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61화 (61/207)

#61화. Chapter 15. 다짐 (2)

***

<해빈이 혹시 들켰니?>

대뜸 던진 질문에 다른 것보다도 감탄스럽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눈치 진짜 빠르네…….

내심 중얼거린 나는 그 심경 그대로 서연희에게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바로 알아봐요?”

<글쎄? 그냥 감으로?>

상당히 의뭉스럽게 들리는 대답. 내 옆에 있던 유해빈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보스는 웃고 있다…….”

<응? 나 이럴 땐 원래 잘 웃어. 내 귀염둥이 하는 거 보면 귀엽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안개의 마녀’로서의 서연희는 몹시 차가운 성격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나를 대할 때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여유 있게 웃음을 머금고, 목소리도 상냥하면서 장난기를 내비치는 느낌이지.

나는 간결하게 오늘 상황을 설명했다.

“은마산 안에 유적지 같은 게 있더라고요. 일이 좀 생겨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그나저나 왜 나한테만 비밀로 했어요?”

조금쯤 원망까지 담은 타박.

아마 서연희는 처음부터 알았겠지. 소원 계약을 맺을 때 본 과거로 유해빈이 여자라는 걸 알았을 거다.

나도 미리 알았다면 ‘그 발언’도, 방을 같이 쓰자는 제안도, 어제의 실수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답한 건 유해빈이었다.

“그냥 아는 사람 적을수록 좋으니까…… 그래서 숨기고 싶었죠. 그래도 계속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적당한 시기가 오면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적당한 시기에 밝혀졌니?>

“아뇨…….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달랐죠…….”

<어머, 그건 아쉽게 됐네. 여하튼 난 해빈이 의사 존중해준 거야. 우리 일이랑 당장은 크게 상관없고 개인 프라이버시에 가까워 보여서.>

마침 화제가 적절히 넘어간 듯해 나는 서연희에게 일렀다.

“그 프라이버시 말인데요.”

<왜?>

“여기서 길게 얘기하긴 그렇고 서울 가서 금요일에 말씀드릴게요. 한꺼번에 정리해서 보고할 일은 보고하고, 제 쪽에서 여쭤볼 부분도 몇 개 있고요.”

<표정 보니까 적당적당한 일은 아닌 것 같네?>

“좀 많이 큰 건이에요.”

편안하던 분위기가 적잖이 가라앉았다. 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연희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도 완연히 달라졌다.

팬텀의 활동 계획보다 더 중대한 사안. 배신자에 관련한 일임을 내 목소리만 듣고 짐작한 듯싶었다.

은마산에서 내가 본 벽화, 다시 말해 토끼 가면과 관련한 일이라는 것까진 아무리 서연희라도 모르겠지만-

<보고할 게 뭔지는 알겠고, 나한테 물어볼 건…… ‘프라이버시’려나?>

“…….”

유해빈과 내 일을 단번에 알아챈 것 이상으로 놀라운 상황 판단력. 나는 경탄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눈치 왜 이렇게 빨라요?”

<글쎄? 내 귀염둥이 일이니까?>

“……네,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정말 감격스럽네요.”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면 섭섭한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거 알지?>

“아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부끄러워서?>

“…….”

“………….”

유해빈이 초점 없는 눈으로 나와 서연희의 홀로그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옆에서 저런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더 민망해진 나는 빠르게 대화를 정리했다.

“금요일에 봬요. 그날은 늦게까지 시간 내주셔야 하는 거 참고하시고요.”

<알겠어. 그러면 푹 쉬고, 해빈인 어제보다 마음 편히 자겠네?>

“네…… 그럴 것 같아요.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정말, 아주 감사합니다, 보스.”

<고마울 게 뭐가 있니. 내가 데리고 있는 소중한 단원인데 인간관계랑 정신건강도 가능한 만큼 챙겨야지. 혹시 도진이가 앞으로도 못살게 굴면 나한테 꼭 말해? 혼내줄 테니까.>

“……네.”

<그럼 너무 늦게까지 수다 떨지는 말고, 서울 와서 봐.>

그리곤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분명 유해빈 얘를 팬텀에 데리고 온 사람은 난데 어째 서연희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챙겨주는 것 같단 말이지. 전부터 마음에 든다더니 진짜 되게 마음에 들었나?

조금 반성하면서 나는 유해빈에게 일렀다.

“너 이거 진짜 솔직하게 말해봐. 있는 그대로 거짓말 안 하고.”

“……뭘요?”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삐딱해진 어조로 유해빈이 되물었다. 교수님, 교수님 하면서 그렇게 잘 따르더니 서연희의 상냥함에 그새 홀라당 넘어간 걸까.

살짝 서운한 감정까지 느끼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너 대하는 거…… 좀 막 하는 감이 있나?”

“네……?”

“한마디로 내가 좀 못된 선배인가? 말투랑 행동이 너무 차가워서 대하기 껄끄럽고 그래?”

“…….”

대답 없이 유해빈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분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나한테 쌓인 게 많았나?

하기야 두들겨 패고, 부끄러운 말 하라고 시키고, 어제도 무척 곤란하게 만들긴 했지. 말투랑 행동도 되돌아보면 더 살갑게 대할 수 있었던 게 뒤늦게야 보인다.

십여 초의 침묵.

한숨을 폭 내쉬던 유해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

“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마도 용족의 언어.

나는 유해빈에게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 몰라도 돼요.”

“욕한 거지? 어감이 딱 그렇던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저도 잘 몰라요.”

“네가 말해놓고 왜 몰라. 이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못 알아듣는다고 욕까지 하네?”

“어, 어? 반성하신다면서 표정 왜 그래요. 가만 보면 교수님 진짜 꼰대 같음. 그래 봐야 일곱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그 정도면 나 이 년만 지나봐. 스무 살 되면 사실상 동년배지.”

꼰…… 뭐요? 일곱 살이 차이가 안 나는 거라고?

논리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대응에 당황하고 있으려니 유해빈이 몸을 홱 돌렸다.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선 냉담하게 이른다.

“저 아이스크림 하나만 주세요. 오늘 일 많이 했더니 갑자기 피곤해져서 못 나가겠어요.”

“……뭐로.”

“교수님이 드시고 싶은 거요. 그거 저 먹을래요.”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다…….”

수고한 건 사실이고, 내가 여태 막 대해서 쌓인 울화가 한꺼번에 치밀어오른 것 같고, 그래서 나는 시키는 대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가져다줬다. 내가 무조건 거르는 팥 아이스크림.

“……이런 거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지.”

거친 손길로 포장지를 뜯어낸 유해빈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

유해빈이 용족의 언어로 ‘착한 쓰레기’라는 말을 내뱉고, 짜증 나니까 빌린 옷은 절대로 돌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즈음.

그보다 한 층 위의 숙소에 머물고 있던 진유리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저래?’

둘이서 같은 방을 쓰는 이세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눈길에 진유리는 의아해하며 생각했다.

‘나한테 물어볼 거 있나?’

유적에서의 사건은 잘 마무리됐고, 진유리와 이세아 둘 다 대단한 기연을 얻었다. 마력 총량이 크게 상승한 것이다.

‘나는 B급이랑 A급 중간쯤. 쟤는 A급 기준치까지 오른 것 같던데.’

마력 보유량은 많을수록 더 올리기 힘들다는 게 상식이다.

가령 진유리와 이세아가 S급 각성자였다면 이만큼 지대한 성장을 이루기는 힘들었겠지.

그러나 아직 미숙한 그들은 유적의 마력을 얻어 족히 연 단위의 성장세를 단번에 달성했고, 그래서 이번 사건은 결과적으로 보면 굉장히 잘 풀린 일이다.

이도진도 무사하고, 누구 하나 다친 사람도 없고, 얻은 것만 있으니까.

한데 어째서 이세아가 저렇게 심각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진유리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고, 해서 이세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마력 얻은 거 난 아무 이상 없는 거 같은데.”

짚이는 거라곤 그 정도였다. 외부에서 얻은 마력 상승을 다루기 어려워하는 것.

마력의 세밀한 조정 측면에서 자신보다 앞서는 이세아가 곤란을 겪는단 건 좀 의문이지만 그것 말고는 정말로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그런 거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한데 그때.

이세아가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연상이랑 사귀는 거 어떻게 생각해?”

“엥?”

뜬금없게 들리는 질문이라 진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했더니 연애 얘기라니. 곧바로 드는 의문에 되물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런 쪽은 아예 관심도 없는 앤데 어째서 연상이 어쩌니 묻는 걸까. 기실 되물으면서도 진유리는 이세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으며 역시나 그녀가 부정했다.

“나 말고 네 생각 묻는 거야.”

“……연상?”

진유리는 당황스러웠다. 최근에 관계가 나아지긴 했으나 이런 화제는 좀 부담스러워서.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은 해야 했고, 진유리는 우물거리듯 답했다.

“연상, 나쁘진…… 않지?”

그렇게 답하며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진유리가 보기에는 멋있는 연상 그 자체라 할 만한 사람. 그 이미지를 토대로 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이세아가 재차 물었다.

“나이 차이 어느 정도까지 나도 되는데?”

“음…… 앞자리만 같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 년만 지나면 자신은 스무 살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그 무렵이면 스물일곱. 열여덟과 스물다섯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고,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진유리의 입가에 일순간 미소가 스몄다.

그 모습에 이세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으나 진유리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세아는 드디어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했다.

“가르쳐주는 선생님 존경할 수는 있는데, 거기서 더 넘어가는 건…… 난 개인적으로 별로야.”

“왜?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감정…… 앗!”

이젠 진유리도 깨달았다.

‘뭐야? 얘 그러면…….’

그녀 본인도 무어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걸 감지하고 건넨 질문들이었던 거다.

진유리는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어? 아, 너, 뭘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도진 교수님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어, 아니거든? 나이 차이도 나고 교수님이기도 하고-”

“앞자리만 같으면 상관없다며. 좋아하는 거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그으, 일반적으로 봤을 때-”

“처음부터 네 생각 물은 거잖아.”

“앗…….”

논리정연한 반박에 일순간 반박할 말을 잃은 진유리는 결국 무작정 잡아뗐다.

“어쨌든 아냐. 너 오빠를 내가 왜 좋아해?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아니면 말고.”

짧게 답한 이세아가 자기 침대로 걸어갔다. 소리 없이 몸을 누이더니 그 자세 그대로 진유리를 응시한다.

괜히 움츠러드는 느낌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당장 해줄 수 있는 호의를 베풀고자 이세아에게 물었다.

“……잘 거면 불 꺼줄까?”

“됐어.”

“그래…….”

작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두 사람의 대화 양상.

진유리는 잠깐 그것에 화가 치밀었으나 그보다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막막함이 더 컸다.

뭘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는데 본인도 아니고 가족에게 선고받은 것이다. 꿈도 꾸지 말라고.

이윽고 이세아가 조용히 일렀다.

“우리 오빠 약혼녀 알아?”

“……한세라 씨?”

이름은 진유리도 익히 들어봤다. 영원 길드의 대표인 한태강의 외동딸.

들리는 말로는 문자 그대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이세아가 말을 이었다.

“그 언니, 진짜 예뻐. 현실에 있는 사람 아닌 것처럼. 유학 가 있는데 다음 달에 졸업하고 한국 올 거야.”

“…….”

진유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힘없이 대꾸했다.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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