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Chapter 15. 다짐 (4)
은마산 유적에 갇혔을 당시, 세아와 진유리를 바깥으로 내보내자마자 떠오른 메시지였다.
세아와 진유리, 유해빈. 세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게 클리어 조건이었으니까.
내보낸 두 사람은 붕괴하려던 유적을 나선 시점부터 위기상황이 아니게 됐다.
유해빈도 폭발이 멈추고, 유적의 통제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 위기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때 클리어된 거겠지.
여하튼 서브 퀘스트의 클리어 보상으로 나는 유럽 쪽에서 확정된 배신자 한 놈의 이름을 알아냈다.
‘몽상가’ 아르노 뒤레.
지(地) 속성 마법의 대가로 준비한 영역 내에선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사.
과거엔 36 영웅 내에서 분위기 메이커였던 자.
그리고 지금 내게는…….
“그 새끼 한국 있는 동안, 그 안에 죽일 거예요.”
마땅히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할 배신자일 뿐이다.
분명 궁금할 텐데도 서연희는 놈을 배신자라 지목하는 근거를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 자신의 의문과 무관하게 내가 할 일에 필요한 것들만을 물었다.
“배신한 동기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러면 그것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겠네. 무턱대고 죽이긴 싫잖아?”
왜 배신했는지.
배신 자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놈을 죽이기 전에 나는 그런 걸 알고 싶었다. 그래야 죽어가는 놈에게 똑똑히 말해줄 수 있으니까.
네가 왜, 누구에게 죽는지를.
“꼭 한국에서 죽여야 해? 기한이랑 장소를 넓게 잡으면 쓸 수 있는 수단도 훨씬 많아질 텐데.”
“무조건 한국일 필요까진 없어요. 그래도 시기를 빨리 가져갈 거고, 그러면 그놈이 여기 있는 도중이겠죠.”
<킬 더 이블> 2권의 진행률은 벌써 절반을 넘긴 상태다. 여태까지의 추이로 보면 길어봐야 한 달 안에 2권이 마무리되겠지.
그전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해야 한다.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진다는 전제조건을 성립시키면서.
현시점에 내가 파악한, 생존한 배신자의 수는 여섯.
이름까지 아는 건 한국의 한 놈, 아르노 뒤레, 미국의 한 놈으로 셋.
미국 쪽은 3순위다.
내 전력과 물리적인 거리. 그 외에 고려해야 할 사항들까지.
여러모로 섣불리 시도하긴 어려워서.
한국의 배신자는 2순위.
여의치 못하면 그쪽으로 가닥을 잡아야겠지만 놈에게 한국은 말 그대로 홈그라운드다. 기업인으로 완전히 행보를 튼 염의준 때와는 달라서 어설프게 덤볐다간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향후 계획에 악영향이 미칠 우려도 있다.
“그래서 만만한 게 아르노 뒤레더라고요. 자기 영역에 틀어박히면 그놈도 까다로우니까 한국에 있을 때, 제일 약할 때 처리하고 싶어요.”
“팬텀이 도와줄 건?”
“팬텀 활동으로 알릴 게 아니라서 딱히 없을 거예요. 해빈이 정도는 데리고 행동할 수도 있겠네요. 걔도 집 떠나오게 한 놈들한테 복수하고 싶어 하니까. 제가 부탁 안 해도 자기가 먼저 참여하겠다고 할걸요.”
“어머, 수학여행 다녀오면서 더 친해졌나 보네?”
“……여태 좀 못되게 굴긴 한 거 같아서 전보다는 잘 대해줘야겠다 싶죠.”
“응, 애가 당돌한 구석은 있어도 귀엽잖아? 선배로서 잘해주면 좋겠네.”
유해빈 걔를 정말 아끼긴 하는지 무척 상냥한 말투로 이른 서연희가 조용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얇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흘려내며 물었다.
“아르노 뒤레는 상황에 따라 다를 거야. 타이밍만 좋으면 염의준보다 쉽게 제압할 거고 타이밍이 정말 안 좋으면 샬럿 못잖을 수도 있을 테니까. 좋은 방법 생각해둔 게 있어?”
“제가 가진 거 전부 끌어다 쓰면 그놈이랑 일대일로 맞닥뜨릴 기회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진행 중인 마력 속성에 관한 연구.
내 통제하에 놓인 은마산 유적지.
특정 지역이나 토지 자체와 깊은 연관이 있는 아르노 뒤레의 마법.
그게 누구든 배신한 동기를 알아내고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로 끌어내고자 상승시켜둔 매력 수치.
요약하면 간단한 일이다.
놈이 솔깃할 만한 마학 연구를 미끼로 던져서 은마산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 안에서 죽여버릴 거다.
본래 이 정도로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었으나 수학여행에서 얻은 게 여럿 있다 보니 체계가 잡혔고, 서연희도 괜찮을 것 같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표면적으론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 되겠네?”
“그렇겠죠. 다른 사람들 보기엔 그놈 혼자 간 거고, 저는 경주로 다시 간 적이 없어야 하니까.”
아르노 뒤레의 사망을 증언해줄 사람은 없겠지.
실종이라곤 하나 사망했다는 게 거의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라 유적 안에서 피치 못할 화를 입었다고 추측되는 상황.
내가 목표하는 결과는 그 정도였고, 그러자 서연희가 물었다.
“다른 두 명은 짚이는 게 없니?”
“확정된 건 아닌데 의심을 안 할 수는 없죠.”
아르노 뒤레 한 놈만 배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셋 모두 배신자일 가능성까지 고려해야겠지.
서연희가 옅게나마 우려를 담아 이른다.
“샬럿도 배신자면 골치가 좀 아플 텐데.”
“얼마 전에 만났다고 했죠?”
“응, 연락했길래 잠깐.”
드물게도 서연희가 곤란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소드 퀸’ 샬럿 테이트.
‘안개의 마녀’ 서연희.
‘대마법사’ 정세빈.
그리고 한 명 더. 지금은 사망한 한태강의 아내.
그들 넷은 36 영웅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축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영웅들이 있기는 했으나 넷이서 한 그룹. 다만 세부적으론 남들이 아는 만큼 친하지 않았다.
네 사람의 중심은 정세빈이었고 분위기를 살갑게 만들어주는 건 한태강의 아내였다.
샬럿 테이트와 서연희, 솔직히 이 둘은…….
“둘이 할 말이 있었어요?”
“별로 없었지. 한 시간 안 되게 얘기하다 왔어.”
다 같이 있을 땐 친한데 둘만 있으면 어색해지는 사이. <세계의 수호자> 작중에서도 그런 관계였고,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 와선 더 어색해졌겠지. 그리고 내가 샬럿과 만난 일을 물은 이유는 서연희를 놀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땠어요?”
“되게 세졌던데? 좀 놀랐어. 앞으로 몇 년은 더 세질 것 같고.”
“제가 잘 아는 사람이랑 비교하면 어때요?”
한태강을 염두에 둔 질문.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서연희가 이내 답했다.
“호흡 두 번으로는 이기기 힘들걸? 한태강 걔가 그것 말고 달리 발전한 부분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현재의 샬럿 테이트와 만나고, 현재의 한태강과 싸워본 그녀의 평가니 신빙성이 매우 높을 터였다. 한태강보다도 강할 거라는 뜻인데…….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물었다.
“보스 본인이랑 비교하면요?”
“나?”
물론 서연희가 이길 거다. 그녀보다 강한 인간은 없으니까.
승패가 아니라 제압에 드는 수고를 물은 거였고, 하지만 샬럿 테이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글쎄? 달이 안 뜨는 날은 꽤 많이 성가시겠지.”
“…….”
달의 위상을 언급했다면 장생종으로서의 힘을 발현한다는 의미. 설령 삭월이라 해도 36 영웅이라는 기준을 훌쩍 넘어선 권능인데 간단히 쓰러뜨리긴 어려울 거라니.
“인간 중 세 손가락 안엔 무조건 든다는 거네요.”
“일등은 장담 못 해도 그 정돈 충분히 될 거야.”
그만한 강자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
아르노 뒤레 하나를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녀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킬 더 이블> 2권의 후반부가 썩 순탄치는 않을 듯하단 예감이 들던 그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서연희가 일렀다.
“이 일은 이만하면 정리된 것 같은데, 아까 하던 얘기도 마저 들려줄래?”
“네, 그렇지 않아도 이거 꼭 여쭤보고 싶었어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어 번 빨아들인 나는 서연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홀려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매혹적인 눈빛이 나를 마주한다.
이윽고 담배를 다 태워낸 다음.
나는 은마산에서부터 의문이었던 걸 물었다.
“보스, 아니, 누나는…… 토끼가 팬텀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얘가 반칙 쓰네?’
살짝 당황한 걸 내색하지 않으며 서연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도진은 특정한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는 일이 많지 않았다.
보통 호칭을 생략하거나 그게 아니면 보스.
‘누나’라는 표현은 희귀하게만 나온다.
가끔 분위기가 아주 좋거나.
이도진 쪽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이번엔 후자라 해야겠지.
‘저런 표정 지으면서 누나라고 부르면…… 말 안 해줄 수가 없는데.’
서연희가 내심 고민하고 있는데 이도진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은마산이 어딘지는 누나도 알죠?”
“아…… 응, 알지. 나도 교복 입을 때 가봤으니까. 정상 올라가면 경치 좋잖아.”
누나라는 말은 무척 듣기 좋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연희는 난처한 심경이었다.
평소였다면 ‘교복 입을 때’라는 화두로 즐겁게 대화를 주고받았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고.
이도진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거기 정상에 갔는데 갑자기 내부 유적으로 저랑 해빈이, 세아랑 진유리까지 입장하게 됐어요.”
이도진과 유해빈. 이세아와 진유리.
둘씩 나눠진 그들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출발해 유적 중심으로 나아갔단다.
“세아랑 진유리 쪽은 방해하는 게 없었고, 중심부에 도착해서 이걸 본 것 같아요.”
이도진이 손을 휘둘렀다.
범위가 크진 않은 마력으로 구현된 벽화가 생생하게 움직인다.
은마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걸맞게,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성이 사악한 괴물들을 물리쳐가는 장면.
그녀는 은발 여성과 사악한 괴물의 정체를 곧장 깨달았다.
“그 안에 이런 게 있었니?”
“저는 나중에 확인했죠. 저랑 해빈이는 중심부로 오면서 벽화에 나온 습격자들이랑 싸웠는데…… 시신을 마력으로 움직였어요.”
서연희가 방금 깨달은 걸 이도진은 그때 이미 파악했으리라.
검은빛을 내뿜으며 인간을 습격하고 피를 마시는 괴물은 그녀 자신과 같은 장생종. 그리고 은빛 머리칼의 여성은 팬텀의 토끼 가면이라고.
기실 드러난 외견만으로 벽화 속의 여성이 토끼 가면이라고 추론하는 건 억측에 가깝겠지. 하지만 서연희는 이도진이 지닌 신비한 능력을 알고 있다.
그녀 자신의 본명까지 아는데 벽화 속의 여성이 토끼 가면인 걸 척 보고 눈치챈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장생종들은…… 저랑 해빈이가 쓰러뜨렸고-”
“혹시라도 신경 쓰고 있으면 괜찮아. 난 그런 쓰레기들 동족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나 태어나기 전인데 얼굴도 본 적 없고.”
은마산 전설은 9세기 중반에 있었던 일. 그녀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태어났고, 게다가 타락한 장생종이라면 서연희의 기준으론 동족이라 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과 연쇄 살인마는 같은 인간이지만 종이 같다고 똑같이 취급하면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놈들 정리하고 유적이 무너지려고 했어요. 제가 통제권을 가져왔고, 세아랑 진유리부터 내보내고 걔들이 뭘 봤는지 확인했어요.”
“그게 나한테 보여준 벽화고?”
“네. 토끼 걔가, 알고 보니까 저보다 훨씬 연상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담배를 입에 문 이도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연기와 함께 내쉰다. 너무나도 심각한 표정.
그리고선 그녀에게 묻는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누나는 토끼가 팬텀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 애를 알고 있었어요?”
서연희는 답했다.
“응,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