시선을 뒀다.
“네가 면역체를 가지고 있다고?”
“예, 예스. 아니, 네……!”
잔뜩 긴장한 듯한 진유리가 새된 목소리로 답하며 나를 흘끗 쳐다본다. 나는 옅게 미소만 지었고, 샬럿 테이트가 일렀다.
“여기서 알아보긴 좀 그러니까 넓은 데로 갈까?”
“마법 실험실이 꽤 넓고 충격에도 튼튼하니 그쪽으로 가시죠. 안내하리다.”
“아뇨. 나랑 세아, 유리, 도진까지 네 사람만 갈 거예요. 사람이 많으면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어서.”
36 영웅도, 마법역학 권위자인 서상욱도, 진유리의 아버지인 진철민도 따라오지 말라고 권고한 샬럿 테이트가 먼저 문을 빠져나갔다.
마법 실험실 위치는 내가 알고 있었다. 다른 세 명과 복도를 걸으며 나는 긴장도 풀어줄 겸 대화를 풀어나갔다.
“많이 놀랐지?”
세아보다는 진유리 쪽에 더 비중을 두고 건넨 질문. 그녀가 떠듬떠듬 말을 흘려냈다.
“네…… 엄청, 놀랐어요.”
“긴장하지 말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니까 하시는 말씀 잘 들어서 네가 걸어갈 길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즈음 우리는 마법 실험실에 다다랐다. 어둑한 공간에 불을 켜고, 한가운데 공간에 샬럿 테이트와 진유리가 마주 섰다. 몇 초의 침묵. 그리고 샬럿 테이트가 대뜸 일렀다.
“나도 네가 면역체 보유자인지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어. 그래도 네가 그 힘을 가지고 있다면 끌어내기 편한 방법 정도는 알려줄게.”
뒤이은 설명은 논리적이라면 논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면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였다.
“면역체 보유자는 체내 마력을 외부의 것인 양 인지하게 된다. 그건 알지?”
“네.”
“그래서 마력을 통제하기 어렵고 면역체를 활성화하기는 더더욱 어렵지.”
활성화는 그걸 말하는 걸 텐데. 진유리가 마법역학 실기시험에서 발현한 구성체.
외부 마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면역체 보유자들에겐 발동 확률이 낮은 필살기 같은 힘이다.
살럿 테이트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걸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각성자였고.
“어제 활성화에 성공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지?”
“…….”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렴. 아니면 도와주지 못하니까.”
“…….”
진유리가 나와 세아를 번갈아 본다. 망설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다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기 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가 안 좋아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대로 보여주자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인 샬럿 테이트가 나직이 일렀다.
“경쟁의식, 신경 쓰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 네 트리거는 그런 것들인가 보네. 그때를 떠올려서 면역체를 활성화해봐. 한 시간 줄게.”
이어서 샬럿 테이트가 부연했다. 면역체를 활성화하는 체계적인 방법 따윈 없다고. 저마다 트리거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타인이 도와주긴 어려운 영역이란다.
“보유자에게 그 감정을 유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도 말로 조언해주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처음 활성화했을 때 도진, 세아, 너희 둘이 있었다고 해서 여기로 같이 오게 한 건데…… 정답이었나 보네.”
나와 세아에게 일러준 샬럿 테이트가 저 반대편을 쳐다봤다. 벌써 십 분째 혼자 끙끙거리며 뭔가를 해보려 하던 진유리가 평소 모습과 상당히 괴리가 있는, 흡사 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하기야 몹시 막막한 심정일 건 충분히 이해된다.
마력을 각성하고 오래도록 꺼내지 못했던 힘인데. 의식해서 발현하는 건 한 시간은커녕 하루로도 힘든 일이겠지.
“흐읏, 으읍-!”
펑!
진유리가 신음처럼 기합성을 낸 직후, 허공에 불그스름한 구체가 나타났다. ‘엿보는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평범한 구성체. 유심히 지켜보던 샬럿 테이트가 나와 세아에게 일렀다.
“가서 도와주고 올래?”
“어떻게 말씀이세요?”
“구체적인 방법은 나도 모르지. 어제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그 비슷하게 분위기를 만들어봐.”
단출한 조언에 나와 세아는 진유리 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왜 와? 아…… 교수님한테 드린 말씀은 아니에요.”
“…….”
세아가 살짝 눈을 흘겼고, 나는 진유리에게 설명했다. 어제랑 비슷한 상황을 만들면 도움이 될 거라길래 왔다고.
“어제랑 비슷한 상황이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진유리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머뭇머뭇하며 세아에게 말했다.
“너 나한테…… 욕 같은 거, 해줄 수 있어?”
“……?”
“응?”
세아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진유리가 빨개진 얼굴로 말을 주워섬겼다.
“진짜 심한 욕 말고, 나쁜 말 같은 거. 무시하고, 비웃고. 그런 느낌으로.”
“…….”
멀뚱멀뚱 쳐다보던 세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곤 전혀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너 그거밖에 못 해?”
본인이 시켜서 듣는 말인데도 타격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인지 진유리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더 심하게.”
“이번에, 내가 너보다 시험 잘 친 것 같아. ……앞으로도 그럴 거 같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계속 내가 이길 거야.”
저거 시켜서 하는 말 맞나? 진심이 아예 안 담겨 있다고는 못 할 것 같은데…….
과연 처음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적당히 되는 대로 한 말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사실에 입각한 발언이었으니까.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진유리가 재차 청했다.
“다른 거도, 나한테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 있으면 해봐. 나중에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난 잘 모르겠는데…… 애들이 내가 너보다 훨씬 예쁘대.”
“또.”
“지나가다가 들었는데…… 너한테 안 좋은 얘기 하는 애들, 좀 있어.”
“……또.”
“너 들어가고 싶어 하는 길드 세 곳, 중학교 때 나한테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무조건 와달라고 연락 온 적 있어. ……내가 너보다 성적 더 낮은데.”
“…….”
“요즘도, 가끔 연락 와.”
“…………또.”
“필기시험 공부해보니까……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어. 너 공부하는 시간 절반도 안 했을 건데.”
“거짓말하지……! ……가 아니라, 또.”
깊이 생각하길 포기했는지 무표정하게 되뇌는 세아와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는 진유리. 이게 대체 무슨 촌극인지 더 보고 있기 힘들어 내가 끼어들었다.
“난 도와줄 일 없고?”
정신적 충격이 무척 커 보이는 진유리가 힘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그냥…… 잘할 수 있다는 말만 해주세요.”
“힘내,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진심을 담아서, ……부드럽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리야, 할 수 있어.”
“아…… 네, ……고맙습니다.”
나로선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이른 말이 민망했는지 진유리가 작게 몸을 꼬았고, 그쯤부터 세아의 단어 선택이 조금 더 격해졌다.
“필기도, 실기도, 이제부터 내가 더 잘할 거야. 넌 일반 과목 점수만 1등 하면 돼. ……졸업하고 하나도 쓸 일 없는 그거만.”
여전히 무표정하고 어조도 단조로웠지만 그런데도 문장이 격해서 더 으스스했다. 진유리의 분노도 얼추 임계점에 다다른 듯싶었고, 세아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넌, 앞으로 평생…… 내 밑이야.”
이건 좀 심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진유리가 폭발했다.
“이, 이익……! 조용히 안 해!?”
“잘할 수 있어, 파이팅.”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가 이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발현됐다.
슈아아아아-!
진유리가 구현한 흡수 계통의 구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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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A)
: 측정 불가능한 구성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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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실험실 허공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다. 흡수라는 계통 그 이상의 위력. 대기 중의 마력까지도 흡수하고자.
“아…….”
자신이 만들어낸 구성체를 진유리가 멍한 눈으로 올려다봤고, 멀찍이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손뼉을 치며 다가온 샬럿 테이트가 진유리에게 이른다.
“17분 43초. 난 두 번째 활성화에 성공하는 데까지 23분이 넘게 걸렸어.”
“아, 운이 좋아서…….”
샬럿 테이트가 차분히 부정했다.
“면역체 보유자에게 운 같은 건 없어. 재능과 노력이 있을 뿐이지.”
“네…….”
“진유리라고 했지? 내가 보증할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 넌 이곳까지 이를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샬럿 테이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차갑게 느껴진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나는 한 걸음 나섰다.
“샬럿, 아까 말했던 제안을 지금 드리고 싶네요.”
진유리, 세아, 샬럿 테이트.
세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나는 본론을 일렀다.
“유리의 재능을 높이 보셨다면, 샬럿이 이 애를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최소한 한국에 계신 동안. 가능하다면 이후로도.”
그럴 줄 알았단 것처럼 웃은 샬럿 테이트가 떠보듯이 답한다.
“거래니까 나한테 줄 대가도 준비했을 것 같은데…… 뭔지 알려주면 생각은 해볼 수도 있겠네.”
“이번 방어 구성체 외에 향후 제가 진행할 마학 연구들. 샬럿이 이 애를 도와주는 한, 저도 샬럿을 도와줄게요.”
내가 내밀 수 있는 최선의 카드.
진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