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Chapter 14. 은마산 (3)
“암튼 이득 한 번 봤네요. 어서 가요, 교수님.”
“잠깐만.”
졸래졸래 다가와서 말하는 유해빈에게 나는 잠시 대기해달라고 일렀다. 그러자 그 애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상한 거라도 발견하셨어요? 저는 딱히 못 느꼈는데.”
“이상한 거라기보다는…….”
말을 흐리며 나는 모래처럼 바스러진 조각상들을 응시했다. 유해빈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비밀. 그것과 관련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은마산 정상 한가운데 지점. 내가 거기 다다랐을 때 검은 심장이 처음 반응했다.
이 유적은 나와 유해빈을 침입자로 인식했고, 마력의 압박감에 더해 유해빈에게는 디스펠 효과까지 얼마간 미치고 있다.
추측해보건대 유적은 우리를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판단한 듯했다.
통로에서 기관 장치가 공격해올 때도 검은 심장이 반응한다는 메시지가 보이긴 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고, 이 지점에 도착해 군대 조각상과 싸우려 할 때 검은 심장이 다시 반응했다. 이번엔 꽤 강하게.
그러자 군대 조각상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동을 멈췄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 되겠지.
기본적인 기관 장치를 운용하고, 심지어 군대 조각상을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마력. 이 유적을 천 년 넘게 유지 시켜주는 근본적인 동력원. 그것과 검은 심장이 적대 관계라고.
내겐 이 가설을 뒷받침할 또 다른 근거도 있었다.
“…….”
힘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조각상을 움직이던 마력. 이 공간 내에 일렁이며 나를 압박하던 마력. 그 힘들이…… 검은 심장으로 흘러들어온다.
두근, 두근.
가슴이 기뻐하며 뛴다. 내가 기뻐하는 게 아니다. 검은 심장이 씨익 웃는 것처럼 박동하고 있다.
앞으로도 먹잇감이 많이 남아있다고. 어서 더 나아가라고. 마치 그런 말들로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이어서 유해빈이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교수님!”
고개를 돌려 바라본 유해빈은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고, 어느새 외견이 조금 바뀌어 있다. 남장하며 살아온 모습 그대로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유해빈이 자기가 입고 있던 내 겉옷 지퍼를 명치 부근까지 열어젖힌다. 그리고는 시선을 내려 자기 가슴께를 확인한다.
티셔츠 말고 입은 게 없으니 평소보다 굴곡이 도드라지긴 했으나 내가 보기에도 아까와는 아예 비교가 안 됐고, 손바닥으로 가슴 근처를 툭툭 두들겨보기까지 하며 확인을 끝낸 유해빈이 내게 일렀다.
“어, 이거…… 저 디스펠 걸린 거도 풀렸는데요.”
“그래……. 그런 것 같네.”
필시 검은 심장이 반응한 여파겠지.
군대 조각상뿐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던 유적의 마력을 모두 흡수한 걸까. 그런 거라면 얘한테 걸린 디스펠이 효력을 잃은 것도 설명되는데.
유해빈은 이 모든 일이 내게서, 정확하게는 검은 심장에서 기인했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검은 심장이 흡수한 마력의 양이 상당하고, 얘는 용이라 마력에 대한 감응력이 극히 뛰어난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초고도의 마력 흡수가 발현됐단 뜻이겠지.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유해빈이 재빨리 겉옷 지퍼를 올렸다. 그러더니 조금은 의뭉스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 근데 교수님…… 저 이거 옷은 나중에 숙소 가서 돌려드리면 안 될까요? 그, 왜냐면, 언제 다시 디스펠 걸릴지도 모르고, 이제 붕대도 없고, 좀 그래서요. 그래서…… 좀 더 이 옷 입고 있고 싶은데.”
“맘대로 해. 나중에 돌려주면 된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함박웃음을 지은 유해빈이 꾸벅 고개를 숙였고, 나는 이어지는 통로로 발길을 향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해빈이 쟤가 은근히 당연한 것도 고마워할 줄 알고, 애가 의외로 예의 바른 면이 있단 말이지.
내가 저 옷을 왜 뺏어가. 이 상황에서 저거 홀라당 뺏어가면…… 그건 최종보스라기보단 그냥 지지리 인정머리 없는 못된 놈이라고 해야지.
여하간 우리는 다시 통로를 바쁘게 걸었고, 그러면서 나는 두 개의 메시지에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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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상태추적’을 발동합니다. (랭크 B)
1) 대상자: 이세아
2) 조건: 경상을 넘어서는 물리적 위협
3) 현재 상황: 조건 미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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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47.5%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어제, 그러니까 수학여행 첫날 집을 나서던 때의 진행률이 39% 언저리였다.
오늘 은마산이 붕괴하기 직전엔 43%가량. 그 시점에서 다시 4%가 넘게 올랐다.
진행률 4%.
화수로는 아마 1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분량이다.
심리묘사로만 1화 지면 전부를 사용할 수도 있는 반면에 사건 중심으로 풀어간다면 또 많은 것들이 진행될 수 있으니까.
이번엔 전자와 후자 둘 중에 어느 쪽일까.
세아는 현재 위험을 겪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진행률은 짧은 시간 동안 가파르게 상승했고, 이런 순간에 세아와 진유리가 아닌 외부 시점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서술될 가능성은 적다.
세아는 안전한데, 진행률은 오르고 있고, <킬 더 이블>의 이야기는 지금 세아와 진유리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세 가지.
우선 첫 번째.
둘이 의견 차이로 대판 싸우거나 나와 유해빈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회의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두 번째.
주인공일 가능성이 있는 두 주연, 세아와 진유리 둘의 심리를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앞선 두 가설 다 아니라면…… 어쩌면 그걸 수도 있겠지.
<킬 더 이블> 내에서 차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이야기의 복선. 그 빌드업이 이 시점부터, 이곳 은마산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세 번째라면…… 나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하고.
하지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은마산은 내가 <세계의 수호자>를 쓸 때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장소다. 환생하고 나서 알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런 곳은 여기 말고도 많다. 소설을 쓰면서 모든 사람과 모든 장소를 일일이 다 묘사하진 않았으니까.
이곳 경주만 해도 은마산을 비롯해 내가 작가일 땐 몰랐던 마력 관련 유적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그래도…… <킬 더 이블>에서 주요한 복선이 나오는 장소라면 얘기가 좀 다른데.
그 정도면 세계관 전체의 비밀과도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을 거고, 그렇다면 내가 <세계의 수호자>를 쓸 때부터 그게 뭔지 알고 있었어야 하니까.
한데 나는 작가로서 은마산을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은마산은 <킬 더 이블>이 시작되기 전부터, 내가 어릴 때부터, 그보다도 훨씬 이전인 천 년 전부터 원래 존재하던 곳이다.
그리고 그 은마산이 검은 심장과도 뭔가 연관이 있는데, 심지어 <킬 더 이블>의 핵심 플롯과도 관련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쉬이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고, 현재 내가 가진 그럴듯한 단서는 겨우 한 가지였다.
산 정상이 붕괴할 때 목격했던 홀로그램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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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의 흔적과 조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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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나는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 서연희와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장생종이 지구로 온 이후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달과 아주 가까운 존재니까. 여태까진 그렇게 짐작해왔지.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달에 살던 장생종 내에서 ‘멸망의 예언’이 나온 게 8세기 중반.
그들은 그걸 막으려는 목적으로 갖은 노력 끝에 지구로 이주해왔다. 다시 달로 돌아갈 방법은 남지 않았다.
당시의 지구는 마력이 찾아올 시기.
장생종의 기준으로는 그리 오랜 세월도 지나지 않아 그들 중 일부가 힘이 점차 흩어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은마산 전설은 9세기 중반에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고, 그러니 그 시기와는 겹친다.
하지만 서연희는 은마산 전설보다 훨씬 이후에 태어났다.
그러면 어떻게 된 걸까.
‘동쪽으로 흐르는 달’은 사실 서연희와 관련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있는 ‘동쪽으로 흐르는 달’의 흔적이란 건 은마산 전설이 있고 난 이후, 가령 서연희가 태어난 이후의 사건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있으나 가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상념을 이어나가는 중에도 또 다른 홀로그램 메시지가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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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반응합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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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심장의 반응은 여전하고, 내 체감상으로는 통로를 지날수록 점점 더 거세게 박동하는 것 같다. 거기서 또 얼마쯤 걸었을까.
“와…….”
유해빈이 시선을 멀게 하며 감탄을 흘렸다.
이번에 우리 앞에 드러난 공간은 앞선 두 곳보다 훨씬 넓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 미터 이상, 우리가 서 있는 입구에서 저 끝까진 족히 백 미터는 될 듯했다.
들어오는 입구는 있지만 나가는 출구는 없는 광대한 공동.
유해빈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숫자가 많이 적네요.”
기병이나 보병 조각상 따위는 없었다. 기관 장치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나무로 만든 듯한 관이 세 개.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유해빈에게 일렀다.
“긴장 풀지 말고, 대비하면서 가자.”
“네.”
우리는 천천히 공동의 반대편, 관이 놓여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검은 심장의 반응이 더욱 강해진다.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십 미터 남짓.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폭음이 터지며 말 그대로 관뚜껑이 터져 나갔다.
그 안에 누워 있던 인영들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마력을 끌어올린 유해빈이 의문을 되뇌었다.
“저거…… 일단 아까처럼 조각상은 아닌 것 같네요.”
“인공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시체 느낌인데.”
천 년 이상 잠들어 있었을 텐데도 관을 박차고 나온 인영들은 뼈만 남은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칼도 살가죽도 온전했다. 다만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검디검은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 있고, 눈에선 별안간 붉은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그들의 전신으로 칠흑처럼 새까만 마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엿보는 눈’으로도 읽어낼 수 없다.
최소한 A급을 넘어서는 수준. 감지되는 기세로 판단해 보면…… S급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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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반응합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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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검은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우리와 맞선 세 인영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력을 빼앗아가려 한다.
하지만…….
터어엉-
이번엔 이전처럼 쉽지 않았다. 내 쪽으로 흘러들어오던 마력이 줄다리기하듯 팽팽한 상태로 허공에 멈춰섰다.
자아가 없는 검은 인영들이 해낸 대처가 아니다.
나는 공동의 벽면을 흘끗 바라봤다.
출구가 없는 벽. 그 너머에…… 뭔가가 있다. 그것이 검은 심장에 대항해 마력의 강탈을 막아내고 있었다.
내 쪽도 최종보스 보정으로 습득한 힘이니 선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이 유적을 만든 자들도 만만치 않네. 저 세 인영은 척 보기에도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다.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 여기기엔 너무 수상쩍은데.
그리고 다음 순간.
스으으으…….
세 인영의 몸에서 검붉은 안개가 뿜어져 나온다.
그들의 뒤편 허공에 마찬가지로 검붉은, 둥근 구체가 떠올라 있다.
그걸 보고 나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은마산(銀魔山). 은빛 초인이 사악한 마귀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은빛 초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사악한 마귀의 정체는 알겠다.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무슨 수로 저자들을 이곳에 둘 수 있었는지 알겠다.
크르륵…….
으흐으, 아하하하하-!
검붉은 안개에 휩싸인 세 인영이 미친 듯이 웃는다. 그들은 은마산 전설의 마귀. 고대인들이 그 시체로 침입자를 격퇴하려고 안배해둔 거겠지.
그리고 그 진실한 정체. 나는 그것까지도 알았다.
검붉은 안개. 힘을 발휘할 때 떠오르는…… 달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 그렇다면 오직 한 종족뿐이다.
달에서 온 장생종.
그들 가운데 타락해 사람들을 습격하며 힘을 보충한, 흡혈귀라 불리게 된 자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