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60화 (60/207)

#60화. Chapter 15. 다짐 (1)

“…….”

그러니까, 정말로 토끼 가면 본인이라는 말이지.

거기까지 인지한 나는 크게 세 가지 쟁점에서 의문을 가졌다.

우선 첫 번째.

토끼 가면의 정체가 무엇인가.

여우 가면과 함께 서연희가 내게 신원을 알려주지 않은 멤버. 그녀는 대단히 강하다.

경매장 사건 때 드러난 전력만 놓고 봐도 36 영웅급에 근접했거나 어쩌면 그 이상. 나도 반드시 이기리라 장담할 수는 없는 강자다.

하지만…….

“좀 심하게 센데.”

벽화를 통해 본 과거, 토끼 가면의 진정한 전력은 내가 상정한 것조차 월등히 능가했다.

만월의 장생종, 그것도 평범한 개체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도 특출난 놈과 단신으로 맞붙어 쓰러뜨릴 정도라면……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확실히 강하겠지.

한태강과 샬럿 테이트.

신체 포인트 기준으로 최소 팔십 후반대, 특정 부분은 구십 대에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초강자들.

그들과도 대적할 수 있는 경지였다.

여기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토끼 가면은 팬텀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여전히 힘을 아주 많이 감추고 있다.

아니면 지금보다 은마산 전설 시점의 그녀가 훨씬 더 강한 걸 수도 있고.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서연희에게 빈 소원이 나와 관련 있는지도 지금으로선 명확히 알 수 없다.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기에 의문이고, 나는 두 번째 쟁점으로 사고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두 번째 쟁점.

‘동쪽으로 흐르는 달’은 대체 무엇인가.

토끼 가면은 은마산 전설 당시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건 홀로그램으로 확인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해당 문장을 토씨 하나하나까지 면밀히 살펴보며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소유자였다’라는 어구.

겉보기엔 해석의 범위를 좁혀주는 것 같지만 실은 완전히 반대 의미다. 차라리 교묘한 함정이라 표현하는 게 옳겠지.

토끼 가면 이전에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소유한 자가 있었는지.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는지.

현재 그녀가 그것의 소유자인지.

내가 그것을 손에 넣어 파괴해도 되는지.

그 무엇도 특정할 수 없게 일부러 저런 식으로 서술한 것이리라. 저 아이템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언급조차 없고.

그래도 추측 가능한 여지는 있어서, 나는 세 번째 쟁점까지 종합해 현시점에서 가능한 만큼은 추론의 범위를 좁혀나갔다.

세 번째 쟁점.

토끼 가면, ‘동쪽으로 흐르는 달’.

<킬 더 이블>, 진유리와 세아.

이 각각의 요소들은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까.

<세계의 수호자>의 작가로서.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으로서.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로서.

이시혁과 정세빈의 아들로서.

내 동생 세아의 오빠로서.

서연희를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정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설.

상상력, 희망, 조바심.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혼재하는 가운데 벽화에서 흘러나오던 장면들이 끝났고, 나는 몸을 돌려 왔던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벽화를 구성하는 마력 구조는 완벽히 파악했으니 여길 빠져나간 뒤에도 내가 원할 땐 언제든 영상을 구현해낼 수 있다.

당장 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여길 나가서 세아를 안심시켜주는 것.

그리고 서연희와 대화를 나누는 일도 필요하다.

물론 나는 그녀를 믿는다.

서연희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시점까지 오는 데 못해도 몇 년은 더 걸렸겠지. 나는 나 자신보다도 서연희를 더 믿는다.

그녀가 나한테 해가 미치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내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그녀의 행동도 결론적으론 나와 우리의 목표를 위한 것이리라고.

지금도 그걸 의심하지 않는다. 서연희도 나와 정확히 같은 마음일 테고.

하지만 그녀와 나는 완전하게 같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니기에 내가 오늘 알아낸 것까지 고려하면 물어봐야 했다. 토끼 걔 정체가 뭐냐고.

서연희도 세세하게 다 알지 못할 수 있으나 아는 건 전부 말해달라고 부탁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되뇌며 발길을 재촉한 나는 아까 떠나왔던 공동으로 복귀했다.

내가 건네준 겉옷의 소매를 길게 빼서 아예 손은 보이지도 않게 만들어 놓곤 펭귄처럼 옷을 팔랑거리던 유해빈이 반색하며 물었다.

“일 다 끝나셨어요?”

“그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무슨 못된 짓하고 오셨는지 나중에 말씀만 해주세요.”

“다는 못 말해주는데…… 너 수학여행 데리고 와서 같이 하려고 했던 건 끝났어. 나머진 내가 보고 정리해서 차근차근 말해줄 테니까 오늘은 마음 편하게 쉬자.”

그러자 유해빈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잘거린다.

“근데 저희 수학여행 계속 진행할 수 있어요? 조사받고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런 건 내가 처리하면 돼. 일단 유적 붕괴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폭발이 멈추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도 밖으로 내보내진 거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그거야 제 연기력 믿어보세요. 제가 이래 봬도 가끔 기분 내려고 남장 안 하고 밖에 나갈 때도 있었는데 가발 쓰고 선글라스 끼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보던데요? 하긴 여자 옷 입으면 그냥 봐도 여자니까. 맞다, 최근에 이세아랑 진유리랑 지하철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걔들도 저인 줄 모르고 지나갔어요. 그때 진짜 식겁했는데. 아, 이건 연기랑은 상관없나? 여하튼 애초부터 여자고, 폴리모프 상태가 너프를 좀 심각하게 먹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옷 제대로 갖춰 입으면 되게 건강미 있는 여자 느낌이-”

“해빈아, 제발…… 그만 말해…….”

아까도 느낀 건데 이 자식 남자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해도 되는 말과 굳이 할 필요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말의 구분이 잘 안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제지하자 유해빈이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잠시 자기 발언을 곱씹는 것 같더니 얼굴이 살짝 발개진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아무튼 확실히 잘 모르는 척할 테니까 믿어보세요.”

“……고맙다.”

거기까지 대화를 마치고 나는 마력을 운용했다.

내 지배하에 있는 유적의 기능 중 일부. 우리를 밖으로 내보낼 마력 구성체가 옅게 일렁인다.

“산 정상으로 갈 거야. 이리 와서 옆에 붙어라.”

“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유해빈이 내 옆에 찰싹 붙었다. 바스락거리는 내 겉옷 재질이 반소매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뚝에 느껴졌고, 내가 내려다보자 유해빈이 우물거리듯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이거 옷은 숙소 가서 돌려드릴게요. 아, 근데 먼지도 많이 묻고 땀도 좀 흘렸는데 집에 가져가서 세탁해서 드리는 게 나으려나?”

“뭔 세탁이야. 그냥 줘도 돼.”

“에이, 그래도요. 좀 그렇잖아요. 교수님은 괜찮아도 제가 좀, 어, 음…….”

퍽 난처해하는 눈치. 여기선 잠자코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네. 빨아서 줘라.”

“아, 네! 깨끗하게 빨고 완전 새 옷처럼 만들어서 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이 옷 어디서 사신 거예요? 옷 예쁜데 다음에 저도 여기서 사게요.”

“그거 어디더라. 전에 편집샵에서 산 건데 거기 옷 이쁘긴 하더라.”

내가 매장 위치를 알려주던 그즈음 빛무리가 우리를 감쌌다.

어딘가로 향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 다음 순간.

“어……?”

유해빈이 천연덕스럽게 놀란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비치는 광경은 은마산 정상. 우리가 종적을 감췄던 그 자리였다.

그리고.

“교수님!”

“오빠…….”

진유리의 외침에 이어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눈이 새빨개진 세아가 이쪽으로 달려와선 나를 꼭 끌어안았다.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이세아와 진유리가 유적을 나선 직후.

“오빠……?”

멍하니 중얼거린 이세아는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뒀다. 은마산 정상이 올려다보이고,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산에 오르기 전에 거쳐온 입구 부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제일고 관계자들과 학생들, 신고를 받고 온 듯한 각성자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살피는 어느 곳에도, 이도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이세아는 모든 인내심을 다해 더 기다렸다. 어쩌면 시간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달랬다.

유적에 들어갈 때도 다른 곳으로 흩어졌으니 나올 때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시간 차이가 존재하거나 내보내지는 위치가 다를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애써 되뇌며 눈으론 계속해서 이도진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발과 어깨,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도진이 보이지 않고,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고 싶고,

그러면 자신이 제일 먼저 찾아내고 싶은데…….

한데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때까지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콰앙!

땅을 박찬 이세아는 높이 도약해 산 정상 쪽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뒤를 쫓은 진유리가 당황과 경악에 엉망이 된 목소리로 외쳤다.

“교수님! 교수님-!”

이세아는 비로소 실감했다. 진유리까지도 저렇게 이도진을 찾고 있잖은가.

그는…… 유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그곳에 남게 된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그렇게 돼버렸다면.

그에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은마산을 한 바퀴 빙 둘러 차츰차츰 올라선 이세아는 이윽고 산 정상에 도착했다.

공터를 중심으로 안전선이 둘러쳐져 있고, 그 주위론 그녀가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걱정스러워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갈라져 있던 암반은 그랬던 적이 없는 것처럼 멀쩡하다. 이도진의 모습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고, 이세아와 진유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며 다가온다.

“세아야! 어, 너 어디서 왔어? 진유리랑…… 유해빈이랑 교수님은?”

그 말에 이세아는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정이었다.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여기…… 뭐야? 왜…… 왜 멀쩡해? 오빠…… 우리 오빠는?”

급히 조사하고자 왔을 각성자들이 진유리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거냐는 질문.

이세아보다는 침착했으나 그런데도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진유리가 답했다.

“저희 유적 같은 데 있었는데…… 거기가 붕괴하려고 해서, 무너지기 직전에 저랑 쟤는 나왔어요. 정신 차려 보니까 산 입구였고, 근데 같이 있던 친구랑 저희 반 인솔자 교수님…… 혹시 저희 말고 두 사람 나온 거, 못 보셨어요?”

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게 곧 대답이었다.

진유리도 이세아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도진은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붕괴하던 유적에 남게 되어 그에 따른 화를 입었을지도 모르고, 기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오빠, 오빠아…….”

이세아는 넋이 나간 것처럼 되뇌며 산 정상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발에 닿는 암반은 단단하기만 했다. 무너졌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도진은 전혀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없었고, 그녀는 문득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5학년. 자신이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때 이세아는 오빠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에 떨었다. 오빠에게 앞으로도 동생으로 여겨지고 이쁨을 받고 싶어 서투른 식사를 준비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방 안의 불을 환하게 켰다.

밤새 볼을 꼬집고, 얼굴과 몸을 찬물로 씻어내고, 그전까지는 한 번도 마시고 싶은 적이 없던 쓴 커피를 몇 잔이나 들이켜면서 잠을 참았다. 오빠가 돌아왔을 때 깨어 있고 싶어서.

하지만 이도진은 다음 날 아침에야 귀가했고,

그때부터 이세아는 조금씩이나마 오빠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하지만 요즘엔 사이가 많이 좋아졌고,

그런데…… 지금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번엔 이도진의 잘못이 아니다. 이세아 자신은 빠져나왔는데 그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폭발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잘못한 건 누굴까.

과거엔 오지 않은 사람의 잘못이었다. 이도진이 잘못한 일이었다. 오빠가 오길 애타게 기다리던 어린 동생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세아는 이도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몸이 피곤해서 그만 친구 집에서 잤다고,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단 말을 들었으나 이번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이유였다.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올 수 있을 텐데 피곤해서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절대로 오지 못하는 상황인 거다.

그러니까 이번엔 이도진의 잘못이 아니고, 하지만 이번에도 이세아의 마음은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그래서 꼭 누군가에게 반드시 잘못을 물어야만 한다면…….

이번엔 누구의 잘못일까.

잘못이라고 확실하게 지칭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 그래도 꼭 한 명을 골라야만 한다면?

그러면 소중한 가족을 남겨두고 뻔뻔하게 혼자 빠져나온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다름 아닌 이세아 자신에게.

콰앙! 퍼억!

이세아는 주먹을 내뻗었다.

그녀의 공격에 직격당한 암반이 갈라지며 파편을 휘날렸다. 느닷없는 행동에 진유리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 뭐 하려고.”

“이거…… 다 부술 거야.”

이세아는 나직한 목소리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의지를 담아 답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이곳을 통해서 유적지로 향했다. 그러니 여기를 다 무너뜨리면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오빠를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조차 믿지 않는 말을 내심으로 되뇐 그녀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스아아아아-!

유적에 가기 전까지의 그녀로선 발휘할 수 없는 압도적인 마력. 그 힘으로 다시금 암반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산 정상이 거세게 흔들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경악해서 그녀를 응시한다. 방금 공격에 실린 마력이 거의 A급 각성자에 상당하는 수준이었기에.

“학생, 그러지 마요. 위험하니까-”

만류하던 이들이 흠칫해 발을 멈췄다.

이세아의 눈빛에 실린 기세. 쉽게 말리기 어렵단 걸 직감한 것이다. 그녀는 재차 주먹을 쥐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아마 그렇겠지.

정신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일까. 필시 그렇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산을 죄다 무너뜨려서라도 오빠를 찾을 수 있다면 이세아는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슈아아아아악!

그녀의 손에서부터 휘몰아친 마력이 암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기 직전.

“어……?”

이세아는 유해빈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는 게 빨랐을지 의식할 겨를도 없이 생각하는 게 빨랐을지.

어쨌거나 이세아는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유해빈의 목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교수님!”

“오빠…….”

진유리의 커다란 외침에 조금 가렸지만 이세아는 그렇게 말했다. 이도진이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저만치 앞에 서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세아는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디뎠다. 두 번째 걸음은 그보다 빨랐다. 그리고 세 번째 걸음.

“으갹!”

황망한 발걸음으로 달려간 이세아는 그대로 이도진을 끌어안았다. 도중에 누구와 부딪친 느낌이 들긴 했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도진의 몸을 감싸듯 두른 양팔에 힘을 더하며 되뇌었다.

“어디 갔었어…….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미안해. 나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이도진의 말투에서 미안하단 감정이 한껏 느껴졌다.

왜 미안해하는 걸까. 그가 뭘 잘못했다고.

이세아는 고맙기만 했다.

이젠 오빠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이트데이 때도.

경매장 사건 때도.

그리고 오늘까지.

가끔 늦을 때도 있지만.

그래서 속상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옆에 있어 줬으면 할 때 결국 오빠는 반드시 와준다고.

그러니 그녀 자신도 더 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빠를 살갑게 따랐던 예전처럼 대하는 건 시간이 걸리거나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은 그에게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거야.’

이도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다시피 한 이세아는 그리 다짐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마간 드러난 시야로 진유리가 주저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내가 쟤 밀쳤나?’

이도진에게 달려오며 부딪친 건 아마 진유리였나 보다.

“아…….”

밀쳐진 게 불만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볼멘소리를 내던 진유리가 이내 이도진과 이세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어째 부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네가 왜 부러운데?’

이세아는 내심 추궁했다. 뭐가 저리 부러워서 은근히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티를 팍팍 내는 걸까.

오빠가 있는 게 부러워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번뜩 드는 생각.

‘……네가?’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일부러 구체화하지 않았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세라라면 모를까 어딜 앙큼한 마음을 품는 건지.

나이 차이. 교수와 학생. 그런 걸 다 떠나서,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세라 언니라도…….’

여태까진 한세라 한 사람은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그것도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오래 못 봤잖아.’

못 본 사이 이세아 자신의 마음속에서 한세라라는 존재가 너무 과대평가된 걸 수도 있으니 그 점을 잘 알아봐야 할 듯했다. 6월에 한세라가 귀국하고 나면.

어쨌든 진유리는 아니었다.

“세아야, 잠깐만. 저분들한테 설명 좀 드리고.”

“……응.”

이세아는 비척비척 팔을 풀어내고 이도진의 옆에 섰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자신과 유해빈에게 닥친 상황을 설명해나간다.

이세아는 방금의 다짐을 한 번 더 되새겼다.

오빠가 달라졌으니까, 자신도 달라져야 한다고.

***

5월 6일 오후 열 시 무렵.

“흐으…… 좋다, 좋아.”

샤워를 마친 유해빈은 더운 숨결을 내쉬며 욕조에서 나왔다. 자욱한 김이 서린 욕실에 놓인 거울에 물을 뿌려 말끔히 하고 거기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그리곤 뿌듯한 목소리로 일렀다.

“나는…… 잘 컸어.”

폴리모프 상태인 지금도 여자처럼 꾸미면 꽤 괜찮지만 진짜 자신은 정말 아주 잘 컸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고, 유해빈은 챙겨왔던 옷을 입었다.

붕대를 둘러 가슴께를 가렸다. 흰색 티셔츠를 입고 속옷과 얇고 시원한 잠옷 반바지까지 입었다.

‘후드도 입을까?’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옷을 더 껴입진 않기로 했다. 어차피 들킨 데다 봄 날씨라 두껍게 입으면 더우니까.

그리고…….

‘이쪽이 더 좋아.’

그냥 이대로 대하고 싶어서.

곧 맞이할 순간을 떠올리며 즐겁게 웃은 유해빈은 욕실 문을 열고 나섰다. 이도진이 오려면 십 분쯤 남았겠지.

‘좀 힘들었지만 잘 풀렸으니까 됐어.’

조사단에게 설명을 마치고 수학여행을 재개하기까지 두 시간가량이 걸렸다. 유해빈, 진유리와 이세아. 세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 이도진이 조사단에게 상세히 정보를 알려줬고, 의심을 살 여지도 없었다.

‘아직 유적 어딘지 못 찾았으려나?’

유적의 위치는 이도진만 알겠지만 알려줄 이유도 없고, 알려줘서도 안 되는 터라 그 부분은 감춘 듯했다. 조사단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즈음 제일고 일행은 벌써 서울로 돌아가 있겠지.

‘보니까 거기 있던 것 중에 중요한 건 오빠가 다 챙긴 것 같고, 경주에서 할 일도 다 끝났댔고, 내일은 편하게 놀면 되겠네.’

경쾌하게 걸어 방 한쪽으로 향한 유해빈은 가져온 캐리어를 열었다. 오늘 입은 옷과 속옷을 봉투에 넣은 다음. 그녀의 시선이 캐리어 구석으로 향했다.

‘이건 어쩌지……?’

이도진에게 빌려 입었던 겉옷.

세탁해서 돌려준다는 구실로 챙겨놓았으나 솔직히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지 않았다.

그냥 돌려주기 싫고, 어디서 산 옷인지도 넌지시 캐물어서 들었고, 거기까지였다.

마음이 은밀히 속삭이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지는…… 그건 서울로 돌아가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 듯했다.

달칵.

그때 이도진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걸어오다가 유해빈과 눈이 마주쳤다.

“…….”

“…….”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 미묘한 긴장감은 좋지만 어색한 적막까지는 원치 않았던 유해빈이 쾌활하게 일렀다.

“고생하셨어요. 일은 다 잘 끝났죠?”

“그래. 너 신경 쓸 건 없고 이제 진짜 수학여행만 생각해. 하루밖에 안 남긴 했는데.”

“에이, 하루면 충분하죠. 아이스크림 사서 넣어놨는데 드실래요?”

샤워하고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그녀가 묻자 이도진이 짧게 답했다.

“좀 있다가 씻고 먹을게.”

“어…….”

목소리를 흘리면서 유해빈은 고민했다.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것과 당황한 티를 내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효과적일지.

전자보다는 후자가 좀 나을 듯했고, 게다가 이미 말을 흘렸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늦었다.

그녀는 조금 민망해하며 일렀다.

“그으…… 신경 쓰지 마시고 씻으셔도 되는데. 저 눈 꼭 감고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을게요.”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고. 아니면 미안한데 십 분만 산책하고 오면-”

“아, 그건 싫어요. 저 씻었는데 방에서 나가기는 싫은데.”

“……그러면 음악 듣고 있어.”

자기 캐리어를 뒤적인 이도진이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조심성 없이 속옷만 챙겨 들어가려던 것과 달리 들고 있는 옷가지는 겉옷만 보였다. 속옷 같은 건 그 안으로 뭉쳐둔 거겠지.

‘그래도 좀 의식은 하나 보네?’

유해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음악을 듣고 있을 거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배경음처럼 귀에 담으며 눈만 살짝 감았다.

그리고 십수 분이 지난 다음.

“후우…… 해빈아, 아이스크림 뭐 있냐?”

샤워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것인지 욕실을 나선 이도진이 아까보단 훨씬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고, 유해빈은 다음 작전을 구상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셔벗 종류랑 우유 들은 거랑 몇 개 사 왔어요. 음료수랑 과자도 좀 샀는데 맥주는 제가 못 사서, 음…… 그건 좀 아쉽네요.”

그렇게 답하며 이도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처럼 침묵이 일어도 어색하진 않았다. 서로 대화할 의지는 있지만 할 말을 찾는 미묘한 분위기.

정확히 유해빈이 원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슈우우우…….

갑자기 허공에 마력의 빛무리가 나타났다. 이내 홀로그램으로 구체화했고, 유해빈으로선 이 상황에서 썩 달갑지 않은 사람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팬텀의 보스였다.

<오늘 둘 다 수고했어.>

“……네.”

“아, 마침 제때 연락하셨네요.”

유해빈의 나직한 대답과는 달리 이도진은 그녀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한데 그때.

<흐응……?>

보스가 뭔가 미심쩍어하는 듯한 콧소리를 냈다.

유해빈을 쳐다보고 이도진을 쳐다본다.

이어서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진 거리를 살피고, 그 모든 것을 아울러 이 방의 정경 전체를 눈에 담는다.

그리고.

그녀가 대뜸 묻는다.

<해빈이 혹시 들켰니?>

“아앗……!”

유해빈은 놀라서 새된 목소리를 냈다.

실로 어마어마한 직감.

그것에 일순간 압도당한 그녀는 경계심을 되새기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스는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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