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68화 (68/207)

#68화. Chapter 17. 몽상가 (1)

오히려 속인 유해빈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떨 땐 세상 똑똑해 보이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럴 때만 저렇게 멍청한 건지.

‘그렇다고 들키고 싶다는 건 아닌데…….’

사실 온전한 진심은 아니다. 들키고 싶은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묘한 뭔가 정도는 기대했다.

들킬 듯 말 듯 한 스릴감이랄까. 그러고서도 결국에는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뿌듯하게 귀가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게다가 한 가지 더. 솔직히 이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음습한지라 망상 선에서 그친 생각이지만…….

‘만약에 들켰으면…….’

그야 이도진은 놀라겠지.

하지만 그러고서도 크게 불쾌해하지는 않는다면.

얄밉지만 막강한 보스도.

경기장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채 미국에서 운동화나 찾고 있는 약혼자도.

자기 오빠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민하게 구는 여동생도.

전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헛된 꿈을 품고 있는, 전보단 아주 조금 가까워졌으나 아직 친구는 아닌 교실 같이 쓰는 애도.

그 누구도 방해하는 사람 없이.

유해빈 자신과 이도진 둘만 이렇게 밀폐된 차 안에서 서로의 숨결까지 들릴 만큼 가까이 앉아 있고.

지난 주말 동안 그녀가 저지른 음습한 행위들을 전부 다 알았는데도 이도진이 불쾌해하진 않아서.

그래서 분위기가 다소 묘하게 흘러가고, 관계가 급격히 진전된다면…….

금요일 밤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그런 걸 상상하며 혼자 몸을 비비 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진도는 개뿔, 그런 희망적인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선 아무 의심도 없이 옷을 내려놓은 이도진을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만 불평했다.

‘아니…… 진짜 저걸 모르나?’

찬찬히 맡으면 옷에서 나는 향과 그녀의 체향이 정확히 같다는 걸 알 텐데. 그러나 저쪽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듯했다.

물론 합리적으로 보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이도진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거고, 아주 용의주도하게 잘 속여 넘기기도 했으니까.

한데도 유해빈은 괜스레 억울하단 생각을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도진이 자신의 눈앞에서 행한 망측한 짓이 부끄러웠으나 기분이 나쁜 건 전혀 아니었고,

그래서 아쉬우면서도 가슴이 찌릿한 감각을 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에이, 고맙긴요. 그때 산에서 저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너 오늘따라 좀 많이 착하게 군다? 너도 나한테 뭐 잘못이라도 했냐?”

이번엔 진실에 근접했다.

옷에 밴 그녀의 체향을 맡고서도 향이 상쾌하다느니 나도 앞으로 세탁할 때 이런 향 나도록 연구를 해봐야겠다느니 헛소리를 해대던 멍청이인데, 조금 친절하게 굴었다고 근거 하나 없이.

그게 불만스러우면서도 유해빈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저는 당연히 아무 잘못 안 했는데…… 누가 교수님한테 잘못 같은 거 했어요?”

“아, 다른 게 아니라 요새 세아 걔가 엄청 착해졌거든. 처음엔 집에 고장 낸 거라도 있나 싶었는데 아니라고 하고, 용돈 올려줄까 물어봐도 싫다던데. 적응도 살짝 안 되고, 저게 언제까지 갈까 싶기도 하고 그러네.”

유해빈은 또다시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웃기고 자빠졌네. 거 실실대는 거나 숨기고 말하지.’

뭔가 했더니 동생 자랑을 하려고 빌드업한 거였다. 유해빈이 흘겨보듯이 보낸 눈빛의 의미도 알아채지 못한 이도진이 차를 몰아가며 연신 자랑을 주워섬겼다.

금요일에는 술 마시고 왔다고 라면에 콩나물까지 넣어서 끓여주더라.

토요일엔 같이 외출했다가 들어왔고, 집에서 본 거긴 하지만 몇 년 만에 둘이 오순도순 영화도 봤다.

“그리고 어제는 애가 훈련받고 집에 오면서 먹을 걸 사 왔더라? 떡볶이랑 순대랑 튀김. 양이 많길래 다 먹을 수 있겠냐고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글쎄,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

헤벌쭉한 얼굴로 떠들어대는 걸 더 듣기 싫었던 유해빈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아는 목소리를 흉내 냈다.

“뭐라고 했긴요. ‘나만 먹으려고 산 거 아냐. ……배고프니까 빨리 앉아. ……흥칫핏.’ 뭐 이랬겠죠.”

끼이익-

마침 붉은색 신호라 차가 멈췄다. 이도진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그거 세아 따라 한 거냐?”

“오, 알아보시네요. 닮았어요?”

“대사는 거의 안 틀리고 똑같은데…… 뒤에 흥칫핏은 뭐야.”

“연극에서 지문 같은 거죠.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거. 어, 교수님 운전대에서 손은 왜 떼세요. 저 때리시려고? 안 아프게 쓰다듬는 거면 봐줄 수도 있는데- 아, 파란불이다. 운전 집중해요, 운전.”

부웅-

아까보다는 조금 거칠게 액셀을 밟으며 이도진이 일렀다.

“……너 진짜 내가 벼르고 있다.”

“으흠, 이세아 풍으로. ‘오빠…… 나 때리게?’”

“그만하라고…….”

“그믄흐르그 흣뜨…….”

거기까지만 유치하게 굴고 유해빈은 피식 웃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신체에서 가장 은밀한 부위 중 하나에 얼굴을 가져다 댄 것과 다를 바 없던 이도진의 폭거. 거기서 느낀 민망함에 대한 복수는 이만하면 된 듯싶었다.

‘더 하면 진짜 화낼지도 모르고.’

마트에서 그녀의 거주지까진 그리 멀지 않다. 차로는 천천히 가도 십오 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 그리고 절반가량 온 시점, 이도진이 문득 말을 꺼냈다.

“조만간 할 일 있을지도 몰라.”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으나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 경주에서 돌아온 그가 팬텀의 보스와 나눈 대화. 그 자리에서 결정된 사안을 그녀에게도 알려주려는 것이리라.

유해빈은 옅은 긴장감을 담아 물었다.

“뭔데요?”

“누구 한 명, 죽일 거야.”

“이유는요?”

“내 원수, 너 집 떠나오게 만든 쓰레기 중 한 명.”

“어디서 하는데요?”

“은마산으로 끌어들여서. 그놈이 들어가고 나면 우리는 서울에 있다가 그쪽으로 워프할 거고, 표면적으로는 실종 처리.”

그녀는 마지막으로 중요한 걸 물었다.

“그게 누구죠?”

“아르노 뒤레. 나 혼자 해도 되지만 네가 도와주면 더 편할 것 같은데…… 생각 있냐?”

“교수님이 생각 없다고 하셔도 저는 있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고마워하는 듯한 어조로 답한 이도진이 세부적인 계획을 일러줬다. 작전 수행자는 그와 유해빈까지 두 사람. 팬텀 단원들은 일절 개입시키지 않을 거란다.

“요즘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나만 해도 충분할 거고, 네가 도와주면 백 퍼센트라고 본다.”

“근데 그 사람 좀 세지 않나요? 컨디션 좋으면 36 영웅 탑텐도 들 거라고 인터넷에서 영상이랑 썰 봤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은마산 안에선 그놈 컨디션 좋을 일이 없을 거야. 그러기 전에 죽일 거니까.”

그즈음 차가 유해빈이 사는 오피스텔 앞에 당도했다. 문을 열고 마트 봉투까지 챙겨 차에서 내리자 이도진이 일렀다.

“5월 중으로 잡고 있다.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네, 그럼 내일 수업 때 뵙겠습니다!”

살갑게 손을 흔든 유해빈은 그대로 집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가…… 언뜻 생각난 게 있어 이도진을 불러세웠다.

“아, 교수님.”

“응?”

되묻는 그의 표정에는 결의와 침착함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말하려는 부분은 마음의 준비가 끝난 걸까.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걸까.

유해빈은 조금 주저하면서도 이도진에게 일렀다.

“이세아 걔가 은근 마음이 여리잖아요. 저희 계획 성공하면……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그녀는 이도진이 화를 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라고, 그런 날 선 말이 돌아와도 수긍될 발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딱히 격앙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침중한 표정을 짓다가…… 씁쓸한 목소리로 답한다.

“조언 고맙다.”

“어…… 그러시면 제가 죄송스러운데요…….”

“아냐, 고맙지. 나한테 충고해준 것도 고맙고, 내 동생 챙겨주는 것도 고맙고. 크게 폐가 안 되면 앞으로도 그래 줬으면 좋겠다. 나한테도 이거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말해주고, 세아도 신경 써주고.”

씁쓸하던 어조가 끝에 가서는 그녀에게 전하는 감사로 바뀌어 있었다.

‘이러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생각 외로 부드럽고 진심 어린 반응에 당황하던 유해빈은 겨우 답할 말을 찾아냈다.

“저희 같은 방 쓰기 전에 이렇게 말했으면 화냈을 거죠? (인상을 찌푸리며) ‘네가 뭔데 내 동생을 그렇게 걱정하냐?’ 뭐 이런 식으로요.”

“……그건 내 흉내야?”

“와, 아니란 말은 안 하시네. 그럼 저 들어갑니다. 내일 뵐게요!”

그렇게 말하며 이도진에게 손을 흔든 그녀는 곧장 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

여기 더 있으면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을 것 같아서. 그렇게 급히, 저쪽에서 이상하다 여기고 부담을 느낄 정도로 무작정 다가갈 작정은 아니었다.

그야 안 들키게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행동도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안 들키니까 하는 거다.

최선을 다하되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대(對) 이도진 전략으로 유해빈이 세운 원칙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집 현관까지 들어선 그녀는 마트에서 산 것들부터 정리했다. 그리곤 욕실에서 몸을 씻고 다시 거실로 나와서 옷 거치대를 바라봤다.

시선은 어느 한 곳에 집중되어 있고, 그쪽을 향해 걸어가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급발진은 착하고 귀엽고 멋있는 우리 도진 씨 모르게, 나 혼자 하면 되는 거지.’

걸음을 멈춘 유해빈은 거치대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이도진에게 건넨, 금요일 저녁부터 오늘까지 입었던 그 옷과 똑같은 디자인의 옷. 그걸 손에 쥐고, 마치 말을 걸듯이 일렀다.

“오늘부터는…… 네가 내 잠옷이야.”

상냥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지난 며칠 동안 동료가 겪은 고초를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옷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비명처럼 바스락거렸으나 그런 건 사뿐히 무시했다. 그리곤 사실상 이도진에게서 훔친 거나 마찬가지인 옷을 몸에 둘렀다.

어렴풋이 남은 그의 체향.

살갗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모두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

5월 12일, 수요일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이라 서상욱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출근하지 않은 나는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한산할 시각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이 보이지 않았고, 나도 천천히 차를 몰며 상념을 이어나갔다.

이틀 전 유해빈에게 들은 말이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36 영웅을 한 사람 죽여야 한다. 나는 아르노 뒤레를 죽이기로 거의 결론을 내렸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지만…….

세아가 슬퍼할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으로 모시는 샬럿 테이트만큼 가깝게 지내진 않겠지만 놈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으니까.

염의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그 이상.

슬퍼하고, 낙담하고, 자기 주변에서 자꾸 수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에 불안해하겠지.

나는 그걸 최대한 보듬어주려고 하지만 내 생각처럼 잘 될까?

어쩌면 유해빈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위로해줘도 세아는 주변인의 죽음 그 자체에 충격을 받을 거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계획을 강행하려 한다.

이 간극은 해소될 수 없다.

세아는 틀림없이 상처를 받는다.

내가 아르노 뒤레를 죽이겠다고 작정한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된다.

그걸 알지만 멈추지 않으려 하는 나는…… 내가 세운 원칙을 잘 지키고 있는 걸까.

아마 아닌 것 같다고, 월요일 밤부터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반성이라 할 순 없겠지. 정말로 반성한다면 계획을 바꿀 테니까. 그저 목적조차 뚜렷하지 않은 질책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나는 서상욱 교수의 연구소에 다다랐다.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요즘 자주 보는군. 볼 때마다 반갑고.”

아르노 뒤레였다.

목소리에선 확실히 반가운 기색이 비치고 있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니, 별일 없어.”

처음 한국에 와서 만났을 때와 비교해 그는 명백히 더 우울해 보인다. 마주칠 때마다 점점 더 그런 느낌이 강해지고 있다.

그건 죄책감의 발로인 걸까.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아르노 뒤레와 연구소로 향하던 와중에 놈이 궁금해하는 눈치로 물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지?”

“아, 간단하게 설명부터 드릴게요.”

내 첫 번째 성과인 방어 구성체.

그건 마력 활용과 그에 따른 계통에 집중한 연구였다.

그리고 이번에 선보일 건 그 반대다.

마력 감응과 그에 따라 나타나는 마력 속성에 관한 연구. 거기에 더해 아르노 뒤레가 관심을 가질 요소도 있다.

“특정한 공간과 그곳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마력. 각성자 개개인의 마력 감응력과 그걸 토대로 발현되는 마력 속성.”

“음……?”

여기까지 듣고서도 아르노 뒤레는 의아해하는 표정이다.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그로서도 짐작하기 어려운 연구라는 뜻이겠지.

나는 의미심장한 어조를 꾸미며 결론을 말했다.

“그 연결점을…… 어쩌면 찾은 건지도 몰라요.”

“……!”

놈이 눈을 크게 치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