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Chapter 15. 다짐 (3)
말 그대로 ‘어쩌라고’였다. 한세라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예쁘다, 다음 달에 한국으로 귀국한다, 전혀 듣고 싶지도 않은 그런 정보들을 자신에게 미주알고주알 얄밉게 털어놓는 저의가 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이세아의 의도는 무척 명확해 보였고, 해서 진유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치밀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자기까지 나설 필요도 없다 이거야?’
‘이도진의 동생으로서 넌 절대 허락 못 한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도 싫다는 걸까. 거의 파혼 직전에 이른 약혼녀를 언급하는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파혼한다면서.’
소문이 돌기도 했고, 이도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과정에서 진유리 본인이 얻은 정보도 있었다.
사실상 파혼은 확정적이라고.
약혼 기간이 길었다 하나 이도진과 한세라는 연인이라 할 수도 없는 관계란다. 게다가 영원 길드의 한태강이 이도진을 몹시 탐탁지 않게 여긴단 말도 파다하고.
근래 이도진이 대단한 성취를 이뤄낸 건 부정할 수 없을 터. 그러나 당사자 두 사람이 분명한 의지를 보여 사태의 향방이 극단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결국엔 파혼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리고 이어진 상상, 혹은 망상.
‘교수님 만약에 파혼하시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된다. 누굴 만나든 만나지 않든 이도진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지.
‘엄마랑 아빠가 나 남자친구 언제 데려오냐고 궁금해하잖아.’
진유리는 그때마다 관심 없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부모님도 그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길 원하지 정략적인 혼인으로 기업의 성장을 도모할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말해왔다.
하지만…….
‘……둘 다 되면 좋잖아.’
예를 들어 앞길이 창창한 마학자 이도진이 국내 수위의 기업인 대명 그룹의 외동딸과 약혼하게 된다면?
이도진의 연구에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대명 그룹도 이도진의 연구를 바탕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당사자인 이도진과 진유리가 서로 원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만약 두 사람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전하게 윈-윈이다.
진유리의 부모님은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좋다.
당사자인 두 사람은 당연히 행복하다.
대명 그룹은 성장하고, 이도진의 마학 연구는 더 큰 성과를 거둬서 이 나라…… 아니, 전 세계적인 발전까지 도모할 수 있다.
해서 그녀가 생각하기엔 나쁠 게 없었다.
단 한 사람, 저기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뭔가를 보고 있는 시누이(예정)만 제외한다면.
‘너만, 너만 괜히 옆에서 아무 소리 안 하면…….’
갑자기 열이 받은 진유리는 이세아를 노려봤다.
저쪽에서 눈치채면 안 되니 불과 일 초도 지나기 전에 고개를 돌렸지만.
그리곤 심호흡하며 앞으로의 전략을 세워나갔다.
‘그래, 내가 굳이 쟤를 적대할 필요는 없잖아?’
수년 동안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전보다는 그래도 친해졌고, 샬럿 테이트에게 훈련도 같이 받는다. 솔직히 적대해봐야 손해 보는 건 진유리 자신이고, 지금부터라도 이세아와 더욱 돈독해져 든든한 아군으로 만드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으흠, 에헷.”
상당히 긴장한 상태여서 이상하게 들리는 헛기침 소리.
이세아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응시한다. 진유리는 가능한 한 살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세아야, 너 뭐 봐?”
햇수로 오 년을 알아오며 이세아를 성을 떼고 ‘세아’라고 부른 건 이게 처음이다. 대단히 어색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진유리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고…….
“……오지 마.”
이세아의 나직한 거부. 그러나 진유리는 굴하지 않고 재차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왜? 뭐 재밌는 거 보면 나도 같이 봐. 방에 우리 둘만 있고 심심하잖아.”
“……나 경고했어.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이쪽으로 오지 마.”
“응? 뭔데?”
저러니까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이세아에게 친근하게 굴겠다는 목적 말고도 그냥 뭘 보고 있길래 저러는가 싶었다.
‘교수님 사진 같은 건가?’
진유리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좁은 범위로 국한돼 있었다. 이쪽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고, 아까 ‘우리 오빠 넘볼 생각하지 마’라는 식의 경고를 들었으니 진유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도진에 대한 이미지와 맞지 않는 사진 같은 걸 보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짐작한 것이다.
‘오히려 좋은데.’
어떤 모습이든 전부 이도진이다. 멋있는 모습 외에 학교 밖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그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진유리는 이세아의 침대 바로 앞까지 이르렀고,
“궁금한데 나도 보여주면 안 돼?”
아마도 여태 살면서 한 번도 내본 적 없지 않을까 싶을 만큼 호의가 담뿍 담긴 목소리로 물으며 이세아가 누운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휴대전화로 뭘 보고 있는지 살피고자.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아…….”
그녀는 자그마한 소리만 흘리며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세아가 고저 옅은 어조로 이른다.
“안 보는 게 좋다고 했잖아.”
“아…….”
‘그 뜻이었구나’라고, 진유리는 이세아가 자신을 배려해줬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의 사진이 비치고 있었다. 진유리는 그녀의 외견을 어떤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그런 말도 손색이 있었다. 왜냐면 지금까지 사진 속의 여성에 근접하는 미인조차 본 적이 없으니까.
타인과 비교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폐였다.
예쁘다, 아름답다, 매력 있다, 눈이 부신다, 후광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 말들의 백 배나 천 배쯤 되는 수식어가 있다면 그걸로 표현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진유리의 어휘력은 그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얼굴의 이목구비,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서 있으면서 드러난 몸선과 피부, 모자라거나 과하지 않는 정도에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꾸민 전체적인 스타일까지.
그냥 완벽했다.
저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가능한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예뻤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어져 온 대화와 그전에 들은 말까지 맥락을 살폈을 때, 저 여성이 누구인지 진유리는 이세아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친절하게 확인사살까지 해줬고.
“세라 언니 유학 가기 전에 만났을 때, 나 원래 사진 같은 거 잘 안 찍는데, 너무 예뻐서 찍었어.”
“그, 그래……?”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저런 사람이 눈앞에 있고 자기랑 친하면,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곧이곧대로 감탄하는 건 너무 초라하기에 진유리는 무의미한 저항이나마 괜스레 중얼거렸다.
“사진, 잘 찍었네.”
“못 찍은 거야.”
“그으, 이거 사진 보정…… 어떻게 한 거야? 되게 잘했-”
“보정 안 하고, 어플 안 쓰고, 필터도 안 씌웠어.”
‘거짓말하지 마!’라고, 진유리는 그렇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사진이 현실 그대로라고, 혹은 이세아의 말대로 현실보다 못한 사진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이상하니까.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성형과 시술. 그런 수단들이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건 진유리 스스로 커트했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다 해도 저 외견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냥, 그냥 어마어마하게 예쁜 거다.
그래서 진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되게…… 예쁘시네…….”
마지막 배려인 건지 이세아는 답하지 않았고, 진유리는 터덜터덜 걸어서 자기 침대에 누웠다. 탁자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드니 꺼진 화면으로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만하면 이세아만 빼고 제일고 내의 ‘여학생’은 모두 가볍게 압도할 수 있다고 여겨왔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거울을 보기 싫은 기분이었다.
‘나도 몇 년 지나면…….’
그러나 마음 한쪽의 부정적인 생각이 속삭였다.
몇 년 지나면 뭐, 네가 뭘 어쩔 건데. 저만큼 예뻐진다고?
‘……그럴 수도 있잖아.’
진유리는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가능성이 크냐 작냐를 떠나서 지레짐작해서 지고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그즈음 반대편에서 이세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어째 조금쯤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진유리는 내심으로만 원망을 토로했다.
‘이세아, 한세라. 이름에 세 들어가는 사람 다 싫어…….’
그때 별안간 드는 생각.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영웅, 대마법사 정세빈의 이름에도 ‘세’가 들어간다.
화들짝 놀란 진유리는 서둘러 생각을 정정했다.
‘방금 그건 취소…….’
***
5월 7일 금요일, 오후 6시 무렵.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수학여행이니까,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라.”
“네-!”
제일고에 도착한 학생들은 담임의 주의사항을 듣고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다. 유해빈은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이도진에게 일렀다.
“교수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이세아 잘 가고, 유리멘탈 너는…… 음, 너는…….”
“……시비 걸지 말고 가.”
“어, 그래. 암튼 다음 주에 봐요!”
손을 휘적휘적 흔든 유해빈은 캐리어를 끌고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유리멘탈 쟤 진짜 유리멘탈 됐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저러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계속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게 조금 의아하다고 유해빈은 느꼈고, 곧 그런 생각을 지워냈다.
‘자기 알아서 하겠지.’
사이는 나빠도 유해빈은 진유리의 근성만은 인정했다. 실의에 빠질 일이 있어도 알아서 극복하겠지. 그 이상 신경을 써줄 만큼 친하지도 않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달칵-
빠른 속도로 귀가한 유해빈은 거주 중인 오피스텔의 문을 열었다. 며칠 집을 비워서 그런지 공기가 제법 싸늘했고, 그녀는 곧장 가지고 있던 캐리어를 열었다.
‘다른 건 나중에 정리하고, 일단 이것부터.’
그녀의 오른손엔 옷가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도진에게 빌리고, 세탁해서 돌려주기로 한 겉옷.
구겨지지 않게 잘 개어둔 그 옷을 간이 거치대에 걸어두고, 그녀는 잠시간 면밀히 살피며 고민했다.
‘……진짜 이래도 되나?’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계획. 들키지 않으면 그뿐이긴 하나 유해빈 본인이 생각하기에 나쁜 짓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그녀는 옷을 가만히 쳐다보며 고민했고,
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망설임을 말끔히 날려 보냈다.
‘착한 쓰레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는지.
팬텀의 보스. 그녀의 말에 실린 뼈를, 유해빈 자신에게 나대지 말라고 경고한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선 자기가 너무 차갑게 대해서 미안하다느니 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해댔고.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나 열이 받았고, 유해빈은 결론을 내렸다.
‘내 잘못 아냐.’
어디서 산 옷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 옷의 디자인과 형태도 정확하게 인지했다. 유해빈은 의지와 기대감이 가득 서린 손길로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무릎 위까지 드러나는 치마. 품이 넉넉한 상의. 모두 여성용 옷이었다.
이윽고 유해빈은 입고 있던 모든 걸 벗었다. 그런 다음 옷장 서랍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속옷 상의와 하의를 입고, 꺼낸 옷들을 입었다. 마스크를 쓰고, 정교하게 만들어 감쪽같은 긴 머리 가발까지 썼다.
이제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딜 봐도 건강한 매력이 한껏 뿜어져 나오는,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여학생.
눈가를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쓰고 예쁜 샌들까지 신으니 완벽했다. 이러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지.
한껏 꾸민 옷차림으로 다시 집을 나선 유해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택시를 잡았다. 이삼십 분쯤 걸렸을까.
목적지 근처에 내린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번화가에 자리한 여러 가게. 그중에 가려고 했던 곳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에 유해빈은 곧바로 물었다.
“여기 남자 봄에 입는 아우터는 어디 있어요?”
“저기 왼쪽 코너 도시면 그쪽이에요. 남자친구분한테 선물하시게요?”
“네, 하나 사주려고요.”
점원이 사근사근한 어조로 건넨 질문에 뻔뻔하게 답한 유해빈은 들은 대로 왼쪽 코너를 돌아 남자용 옷이 걸려 있는 위치로 향했다.
‘음…… 진짜 예쁜 거 많네?’
사려고 했던 옷 외에도 눈에 띄는 제품이 몇 개 있었다. 옷 돌려줘야 할 사람한테 잘 어울릴 법한, 그 사람은 누더기를 걸쳐도 잘 어울리긴 하겠지만, 여하튼 선물해주면 괜찮을 듯한 것들이 더러 있었고…….
‘아냐, 너무 나가면 안 돼.’
아쉽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의심을 사면 아예 수습할 여지가 없어진다.
옷 빌려준 사람이 자기 옷을 돌려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 이상의 어필은 지금 당장은 욕심이다.
‘아, 저깄네.’
원하는 옷을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 유해빈은 점원에게 물었다.
“이 옷 치수 더 큰 것도 있죠? 진열된 거 말고 새 옷으로요.”
“그럼요. 가져다드릴까요?”
곧 점원이 옷을 찾아서 가져다줬다. 그걸 들고 계산대로 향한 유해빈이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십칠만구천 원입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 현금으로요. 영수증 괜찮아요.”
흔적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니까. 지출이 꽤 컸으나 유해빈은 개의치 않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 한 시간가량이 소요됐고 시계는 어느새 오후 일곱 시 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도진 씨는 보스랑 만났으려나?’
서울로 올라와서 만난다고 했으니까. 그녀로서는 아직 들어설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그들만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겠지. 밤늦게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했다.
‘흠…… 상관없어.’
약이 오르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것과 별개로 만족하고 있었다. 저쪽은 결승선 앞이고, 할 일이 많은 이도진을 배려해 여유를 부리고 있는 듯하지만…….
‘난 아니거든.’
후발주자는 그런 건 신경 안 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차후 자신이 비슷한 지점에 이른 뒤에도 그 여유 있고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때를 기대하며 유해빈은 입은 옷을 죄다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몸을 말끔히 씻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이십여 분.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어내며 거실로 나온 그녀는 옷을 걸어두는 간이 거치대를 바라봤다.
이도진에게 빌린 겉옷.
그리고 또 하나. 아까 구매한, 그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옷이 나란히 걸려 있다.
‘나 진짜 변태 같네…….’
잠깐 자괴감이 들었으나 유해빈은 무시하고 손을 뻗었다. 양심에 찔린다고 중단할 거였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오른손엔 이도진에게 빌린 옷.
왼손엔 그것과 같은, 아까 구매해 마법으로 간단히 세척해둔 옷.
두 개의 옷을 한눈에 담으며 유해빈은 생각했다.
‘도진 씨 옷 되게 깔끔하게 입어서, 그냥 보기엔 차이도 없네?’
아마 몇 번 입지 않은 옷인지도 모른다. 육안으로 보기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이건 신경 써야겠네.’
이도진의 옷에 은은하게 남아 있는 체향.
반면에 방금 구매한 옷은 새 옷 냄새가 나고, 착용감이 아예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유해빈이 떠올린 해결책은 간단했다.
‘내가 집에서 입고 있으면 되지.’
월요일 아침까지 이틀 하고도 한나절.
그동안 이 옷을 입은 채로 먹고, 자고, 생활하면 착용감이 자연히 스며들지 않겠는가. 다시 생각해봐도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유해빈은 새 옷의 태그를 잘라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옷을 몸에다 걸쳤다. 착용감도 더해지고, 유해빈 자신의 체향도 스며들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새 옷이라는 느낌이 없어지겠지.
그런 다음에 세탁까지 하는 건, 그러면 다시 새 옷 느낌이 날지 옷 상태를 보고 고려해봐야 할 테고.
‘아, 진짜 좀 되게 변태 같긴 해…….’
아까보다 더해진 자괴감. 이래서야 이도진을 탓할 입장도 못 된다. 그는 모르고 그런 거지만 자신은 명확한 의지로 이러는 거니까.
그때 이도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도진 씨: 월요일에 옷 돌려주면 된다 (19:57)
단순히 옷을 돌려달라는 뜻이 아닐 터였다. 지금 보스와 만나서 회의 중이고, 그에 따라서 어떤 계획으로 일을 해나갈지를 알려주려는 거겠지. 그건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둘이서 양주 홀짝이며 흑막처럼 어른 분위기를 낼 걸 생각하면 열 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해빈은 겉옷의 지퍼까지 채우고 홀로 중얼거렸다.
“나도 잘못하는 건데…… 그래도, 그쪽도 못됐잖아요.”
착한 쓰레기와 상냥한 최종보스. 두 사람 모두를 탓하는 말이었다.
***
집에 돌아와서 얼추 정리를 끝낸 나는 세아에게 일렀다.
“오빠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게. 좀 늦을 거야.”
“……어디 가는데?”
“아, 친구랑 좀 보기로 해서.”
“…….”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긴 한데 어쩐지 자제하는 듯한 기색. 그리고는 짧게만 일렀다.
“지하철 첫차 시간보다 늦게 올 거 같으면 미리 전화해.”
“……그거 무슨 기준이야?”
그전에 돌아올 생각이긴 했으나 궁금해서 물으니 세아가 새침하게 답했다.
“그거 넘어가면 외박이니까.”
“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늦을 거야. 두 시나 세 시쯤?”
“……그것도 늦잖아.”
“그렇긴 하지. 최대한 빨리 올게.”
“알겠어.”
얘가 오늘은 되게 선선하네. 짜증을 안 내는 건 아닌 듯한데도 평소보다 묘하게 태도가 차분하다.
한 번 봐준다, 그런 느낌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심지어 현관으로 마중까지 나온다.
“……다녀와.”
“어, 그래. 오면서 뭐 좀 사다 놓을까?”
“맘대로.”
그리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주면 주는 대로 다 먹는 스탠스였는데 이 부분도 좀 달라졌고.
집을 나서고 서연희와 만난 자리에서 ‘우리 세아가 달라졌어요’라는 요지의 얘기를 꺼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경주에서 오빠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됐다, 그런 거 아닐까?”
“애가 저 없어졌을 때 걱정 많이 하긴 했는데…… 저는 미안하죠.”
유적의 정보를 얻느라 하지 않아도 됐을 걱정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자 서연희가 눈빛을 반짝이며 묻는다.
“맞아, 그건 어떻게 된 거니? 얘기가 나왔으니까 자세히 물어봐야겠네.”
“그전에 제일 먼저 말씀드릴 것부터 알려드리고요.”
잠시 기다려달라는 식으로 답한 나는 서연희의 잔에 술을 채워줬다. 내 잔은 서연희가 채워줬고, 우리 둘만 있는 공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길 십여 초.
얼음도 타지 않은 독한 술을 들이켠 나는 입을 뗐다.
“배신자, 유럽 쪽. 알아냈어요.”
“누군데?”
단출한 질문.
나는 조용히 답했다.
“아르노 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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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5월 6일 자정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중 [은마산에서 추락한 학생 전원]을 위기에서 구해낼 것
-대상 목록: 유해빈, 이세아, 진유리 총 3인
-클리어 보상: 유럽의 36 영웅 중 확인된 배신자 1인의 이름
-유럽의 확인된 배신자: ‘몽상가’ 아르노 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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