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55화 (55/207)

#55화. Chapter 14. 은마산 (1)

홀로그램의 서브 퀘스트가 조정된 그 순간, 나와 유해빈은 이미 암반의 갈라진 틈 사이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교수님!”

새된 목소리로 외친 유해빈이 자기 뒤편으로 마력을 내쏘았다.

퍼엉!

그 반동으로 내게 접근해와선 나를 와락 껴안는다. 맞닿은 신체의 감촉이 몹시 부드럽다느니 하는 걸 명확하게 인지할 틈도 없이 나도 유해빈을 꼭 끌어안았고, 저 멀리 시야 끄트머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황망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일고 학생들과 인솔자들. 이어서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아아아아아-!”

“꺄아아악! 교수님, 으아아앗!”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세아.

겁먹은 비명과 다급한 외침이 혼재된 진유리.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는 하나 나와 유해빈보다는 십수 미터 이상 위쪽이었다.

“흐읍!”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서브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이곳 은마산에서 추락한 학생 전원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

그리 간단히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이미 위기 상황인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여기서 다시 올라갈 수 있다면…….

“……!”

하지만 내 짐작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체내 마력이…… 아예 뜻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어!?”

유해빈도 나와 같은 일을 하려고 했던지 대단히 놀란 기색이었고, 나는 이내 마력이 운용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은마산 근처에는 결계처럼 마력이 깔려 있어 비각성자들은 그 압박감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와 유사한 현상이 나와 유해빈에게 일어난 것이다.

최상위 각성자라 할 수 있는 우리 둘에게까지 여파가 미칠 만큼 강한 압력. 그것의 근원이 되는 어떤 힘이 우리가 추락해 가까워지고 있는 산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터였고, 그쪽으로 점차 접근하고 있어 마력의 흐름마저 순간적으로 끊긴 것이리라.

그리고…… 이성적으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거기까지였다.

“어…… 어? 뭐야!?”

내 품에 안겨 있다시피 접촉해 있던 유해빈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형체와 순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마력이 나와 유해빈을 동시에 감싸고 있다. 워프 마법의 영향권에 들어선 것처럼, 어딘가로 날아가는 듯한 감각. 나는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

-스킬 ‘상태추적’을 발동합니다. (랭크 B)

1) 대상자: 이세아

2) 조건: 경상을 넘어서는 물리적 위협

3) 현재 상황: 조건 미충족

+

세아도 우리처럼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나 위협을 겪고 있는 건 아니다. 아마 진유리도 마찬가지겠지.

이건 그런 뜻이려나. 퀘스트가 진행되기 전에 탈출하려 해봐야 소용없다고. 가서 잘하라고. 그즈음부터 시야에 비치는 광경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

슈아아아아악-!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공동을 지나서, 나는 어느샌가 단단한 돌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와, 와…… 아니, 이거 진짜 뭐예요? 무슨 고대 놀이기구 같은 건가?”

품에 데리고 있던 유해빈을 풀어주자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린 말. 나는 짧게 지시했다.

“마력 쓸 수 있는지 먼저 점검해. 주위에 보이는 거 전부 다 말하고.”

“아, 네. 마력은…… 괜찮은 것 같아요. 압박감이 살짝 들긴 하는데 심하진 않고, 아까 마력 끊긴 건 저희 여기로 데려온 워프 마법? 그거 영향이 컸지 싶네요.”

“보이는 건? 우리 앞에 보이는 구조물이랑 형태까지 다 말해봐.”

“음……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쇳덩어리로 문을 만들어서 막아놨어요. 문 크기는 삼 미터 정도. 금속 재질에 실물 크기 군대 조각상 같은 것도 보이네요. 다 해서…… 서른다섯. 기병 다섯에 보병 서른이에요. 시야는 별로 어둡지 않고, 벽면엔 마력으로 가동되는 횃불이 걸려 있어요. 그 외에는 특이사항 없습니다.”

하나씩 대조해 보니 내 눈에 보이는 것과 정확히 같았다. 보는 사람마다 달리 보이진 않는다 이거네. 환각일 가능성도 적고, 여긴 아무래도 중심부와 이어져 있는 첫 출입구쯤 되는 모양이었다. 다만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세아랑 진유리는, 너도 도중에 기척을 놓쳤나?”

“네…… 마력도 갑자기 안 먹히고 교수님까지 놓쳤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아서, 적어도 걔들 둘이랑 저희 쪽 둘씩은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옳은 판단이라 해야겠지. 세아와 진유리한테까지 손을 뻗는 건 그 순간엔 불가능했다. 우리와의 물리적 거리 문제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애들은 여기와 다른 곳으로 향하기로 되어 있던 듯하니까.

마음이 타들어 갈 것처럼 걱정이 됐지만 나는 ‘상태추적’ 스킬로 세아가 현재 시점에선 안전하단 걸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유해빈은 그런 편리한 스킬은 없으나 냉철하게 결론을 내렸다. 잘못하다가 한 명만 낙오되거나 설상가상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질 바엔 차라리 둘씩이라도 뭉치는 게 낫다고.

그러니 세아가 걱정되는 가운데서도 나는 애꿎은 사람을 탓하고 싶진 않았고, 그런데도 애가 무거운 어조로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더 잘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였는데…….”

“거기서 더 어떻게 잘해. 앞으로 잘할 거나 신경 써.”

핀잔, 혹은 위로. 그나마 안색이 조금 풀린 유해빈이 내게 물었다.

“근데 왜 걔들이랑 저희랑 따로 떨어진 걸까요? 그냥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랬나?”

“글쎄…….”

나는 말을 아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그것도 아주 신빙성이 없는 가설은 아니지만…… 내게는 짚이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이동되는 존재의 차이가, 장소의 차이까지 성립시킨 게 아닐까 하고.

세아와 진유리.

그 둘은 완전하게 인간이다.

그런데 유해빈 얘는 인간이 아니라 균열 너머 세상의 생명체인 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나는 분명 인간으로 환생했다. 전생을 모른 채로 몇 년을 살았고, 전생을 자각하고 나서도 쭉 인간이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어땠을까. <세계의 수호자>의 후속 외전인 <마신의 탄생>을 거치고, <킬 더 이블>이 시작되고 맞이한 지금은…… 그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아직도 온전히 인간일까? 그건 나로서도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다.

아까 지반이 갈라지기 직전에 반응한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 보정으로 습득한 그 특성이 내 몸에 자리해 있고, <마신의 탄생>에서 ‘마신’이란 나를 지칭하는 거겠지.

그런 것들을 모두 종합해서 고려해 보면…… 하나의 가설이 나온다.

순수한 인간인 세아와 진유리는 침입자라기보단 방문자로 인식되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 거라고.

순수한 인간이 아닌 나와 유해빈은 침입자로 인식되어, 이곳에 준비돼있는 안배와 싸워야 한다고.

물론 내 짐작이 다 맞을 거라 확신할 순 없겠지. 그래도 하나만은 정확하게 맞춘 것 같네.

위유우우웅.

쿠웅! 쿠우웅!

마력의 파도가 너른 공간 전체로 세차게 뻗어 나갔다. 그 광경에 유해빈이 한숨을 폭 내쉬며 투덜거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대충 느낌 쎄하긴 했는데…… 영화에서도 그렇고, 왜 고대인이란 사람들은 죄다 발상이 비슷한지 모르겠네요. 이런 거 매뉴얼 같은 거라도 있나?”

“……그러게.”

커다란 문을 지키듯이 배치돼 있던 실물 크기의 군대 조각상. 그것들이 침입자를 인지해 깨어나고 있었다.

칙칙한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쥐고 있던 무기에 마력의 기운이 일렁였고, 기병이 타고 있는 군마 역시 살아있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있다.

‘엿보는 눈’ 특성으로 감지할 수 있으니 수준이야 A급 이하. 보병은 B급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고, 기병은 그보다는 강해 보인다.

유해빈이 내게 물었다.

“저희 이거 빨리 처리해야 하죠?”

“어, 네가 둘. 내가 셋. 신호 주면 달려가서 기병부터 해치워.”

“아뇨, 더 빠른 방법 있어요.”

단출하게 답한 유해빈이 이 공간 중심부로 나서며 양손을 내뻗었다. 기병들이 선두에 선 골렘 군대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바로 그때.

스아아아아!

유해빈의 손 주위로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한방에 싹 쓸어버리고, 애들 챙기러 가자고요.”

호언장담하는 말. 무슨 수단을 쓰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멀쩡히 집 가는 애 붙잡고 제압했을 때 나와 싸우며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했던 힘.

드래곤이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기술, 브레스를 발현하려는 것이다.

우워어어어!

히이잉!

군대의 함성, 군마의 투레질. 놈들이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온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

유해빈이 펼친 양손에서 발출된 마력이 한순간에 놈들을 지워버렸다.

“하아, 하아…….”

한 번에 상당한 힘을 소모한 유해빈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나는 내 짐작이 정말 맞아떨어졌다는 것에서 오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우, 좀 힘드네요. 약간 디스펠 걸리는 느낌도 드는 게 침입자한테 압박감 주는 거 맞는가 봐요.”

호흡을 가다듬은 유해빈이 씨익 해맑게 웃으며 내게로 걸어온다. 얘가 오늘 입은 상의는 품이 그렇게까지 넉넉하진 않은 흰색 티셔츠. 한 걸음씩 걸어오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뭐가 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 유해빈은…… 아직 눈치를 못 챈 것 같다. 워낙 마력 소모가 컸던지라 본인의 몸 상태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던 걸까.

“교수님 왜요? 제가 너무 헌신적이라서 감동받으셨나?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요. 다음에 뭐 나오는 거든 여기 나가서든, 제가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얘는 내가 세아 걱정 때문에 표정이 굳어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꾸미면서 너스레를 떨었고, 이제 나와의 거리는 불과 수 미터 남짓.

“……교수님?”

고개를 갸웃하는 유해빈을 나는 애써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키는 그대로다.

어깨가 좀 좁아지고, 체구가 조금 더 가녀려졌다.

이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머리칼이 어깨선을 지나 찰랑거린다.

본인은 자기 목소리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목소리도 살짝 더 가늘고 높아졌다. 본래도 되게 예쁘장하다는 느낌이었던 이목구비가 한층 더 여성스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걸어오면서…… 뭐가 좀, 계속 흔들렸고, 나는 그 시점에서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니, 묘사고 뭐고 그딴 게 뭐가 필요해. 이걸 어떻게 못 알아보냐고. 유해빈 이 자식…… 그냥 여자잖아.

“교수……님?”

유해빈이 내 바로 앞에 섰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고개를 내려서 자기 손발과 몸을 내려다본다. 인제 보니까 손도 좀 작아진 것 같고.

그리고.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유해빈이 입은 티셔츠 안쪽에서…… 웬 흰색 붕대 같은 것들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 어?”

유해빈의 시선이, 터져 나간 붕대 조각으로 향했다가, 다시 자기 가슴께로 향한다. 좀…… 이런 표현 쓰긴 좀 그런데…… 아무튼, 옷이 되게 좀 힘들어 보인다.

횃불에 비쳐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 유해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되뇐다.

“어, 어…… 이게…… 왜……? 아니, 나 못 느꼈는데…….”

“디스펠, 너 마력 많이 썼고, 그럴 수 있어.”

“아니, 이게…… 아니…….”

유해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에 따라 아까부터 흔들리던 게 또 계속 흔들리고, 얘 천으로 칭칭 감은 것 말곤 티셔츠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는지 어렴풋이…… 나는 다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본인에게 물었다.

“내가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진짜 쓰레기 같은 건 아는데…….”

“어, 어…… 뭐가요?”

“너 그으, 뭐냐…… 뭐랄까…… 되게 고전적인 방식을 썼네.”

남장여자 클리셰로 가슴에 붕대 감는 거 나도 아는데…… 지금이 어느 시댄데 그러고 다니냐고. 스포츠용 속옷이라던가 뭐 많잖아.

유해빈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아까 그 상태에서 더 새빨개질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이…… 교수님이랑 같은 방 쓰니까…… 혹시라도 보시고 너 무슨 여자 속옷을 들고 다니냐고 할지도 모르니까…… 평소에는 따로 챙겨 입는 거 있는데…… 아니, 근데 잠깐만. 듣고 보니까 열 받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물어봅니까? 미쳤어요!?”

“미안하다…….”

“후우, 미안하면 됐어요. 하……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타이밍에, 진짜 이럴 게 아니었는데…….”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내가 미안하다.”

“아니, 교수님이 미안하실 건 없고요…… 아니지, 교수님이랑 직접 연관돼있는 거니까 미안해하셔도 되는데…… 아니, 또 미안할 것까진 아닌가?”

거의 횡설수설에 가깝게 말하던 유해빈이 제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자기 몸을 다시금 자세히 살피더니 언뜻 감탄까지 담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근데 저도 십 년 만에 보는 건데요……. 와…… 이거 내가 포텐셜이 이 정도였나? 싶기도 하고…… 폴리모프 풀려도 별 차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건 좀 아닌데 했는데 지금 보니까 괜한 걱정이었다 싶기도 하고…… 아, 그렇다고 보진 마시고요. 지금 그으…… 좀 그래요.”

“보진 않았는데…… 아무튼 미안하다…….”

“죄송한데 교수님 잠시만 뒤돌아 서주세요. 저 이거 붕대 끊어진 거라도 어떻게 좀 묶어보게요.”

나는 시키는 대로 정확히 반 바퀴 돌았다. 벽에 걸린 횃불이 일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가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단 걸 상기하고 유해빈에게 일렀다.

“해빈아.”

“네? 왜요?”

“이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진짜 미안하다.”

“아, 귀 닳겠네. 뭘 자꾸 미안해요, 우리 사이에. 여기 나가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비밀만 좀 지켜주세요. 이세아랑 진유리는…… 아, 모르겠다. 일단 그건 좀 가다가 생각해야겠네요.”

“아니, 그냥 미안하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미안해서.”

“……뭐가요?”

유해빈의 어조가 미심쩍은 투로 바뀌었다. 얘도 내가 뭘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얼추 알아챈 듯했다.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나는 해야 할 말을 명확히 하기로 했다.

“그때, 너 집 가는 길에 시비 걸고 데려가서, 내가 뭐라고 말하라고 시킨 거…… 몰랐느니 뭐니 변명하는 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그것 자체로 되게 미안하다고.”

“…….”

유해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스륵, 스륵. 천이 스치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에 작게 울렸다.

그리고 십여 초가 지났을까.

유해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교수님 그러면요…….”

“어, 말해.”

“제가 그때는 제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못 했던 게 있는데요……. 마침 사과도 하셨고, 그거 지금 말해도 될까요?”

“……말해.”

나는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어떤 뉘앙스의 말이 나올지에 대해서.

그리고.

유해빈이 원망스럽다는 감정을 한껏 담아 내게 일렀다.

“진짜…… 미친, 변태 새끼…….”

“……미안하다.”

나는 할 수 있는 말만을 전했다.

***

그 무렵 이세아는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걷고 있었다. 거의 다급한 뜀박질에 가까운 속도. 뒤에서 따라붙던 진유리가 그녀에게 일렀다.

“좀 천천히 걸어.”

“…….”

침묵이라기보단 무시. 진유리가 성큼성큼 속도를 내서 이세아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채며 쏘아붙였다.

“너 무슨 함정이 어디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신경도 안 쓰고 가? 좀 천천히 걸으란 말 안 들려?”

“……넌 천천히 와. 나 안 그래도 많이 참고 있으니까.”

이세아는 거짓을 말한 게 아니었다. 이 정도 속도만 해도 모든 인내심을 발휘해 걸음을 늦춘 것이었다. 더 빨리, 당장이라도 시야에 펼쳐진 좁은 길을 쏜살같이 달려나가고 싶은데. 혹시 모를 함정이 있을까, 자신이 다칠 게 겁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다쳐버리면 이도진을 무사히 구해낼 수 없을까 그게 두려워서.

그래서 속도를 늦춘 것이었고, 이세아는 눈으로 진유리에게 경고했다.

방해하지 말라고. 더 참견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세아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진유리도 움찔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화내는 일이 거의 없는 애니까. 하지만 진유리 또한 이번엔 지지 않고 이세아를 마주 노려봤다.

“너만 급한 거 아니야. 나도 걱정되고, 빨리 가고 싶은 거 마찬가지야. 근데, 무턱대고 가다가 다치면 교수님이 너 걱정할 거라는 생각 안 들어?”

“…….”

앙칼진 말투였으나 거기엔 틀림없이 걱정이 스며 있었다. 이세아 자신을 걱정하고, 이도진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세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고, 진유리가 재차 일렀다.

“같이 가자고. 가면서 속도 더 올리든, 함정이 나오든, 나랑 같이 대처하자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너한테 내가 도움이 못 될 것 같아?”

“……그건 아냐.”

“후…… 그럼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 급하게 행동하면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침착하게, 당황 안 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가진 기량을 다 펼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샬럿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 너도 기억하잖아.”

“…….”

그러더니 오히려 진유리 본인이 이세아를 추월해 앞장섰다. 속도는 이전보다 느렸다. 대신 더 신중해졌고, 진유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세아의 페이스와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이세아는 그런 그녀를 넌지시 쳐다보며 생각했다.

‘쟤도…… 좀 바뀐 것 같아.’

언제부터였을까.

일전에 강의실에서 크게 싸움을 벌인 이후로, 그즈음부터 진유리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 그렇다면 이세아 자신은 어떨까. 성장하고 있는 걸까. 본인 스스로 알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그녀는 통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위험하진 않은 것 같아.’

산 정상의 갈라진 틈새. 거기서 떨어질 때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근원을 알 수 없는 마력이 그녀와 진유리를 이 공간으로 데려왔다. 이도진과 유해빈은 보이지 않았고, 상당히 잘 꾸며진 통로가 보이길래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꽤 오래 걸었는데도 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침입자를 막아서는 어떠한 장치도 없었다.

‘그냥…… 유적지에 온 느낌이야.’

위험하지 않은, 평화롭게 마련된 유적에 들른 듯한 분위기.

그즈음 진유리가 외쳤다.

“어? 야, 저기!”

이세아는 진유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내다봤다.

주황빛의 횃불로 밝혀져 있던 통로가 끝을 보인다. 조금 더 어둑한 빛이 저 멀리서 흘러나왔고, 진유리와 이세아는 걸음을 빨리해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

“이게 다 뭐야……?”

진유리가 놀란 어조로 중얼거렸다.

통로를 빠져나온 그들 앞에 펼쳐진 건 아주 커다란 공동이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족히 십여 미터 이상. 공동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도 수십 미터는 될 듯했다.

이세아는 조심스레 공동을 걸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걷던 진유리가 혼잣말처럼 묻는다.

“벽화…… 맞지?”

“응.”

이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넓디넓은 공동 전체에 그려진 벽화.

사람이 아주 많이 그려져 있다.

으리으리한 집도, 초가집도, 푸른 산과 강, 하늘과 땅이 모두 그려져 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

“각성자를 그려놓은 건가……?”

진유리의 추측에 이세아도 동의했다.

많은 사람 중에서 일부,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묘사한 이들이 있었다.

하늘을 날고, 산과 산 사이를 뛰어다닌다.

“그럼 이 사람들은…… 뭐지?”

“……나도 모르겠어.”

진유리의 의문에 이세아도 답을 이르지 못했다.

용맹하고 강해 보이는 각성자들 말고, 빛을 뿜어내는 자들이 더 그려져 있다.

푸르거나 붉은빛이 아니라, 검은빛.

무척 사악한 외견으로 묘사된 그들이, 사람들을 습격하며 목을 깨물고, 팔다리를 뜯어내고, 새빨간 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이세아는 문득 발견한 장면에 고개를 갸웃했다.

용맹하고 강한 각성자.

사악한 검은빛의 습격자들.

그들 중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은 듯한 사람이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신비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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