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Chapter 13. 수학여행 (2)
“…….”
“…………?”
황당하다는 심경을 담아 물끄러미 응시하니 유해빈도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햇빛을 받아 부드러운 빛을 띠는 연한 갈색 머리칼. 별 같은 게 반짝거리는 듯한 눈동자.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곱상한 생김새에다 하는 짓은 더 신기한 놈이다.
성격은 활발한데 또 음흉한 구석이 있고, 나한테 되게 싹싹하게 구는데 또 은근슬쩍 거리감 없이 훅 들어오는 면이 있고, 세아랑 너무 친한 건…… 이건 그냥 열 받고.
여하간 예측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수학여행을 안 간다고? 왜? 어째서? 그런 거 되게 좋아할 것 같은 놈이. 너 막 그렇게 고독한 거 좋아하고 그런 스타일 아니잖아.
나는 나지막이 심호흡하며 물었다.
“이유가 뭔데.”
“어, 딱히 이유는 없고, 그냥요.”
“1반 다 가는 거로 되어 있던데. 너 빠진다는 소리도 못 들었고.”
“그건 신청만 해놓은 거죠. 안 하면 사유서 써야 하고 귀찮으니까. 가는 당일 날 아프다고 전화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교수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니, 그래서, 별 이유 없으면 그냥 가도 되잖아. 가면 안 되냐?”
“어……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저 가기 싫어서요.”
“왜.”
“음, 그냥요.”
“나도 수련회, 수학여행 다 가봤잖아. 가기 싫고 귀찮은 거 이해해. 근데 막상 가면 또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잖아. 너도 알지?”
“어…… 아뇨, 저는 모르는데요.”
“……?”
더욱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중학교 때부터 수련회랑 수학여행 다 빠졌거든요. 중1, 중2 수련회 안 가고, 중3 때도 수학여행 안 가고, 작년 고1 때도 수련회 안 갔는데요…….”
“……그게 되냐?”
타박하고 부탁하는 걸 떠나서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한두 번쯤은 불참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빼먹긴 어려울 텐데.
그러자 유해빈이 뿌듯해하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흐흐, 핑계 대느라 고생 좀 했죠. 저는 보호자도 없고 제가 결정하니까 그거도 써먹고, 아프다는 핑계도 써먹고, 학교 외부 대회 참가해서 어떻게 일정 겹친다고 불참할 때도 있었고, 아무튼 여태 한 번도 간 적 없습니다.”
“그거…… 네가 앞에 했던 말이랑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이유 없이 가기 싫다면서. 그렇게 몇 년간 기를 쓰고 안 가려고 했는데 ‘그냥’은 좀 말이 안 되잖아.
학교 일정 다 빼먹어놓고 뿌듯해하는 건 일단 그러려니 넘기고, 나는 이놈을 스리슬쩍 구슬리기로 했다.
“해빈아, 우리가 그래도 평범한 교수와 학생 사이는 아니잖냐?”
“네? 아, 네. 그쵸, 그렇죠. 그것보단 훨씬, 훨씬 더 밀접한 사이죠.”
“그러니까 나한테는 왜 안 가는지 이유 말해줘도 되지 않냐? 들어 보고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거면 해결해줄 테니까.”
그러자 이번엔 유해빈이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보냈다.
“근데요, 교수님은 저 왜 그렇게 데려가고 싶어 하세요?”
“그냥, 나도 가는데 너도 갔으면 좋겠다 싶어서.”
나도 마찬가지로 허술한 이유를 대니 지긋이 눈을 흘기던 유해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묻는다.
“아, 이거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또 가서 학생 신분으로 하면 안 되는 나쁜 짓 시키려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제 말 맞죠?”
“됐고, 이유나 빨리 말해봐. 점심시간 다 끝나가잖아.”
학생 신분이고 자시고, 성인이든 애든 우리 하는 짓은 일반적으로는 하면 안 되는 짓이지.
한데 그때부터 유해빈의 안색이 급격히 침울해졌다.
“그게 실은요…….”
“그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편하게 말해봐.”
“제가 ‘여기’ 온 다음부터…… 누가 옆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려나 했더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거운 이유였다. ‘여기’라는 건 지구를 말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고향에서 떠나오며 생긴 트라우마라는 거다.
“누가 불쑥 습격하면 어쩌나 불안해서요. 심장도 쿵쾅쿵쾅 뛰고, 실제로 누가 근처에 있는 곳에서 자야 했던 적은 없고, 절대 그런 일 안 만들려고 했는데…… 그냥, 생각만 해도 좀, 불안하네요…….”
“………….”
이거 이렇게 되면 얘 데리고 가서 부려먹으려고 했던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은데……. 물론 원래도 그렇긴 하나 한층 더 인간성이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불안감이라는 게 불특정 다수한테 적용되는 거지? 네 정체를 모르거나, 네 정체를 알면 너한테 위협이 될지 모르는 사람들, 혹은 네 정체를 알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
“뭐, 얼추 그런 느낌이죠. 근데 아시다시피 제가 여기서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제 정체 아는 사람은 보스랑 교수님뿐이고,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제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교수님밖에 없는걸요…….”
이 자식 말투가 갑자기 연약해져서 적응이 안 되지만 그걸 굳이 지금 지적할 만큼 내가 양심이 없진 않았다. 얘랑 나는 어떻게 보면 처지가 비슷한 면도 있고, 뭐랄까…… 되게 좀 측은하네.
딩-동댕-동.
그즈음 점심시간이 오 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축 처져서 더 좁아 보이는 유해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힘주어 일렀다.
“걱정하지 마라. 이 형이 해결해준다.”
“네?”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는 유해빈을 내버려 두고 나는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목적지는 교무실, 현재 2학년 1반 담임이자 내가 고3 때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책상 앞.
“어, 그래. 이도진 선생님. 무슨 일 있나?”
오전에도 수학여행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담임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일렀다.
“선생님, 조금 갑작스럽지만…… 가능하다면 숙소 배치 조정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숙소 배치? 누구를 어디로? 아니, 그건 그렇고 왜? 또 애들끼리 싸우기라도 했나?”
“아뇨.”
잠시 말을 멈추며 분위기를 잡은 나는 대단히 열정적인 표정을 꾸며서 답했다.
“이 나라 마학계의 미래가 달린,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
4월 26일 오후 여덟 시경.
학교를 마치고 으슥한 골목에 선 유해빈은 눈앞의 남자가 흐뭇해하며 전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방 바꿔줬다고. 넌 나랑 같은 방 쓰면 된다. 2박 3일 내내.”
그리고는 흰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몇 개의 표와 삼십 명쯤 되는 이름이 적힌 종이. 2학년 1반 학생들과 인솔자들이 묵을 숙소의 방 배치표였다. 거기에는 유해빈의 이름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와 나란히 적혀 있다.
그의 이름은 이도진.
‘수호자’ 이시혁과 ‘대마법사’ 정세빈의 아들이자 국제 테러단체 팬텀의 이인자.
유해빈이 다니는 제일고의 마법역학 교수님이자 나름대로 친한 친구인 이세아의 오빠.
그가 한껏 뿌듯해하면서도 배려심이 담긴 어조로 말한다.
“나는 믿을 수 있다며? 그럼 나랑 같은 방 쓰면 되겠다 싶어서. 이거 바꾸는 데 나도 고생 좀 했다.”
들어보니 이런 말이었다.
2학년 1반의 학생은 총 스물일곱 명이다. 남학생 열셋에 여학생 열넷. 인솔자는 다섯 명으로 남자 셋에 여자 둘.
학생이든 인솔자든 기본 3인 1실로 묵게 되지만 인원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남학생 숙소가 다섯(총원 13인 3/3/3/2/2)에 여학생 숙소도 다섯(총원 14인 3/3/3/3/2)이다. 인솔자 숙소는 남녀를 나눠서 세 명과 두 명으로 두 곳.
그런데 이도진이 이 배치를 바꿔놓았단다.
“방이 열두 개잖아. 여자들은 여섯 개 그대로 쓰면 되고, 남학생 방을 넷으로 줄여서 열두 명 쓰고, 인솔자 방 한 곳은 담임이랑 다른 인솔자 한 명이 쓰고, 그러면 방이 하나 남지? 그 방을 너랑 내가 쓴단 뜻이지.”
“……그게 돼요?”
“당연히 그냥은 안 되지. 무슨 특혜 소리를 들으려고. 뭐, 이것도 충분히 특혜긴 한데, 그래도 근거 정도는 있어야지. 연구 핑계로 겨우 조정한 거야.”
교직원들에게 자세히 알리진 않았으나 이도진은 자신의 다음 연구가 마력 감응에 관한 것이라고 일러두었단다. 마력 활용에 관한 연구, 방어 구성체를 발표했으니 다음 연구는 반대 분야인 마력 감응에 관한 것이란 말엔 설득력이 있겠지. 그리고 제일고 내에서 마력 감응의 재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유해빈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너 데리고 테스트 좀 해본다고 했다. 위험한 실험은 아니고 자는 동안 반응 체크만 하는 거라고. 마침 이틀 밤 연속으로 지켜볼 기회가 있으니 이번만 편의를 봐줄 수 없겠냐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데.”
“그으…… 담임 저한테는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완전히 결정 난 건 아니고 내일 인가받는대. 내가 지금 너한테 미리 허락 구하고, 담임은 내일 아침에 내가 ‘해빈이가 괜찮답니다’라고 하면 인가받을 거고, 별문제 없으면 그 종이대로 간다고 보면 된다.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의기양양하게 물은 말.
‘안 괜찮은데요…….’라는 대답을 유해빈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전에 해놓은 말이 있었으니까.
누가 옆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지만 이도진은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핑계를 댔으니까.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방안을 그가 가져왔으니까.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이실직고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거 거짓말이었다고요…….’
옆에 누가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야 이 세상에 온 뒤로 줄곧 혼자 잠들었지만 그건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 댔던 이유가 그나마 진실과 가까우리라. 트라우마보단 그냥 싫어서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나도 개인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 용인데…….’
애초에 그만큼 불안하다면 현재 거주 중인 오피스텔에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윗집도 있고, 아랫집도 있고, 옆집도 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정체를 발각당해서 습격자가 찾아온다고 치자. 유해빈이 사는 집 창문을 깨고 들어오거나 문을 부숴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런 걸 일일이 두려워했다면 제1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도 않았겠지. 인적 없는 산골짜기에 홀로 살면서 성장을 마치길 기다리고, 균열을 넘어 돌아갈 방법이나 찾았을 터였다.
유해빈은 기왕 맞닥뜨린 상황에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질 걸 걱정할 정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점심때 이도진에게 했던 말은 사실상 죄다 거짓말이고 불쌍한 척을 한 것에 불과했지만, 도저히 그걸 실토할 수가 없었다.
‘하…… 진짜 미치겠네…….’
첫 번째 이유. 인제 와서 다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이어질 응징이 두려워서.
두 번째 이유. 그래도 이도진이 이렇게나 신경을 써줬는데 무턱대고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세 번째 이유. 그러면 진짜 이유가 뭐였냐고 그가 물어봤을 때 되돌려줄 답이 마땅치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유.
‘근데 이거…… 솔직히 좀, 재밌을 것 같긴 해.’
수련회, 수학여행. 이도진의 짐작대로 유해빈은 이런 이벤트들을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가기 싫은 이유가 가고 싶은 이유를 압도했기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부분이 해결됐고,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그건 ‘스릴’이라고 여길 수 있는 영역이었다.
‘안 들키면 그만이고, 들켜도 뭐, 큰 문제 있나?’
들키면 또 들키는 대로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이도진은 수학여행에서 자신과 함께 무언가 일을 꾸밀 작정인 듯했다.
‘우리 도진 씨가 하는 일이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마어마하게 못된 일일 거고, 근데 정황을 아는 내가 봤을 때는 그럴 수 있지 싶은 일일 거고, 재미도 있을 것 같고.’
곱씹어볼수록 이건 따라나서는 편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다.
유해빈이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 남짓. 이어서 감격스러워하는 감정이 가득 담긴 표정을 최선을 다해 연출하며 이도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진짜 고맙습니다, 교수님.”
“뭘 고맙긴. 우리가 어디 보통 교수랑 학생 사이야?”
“그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선배님’.”
“그리고, 가서 나랑 뭐 일 좀 할 거 있을 수도 있는데…… 이건 아직 나도 확실하게 가닥은 안 잡혀 있어서, 가서 말해줄게.”
“오…… 저희 뭐 어디 유적이라도 몰래 털러 가는 거예요? 거기 그런 거 많다잖아요.”
유해빈은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그들이 향할 곳. 제일고 수학여행지로 선정된 지역.
마력이라는 신비한 힘이 이 세상에 찾아온 그 무렵, 격동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했던 도시.
천년고도 경주였다.
***
5월 5일, 수요일 이른 아침.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려 이십 분째 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됐어? 우리 슬슬 나가야 하는데.”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평소처럼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다만 초조함과 긴장감 같은 게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다.
“진짜 늦는데…….”
현재 시각 오전 6시 30분.
넉넉잡아 오전 6시 55분까지는 학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이세아 이게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났으면서 샤워하고 방에 들어가선 한 시간 가까이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깜빡 잠이 든 건가 해서 방문을 살짝 열어보려던 그때.
달칵-
문이 열리고 세아가 걸어 나왔다.
평소보다 공을 들여 손질한 듯한 머리칼은 이마에서 귀 라인 위로 예쁘게 땋아 올렸고, 옷도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아끼는 거로 입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 외에, 이렇게 시간이 걸린 이유를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화장했네?”
“……그냥.”
놀러 나갈 때도 잘 안 하는데 오늘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꾸민 모습이다.
화장 잘 하고 다니는 사람을 내가 두 명 아는데, 한 명은 서연희고 한 명은 세라다.
서연희는 본판도 어마어마한 사람이 거의 신기에 달한 화장 실력을 보유했고, 세라는 애가 꾸미는 것에도 재주가 출중해서 어렸을 때부터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었지.
내 동생은 그 둘이랑 비교하면 익숙지 않은 느낌이 확 나지만 그래도 애를 쓴 느낌이라 귀엽-
“……무슨 생각해?”
“아니,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웃지 마.”
“어, 아니, 안 웃었는데. 안 웃겨. 잘 꾸몄-”
“평가도…… 하지 마.”
“아, 네…….”
의기소침하게 답한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뭔가를 가져왔다. 세아에게 내밀면서 일렀다.
“자, 선물. 어린이날이라고 주는 거 절대 아니고, 그냥 주는 거.”
“…….”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서 있던 세아가 내 손에 들려있던 걸 받아들었다.
오늘 메고 가라고 미리 사다 두었던, 봄에 잘 어울리는 자그마한 가방.
“……고마워.”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한 세아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원래 메고 있던 가방은 놔두고 내가 방금 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왔다.
“가자.”
“콘센트 같은 거, 다 껐어?”
“너 하도 안 나오길래 두 번 세 번 확인했지.”
“……빨리 가.”
새침하게 답하는 세아와 함께 나는 집을 나섰다.
각자 소지품이 든 캐리어가 한 개씩, 메고 있는 가방도 한 개씩.
<킬 더 이블> 2권의 현재 진행률은 삼십 퍼센트 후반대.
내가 해야 할 일은, 수학여행 기간에 내가 선택한 누군가를 구해내는 것.
여태까지 어려웠지만 앞을 향해 걸어 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나는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