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65화 (65/207)

#65화. Chapter 16. 어버이날 (1)

***

한편 시간을 조금 되돌려 이도진이 집을 나섰던 저녁 무렵.

“오면서 뭐 좀 사다 놓을까?”

“맘대로.”

현관까지 나와 오빠를 배웅한 이세아는 새침하게 답하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 바깥에서 이도진이 ‘갔다 올게’라고 조금 큰 목소리로 전하는 말이 들렸다.

이어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 거기까지 들은 이세아는 다시 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속옷과 갈아입을 옷이 들려 있었고, 욕실로 향해 따뜻한 물을 틀던 이세아는 문득 생각했다.

‘그냥 물 받아서 씻을까?’

집 욕조는 아주 넓고 쾌적하다.

데운 물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고, 월풀과 스파 기능까지 달려 있다.

그렇다고 자주 쓰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집에 혼자뿐인 데다 몸도 노곤하니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거기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고.

‘목욕하고 바로 누울래.’

사실 알 수 없었다. 은마산의 사건을 겪고 이제는 전보다 이도진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녀 스스로 보기에도 ‘정신병’에 가까운 불안증세가 아예 사라졌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벽까지 그 없이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단 게 사실상 확정적인 상황인데도 평소만큼 불안하진 않았고, 해서 이세아는 생각했다.

목욕으로 몸을 나른하게 만들고, 수학여행을 다녀와 피곤한 여세까지 몰아 오늘은 일찍 잠들자고.

한밤중이 되면 또 불안해질지도 모르니까.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들고, 깨어나 보면 오빠가 귀가해 있을 터였다. 심지어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면…….

‘나 일어날 때쯤 들어오려나?’

그러면 아마 첫차 시간을 넘겨 돌아온 것일 테니 썩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어쨌든 일찍 자서 손해를 볼 건 없을 듯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오빠가 귀가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한다면.

하지만 이도진은 늦어도 새벽 두세 시까진 돌아온다고 했고, 이제 오빠를 예전보다 믿어보기로 한 이세아는 자신이 제대로 잠들기만 하면 새벽 두세 시 전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단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역시 일찍 잔다고 나쁠 건 없다. 이도진이 약속만 지킨다면.

얼마간 지나 욕조에 받은 목욕물이 다 데워졌다.

옷과 속옷을 벗고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간단히 몸을 씻어낸 이세아는 물방울이 깨끗한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나신에 수건 한 장만 챙겨 욕조 안으로 발을 뻗었다.

“흐으…….”

딱 알맞은 온도보다 뜨겁게 데운 목욕물. 별생각 없이 목 부근까지 몸을 담그니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따뜻함보단 더움 쪽에 가까운 감각.

채 일 분이 지나기도 전에 몸이 후끈거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갈까?’

가녀리고 청초한 외견.

말수가 적고 몹시 차분한 성품.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으레 선입견처럼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는 듯하나 사실 이세아는 인내심이나 참을성이 그렇게까지 강한 편은 아니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굳이 그걸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목욕물이 너무 더워서 들어가 있기 싫은 건 누구에게 말을 하니 마니 할 문제도 아니었고.

온도를 좀 더 낮춰도 더운 기운이 쉬이 가라앉지 않자 이세아는 결국 잠시나마 욕조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촤악-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욕조 안에 담긴 물이 출렁거리며 바깥으로 살짝 넘쳤다. 이세아는 젖은 머리칼을 왼쪽 어깨선에서 가슴께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모아 정리하며 세면대로 다가갔다.

‘이거 들고 오길 잘했네.’

세면대에는 목이 마르면 마시려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요구르트가 세 개 올려져 있다. 그중 하나를 쥐고 대충 손가락으로 눌러 뚜껑을 뚫어낸 그녀는 요구르트를 입으로 가져갔다. 쪽, 쪽. 빨아 마시는 소리가 조용한 욕실에 울렸고, 그녀는 김이 뿌옇게 서린 거울에 물을 뿌려 거기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더위가 스민 표정이 몽롱해 보인다. 이내 이세아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했다.

“…….”

확실히, 작년보다 살이 붙었다. 체구 자체는 가냘팠으나 몸선이 예쁜 곡선을 그렸고, 이젠 마른 느낌이라기보단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살결이라 해야겠지. 실제로 그녀가 직접 손으로 눌러봐도 그런 감촉이었다.

그야 익숙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서 더 찌는 건 싫으니까…….’

두 번째 요구르트 뚜껑에 구멍을 내고 입으로 가져가 쪽쪽 빨아 마시며 이세아는 생각했다. 앞으로 군것질을 하더라도 어떤 걸 먹는지 더 신경 쓰자고.

‘마실 건 요구르트 같은 거 주로 마셔야지…….’

왜냐면…… 요구르트는 건강식품이니까. 딱히 근거는 없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아무렴 탄산음료보다는 낫겠지.

당도 칼로리도 탄산음료와 비교해 딱히 나을 게 없다는 건 알지 못했다.

‘초콜릿 같은 거보다, 과일 같은 거 많이 먹고.’

그녀가 떠올린 건 말린 망고 겉면에 설탕을 뿌린 것이나 바나나를 튀겨서 말린 과자였다.

전자는 당이 어마어마하고 후자는 칼로리 폭탄이었으나 그런 것까진 알지 못했다.

과자가 아니라 과일이니 그쪽이 더 낫지 않을까.

말린 거라 살이 덜 찔 테고, 그러면 손 가는 대로 먹어도 되지 않을까.

잘 알아보지도 않고 안일하게 되뇐 생각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스타일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을 세운 이세아는 다시 욕조로 들어갔다. 요구르트를 연거푸 두 개 마시고, 거기다 입으로 또 하나를 물고 있었다. 몸도 어느 정도 식었고, 나른한 기분도 들고, 넉넉잡아 한 시간쯤은 혼자 욕조 안에서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작정이었다.

그리고…….

‘더워.’

그로부터 이십 분도 더 버티지 못하고 이세아는 목욕을 끝냈다. 한 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이만큼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십 분도 초로 치면 무려 천이백 초나 되니까.

조금 덥다고 손바닥 뒤집듯 아까 했던 결심을 바꾼 그녀는 마무리로 몸을 씻어내고 욕실을 나왔다.

시계는 오후 일곱 시 반을 넘겨 있었다. 지금 잠든다고 가정하면 새벽녘에 일어나지 않을까. 머리칼만 얼추 말리고 촉감이 보드라운 잠옷용 옷을 챙겨입은 이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 상태로 누워있으려니…….

‘좀 애매해.’

몸은 나른한데 그렇다고 잠이 오지는 않는 모순적인 감각.

졸리기는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이불을 몸에 빙빙 둘러서 침낭처럼 만들어도 포근한 느낌이 들뿐 쉽사리 잠들 것 같진 않았고, 자연스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은마산에서 봤던 벽화.

거기서 얻은 힘.

전보다 믿을 수 있게 된 오빠.

사 년 동안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놓고 인제 와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진유리.

내일만 쉬고 일요일부터 재개될 샬럿 테이트와의 훈련.

그리고…… 경황이 없어 지적하지 못했으나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니 의아한 것 하나.

‘걔가 왜?’

유해빈이 왜 이도진의 옷을 입고 있었을까.

은마산 유적 안에서 만났을 때는 이미 그런 상태였다. 유적을 나오고 나서도,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돌려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뭔가 의심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한 정도. 하지만 잠도 오지 않았기에 이세아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세아: 야

-유해빈: ??

-유해빈: 님이 어쩐 일로 저한테 선톡을 하심? (19:58)

-이세아: 물어볼 거 있어서

-유해빈: 뭔데?

-유해빈: 어;

-유해빈: 혹시...

-이세아: ?

-유해빈: 혹시 나한테 관심 생긴 거면

-유해빈: 미리 말해두는데

-유해빈: 안 됨

-유해빈: 절대 안 됨 (19:59)

-이세아: ㅡㅡ

-이세아: 너 우리 오빠한테

-이세아: 옷 돌려줬어?

-유해빈: 옷? 아 ㅋㅋㅋㅋㅋ

-유해빈: 이거?

-유해빈: 사진 파일을 첨부하셨습니다. (20:00)

유해빈이 보내온 사진은 자기 집에 있는 옷 거치대를 찍은 것이었다.

은마산에서 유해빈이 입은, 본래 이도진의 것인 겉옷이 거기에 얹어져 있다.

이세아는 재차 물었다. 그리 미심쩍은 건 아니지만 워낙 특이한 상황이라 추궁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세아: 그거 왜 가져갔는데?

-이세아: 애초에 어제 왜 입고 있었어?

-유해빈: 내가 뺏음 ㅋㅋㅋㅋㅋ

-유해빈: 안 돌려줄 거임 ㅋㅋㅋㅋㅋ

-이세아: ㅡㅡ (20:01)

농담은 거기까지였고, 유해빈이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

-유해빈: 오빠 팔 걷고 있다가

-유해빈: 상처 나서 내가 대신 입고 있었음

-유해빈: 피 묻으면 안 되잖아

-유해빈: 근데 나도 입다 보니까 땀도 좀 흘리고

-유해빈: 그대로 돌려드리기 싫어서 월요일에 드리려고 (20:02)

-이세아: 오빠라고 하지 마

-이세아: 어감 이상해

-유해빈: (너네) 오빠

-유해빈: (별로 안 미더워 보이는 캐릭터가 엄지를 치켜드는 이모티콘)

-이세아: 그러니까 더 이상해

-유해빈: 암튼 새 옷으로 돌려드릴 건데 (20:03)

-유해빈: 지금 방향제 배게 하는 중임 ㅋㅋㅋㅋ

-이세아: 고마워 월요일에 봐

-유해빈: ㅇㅋㅇㅋ (20:04)

그 시점에 이미 이세아의 머릿속에는 단 한 톨의 의구심조차 남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아귀가 착착 들어맞았으니까.

휴대전화를 침대맡에 밀어둔 그녀는 집중해 눈을 감았다. 목욕이 끝나 나른해진 몸 상태가 절정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몇 분만 가만히 있으면 잠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웅-

우우웅-

잠기운이 빼꼼 고개를 내밀려고 할 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당황한 잠기운이 ‘너무 일찍 왔나?’라고 머쓱해하듯 멀어져간다. 이세아는 짜증보다 앞서 손을 뻗었다. 누가 연락한 건지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으로 비친 이름에 옅게 눈을 찡그렸다.

‘뭐야?’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도진이 아니라 진유리였다. 그러면 짜증이 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이세아는 일단 열어보기나 하잔 마음으로 메신저 앱을 눌렀다.

-진유리: ㅎㅎ

-진유리: 세아야 집에 잘 들어갔어?

-진유리: 모레 샬럿 선생님 뵈러 가는 거

-진유리: 만나서 같이 갈래? ㅎ (20:07)

-이세아: 그래

-진유리: 웅웅 ㅎㅎ

-진유리: (귀여운 곰돌이가 기뻐하는 이모티콘)

-진유리: 근데 지금 뭐 하고 있어?

-진유리: 교수님이랑 같이 저녁 먹어?? ㅎㅎ (20:08)

‘이거였네…….’

이세아는 진유리가 왜 뜬금없이 연락했는지를 눈치챘다. 막 잠들려던 걸 깨운 것에 더해서 한층 화가 났다. 진유리의 추측과 달리 오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놀러 나가버렸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유치하게도 화풀이로 답했다.

-이세아: 오빠 나갔어

-이세아: 언제 들어올지 몰라

-진유리: 아 ㅎㅎ

-진유리: 친구분들이랑?

-이세아: 몰라

-이세아: 요즘 누구 만나러 자주 나가 (20:09)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떴는데도 진유리의 답장이 오지 않았고, 이세아는 짧게 일렀다.

-이세아: 나 좀 피곤해서

-이세아: 선생님 언제 뵈러 갈 건지 내일 상의해

-진유리: 아 응 ㅠㅠ 미안 ㅠㅠ 내일 톡할게!!

-진유리: 잘 자!!

-진유리: (졸린 모습으로 침대에 누운 곰돌이 이모티콘)

-이세아: 응 너도 푹 쉬어 (20:10)

대화를 끝내고 나니 진이 쫙 빠졌다. 진유리에게 전한 말이 이세아 자신에게도 그대로 돌아온 거다.

대체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좋아하길래 2박 3일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만나러 가는 건지. 그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뒤척이던 이세아가 잠든 건 오후 아홉 시에 이르렀을 무렵. 그리고 애매하게 잠이 든 탓인지 마찬가지로 애매한 시간에 깨어났다.

‘네 시…….’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렸는지 옷이 축축했고, 목이 말랐다.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난 이세아는 부엌으로 향해 물을 한 컵 마셨다. 집 안은 무척 조용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이도진은 아직 귀가하지 않은 듯싶었다.

한데 바로 그때.

띡, 띡, 띠리릭-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오는 발걸음이 조심성 없이 거칠었다. 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났다.

이윽고 부엌 쪽의 불이 켜졌고…….

“어, 깜짝이야.”

척 보기에도 술이 많이 취한 듯한 이도진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어둠 속의 암살자처럼 기척도 없이 부엌에 서 있던 이세아는 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왔어?”

반겨주는 말이 아니었다. 새벽 두세 시라더니 이제야 들어왔냐는 의미. 하지만 술이 잔뜩 취한 이도진은 그것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첫차 시간 전에 왔지?”

그리곤 가까이 다가오려 하길래 이세아는 뒤로 물러섰다.

“술 냄새나.”

비단 술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한 번씩 나는 담배 냄새도 짙었고, 잔뜩 풀어진 표정도 만취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서 정신이 멀쩡한 이세아로서는 접근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도진이 손에 든 봉투를 흔들며 일렀다.

“아, 어, 오늘 기분이 좋아서…… 좀 마셨어. 먹을 거 좀 샀는데…… 지금 먹을래? 오빠도 뭐 좀 먹고 자려는데.”

“……뭐 샀는데?”

“어…… 샌드위치랑 김밥이랑 우유랑 과자랑 아이스크림이랑 이것저것. 라면도 좀 샀는데 이거 먹고 자야겠다.”

“……그러면 샤워하고 와.”

“응?”

“……내가 끓여줄게.”

“……응?”

“…….”

이도진이 갑자기 술이 확 깼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세아는 그의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뺏어 들었다. 상당히 무게감이 있었고, 마침 건망고 젤리가 보이는 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다시금 쌀쌀맞게 말했다.

“담배 냄새, 술 냄새, 빨리 씻어. 씻고 나오는 거 맞춰서 라면 끓여놓을 거니까.”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냐? 아니면 집에 뭐 부숴 먹었어? 그런 거면 그냥 솔직히 말만 하면-”

“빨리 가.”

편의점 봉투를 식탁에 둔 이세아는 양손으로 이도진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힘을 줘서 그의 방으로 밀어냈다.

자기 방에 강제로 들어간 이도진이 방의 불을 켰는지 문틈으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씻고 갈아입을 옷만 챙기면 될 텐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세아는 왠지 그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고 생각했고, 곧 옷가지를 챙겨 방에서 나온 이도진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방은 달라진 거 없는데……. 혹시 용돈 올려달라고?”

“필요 없어. 십오 분 안에 씻고, 달걀 넣어서 먹을 거야?”

“어, 그러면 좋지. 근데 물은 계량컵으로 받아주라. 너 두 번에 한 번은 한강 만들던데-”

“……더 열 받게 하지 마.”

“앗…… 네, 금방 나올게.”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흡족해하며 이도진이 욕실에 들어간 다음, 이세아는 냄비에다 물을 받았다.

계량컵 따윈 쓰지 않았다. 그러면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오빠에게 지는 것 같아서. 대신 해장용이니만큼 재료는 배려해주기로 했다.

‘콩나물…… 있나?’

이세아가 냉장고에서 위치를 정확히 아는 거라곤 자주 먹는 반찬들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달걀, 소스류. 그 정도가 다였다. 음식 재료들의 위치는 잘 모른다.

냉장고 문을 오래 열고 있어 삐- 삐- 소리가 날 때까지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이세아는 겨우 콩나물 봉지를 찾아냈다.

너무 씻으면 해장 효과가 줄어들까 봐 대강 흐르는 물에 적시는 시늉만 한 콩나물부터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넣고, 그 위에 라면 구성품들을 투하하고선 달걀까지 넣고 냄비 뚜껑을 닫았다.

이도진이 봤다면 상식적으로 그걸 한 번에 다 때려 넣는 게 맞겠냐고 탄식하겠지만 그녀 나름대로 논리에 입각한 근거가 있었다. 콩나물을 일찍 넣을수록 해장 성분(추측)이 더 잘 우려지지 않겠는가 싶었고, 다른 건 원래 손에 잡히는 대로 넣으니까.

그리고 오 분.

슬슬 면이 퍼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날 때쯤 이도진이 나왔고, 그녀는 곧장 검지로 거실을 가리켰다.

“다 됐으니까 앉아 있어.”

“너도 한 젓가락 먹을 거지? 수저랑 김치랑 물은 내가-”

“챙겨놨으니까 가 있어.”

“……?”

“……왜.”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런 거 없으니까, 가 있으라고.”

나직하지만 서슬 퍼런 경고에 이도진이 졸래졸래 거실로 향했다. 다른 건 다 준비해뒀고, 이세아는 냄비를 들고 가서 거실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금도 이게 무슨 일인가 눈치를 흘끗흘끗 보고 있는 오빠의 반응을 기대하며 뚜껑을 열었고, 콩나물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한 이도진은 예상대로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이세아를 쳐다보며 무척 심각하게 묻는다.

“진짜…… 무슨 일 있어?”

“그런 거 없고, 용돈 올려줄 필요 없고, 집에 부숴 먹은 거 없고, 잘못한 거 없고, 화난 거 없고, 붇기 전에 먹어.”

“어, 그러면…… 오랜만에 우리 동생 한 번 안아봐도 되나?”

“윽, 싫어.”

“………….”

“…….”

이도진은 퍽 상처받은 기색이었고, 이세아도 멋쩍어졌다.

그렇게 단호하게 거부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그저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그제야 은마산 사건 때 정작 자신은 오빠에게 달려가서 꼭 안겼던 게 생각났지만…….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자신은 정말 다급했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지금은 둘 다 멀쩡히 라면이나 먹으려는, 말하자면 일상적인 상황이고.

자신보다 거의 30cm 가까이 큰 오빠가 무슨 비 맞는 강아지처럼 의기소침한 표정인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물론 왜 싫은지 정확한 원인을 따져본다면 그저 창피해서.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다.

해서 거실엔 침묵만이 흘렀고, 이도진이 힘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

“……응.”

이도진은 콩나물과 국물 위주로 먹었다.

이세아는 면만 몇 가닥 건져 먹었다.

접시에 젓가락이 닿으며 달그락대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렸고, 이세아는 미안한 마음에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입을 뗐다.

“오늘 어버이날이네…….”

현재 시각은 5월 8일 새벽 네 시 반경. 부모님께 감사를 전하는 어버이날이었다.

이도진이 애틋한 어조로 답했다.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

“……일부러 생각한 건 아니고, 그냥, 생각났어.”

잘 기억나지도 않는 유치원 시절엔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선물했던 것 같다. 사실 그녀 본인은 자신이 그랬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도진이 그랬다고 말해줬기에 그랬나보다 싶은 정도. 이내 그가 제안했다.

“자고 일어나서, 오빠랑 같이 추모 광장 다녀올까?”

“……응.”

이세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빠랑 남산의 추모 광장을 함께 다녀온 가장 마지막 날이 언제였더라.

중학교 때부터는 함께 간 적이 없으니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금 한국에 와 계신 분들, 샬럿이랑 나머지 두 분.”

“……?”

“그분들도 시간이 괜찮다고 하시면…… 다섯 명 같이 가도 좋겠고.”

그렇게 말하는 오빠의 눈빛이 어쩐지 무척이나 차가워 보인다고, 이세아는 이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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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5월 8일 오후 6시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이세아, ‘소드 퀸’ 샬럿 테이트, ‘몽상가’ 아르노 뒤레,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까지 4인과 함께 ‘수호자’ 이시혁과 ‘대마법사’ 정세빈의 추모 광장에 자리할 것

-클리어 보상: ‘몽상가’ 아르노 뒤레가 배신한 동기와 정황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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