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Chapter 13. 수학여행 (4)
‘이걸…… 어떻게 안 들키지?’
찰나의 순간, 유해빈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방책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 모두 그 직후에 폐기됐다. 너무 얇아서 속이 은은하게 비친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백색 환자복. 그것만 입고 가슴과 등에 거즈를 붙이란다.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유해빈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며 이도진이 부연했다.
“일단은 우리가 마력 감응 실험한다고 방을 같이 쓸 수 있게 조정한 거잖냐.”
“아, 뭐, 네…… 그랬……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유해빈 자신을 위해 그가 마련해준 방법. 무척 고마웠고, 수학여행이 기대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말 실험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한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그래서 대기 중에 있는 마력이 네 체내 마력으로 변환될 때, 무의식중에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마력 속성의 갈래 같은 걸 살펴보려는 건데…… 네가 평소에 마력 쓰는 거면 몰라도 민감도 측정은 평상복 입고 자는 것보다 실험용 옷이 훨씬 낫거든. 이건 다 벗고 자는 거랑 거의 차이 없을 거야. 내일 아침에 거즈 떼고 거기 색깔이랑 마력 잔존 반응이 어떤 식으로 남아있는지, 그거만 알면 된다.”
“교수님…… 그거요…… 꼭…… 해야 해요? 조금 귀찮은데…….”
유해빈은 일단 불쌍한 척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귀찮다’ 따위의 시답잖은 이유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고, 역시나 이도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이거 결과 안 나가면 ‘너희 실험도 안 하고, 근데 방은 같이 잡아달라고 하고, 뭐 하는 짓거리세요?’ 소리 듣는다.”
“아…… 그러면 거즈는 붙이고 자는데요, 추워서 옷은 더 입고 자고 싶은데…….”
“나 좀 더워도 난방 빵빵하게 틀어줄게. 이게 두께만 얇지 마력 처리해서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냐? 위아래 무조건 이거 한 장만 입고 자라. 정 어색하면 팬티 같은 건 그래도 입어도 돼. 잠깐 있어봐라. 팬티도 내가 실험용 속옷 준비해놓은 게 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도진이 캐리어를 뒤적거려서 얇은 천 조각 하나를 들고 왔다. 색깔은 검정이고 몸에 착 붙는 종류. 이 또한 실험용 옷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얇아서 뭔가 민망한 느낌이 드는 재질이었다.
할 말을 잃은 유해빈에게 속옷까지 넘겨준 이도진이 다시금 설명했다.
“거즈랑 실험복 속옷, 실험용 상의랑 하의. 나머지는 안 된다. 미안한데 이불도 못 덮고 자. 대신에 난방 충분하게 틀어줄 테니까.”
“어…… 그럼 제가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 그냥 교수님이 입고 자시면-”
“아, 이 자식 되게 꼬치꼬치 말 많네. 실험 데이터 확보하려는 거고 내 마력이랑 네 마력이 엄연히 다른데, 이것도 ‘해빈이는 실험 참여도 안 하고, 근데 방은 같이 잡아달라고 하고, 뭐 하는 짓거리세요?’ 이 소리 듣는다니까?”
“앗, 아아…….”
“그러니까, 닥치고 옷 벗어.”
“……왜, 왜죠?”
통보하는 듯한 말에 유해빈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되묻는 말에 이도진이 본인도 썩 내키지 않는단 표정으로 답했다.
“왜긴 왜야. 내가 붙여주려고 그러지. 가슴이랑 등 앞뒤 정확히 맞게 붙여야 하는데 너 제대로 붙일 자신 있냐?”
“아, 아, 그거야 물론이죠. 하, 하하, 절 뭐로 보시고. 화장실 가서 거울 보면서 붙여올게요.”
작금의 위기를 피하기 급급했던 유해빈은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회피는 회피에 지나지 않았다. 문틈으로 들려온 이도진의 목소리가 냉엄한 현실을 알렸다.
“붙이고 나서 똑바로 붙였는지 나한테 검사는 받아야 한다.”
“…….”
유해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힘없는 손길로 맨투맨 후드를 벗고, 품이 넉넉한 티셔츠와 잠옷 바지를 벗었다. 이제 남은 건 살갗에 가장 먼저 맞닿는 속옷류뿐.
유해빈은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 미쳤다. 진짜 미쳤어. 이건 아니지……. 아니, 진짜 미쳐 돌아가시겠네. 살려줘…….’
유해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용은 균열 너머의 세상에서 피난을 오며 줄곧 외견을 바꾼 채 살아왔다.
용의 마력 파장은 인간과 확연히 다르기에 그걸 들키지 않고자. 그리고 마력 파장을 바꾸는 건 외견의 변화까지 수반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주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다. 마력 파장을 흐리게 하느라 이목구비와 몸선이 중성적인 느낌으로 바뀐 정도.
그 정도만 해도 ‘유해빈’으로 살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고, 하지만…….
‘전부 홀딱 벗으면 이걸 어떻게 몰라보냐고…….’
유해빈은 피부와 직접 맞닿아 있는 천들을 모두 벗어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옷을 입었을 때와는 이도진이 가질 인상이 확연히 다를 터였다.
머리칼이 꽤 긴 편인 유해빈이지만 그가 지금 자신을 본다면 ‘머리칼이 상당히 짧은 유해빈’이라고 표현하겠지.
골격이 가녀린 편인 유해빈이지만 지금은 ‘볼륨감이 적은 편이며 건강한 매력이 한껏 드러난 신체’를 가진 유해빈이라고 표현하겠지.
이도진이 유해빈이란 사람을 어떤 성별로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남성으로 보느냐 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바뀌게 된다.
‘아…… 이건 좀…… 이 타이밍은 좀, 너무, 임팩트가 약한데…….’
영영 숨길 생각은 없었다.
마력 파장과 외견의 변화. 저항군 수뇌부에선 가능한 한 이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한 번이라도 본체로 돌아가면 그때부턴 마력 파장을 속일 수 없고, 변화한 외견도 본래대로 돌아가게 되니까.
몸과 마력이 충분히 성장해 용족 우두머리의 혈손으로서 지닌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기 전까진 이대로 살아가라고 했다.
‘그래도…… 저거 저, 은근히 나 이세아랑 과하게 친하다고 경계하는 얄미운 도진 씨 지금처럼 쭉 도와주다 보면…….’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 해도 본신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유해빈은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딱, 어? 막 괜히 내가 당신을 위해 아주 큰 손해를 감수하는데, 나는 그게 좋다는 분위기 팍팍 잡으면서 확실하게 도와주고, 어? 근데 그러고 나서 보니까 와…… 우리 해빈이 얘가 사실 생긴 게 이렇다고? 오우, 비주얼 미쳤는데? 와, 와…… 이런 반응 나오면…… 그게 제일 좋은데.’
이 계획이 원만하게 성립된다면 유해빈은 자신이 능히 보스와도 겨뤄볼 만한 입지로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사실 겨룬다곤 해도 뭔가를 하고 싶다고, 그런 소망이 구체적으로 있는 건 아직 아니지만…….
‘그게 훨씬 재밌을 것 같은데.’
이렇게 어설프고 전혀 괜찮은 분위기가 아닌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들키는 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하…… 어쩔 수 없나?’
유해빈은 이 상황을 결코 피하기 어렵단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최소한 지금부터라도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안 입고 나가서, 얘기부터 하고, 그러면 도진 씨 놀라서 정신 나갈 거고, 거기서부터 또 에피소드를 쌓아 올리는 거야.’
비록 원대한 목표를 두고 그려오던 큰 그림과는 적잖이 차이가 있겠지만 이것도 그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결심한 유해빈은 벗었던 옷가지들을 도로 착용했다. 그리고 몇 번 크게 심호흡한 다음, 서두를 어떤 식으로 꺼낼지 고심하며 욕실을 나서려 했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이도진이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음…… 정말요? 이게 결과 잘못 나오면 리스크가 좀 있는데, 아뇨, 당연히 저는 믿죠. 근데 굳이 번거롭게, 여기서 해도 되는데요. 어, 음…… 확실히 그쪽으로 애초에 가닥을 잡고 가면 조정하기는 편하겠네요. 네, 네. 그럼 해빈이 데려올게요. 너 다 갈아입었냐?”
마지막 말은 유해빈 자신에게 물은 것이었다. 유해빈은 뭔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단 걸 직감하며 그에게 답했다.
“아, 이거 붙이기가 좀 어려워서, 조금만 더 있다가요.”
“그럼 거즈 그냥 떼고 원래 입은 옷 입고 나와도 된다.”
유해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마력 홀로그램이 보였고, 거기엔 이세아를 닮은 외견으로 변장한 팬텀의 보스가 생긋 웃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해빈이는 수학여행 괜찮았니?>
“네? 아, 네. 재밌었습니다.”
<내 귀염둥이가 너 잠 편히 못 자게 괴롭히려고 한다길래 도와주려고.>
“네……?”
“그거 거즈 홀로그램 가까이 대봐.”
이도진의 말에 유해빈은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들어 올렸다.
위유우우웅-
홀로그램 너머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마력이 거즈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여 간다.
이어진 보스의 말.
<해빈이가 이틀 붙이고 자는 거랑 같은 결과일 거야. 얘 마력 파장 알고, 시간이랑 장소랑 모든 거 다 고려했어. 아무도 의심 안 할걸?>
“음…… 그러네요. 제가 본 대로면 해빈이 마력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잠시 거즈를 유심히 살피던 이도진이 확언했다.
그의 분석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건 유해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보스와 이도진. 두 사람이 보증했다면 필시 그럴 터였다.
“근데 살짝, 틈이 보이는 게 있는데 이건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응, 이번 것도 뭔가 처리해놓을 거라며? 그 여유분까지 생각해서 해뒀어.>
“……고마워요.”
이건 유해빈이 알지 못하는 대화였다. 이도진을 한껏 배려해주는 팬텀의 보스. 그녀를 믿고 자신의 심부까지 드러내는 이도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이벤트 하나둘 정도론 결코 넘을 수 없는…….
‘격의 차이……?’
유해빈이 그런 말을 되뇌고 있으려니 홀로그램이 목소리를 자아냈다.
<해빈이 처음 수학여행 온 건데 푹 자고, 내일부터도 재밌게 지내다 와.>
“아…… 네, 보스. 감사합니다…….”
<둘 다 너무 늦게 자진 말고, 내일도 연락할게. 안녕.>
“들어가요, 누나.”
<어머, 응. 잘 자.>
기뻐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답한 말을 끝으로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이도진에게 거즈와 실험용 의복들을 넘겨준 유해빈은 잠자코 침대에 누웠다. 방금 보스가 전한 말과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편하게 못 자게 괴롭혀서 도와준다고, 푹 자라고 했지…….’
표면적으론 유해빈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편하게 푹 자라는 당부. 그건 바꿔 말하면…….
‘이벤트 같은 거 만들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돌아오라는 말이잖아…….’
보스는 자신을 도와줬으나 그건 배려심에서 기인한 조력이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개입하지 않으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그걸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겠지. 어디까지나 여유로운 방식으로.
‘진짜…… 너무 센 거 아니냐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건 자신의 기지로 이루어낸 일이 아니었다. 이게 만약 육상 경기라면 이런 문장들이 정확하겠지.
유해빈은 오늘의 패배감을 곱씹으며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일렀다.
‘유해빈은 경기 준비 중이다……. 진유리는 요즘 하는 거 보니까 달리기 시작한 것 같다……. 약혼녀는 아직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 이세아는 관중석에서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최종보스라고 해야 할 팬텀의 보스.
그녀는…….
‘보스는, 결승선 앞에서 웃고 있다…….’
실의라기보단 사실 그 자체. 그걸 명확하게 인지하며 유해빈은 잠에 빠져들었다.
***
5월 6일 목요일 오전.
수학여행 둘째 날은 아침부터 일정이 상당히 타이트했다.
어제 본 일반 유적지들과 달리 오늘은 마력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들을 둘러보게 된다. 워낙 볼 게 많아 이른 아침에 출발한 버스가 경주 여기저기를 쏘다녔고, 학생들도 어제보다 좀 들뜬 기색이었다.
“보자, 다음이…… 오, 은마산(銀魔山)이네요? 여기 가보고 싶었는데.”
버스 옆자리에 앉은 유해빈이 재잘거리는 어조로 이른 말.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 내 쪽으로 확 기울어 있다. 나는 약간 부담을 느끼며, 티가 나지 않게 유해빈과 거리를 아주 살짝 벌리며 답했다.
“거긴 별로 볼 거 없어요. 산 정상에서 경치 보는 건 좋은데, 그게 다야.”
“아…… 정말요? TV로 볼 때 진짜 산 예쁘게 보여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쁘긴 한데 유적이라고 말하긴 좀 그런 정도?”
“그만하면 됐죠. 경치 보러 가는 건데.”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유해빈이 짐짓 고개를 주억이며 바깥 정경을 쳐다봤다. 들키지 않게 놈을 훑어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제 잠이 들기 직전에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자식 남자 아닐지도 모른다고.
터무니없는 상상이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보면, 어째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도 든단 말이지.
서연희가 얘의 과거를 살폈을 때. 그녀는 그때 무언가에 놀란 듯했다. 평소 같았다면 내가 얘한테 굴복 선언…… 아무튼 그거 시키는 것도 흥미 있게 지켜봤을 텐데, 도저히 못 봐주겠다면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섰지.
얘의 체구와 이목구비. 남자라고 하면 ‘아, 그래, 남자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자라고 해도 충분히 수긍된다. 머리카락까지 기르면 더 그런 느낌이 강해질 것 같고.
어젯밤 유해빈 이놈이 실험 진행하는 걸 극도로 거부했지. 그때 때마침 서연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얘의 과거를 본 서연희가 여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이 부분도 설명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킬 더 이블>이라는 소설.
그 앞의 세 가지 단서를 모두 종합해서 고려해도 유해빈이 실은 남장여자라는 건 터무니없는 가설에 가깝겠지. 하지만 이거 일단은 소설로 적어내고 있는 이야기일 거 아냐. 그러면…… 남장여자, 그런 애가 한 명 나오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왜 그러세요?”
유해빈이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묻는다.
속눈썹이 예쁘게 자리 잡은 데다 눈동자가 무슨 별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반짝인다. 그 모습에 죄책감에 가까운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나는 대강 둘러댔다.
“아니, 슬슬 다 와 가는 것 같아서.”
안 돼. ‘너 사실 여자냐?’라고 지금 당장은 절대 못 물어본다……. 사실 오늘도 같은 방 써야 하니까 빨리 물어보는 게 상책이라는 건 아는데…… 내가 얘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하면 나로서도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나 유해빈은, 이도진에게 패배해, 육체, 하……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 후우우…… 굴복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편의점에서 먹을 거 사서 돌아가는 애 붙잡고 실컷 때린 다음에 이런 말 하라고 시켰잖아. 만약 정말 얘가 여자라면 오늘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진 그 부분에 대해 차분히 얘기를 나눌 방법을 구상해두고, 그다음에 진행하는 편이 옳을 듯했다.
그야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고 이 자식이 방이 떠나가라 웃어댈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정확하게 짚은 것일 가능성도 상정해둬야 하니까.
그즈음 버스가 배기음 소리를 내며 한 곳에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니 저 위로 해발 수백 미터쯤 돼 보이는 산이 자리해 있는 게 보였다.
은마산(銀魔山).
무려 천 년 이상 전, 은빛으로 빛나는 초인이 사악한 마귀들을 베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산이다.
기록으로 남은 거라고 해본들 그 정도뿐이다.
은빛 초인이 누구였는지, 그 사람이 베었다는 마귀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아주 허무맹랑한 전설은 아니리라 짐작되는 부분이…….
“오…… 뭔가 좀 다르긴 한데요?”
유해빈이 너스레를 떨며 산을 올려다봤고, 저리 말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산에 가까이 갈수록 마력의 흐름이 거세지니까. 산 주위에 해석 불가능한 결계 같은 게 둘러쳐진 느낌이라 비각성자들은 산 입구 부근에서 더 올라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유명한 유적지인데도 방문한 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없고, 입구에서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학생들과 마력을 지닌 인솔자들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들 걸음이 빠르니까 제법 높은 산임에도 정상 부근까지 올라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기는 다른 건 없고 경치 구경하면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게 목적이라서, 다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도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1반 인솔자들의 대표는 나. 유해빈이 내 바로 뒤로 바싹 따라붙었고, 이삼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세아와 진유리가 나란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삼십 분쯤 지났을까.
“경치 좋다…….”
경주 지역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경.
갑자기 속도를 올려 나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유해빈이 산꼭대기에서도 중앙에 걸터앉았다.
“교수님, 물 드실래요?”
“아, 고마워요.”
유해빈이 건넨 물병을 받아든 나는 아래를 바라봤다.
중학교 때는 안 왔지만 고등학교 때는 왔었는데.
딱히 변한 건 없는 것 같고, 여기 정상까지 올라와 세라와 나눴던 대화가 기억에 인상 깊이 남아있다.
경치도 예쁘지만, 중요한 건 이 아름다운 경치가 나한테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는지, 그게 더 중요하다고 했었지. 걔는 차분하게 웃으면서 자기한테는 굉장히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으니까 나한테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당시에 들었을 때보다는…… 지금 더 마음에 와닿는 말이네. 세라와 함께 올라왔기에 이 은마산은 나한테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됐으니까. 귀국하면 이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그 애가 기분 상해하지는 않았으면 싶네.
유해빈이 건넨 물을 마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뭐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석도 없고, 그냥 새까만 암반으로 구성된 자리.
그때.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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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반응합니다. (랭크 S)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의 흔적과 조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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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객관식 질문을 통해 알아낸 보기 네 개.
<세계의 수호자>의 주인공 이시혁과 히로인 정세빈,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이도진, <킬 더 이블>의 등장인물 이세아. 네 사람이 동시에 생존할 방법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제시된 것들.
a.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을 교체시킨다
b. 특성 ‘검은 심장’을 완전하게 각성한다
c.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파괴한다
d. <킬 더 이블>의 주인공과 싸워 패배한다
그중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을 언급하지 않은 보기 두 개의 실마리가…… 이 순간 나타났다. 그리고 홀로그램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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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5월 5~7일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수학여행 기간 내에 ---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
-특이사항: <킬 더 이블> 2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클리어 조건의 대상은 ‘최종보스’ 이도진이 선택
-클리어 보상: 퀘스트 세부사항에 따라 추후 결정하게 되며, 지금 선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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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우웅!
산 정상의 지반이 굉음을 내며 갈라진다.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여기엔 나와 유해빈 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바로 뒤에 따라오던 애들이 있었다.
진유리와 세아.
그 애들이, 눈을 크게 뜨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교수님!”
“오빠……!”
산꼭대기의 지반이 완전히 갈라졌다. 나와 유해빈은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려 한다. 세아와 진유리도 거의 영향권에 들어섰고,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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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가 조정됩니다.
-클리어 조건: 5월 6일 자정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중 [은마산에서 추락한 학생 전원]을 위기에서 구해낼 것
-대상 목록: 유해빈, 이세아, 진유리 총 3인
-퀘스트 세부사항을 기준으로 클리어 보상을 산정합니다.
-클리어 보상: 유럽의 36 영웅 중 확인된 배신자 1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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