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Chapter 13. 수학여행 (3)
학생들이 집결해 인원 점검하고 버스가 출발하는 건 오전 7시 30분. 다만 나는 교직원으로 가는 거라 일곱 시까진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오빠가 곤란에 처하는 건 눈곱만큼도 신경을 안 쓰는 듯한 내 동생이 하도 꾸물거려서 늦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일곱 시 전에 학교 운동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벌써 모인 아이들도 드문드문 보였고, 유해빈이 손을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깔끔한 흰색 모자. 상의는 품이 넓어 하늘하늘한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고, 하의는 무릎 위가 드러나 시원스러워 보이는 반바지다. 거기다 살짝 단이 긴 양말에 가벼운 느낌의 신발까지. 누가 봐도 ‘저 지금부터 어디 놀러 갑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복장이었고…….
“아, 해빈 학생이었네.”
“엥?”
솔직히 처음엔 얜 줄 못 알아봤다. 인사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아차렸고, 내 쪽으로 걸어올 땐 ‘1반 여자앤가? 소풍 가는 느낌으로 잘 입었네’라고 생각했었지. 모자챙에 가려서 얼굴이 안 보였던 데다 얘는 남자치곤 머리칼이 상당히 긴 편이라서. 키도 진유리랑 거의 차이 안 나는 정도에다가 체구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없지 않나?
“교수님,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니, 별일 아니고 학생들 모인 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돼요. 이세아 학생도.”
“네- 아, 맞다. 님 저랑 버스 같이 앉으쉴?”
세아랑 나란히 걸어가며 유해빈이 아무렇지 않게 제안한 말. 몇 미터 뒤에서 걷던 나는 무심한 표정을 애써 유지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고, 세아가 짧게 답했다.
“진유리랑 앉기로 했어.”
“어…… 왜죠?”
“훈련받는 거 얘기 좀 할 거 있어서.”
“어…… 굳이 오늘까지? 수학여행 가는데?”
“방도 걔랑 나랑 둘이 쓰니까.”
“그게 이유가 되나……? 그리고, 내가 구차해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왜 요즘 나보다 유리멘탈이랑 더 친해 보이냐? 왜 배신해? 왜? 너도 유리멘탈 맨날 욕했으면서.”
“딱히, 별로 안 친해. 샬럿 선생님한테 훈련 같이 받으니까. 그리고 난 걔 욕한 적 없어.”
“와, 시치미까지 떼고. 내가 욕하는 거 들으면서 좋아했잖아!”
“좋아한 적도 없어. 듣기만 한 거지.”
“오케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유해빈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교수님, 이세아가 저 싫다는데 저랑 같이 앉아주시면 안 돼요?”
“……?”
“선생님들 다섯 분인데 버스 한 줄에 네 자리니까 두 번째 줄에 교수님 앉으시고 저도 그 옆에 앉으면 되잖아요.”
“음…… 좋아요, 그렇게 해요.”
세아한테 들러붙는 것보단 내가 맡는 게 훨씬 낫지. 내가 나름대로 선선히 응하자 함박웃음을 지은 유해빈이 의기양양한 어투로 세아에게 일렀다.
“봤냐? 나도 같이 앉아서 갈 사람 있다고.”
“……그래.”
‘그래’라고 아주 단출하게 말한 건 세아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으리라. 세아, 아니면 나. 두 사람 외엔 같이 앉아서 갈 사람이 없다는 뜻 아닌가.
친구 여러 명 안 사귀는 애들도 있긴 한데 유해빈 쟤가 그런 캐릭터는 아니니까……. 어째 조금 슬퍼졌다.
드륵, 부르릉-
오전 7시 35분경. 본래 예정보다 아주 살짝 늦게 경주행 버스가 출발했다.
좌석 첫 줄은 담임과 인솔자 세 명.
버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엔 나와 유해빈이 앉았고, 오른쪽엔 공교롭게도 세아와 진유리가 앉았다.
담임이 마이크에 대고 키운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혹시 경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 있나?”
“아뇨, 중학교 때도 수학여행 경주 갔었는데요!”
“아, 그랬나? 일단 가기 전에 설명 좀 할 테니까 지겨워도 들어라.”
“저는 한 번도 안 가봤으니까 잘 들어야겠네요.”
중학교 때는 수학여행을 빠졌던 유해빈이 나직이 속닥였고, 담임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별에 마력이 가장 풍부했던 때는 천년도 넘게 전, 다시 말해 그 힘이 처음으로 발견됐을 때였다.
기술 수준이야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떨어지겠지. 그러나 지닌 힘의 총량은 당시에 살았던 이들이 오히려 지금보다 강했을 거란 추측이 지배적이다.
기술 발전까지 고려하면 현대 각성자들의 수준이 역사상 최고조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나 마력 자체만 놓고 보면 8세기 중반부터 백여 년이 가장 강했으며, 그 후로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현재와 비슷해졌다고.
“불국사도 석굴암도 그 시기에 만들어졌지. 다른 유적도 기존에 있던 걸 마력을 통해 보강한 게 여럿 있어서, 경주에 가면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을 거다. 다들 듣고 있나?”
“네…….”
십 분 이상 일장연설을 펼치던 담임이 문득 추궁하자 나오는 대답들이 시원찮았다.
이거 몇 년 사이에 애들 기강이 많이 빠졌네……. 우리 땐 그래도 선생님 말씀하시면 듣는 시늉 정도는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없었고, 내 옆자리에 앉은 유해빈은 심지어…….
“프흐…… 프으…….”
잘 들어야겠다던 놈이 제일 먼저 자고 있네.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더니 급기야 내 쪽으로 이마가 닿으려고 한다. 결단코 부드럽게 받아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놈의 이마가 내 어깨와 맞닿으려던 그 순간 왼팔 전체에 힘을 줬고…….
툭-
이마에 타격을 입은 유해빈이 비몽사몽으로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이번에는 반대 방향, 유리창 쪽에 머리를 누였다.
그래, 그쪽으로 자라. 거긴 내 소관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내 몸에 닿는 건 절대 사양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세아와 진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몬스터랑 싸울 때 두 번째 검식이랑 세 번째 연결부 말인데, 샬럿 선생님 말씀대로면…….”
“힘 더 빼니까 부드러워졌어.”
“마력 출력으로 보강하고?”
“일부러 보강하는 거 말고, 흐름 그대로.”
“……이세아 너 자꾸 재수 없게 말할래?”
“……뭐가?”
“흐름 그대로? 그게 뭐야. 감각 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싫으면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후…… 이론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설명 못 해.”
“시비 거는 거 맞지?”
“내가 언제.”
일견 티격태격하는 듯하나 의외로 사이가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쟤네는 저렇게 대화하는 게 서로 편해서, 그래서 저런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느낌에 더 가까운데.
저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는 가운데 내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하나 왔다.
우웅-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서연희였다.
-ㄴㄴ: 나중에 오늘 일정 다 끝나고 밤 되면 숙소에서 연락해 ㅎㅎ (08:01)
-이도진: 넹 ㅋㅋ (08:02)
이번 수학여행엔 팬텀이 개입할 일이 없다. <킬 더 이블> 2권이 끝날 때까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활동 자체를 안 하는 게 맞겠지.
그래도 서연희에게 이런저런 언질 정도는 해둬야 했고, 유해빈과 한 방에 묵으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논의할 거란 사실은 그녀도 내게 들어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숙소 들어가고 나서는 보고할 겸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던데…… 이 사람이 보기엔 내가 아직도 예전에 중학생 때처럼 못 미더우려나, 그런 생각도 살짝 드네.
긴장을 늦추지 않는 한에서 마음을 편히 먹으며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휴게소에 들렸다 다시 버스가 달리며 어느새 오전 11시를 넘겨 있었고…….
“도착했으니까 앞사람부터 내려라.”
광택이 번쩍번쩍 나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담임의 말에 모두 차례로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았다.
도시라기보단 한적한 유적지 같은 느낌. 공기도 맑고, 어딜 둘러봐도 고층 건물의 칙칙한 철골 느낌보단 자연의 푸른 빛이 눈에 띄었다. 천년고도 경주. 나는 다짐을 되새기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늘부터 사흘 안에, 이곳에서 틀림없이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터였다.
그리고 맞이한 첫날의 일정은……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평범한, 수학여행 그 자체였다.
***
5월 5일, 오후 아홉 시를 훌쩍 넘어선 시각.
수학여행 숙소의 자기 방 욕실에서 샤워 중이던 유해빈은 오늘 점심쯤부터 했던 생각을 다시금 되뇌었다.
‘음…… 어째 좀…… 그냥 평범한데?’
꽤 기대하고 있었건만 특별한 사건 따윈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익히 들어왔던 수학여행의 표준적인 형태라고 해야 할까.
학교 예산은 충분하니 점심을 맛있는 거로 먹고, 유적지 몇 곳을 들르고, 숙소에 도착해 유의수칙을 듣고, 그럭저럭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학교에서 마련한 지루한 프로그램을 한 시간쯤 듣고, 그리고 방에 도착해서 샤워.
여태까진 그게 전부였다.
평범하게 즐겁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드는 실망감에 유해빈은 내일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오늘 간 데는 전부 마력 유적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수학여행 일정은 첫째 날, 둘째 날과 셋째 날로 크게 나뉘었다.
첫날은 마력과 무관한 일반 유적지를 둘러봤고, 내일부터는 특수 목적 교육기관인 제1 아카데미의 수학여행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마력의 출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들을 방문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직은 내일과 모레에 대한 기대감을 품어볼 만했고, 유해빈이 실망하긴 이르다고 여긴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심장이 살짝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쪽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유해빈에게 이건 사실상 재밌는 게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
알아채느냐 알아채지 못하느냐.
들키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스릴이 있어 재밌을 듯했고, 만약 들킨다 해도 그 시점부터는 또 다른 재미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샤워기를 끄고, 더운 김이 가득 찬 욕실에서 유해빈은 거울을 바라봤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이 늘어져 어깨 끝에 닿았다. 정리하지 않고 이대로 나가면 게임이고 뭐고 대번에 들통날지도 모른다.
‘머리카락 좀 말리고, 옷도…… 아, 껴입고 자면 갑갑한데.’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유해빈은 머리칼을 말려서 정리했고, 욕실에 들고 온 옷가지도 하나씩 챙겨입었다.
몸에 제일 먼저 닿는 종류부터, 그다음엔 조금 두껍고 품이 넉넉한 흰 티셔츠와 잠옷 바지, 거기다가 마찬가지로 품이 넓어서 몸선을 가릴 수 있는 후드 맨투맨까지 입고 욕실을 나왔다.
그때 마침 숙소 문이 열리며 오늘 유해빈과 함께 자게 될 사람이 들어왔다.
이도진. 교직원으로서의 업무를 마치고 온 그가 욕실을 나선 유해빈을 보며 물었다.
“벌써 씻었냐?”
“아, 네. 여기 욕실도 으리으리하고, 침대도 끝내주게 넓고, 냉장고에 음료수도 몇 개 있던데요.”
“그래?”
“네, 미지근하길래 하나는 냉동실에 넣어놨어요. 씻고 드십쇼.”
“그래, 고맙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도진이 자기 캐리어를 뒤적거렸다. 꺼낸 건 세면도구와 수건, 그리고 속옷 정도. 그대로 욕실로 직행하려는 듯하길래 유해빈은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교수님. 옷도 들고 가셔야죠.”
“아, 맞네.”
딱히 미심쩍어하지 않는 투로 답한 이도진이 완전한 장비를 갖추고 욕실로 들어갔고, 유해빈은 한숨을 폭 쉬었다.
‘이거 처음부터 좀 빡센데? 은근히 신경 쓸 것도 많고.’
어쨌거나 재밌는 상황이긴 했다. 부드러운 촉감의 매트리스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대보던 유해빈은 여전히 뛰는 심장 소리를 자각하며 십여 분을 기다렸고,
달칵-
샤워를 마친 이도진이 나왔다.
머리칼도 말리지 않았고, 평소에 보던 맵시 있는 옷차림과 다르게 편안한 옷을 걸친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흠, 흐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고 있으려니 이도진이 다가왔다. 유해빈은 으레 그랬던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를 내려고 의식하며 일렀다.
“저는 여기서 자려고요. 교수님은 저기 안쪽 넓은 침대에서 주무십쇼.”
그리곤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티가 나지 않고 완벽에 가깝지 않을까 자찬하면서.
유해빈의 연기가 깨진 건 바로 그때였다.
“아, 잠깐만 있어 봐라.”
“네?”
이도진이 자기 캐리어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아주 얇고 새하얀, 환자들이 입을 법한 옷과 웬 거즈 같은 걸 들고 돌아왔다.
이내 청천벽력 같은 부탁이 이어졌다.
“너 오늘 내일은 이것만 입고, 가슴이랑 등에 이거 붙이고 자야겠다.”
“……네?”
유해빈은 직감했다.
수학여행 참가를 결정하며 염두에 둔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