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50화 (50/207)

#50화. Chapter 12. 희생 (4)

***

아마 자신은 지금 무척이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진유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걸 자각하면서도, 벌어진 입을 쉬이 다물 수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샬럿 테이트와 대화하며 이도진이 건넨 제안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제안받은 당사자인 샬럿 테이트도 침착한 듯하나 한편으로는 당황스럽단 심경을 내비치며 반문했다.

“내가 이 애를 가르쳐주는 한 네 연구의 결과물을 나한테 공개하겠다. 내가 듣기에는 이런 뜻 같은데, 제대로 이해한 건가?”

“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

몇 초의 침묵. 이윽고 샬럿 테이트가 흘려보내듯이 말했다.

“뭐랄까, 조금 뜻밖이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굉장히 놀랍고.”

진유리도 백 번 천 번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제일고 연구교수로 임용돼 고작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진행한 연구로 마학 역사에까지 남을 성과를 거둔 사람이 이도진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마주치는 터라 실감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는 듯하나 아버지인 진철민에게 여러 차례 들은 말이 있는 진유리는 다르다. 현재 이도진에 대한 마학계의 평가가 어느 정돈지, 그가 얼마나 많이 주목받고 있는지 명확하게 안다.

수호자 이시혁과 대마법사 정세빈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 단 한 편의 논문에서 드러난 재능만으로도 향후 이십 년 안엔 그만한 천재가 나오기 힘들 거라는 극찬을 듣는 인재였다.

그에게 제일고 연구교수는 단지 커리어를 시작하며 잠시 발을 담근 자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겠지.

길어봐야 이 년이나 삼 년.

그보다 짧으면, 어쩌면 이번 학기가 끝나자마자.

이도진은 자신의 재능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가리라.

‘분명히 그럴 거라고 들었는데…….’

한데 그 이도진이, 자신이 미래에 이룩해나갈 성과를 샬럿 테이트에게 제공하겠단다. 그리 하는 동안엔 진유리를 가르쳐달라고.

자신은 이득 볼 일이 없다 해도 무방한데. 오로지 일주일에 두 번 가르치는 학생일 뿐인 그녀를 위해서.

“교수님, 잠깐만요!”

진유리는 황급히 이도진을 불렀다. 이건 교수가 학생에게 베푸는 지원이나 여동생의 학교 아는 애한테 해줄 수 있는 도움을 한참 넘어선 수준이다.

은혜라는 말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겠지. 진유리가 생각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희생.’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잡아 만난 지 두 달도 안 된 타인을 도우려는 것이다. 진유리는 그가 자신을 위해 터무니없는 대가를 감당하길 원치 않았고, 그래서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줄 때 받아.”

하지만 이도진은 어디까지나 평온한 기색이었다.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살럿 테이트에게 부연한다.

“현시점에서 단언하긴 어렵지만 이번 방어 구성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연구를 일 년에 두 개는 발표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겠고, 아예 조건을 세부적으로 정해도 괜찮겠죠. 유리가 졸업할 때까지 한 달에 열흘 이상씩, 샬럿이 한국에 방문해 유리를 가르쳐주면…… 제가 연구한 결과물을 가장 먼저 받아 활용할 수 있는 건 샬럿이 될 겁니다.”

“방어 구성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그걸 일 년에 두 개?”

“네. 졸업 때까지니까 이 년이고, 네 개는 무조건 약속드리겠습니다. 지금 구상하고 있는 것만 해도 그보단 많거든요.”

너스레를 떨며 이른 말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으나 진유리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희생도 어느 정도껏 해야 할 게 아닌가. 놀라거나 경악스럽다는 감정도 안 들고 그저 황당한 심경에 가까웠다.

‘이걸…… 어떻게 갚으라고.’

저쪽은 자기 자신을 대가로 내세웠다. 그렇다면, 그녀도 자기 자신을 그에게 내어놓아야 하는 걸까. 그러면 갚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내어놓는다 해도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자신이 무엇으로 그를 도울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다. 곁에서 쭉 지켜보면…… 그러면 언젠가는 알 수 있을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일까. 해주고자 하는 그녀 자신 또한 바라는 일일까. 그러면 좋겠는데.

그녀가 상념을 이어나가는 동안 이도진과 샬럿 테이트는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좋아, 다른 두 명은 모르겠지만 난 5월 말까지는 남을게. 그다음부턴 한 달에 최소한 열흘은 한국에 와서 유리를 가르쳐주고, 넌 그때마다 진행하고 있는 연구를 나한테 보여주는 거로. 학교 방학 땐 가끔 영국으로 부를 수도 있어.”

“어때? 괜찮아?”

이도진이 진유리의 의향을 물었다. 괜찮고 안 괜찮고를 떠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의아할 정도였던 그녀는 겨우 답했다.

“네,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교수님. 샬럿 님.”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 제자 같은 걸 둔 적은 없지만…… 그쪽이 더 느낌이 살잖아?”

“네…… 선생님.”

‘소드 퀸’ 샬럿 테이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법역학 실기시험, 아니, 그에 앞서 이번 학기에 이도진을 만난 일.

진유리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자신은 어쩐지 많이 다른 것 같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더 많이 달라질 것 같다고, 그런 확신 같은 예감을 가슴에 품었다.

쿵, 쿵.

다시금 심장이 뛴다. 열이 훅 올라서인지 자꾸만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몸 안쪽이 꾹 죄여오는 듯하고, 정체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참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진 건 바로 그때였다.

“…….”

아무 말도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세아가 보낸 시선. 평소에도 감정이 적게 담긴 눈이었고 지금도 그랬지만…… 왠지 모르게 그 시선을 맞받지 못하고 진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시선이 거두어졌고, 그녀는 잠깐의 틈을 노려서 흘끗 이세아를 쳐다봤다. 이번엔 이도진을 올려다보고 있다.

진유리 혼자만 샬럿 테이트의 제자가 된 것에는 딱히 분해하는 것 같지 않고, 그 눈빛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쟤가 뭐가 예뻐서 그렇게 퍼주냐, 그런 것 같은데…….’

진유리는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이세아에게 더 책잡힐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난 수년간 앙숙으로 지내온 제반 상황과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이세아가 껄끄러웠다. 앞으로는 내키는 대로 그녀에게 날 선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단 생각도 든다.

그냥, 잘은 모르겠지만, 괜히 시비를 걸다간 나중에 몇 배로 되돌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진유리는 이도진에게 고맙고, 샬럿 테이트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이세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럼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샬럿 테이트가 돌연 꺼낸 말에 진유리를 비롯한 세 사람이 의아해했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말이 이어졌다.

“세아도 가르쳐줄까? 면역체 보유자가 아니니까 그건 도움을 못 주겠지만 싸우는 법이야 알려줄 수 있는데.”

보호자 격인 이도진은 가만히 이세아 쪽으로 시선만 두고 있었다.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는 듯이.

진유리는 이세아를 눈여겨봤다. 무표정에 가까우나 자세히 보면 표정에 놀란 기색이 어린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될까요?”

“되고말고. 무작정 호의를 베푸는 건 아냐. 면역체 보유자의 훈련에는 트리거가 아주 중요한 요소고, 도진에게 들으니 너희가 라이벌이라면서? 둘을 함께 가르치면 좋은 시너지가 나겠지 싶네.”

“……감사합니다.”

***

결정이 났다.

5월 말까지는 샬럿 테이트가 한국에 머물며 진유리와 세아를 가르치기로. 이후론 한 달에 열흘 이상 한국에 방문해 진유리를 가르치며 그때 역시 세아가 같이 있어도 괜찮다고.

실험실을 나선 우리는 휴게실에서 기다리던 이들에게 결론을 일러줬다.

“오, 아주 잘 됐군. 세아, 유리. 너흰 발음하기도 편해서 이름 그대로 불러도 될 것 같지만 좋은 별칭을 생각해둘게. 나한테도 마법은 편하게 물어보고.”

아르노 뒤레가 반색하며 환영한단 뜻을 전했다.

서상욱 교수와 안드레이 일린은 짐짓 흐뭇해하는 듯이 축하를 건넸고, 진철민은 감격을 금치 못하며 나와 샬럿 테이트에게 연신 감사하단 말을 되풀이했다.

“선생님, 정말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언제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신 날을 알려주시면 준비해놓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것 없습니다.”

나는 몸을 숙여 가며 내 손을 꼭 붙잡는 진철민이 불편했다.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내 문제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게 힘겨웠다.

모든 일이 얼추 정리돼 연구소를 나서려던 즈음.

문득 샬럿 테이트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도진.”

“네.”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사실 너한텐 썩 이롭다고 볼 수만은 없잖아?”

내가 어떤 연구를 내어놓든 난 그걸 세간에 널리 보급할 생각이다. 언젠가 필요해질지도 모르는 함정을 파놓으려는 일환이니까.

하지만 그런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기이한 일이겠지.

특정한 사람에게 연구를 제일 먼저 공개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그건 연구자로서 활용할 큰 무기를 하나 잃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궁금할 거다.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기껏해야 두 달 가르친 학생에 불과하다. 그런 여자애한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나는 정직하게 답했다.

“재능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진유리는 재능이 있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있다.

있는 힘껏 노력하는 애다.

그러니 나는 저 애를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끌어 올려줄 거다.

내가 주인공과 싸워야 한다면, 주인공을 쓰러뜨려야 한다면, 내게 맞서 링에 올라올 사람이 진유리이기를.

죽음만이 승패를 가르는 경기가 되지 않도록 애쓰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고, 그딴 건 변명거리가 못 된다.

나는 진유리를 택했다. 세아를 대신해 ‘희생’할 사람으로.

단지 그뿐이다.

그때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

<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5월 5~7일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수학여행 기간 내에 ---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

-특이사항: <킬 더 이블> 2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클리어 조건의 대상은 ‘최종보스’ 이도진이 선택

-클리어 보상: 퀘스트 세부사항에 따라 추후 결정됩니다.

+

내가 앞서 한 말에 힘찬 박수를 보내는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어쨌든 수학여행 내가 따라가야 한다는 말이네.

***

“내일 다시 연락할 테니까 조심히 들어가라고.”

아르노 뒤레가 경쾌하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고, 세 대의 차량이 도로를 달려나갔다.

진유리와 진철민, 서상욱, 이도진과 이세아.

36 영웅이 묵기로 되어 있는 호텔은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아 걸어갈 작정이었다. 안드레이 일린은 담배를 피우겠다며 자리를 비워 봄기운이 따스한 길에는 아르노 뒤레와 샬럿 테이트만 남았다.

그리고.

아까까지의 쾌활한 말투와는 전혀 딴판으로, 아르노 뒤레가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로티, 허튼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가?”

태연하게 되받은 말. 아르노 뒤레는 쏘아 보내는 듯한 안광으로 샬럿 테이트를 응시했다.

“너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내가 넘겨짚는 거라면 사과하겠지만…… 그러지 말길 바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아르노 뒤레는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몹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내심을 그러모아 한 번 더 일렀다.

“그러지 않아도 넌 이미 강해.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할 거다. 그러니까…… ‘희생’시킬 대상을 만들지 마라.”

“아, 그 얘기였어?”

대놓고 이야기하는 데야 그녀도 더는 능청을 떨 수 없었다. 기실 아르노 뒤레가 뭘 우려하는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면역체 보유자들의 성장에는 트리거가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면역체라는 건 지나치게 무거운 굴레여서, 그걸 버텨낼 만큼의 강한 동기가 없다면 그대로 성장이 멈추게 되니까.

물론 샬럿 테이트의 동기는 일신상의 무력을 발전시키는 것 자체다. 그건 단 한 번도 흐려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굳건해지면 더 좋지.’

그 동기를 더 강하게 만들 방법이 있다.

특별한 사건으로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나가는 것.

그녀는 벌써 여러 번 그런 사건을 겪으며 성장했고,

때로는 직접 연출하기도 했고,

아르노 뒤레는 그걸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별생각 없으니까.”

샬럿 테이트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아서 답했다.

별생각이 없다는 건 진실.

다만 지금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아직은 아니지.’

면역체 보유자인 진유리.

알아본 바로 재능이 상당했다.

어렸을 때의 샬럿 자신보다도 뛰어난 재능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트리거가 여러 개인 건 좋지 않은데.’

진유리가 면역체를 활성화하는 데 계기를 줬던 트리거는 두 개.

이도진과 이세아.

둘이면 집중이 분산된다. 자연히 성장도 더뎌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진유리라는 아이는 지금으로선 그녀의 동기를 북돋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해주지 못하겠지. 트리거가 두 개인 연약한 정신이니까.

그즈음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또한 ‘희생.’

‘둘 중 하나를 희생시키면…… 오히려 상승 작용으로 원래 하나였던 것보다 나아지려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발상.

샬럿 테이트는 마음속으로 이시혁과 정세빈에게 사과했다.

사실 별로 미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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