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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56화 (56/207)

#56화. Chapter 14. 은마산 (2)

한데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일반적인 각성자도, 사악한 괴물도 아닌 듯한 그 은빛 머리칼의 여성은…….

‘얼굴이…… 잘 안 보이네?’

분명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도 이목구비를 제대로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벽화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역사책에서 흔히 보던 것과 비슷하건만, 그 여성만은 전신에서 신비로운 은빛을 내고 있어 외견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체구가 그리 크진 않은 듯하다는 점과 얼굴 윗부분에서 붉은빛이 비친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때.

위유우우웅-

공동 전체가 크게 울리며 본래도 그리 어둡지 않았던 공간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빛의 근원지는 높디높게 솟은 천장. 이세아와 진유리는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봤고…….

“야, 저거…… 마석 아냐?”

“…….”

틀림없이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재질이 반짝반짝 빛을 뿜어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고순도의 마력이 응집해 있는 마석처럼.

단순한 천장이 아니었던 거다. 천장 전체가, 실은 마석이었다.

그 마석이 흘려낸 빛무리가 아래로 내려왔고, 이 공간 전체에 짙게 일렁이다가…… 벽화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벽화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와아아아아-!

그렇지 않아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던 각성자들이 이젠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밟고 뛰어오른다. 주먹을 뻗어 바위를 깨부순다. 산과 산 사이를 쏘다니며 우렁찬 소리를 내지른다.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고, 때로는 자기들끼리 다툼을 벌이거나 협력했고, 또 때로는 마력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온전히 평화롭다고만은 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부정적인 면보단 긍정적인 면이 많아 보이는 광경. 하지만 검은빛의 습격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완연히 달라졌다.

그하하하하-!

끄흑, 으으…….

잔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 절망 어린 단말마. 가동되는 원리가 뭔진 몰라도 그런 음성들이 벽화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검은빛을 내뿜는 사악한 자들이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죽여대고, 잡아먹고, 피를 마시며 킬킬 웃는다.

물론 벽화에 그려진 각성자들은 그런 악행을 좌시하지 않았다. 분노해 한 곳으로 뭉친 그들은 검은빛의 습격자들이 남긴 흔적을 쫓아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습격자들을 발견했고, 용감히 맞서 싸웠다.

하지만…….

“아…….”

이젠 평범한 벽화 속 그림이 아니라 사실상 동화(動畵)에 가까워진 장면들을 바라보던 진유리가 침음성을 냈다.

습격자들을 추적해 그들을 막아내려 하던 각성자들이 모두 죽었다. 기술의 수준이야 이 벽화에 묘사된 것으로만 평가할 순 없겠으나 지닌 힘의 총량은 능히 현대의 A급 각성자와 비견할 수 있을 듯한데.

그런데도 습격자들의 공격에 팔다리가 찢겨 나가고, 목이 잘리고, 그들 자신의 피를 빼앗겨 말라비틀어진 시신만 남기고 죽어버렸다.

습격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거리낌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여나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힘이 강해졌고, 어느새 벽화의 분위기는 지옥을 옮겨온 것처럼 절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보였다.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고 벽화가 움직이던 그 시점부터 종적을 감췄던 은빛 머리칼의 여성이, 그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습격자들과 싸워서, 그들을 쓰러뜨려 나간다.

이세아는 찬란하리만큼 아름다운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엄청 세네…….’

S급 각성자라는 기준으로도 설명이 안 될 정도의 무력. 어림짐작해봐도 36 영웅급. 어쩌면 그 이상.

은빛 여성의 손길에 따라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마력의 파도가 생겨났다. 땅이 산산이 부서지고, 흐르는 강물조차 말려낸다.

남아있던 각성자들이 그녀를 위시해 다시금 힘을 모았고, 검은빛의 습격자들을 벽화 한 곳에 그려져 있는 산으로 몰아갔다.

이제 벽화의 배경은 어두운 밤. 환하게 뜬 만월이 지상으로 빛을 밝히는 가운데 은빛 여성과 각성자, 습격자들의 결전이 펼쳐졌다.

각성자들이 많이 죽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검은빛의 습격자들을 마침내 모조리 쓰러뜨릴 수 있었고, 벽화에 남은 모든 산 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산을 향해 절했다. 그 산의 정상에는 은빛 여성만이 조용히 앉아 있다.

그녀가 쓸쓸한 시선으로 만월을 올려다본다.

신비로운 안개로 가려진 얼굴 윗부분. 거기서 비친 붉은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와 달빛과 맞닿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산 정상엔 아주 커다란 마석만이 남았고, 벽화가 맨 처음의 그림으로 되돌아왔다.

진유리가 얼떨떨해하는 어조로 확신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게…… 그거겠지? 여기 은마산이고, 그거, 전설인가 뭔가 하는 거.”

“……그런 것 같아.”

은마산(銀魔山).

천 년 이상 전, 은빛으로 빛나는 초인이 마귀들을 베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벽화로 본 장면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은빛 초인은 그 여성이겠지. 마귀는 사람을 잡아먹는 검은빛의 습격자들일 테고.

“그러면 이 천장이…… 아까 그 여자가 떠나면서 산꼭대기에 남겨둔 마석이겠네.”

진유리가 중얼거린 말에 이세아는 대답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높이가 십 미터 이상에 지름은 수십 미터도 넘는 공동.

여기선 다른 곳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없다. 오갈 수 있는 문이라곤 그들이 들어왔던 통로뿐.

하지만 이도진과 유해빈도 이 유적으로 들어온 게 분명할 텐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향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초조함을 애써 갈무리하며 이세아는 진유리에게 제안했다.

“일단…… 왔던 곳으로 돌아가 보자.”

혹시나 실마리가 있을까 해서 여태 기다려봤으나 이곳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한쪽으로만 통하는 길이니 첫 시작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는 게 차라리 낫겠지.

그리고 그녀들이 공동을 떠나려 하던 그때.

쿠구궁-

왔던 길과 반대편. 공동 끝의 벽면 저편에서…… 심상찮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

“진짜…… 미친, 변태 새끼…….”

“……미안하다.”

응당 할 자격이 있는 매도와 진심이 담겨 있으나 죄를 갚기엔 턱없이 모자란 사과가 오간 직후.

유해빈은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어…… 내가 말이 좀 심했나?’

따지고 보면 모르고 시킨 건데. 알았다면 설마 그랬겠는가.

그러니 ‘미친 변태 새끼’라고 비난하는 건 조금은 과한 면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잠깐, 아주 잠깐 들었고…….

‘아니지. 내가 왜 미안해하는데?’

그녀는 곧 그런 반성을 송두리째 지워버렸다.

알았든 몰랐든 의미는 없다.

차마 되새기기도 부끄러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했던 자신이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물론 유해빈은 이도진을 싫어하지 않는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고르라면 후자는 비중이 존재하지 않고, 전자 쪽으로 무게가 확연히 기우는 정도.

그리고 주섬주섬 챙긴 붕대 조각을 하나로 만들고자 손을 움직이며, 유해빈은 이런 의문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좋아하나?’

여기서 좋아한다는 건 폭넓은 의미의 호감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짙은 의미.

그녀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음…… 잘 모르겠네.’

호감은 품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하지만 이걸 명확하게 이성적인 호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건 그녀 자신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멋있긴 해.’

단지 외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교수로서, 마학 연구자로서 가진 능력도 대단히 출중하다. 게다가 유해빈은 그의 숨겨진 면모를 알고 있다. 1급 테러조직 팬텀의 이인자. 그 신분으로 활동할 때의 그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고, 어떻게 하면 목표를 잘 쟁취할 수 있는지를 알고, 그걸 이뤄나가는 데 있어 적어도 이도진 자신이 세운 기준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듯했다.

‘나한텐 좀 막 대하는 것 같아도 또 은근히 챙겨주고, 자기 일은 완전 똑 부러지게 잘하면서 또 이세아 대할 때는 이건 뭐 동생 바보도 아니고 동생 멍청이? 동생 천치? 거의 그런 수준인데, 근데 그 갭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또 되게 괜찮단 말이지.’

그런 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역시 유해빈 자신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인 건 확실했고, 하지만 현시점에선 완전하게 ‘좋아한다’라는 표현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현시점까지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 미래에 자신이 이도진에게 어떤 마음을 품을지, 유해빈은 그걸 예감할 수 있었다.

‘좋아하게 되겠지.’

그것도 아주 많이.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 막을 수 없을 거고, 막을 생각도 없다. 그러니까,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리라.

유해빈 본인이 잘 그걸 알고 있기에 가장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를 공개하려 애쓴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상한 타이밍에, 전혀 의도치 않게 밝혀지고 말았지만.

‘어……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좋아하게 될 건 좋아하게 될 거고, 그것과 ‘복종 선언’의 굴욕감은 또 전혀 별개였다. 가슴 아픈 과거를 겪으며 열심히 살아온 가련한 아이에게 어디 그따위 발언을 강요한단 말인가.

성별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볼 수 없는 짓이었다.

‘그나저나 그건 왜 시킨 거람?’

티셔츠를 반쯤 벗어 어깨 위에 얹고, 이어낸 붕대를 가슴에 두르며 유해빈은 내심 궁금해했다.

싸운 상대에게 자신의 승리를 확인한다? 그런 걸 기꺼워할 성격도 아닌 듯한데.

‘근데…… 이거 좀 잘 안 되네……?’

그 의문도 영문을 알고 싶긴 했으나 당면한 문제 또한 상당했다. 어설프게 묶어낸 붕대가, 가슴에 잘 감기지 않았다.

‘진짜…… 내가 이렇게 잘 컸다고?’

저절로 그런 감탄이 들 정도. 브레스로 마력을 제법 소모한 것과 이곳에 쳐진 디스펠 효과로 중성적으로 변한 외견이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본래대로라곤 하나 유해빈 본인도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다.

당시엔 어렸고, 그래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어떤 외견일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육체적인 성장이 어마어마했다.

‘그거야 솔직히 좋은데, 지금 당장은 불편하단 말이지…….’

중성적인 외견일 때는 이런 붕대만으로도 충분히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본모습은, 그리고 대충 복구한 붕대로는, 아무래도 어렵지 싶었다.

해서 유해빈은 결국 선택과 집중이라는 방도를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뭐 완전히 티 안 나게는 못 하겠고…… 얼추 가리기만 해야겠다.’

현재 착용한 티셔츠는 품이 그리 넓지 않았고, 심지어 흰색이다. 상의는 그것 하나만 입었다.

지금 정도의 위용이라면 이런저런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비치겠지.

사실 이미 아까 많이 보였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그 정도는 가리는 게 맞을 듯싶었다.

‘대충 그렇게 하고, 걸으면서 많이 안 흔들리게, 그러면 되나?’

사실 유해빈 자신도 잘 몰랐다. 자기 모습이지만 이게 처음이니까.

그래도 대강 이 정도면 됐겠지 싶은 시점에서 그녀는 몸을 돌렸고, 꼼짝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이도진의 뒷모습에다 대고 일렀다.

“아, 교수님. 다 끝났어요. 이제 보셔도 돼요.”

이도진이 멋쩍은 듯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시지 않은 눈치. 유해빈은 조금…… 아니, 상당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쾌활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어때요? 훨씬 낫죠?”

그러면서 이도진을 향해 한 발 걸었고, 아까보단 좀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슴께가 출렁이는 감각에, 그녀 자신의 위용을 스스로가 너무 얕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씨, 진짜 미치겠네…….’

사태가 확연히 개선되진 않았음을 알았는지 이도진의 표정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일부러 시선을 먼 곳에 두며 그녀에게 답한다.

“어…… 그래. 잘했네. 그럼 음…… 이제 가자.”

“……네.”

두 사람 모두 정면에만 시선을 두고 묵묵히 걸었다. 그들을 막아선 건 두꺼운 철문.

콰앙!

이도진이 쏘아낸 마력에 문이 산산조각으로 바스러졌고, 그들 앞에는 이제 좁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좀, 뭔가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큰코다칠 것 같은 느낌이네요.”

“넌 마력 많이 썼으니까 최대한 힘 아끼고 옆에 붙어 있어. 네가 판단해서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만 마력 쓰고.”

“교수님이 시킬 때 말고요?”

“내가 그 정도도 못 믿으면 너 영입했겠냐.”

“아, 뭐, 그렇긴 한데, 약간 감동이네요.”

그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쏘아지는 마력이 담긴 화살 세례. 불길이 치솟고, 통로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기도 했다.

유해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앞장선 이도진이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순간.

“어!?”

피유웅-

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이전 것들과는 달랐다. 붉은 마력이 한가득 실려 있어 조금만 충격을 주면 폭발해버릴 듯한 화살이었다.

타앙!

다른 공격에 대응하던 이도진을 대신해 유해빈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앞에 둘러쳐진 마력의 방패가 화살의 접근을 일순간 막았고,

퍼어엉!

실드와 화살이 동시에 폭발했다.

그리고 들려온 불길한 소리.

투욱-

“앗, 아아…….”

유해빈이 가슴에 어설프게 동여맨 붕대가 마침내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끊어져 옷 속에서 흘러내린 것이다.

마침 습격을 모두 처리한 이도진이 그녀를 흘끗 쳐다봤다.

유해빈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이도진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아니, 아까처럼 못 본 척이나 해주지 왜 보는데!’

유해빈은 당황해서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만 외쳤고…….

스륵-

이도진이 자기가 입고 있던 얇은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어…… 이거…… 저 입으라고요?”

조금 더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며 유해빈이 물은 말. 이도진이 무미건조한 말투를 의도적으로 냈다는 게 읽히는 목소리로 일렀다.

“어, 너 그래 가지고 불편해서 되겠냐. 일단 이거 입고 있어. 신경 쓰이는 거 없어야 제대로 싸울 거 아냐.”

“아…… 네……. 그으, 고맙습니다…….”

“뭘 고마워. 빨리 가자.”

이도진이 건넨 겉옷을 걸치고 지퍼까지 잠근 유해빈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녀가 입기엔 옷이 너무 커서, 물론 가슴께가 묘하게 불룩 솟은 느낌이 들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티가 덜 나 보인다.

이도진이 벗어준 옷에 남아있는, 은은한 향수와 기분 좋은 체향이 섞인 내음이 코끝에 감돌았다.

유해빈은 그걸 선명히 느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좀, 내 생각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필연적으로 다가올 순간.

‘좋아한다’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쓸 수 있을 때.

그때가, 그녀가 짐작한 것보다도 더 빨리, 어쩌면 벌써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유해빈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흠, 으흠. 교수님, 제가 너그럽게 용서해드릴게요.”

“어…… ‘그거’ 말하냐?”

“네, 뭐, 그거도 그거고, 어젯밤에 그거 무슨 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옷 주면서 그것만 입으라고 하고, 가슴이랑 등에 거즈 붙이라고 하고, 속옷도 안 입든가 뭔 요상한 검정 팬티만 입으라고 하고, 이불도 덮지 말고 자라고 하고, 거즈 자기가 붙여준다고 옷 벗으라고 하고, 제가 화장실 가서 거즈 붙여온다니까 붙인 거 검사한다고 하고, 그거 다, 제가 너그럽게 용서해드리겠다 이 말씀이죠.”

“아니, 어…… 내가 진짜 미안하다……. 내가 그래도 반성은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일일이 말 안 해줘도 돼……. 부탁한다…….”

“어, 아뇨, 이건 교수님 양심에 가책받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아무튼 용서할 거고, ‘그 발언’도 생각해보면 뭐, 말하라고만 시킨 거잖아요. 홀딱 벗고 절하면서 말하라고 안 시킨 게 어디야. 그 정도면 신사지, 신사.”

유해빈으로선 개의치 말라고 건넨 말. 다만 그녀도 말하면서 ‘아, 이거 좀 어감이 이상한가?’라고 느끼긴 했고, 그러나 명확하게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건 자각하지 못하며 말을 끝냈다.

그러자 이도진이 드물게도 대단히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는다.

“아니, 제발…… 너 남장하고 산 지 한 십 년 됐지?”

“네, 그쯤 됐죠?”

“후우…… 해빈아,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고 내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닌데…….”

“아닌데요?”

“너도, 어, 좀, 아무튼 좀 그래……. 십 년이 길긴 긴가 싶기도 하고…….”

“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대화를 시작한 게 오히려 역효과가 나버렸다.

저 멀리 통로가 끝을 보였고, 유해빈은 이번에는 평범한 화제를 고심해 꺼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저 진짜 되게 고생했거든요. 집 밖에서는 화장실도 안 갔어요. 마력으로 참고, 그것 말고도 되게 신경 쓸 거 많아서.”

“아니, 그러니까,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니다, 네 잘못은 아니고, 그냥 내가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

이쯤 되니 유해빈도 무슨 말을 해도 더 분위기가 어색해질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통로를 빠져나왔고,

맨 처음에 상대한 것과 비슷한 군대 조각상들이 넓은 공간에 서 있었다.

보병 오십에 기병이 열다섯.

먼젓번보다 두 배는 강력한 전력이었고,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건 뭘까요……?”

“글쎄, 단순히 군대는 아닌 것 같고…….”

두 사람은 신중하게 정면을 살폈다.

수십 명의 군대 무리에 더해, 갑주를 착용하지 않은 조각상들이 다섯 정도 더 있었다.

이도진이 곧 추측을 내어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고대의 각성자들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네.”

“어…… 그러면, 좀 빡세겠네요.”

그즈음 조각상들이 깨어났다.

보병과 기병은 각각의 전력은 이전과 비슷한 수준. 하지만 각성자들은…….

“마력 양으로는 전부 A급이야. 내가 먼저 가서 각성자들부터 처리하고, 너는 뒤따라오면서 기병 견제해줘라. 그다음에 둘이 같이.”

“네.”

우워어어어-!

적들이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콰앙!

땅을 박찬 이도진이 앞장서서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유해빈은 놀라서 말을 흘렸다.

수십의 군대와 다섯의 각성자들.

그들 모두, 이도진이 손을 휘두르자마자,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진 것이다.

유해빈은 지금 드는 유일한 판단을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돼서 고장 났나……?”

***

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방금 부서진 조각상들.

그건 결코 오랜 세월에 고장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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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반응합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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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과 격돌하는 것과 동시에 떠오른 홀로그램 메시지.

내 짐작에 근거가 하나 더 늘었다.

이곳 은마산 내부에 마련된 유적.

여기는 아마, 내가 얻은 특성 ‘검은 심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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