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Chapter 13. 수학여행 (1)
‘실제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생각만 한 건데.’
아예 행동에 나설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곧장 움직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본 다음에…….’
이세아를 진유리와 함께 가르치겠다고 한 것은 그걸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이시혁과 정세빈의 자식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진유리의 트리거가 이세아에 대한 경쟁의식 하나로만 집중되면 굳이 다른 트리거를 강제로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런 다음엔 성장한 진유리를 통해서 샬럿 자신의 발전을 꾀하겠지만…… 그건 또 나중의 이야기고.
‘그래도 오래 기다릴 수는 없겠지.’
샬럿은 고개를 살짝 내려 아래를 바라봤다. 두껍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팔, 굳은살이 배긴 손.
아직은 괜찮다. 삼 년 정도는 아마 거뜬할 거다. 그러나 오 년 이후는 장담할 수 없고, 그조차 넘어서 십 년이 지나면…….
‘나는 늙어버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를 더는 거부하지 못할 터였다.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아무리 전투 경험을 쌓아나가도, 육체의 쇠락이 성장의 수준보다 가팔라지는 시기가 결국은 닥쳐오겠지. 그때부터는 잘해봐야 현상 유지도 어렵다.
‘퇴물이 되는 건 한순간이야.’
그토록 열정적이고 강인했던 이들이 불과 몇 년 만에 형편없는 퇴물로 전락하는 꼴을 그녀는 여태 드물지 않게 봐왔다.
그녀 자신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거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도 하겠지만…… 어쨌든 현재보다 발전하리라 확신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오 년뿐이다.
‘그 안에 도달해야 해.’
역대 최강의 면역체 보유자란 타이틀을 넘어서 역대 최강의 각성자로.
이십여 년 전의 결전에서 이시혁과 정세빈이 마지막 순간 보여줬던 기적 같은 힘조차 뛰어넘어서.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껏 존재한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강했을, 악마의 수장이었던 악신조차 능가해서.
인간과 악마와 몬스터를 막론하고 가장 강한 존재로 올라서고 싶었다.
그 정도면 만족스럽다곤 못해도 적어도 힘닿는 데까진 해봤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희한테도 미리 사과해둘게.’
두 아이와 한 청년에게 마음으로나마 전하는, 기만을 닮은 사과.
당장은 미안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호의를 베푼다고 봐도 좋았지만 어쨌든 마음을 먹긴 했으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고, 응당 그래야 할 때가 오면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
샬럿 테이트는 죽는 날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 세상에 마력이라는 힘이 존재하는 한. 그 힘으로 강해질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아가 대뜸 선언했다.
“나 시험 잘 쳤어.”
그리곤 내가 무어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여는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고,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뭉치를 들고나와선 내게 내밀었다.
“가채점해보니까…… 오늘 친 과목들 빼면 평균 90점 넘어.”
“진짜로?”
세아에겐 몹시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깜짝 놀란 척만 했다. 유해빈한테 미리 들은 말도 있고, 아까 진유리 도발할 때도 들었으니까. 본의 아니게 미리 누설한 격이 된 거지. 내 생각엔 세아도 아차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공개한 듯한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조금 더 연기를 펼치기로 했다. 세아가 의심하지 않을 만한 선에서 개연성을 맞추는 것이다.
“유리 ‘도와’줄 때 잘 쳤다길래 이번엔 집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더니 성적이 올랐구나 싶긴 했는데, 이 정도로 잘 쳤을 줄은 몰랐네. 이게 몇 점 오른 거야? 평균 20점 넘게 오른 건가?”
“1학년 2학기 기말 때 62.13점. 20점 넘게가 아니라, 28점 넘게 올랐어.”
“아…… 그래?”
그걸 정확히 정정해줄 정도의 학문적 열정을 품고 있을 줄이야…… 라는 말은 당연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알고 있긴 했으나 실물로 보니 많이 기쁘기도 했고, 시험지를 넘기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세아가 조곤조곤 일렀다.
“이번 건 실기도 전보다 잘 쳐서 전교 3등 안에는 들 거 같아. 결과 나와봐야 아는데…… 1등 할 수도 있어.”
“오빠가 피자 시켜줄까? 아니면 나가서 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종류별로 사다 놓을까?”
“배불러. 내일은 군것질도 안 할 거야.”
새초롬하게 답한 세아가 자기 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나왔다. 샤워하고 몸에 걸칠 옷가지들을 기다란 수건으로 둘둘 말아 들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려 하길래, 나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닌 것처럼 물었다.
“근데 있잖아.”
“왜.”
“유리 도와준다고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걔한테 했던 말, 그으, 뭐라고 해야 하나…… 진심은 아니지?”
이거 지금 안 물어보면 나중엔 더 물어보기 힘들 것 같아서. 기실 ‘도와준다’라고 포장할 때 이 질문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얘가 그런 흉악한 말을 진심으로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마냥 믿기엔 단어 선택이 너무 적절하고 효과적이었지.
그전부터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아놓은 말을 꺼낸 게 아니면 단박에 구사하긴 어려운 수준이라서, 오빠인 나로서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낀 거다.
혹시나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면…… 내가 누구 지적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타일러보려고.
그러자 세아가 차분히 답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해.”
“그치? 그냥 걔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한 거지?”
나는 반색하며 재차 물었다. 마음 한편으로 드는 의아하단 생각은 저 멀리 치워두기로 했다. 세아가 그렇다는데 믿어야지. 내 동생이 그렇게 못된 발언들을 진심으로 할 리가 없으니까.
한데 이어진 세아의 말이 뜻밖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유해빈이랑 다른 애들이 진유리 험담할 때 하는 말, 기억나는 거 말한 거야.”
그리곤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나는 한 놈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유해빈 이 자식, 원래도 세아랑 너무 과하게 친한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한층 더 화가 난다.
나쁜 친구들이 하는 나쁜 말을 지금보다 더 배우면 안 되니까. 그걸 방지할 방법을 생각하며 내 방으로 향한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것 말고도 계획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
<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5월 5~7일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수학여행 기간 내에 ---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
-특이사항: <킬 더 이블> 2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클리어 조건의 대상은 ‘최종보스’ 이도진이 선택
-클리어 보상: 퀘스트 세부사항에 따라 추후 결정됩니다.
+
5월 5일부터 7일까지의 제일고 수학여행. 따라나설 구실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클리어 조건의 대상을 정하는 건데…… 후보는 이미 좁혀뒀다.
세아, 진유리, 유해빈.
내가 누구를 택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흐름이 많이 달라지겠지. 일단 대상으로 정한 사람이 위기에 처한다는 건 확정이다. 그리고 대상이 아닌 사람도 퀘스트 대상과 무관하게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 부분도 고려해야 했다.
가장 안전한 선택은 세아.
가장 효과적인 선택은 진유리.
가장 무난한 선택은 유해빈.
세아를 아예 위험에서 배제하고 진유리나 유해빈 둘 중에 선택하는 게 맞을 듯한데, 언제까지 정해야 한다는 설명이 없으니 수학여행 도중에 상황을 살피고 결정해도 되겠지.
그리고 또 하나 가닥을 잡아놓아야 할 게 있었다.
+
<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33.5%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만 하루 만에 10%가 훌쩍 넘게 올라간 진행률.
오늘로 2권 초반부가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봐도 좋겠지. 빌드업 과정이 끝났고, 나와야 할 인물들이 다 나와서 서로 만났다. 남은 2권의 내용은 훈련과 이런저런 사건들의 연속일 터.
나도 슬슬 범위를 좁혀야 했다. 누가 배신자인지. 그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가장 의심스러운 건 샬럿 테이트였다.
가장 강하고, 가장 위험한 여자.
<세계의 수호자>의 완결 시점, 나는 그녀가 향후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설정’이라고 표현할 것까진 아니지만…… 그와 흡사한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면 36 영웅 중에서도 능히 한 손에 꼽힐 강자. 그리고 누구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강해지는 것에 중독된 광인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봤다.
그야 무의미한 가정이라고 여겼다.
36 영웅들이 살아있고, 이시혁과 정세빈이 살아있는 한, 그녀가 어긋난 길을 걸으려 해도 바로잡아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영웅들은 변했다. 내가 글로 옮겨적지 않은 인생을 살며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갔다. 올바르든 그렇지 않든.
그러니까 최악의 가능성까지 상정해야 하는 나는 샬럿 테이트를 ‘광인’으로 가정하기로 했다. 자신의 트리거를 보강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냉혈한이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여야 했고, 그렇다면 역시 배신자일 가능성이 가장 큰 자는 그녀였다.
그녀가 배신자라면.
설령 배신자가 아니라 해도 자신의 트리거를 보강하고자 내 제안에 응한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행동에 나설 때는 언제일까.
<킬 더 이블>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이걸 클리어해서, 그 보상으로 짐작해봐야겠지.
그전까지 대응할 방법도 있고.
+
[미수령 보상]
1) 신체 포인트 5p
2) 소질 포인트 0.6p
3) 스킬 (랭크 B~C, 항목 중 택일)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의 고유 퀘스트 보상 중 ‘스킬’을 습득합니다.
: 상태추적 (랭크 B)
-스킬 ‘상태추적’을 발동합니다. (랭크 B)
1) 대상자: 이세아
2) 조건: 경상을 넘어서는 물리적 위협
3) 재발동 대기시간: 13일 23시간 59분 59초
+
랭크 B라 해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효과적인 스킬이었다.
조건을 꽤 구체적으로 건 반동으로 재발동 대기시간이 상당히 길었지만, 어차피 수학여행 끝날 때까진 대상자를 바꿀 생각도 없으니까 무의미하다.
게다가 마침 14일 뒤면 5월 7일 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신체 포인트와 소질 포인트는…… 수령 제한시간이 3주 이상 남아있으니 지금은 보류해두고, 일단 이 정도로 해두면 되려나.
그즈음 달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방 밖에서 들려왔다.
방을 나서보니 약간은 어설픈 맵시로 수건을 머리에 묶은 세아가 더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까 들은 말이 있는데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묻고 말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잘래?”
“……살찐다고.”
평상시의 새침한 말투보다도 더욱 퉁명스러운 대꾸. 나는 굴하지 않고 냉동실에서 두 종류의 막대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너 고르면 오빠가 남은 거 먹을게.”
“살…… 찐다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세아가 재빠른 손짓으로 푸른색 아이스크림을 집어갔다. 그러게 주면 또 먹을 거면서.
그리고 주말이 지나 맞이한 4월 26일 월요일 점심 무렵.
“어, 교수님 안녕하세요!”
점심을 먹고 어딘가로 가는 길인 듯하던 유해빈이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애를 붙잡고 제안했다.
“해빈 학생, 괜찮으면 내가 음료수 하나 사주고 싶은데.”
“정말요? 안 그래도 오늘 점심이 살짝 부실해서 음료수랑 빵까지 먹으면 오후 수업 열심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빵도 사줄 테니까 따라와.”
“오…… 그러면 가야죠.”
남들이 보기엔 교수가 매점 근처에서 학생 마주쳐서 먹을 거 사주는 정도로만 보이겠지. 건물 앞에 있는 나무 벤치에 유해빈과 나란히 앉은 나는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일렀다.
“이번 수학여행 가는 거 나도 따라가게 됐거든.”
강의하는 교수들은 원칙적으로 따라가지 않지만 아무래도 마력을 다루는 학생들이 이백 명 가까이 되니까. 담임 교사들은 마력이 없는 비각성자도 더러 있고, 그들만으론 대처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에 교직원들도 차출해야 한다.
오전에 나는 그걸 자진해서 신청했고, 내가 맡을 반도 배정받았다.
2학년 1분반. 마검술 전공의 학생들이 속한 곳이고, 다시 말해서 유해빈과 세아, 진유리가 속한 학급이기도 했다.
한데 바로 그때.
유해빈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일렀다.
“어, 진짜요? 어…… 그러면 안 되는데?”
“왜, 뭐가 안 돼.”
“아, 그게, 저는 수학여행 그거 안 가거든요.”
“……?”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