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Chapter 17. 몽상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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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십 년도 넘게 예전 일이지만…… 로티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했거든.”
그렇게 말하며 아르노 뒤레는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나이는 몇 살 적었으나 마음으로 인정했던 리더 이시혁. 마찬가지로 나이는 어렸어도 그 재능과 실적을 존경해마지 않았던 정세빈.
과거 악마들과 함께 싸워나가던 시절, 부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길 응원했던 그들이 이어져 낳은 아들 이도진. 그가 몹시 침중한 낯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고작 열다섯 살에 부모를 잃고도 이렇게 잘 자라줬으니 이시혁과 정세빈의 동료로서 대견한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본래는 그런 마음이 가장 컸는데.
한데도 아르노 뒤레는 내심 의문을 되뇌며 이도진을 바라봤다.
‘내가 왜…… 어째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지?’
샬럿 테이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
그는 그걸 여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이유가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이유. 그들 두 사람만 아는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기에.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분명히 앞으로도 그럴 터였는데…….
‘이상한 일이군. 이 애를 믿을 수 있겠다고,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놔도 좋다고, 그러면 뭔가 확실하게 나아질 거라고……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물론 이도진의 재능은 뛰어나다.
한국의 제1 아카데미 대학부 졸업.
아르노 뒤레의 기준으로는 정말 기초적인 교육만 받았을 뿐인 그가 마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그동안 그는 복합 계통의 방어 구성체를 세상에 선보였고, 이번엔 각성자의 마력 속성 숙련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며, 아르노 뒤레가 그에게 건넨 상찬은 과장이 아니었다.
대마법사 정세빈보다 뛰어나다고.
설령 당장은 아니라 해도 십 년 안에는 그런 평가를 받게 되리라고.
아르노 뒤레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
성품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인다.
방어 구성체, 속성 숙련의 방법론. 모두 마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성과다. 그러나 이도진은 두 가지 연구와 앞으로 그가 해나갈 다른 연구들까지, 그것으로 이득을 취하진 않을 거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가 바라는 건 자신의 연구로 이 세상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뿐.
대마법사 정세빈처럼.
수호자 이시혁처럼.
그들의 자식, 영웅의 아들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부모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되려 죽은 부모의 이름을 더욱 드높일 수 있게.
오로지 선량하고 발전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 하는 대견한 조카였다.
재능이 뛰어나고 성품이 훌륭하며 옛 동료들의 아들이기까지 한 아이. 게다가 성격도 아르노 뒤레 자신과 제법 잘 맞는 듯하다. 그러니 친근하게 여기는 마음 정도는 당연히 드는 게 정상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야.’
아르노 뒤레는 그리 결론을 내렸다. 샬럿에 관한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털어놓는다니. 그건 이도진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그는 잠시 고민했고…… 지금 이도진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과 그나마 흡사한 단어를 하나 찾아냈다.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만큼.
그에게 공감을 얻고, 대화를 나누며 유대감이 깊어지면 좋겠다고 강하게 원할 만큼.
‘그래, 이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판단을 마친 아르노 뒤레는 티가 나지 않게 살짝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짚이는 건 없었다. 이도진이 그의 정신에 간섭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자신이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거겠지.
성애(性愛)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르노 뒤레는 이성애자고, 여러 이유로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살아오며 많은 이성을 만났다.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도진에게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말해도 되겠지. 로티도 떨쳐낸 것 같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영웅이 수십 년을 단련한 통찰력은 ‘매력’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간취해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의 근원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이도진이 은마산 유적 내에서 올린 매력과 의지.
진실을 알아내길 원하는 마음과 그 소질들이 결합해 악마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정황엔 생각이 닿지 못했고, 의구심을 떨쳐낸 그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십 년 하고도 아마 이삼 년은 더 됐을 거야. 로티가 갑자기 연락해선 런던으로 와줄 수 있겠냐고 하더군.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길래 급히 갔지. 그 자리에서 들은 거야.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유가…… 뭐죠?”
아르노 뒤레는 옛 기억을 차분히 떠올리며 이도진에게 설명했다.
“그 당시엔 균열이 닫히고 마력이 사라질 거라는 게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지. 언제가 될진 모르고 그래도 오십 년은 더 유지되리라 다들 예측했지만…… 그것도 정확한 건 아니었어. 짧으면 십 년 안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있었지. 로티는 그게 고민이라더군. 자긴 마력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흔히들 각성자는 비각성자보다 신체기관과 감각이 하나 더 있는 느낌이라고 하지만 면역체 보유자인 로티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던 모양이야. 마력이 없는 건 그 애한테는 팔다리를 전부 자르고, 눈을 빼앗고, 혀를 자르고, 코와 귀에 아주 커다란 못을 박아넣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박탈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로티 본인이 그러더군. 엄살을 부린 건 아닐 거야. 로티는 마력과 관련해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때 조금…… 아니, 꽤 많이 충격을 받았고, 로티가 내게 말하더군.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죽겠다고. 진,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로티에게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
“도와주겠다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그러셨지 않을까 싶네요.”
아르노 뒤레는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는데, 나머지 반은 틀렸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 하지만 실제로 말한 건 아니야.”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이도진이 의아해했고, 아르노 뒤레는 피식 웃으며 정답을 일렀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어. 이젠 훈련하는 게 힘들어졌냐고. 그 이기적인 트리거를 유지하는 게 버거워졌냐고. 마구 독설을 쏟아냈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을 거야. 그런 부분도 어느 정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샬럿이 뭐라고 하던가요?”
“내일 자기가 죽어 있으면 그건 내 책임이라고, 싸늘하게 말하고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군. 물론 로티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아있지. 충격요법이 성공한 거야.”
“그러면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단 부분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죠?”
“그전부터 균열을 특정 시간대에 특정 장소에만 발생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쭉 해왔거든. 발상 수준에 머무르긴 했지만 이론도 끄적여둔 게 있긴 했어. 그걸 완성하려고 꽤 노력했는데…… 그러기 전에 대균열이 일어나버렸지. 그래서 사실 네겐 미안한 마음이 아주 많이 들어. 내가 성과를 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요즘도 가끔 악몽을 꾸거든.”
생각보다도 더 많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도진이 듣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르노 뒤레는 애써 힘이 실린 말투로 대화를 정리했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꿈. 균열을 조정하려는 목적. 거기에 로티가 더해졌고, 리와 세브의 희생까지 더해졌지. 그러니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무리한 목표라는 건 알아. 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고, 균열로 희생되는 사람이 더는 나타나지 않도록 할 거다. 리와 세브를 잃었을 때처럼…… 그런 슬픈 일을 두 번 겪고 싶진 않으니까.”
“……멋지네요.”
이도진은 짧은 감상만 전했고, 아르노 뒤레는 꿈속을 거닐듯 벅찬 표정으로 마지막 할 말을 이었다.
“균열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평생 살 생각이야. 내가 관리를 해야 하니까. 본래 이런 말을 할 작정이 아니었는데…… 어쩐지 네겐 얘기하고 싶어지는군. 혹시 정신계 마법이라도 걸었나?”
“그럴 리가요.”
“하하, 농담이야. 여하튼 네 연구를 도우면서 실마리를 찾을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네 재능이라면 네 대에선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고. 꼭 그렇게 해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은 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친 아르노 뒤레는 조용히 이도진을 응시했다. 그는 무척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연구 자문으로 찾아온 것인데 뜻밖에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으니.
아르노 뒤레는 퍽 가벼워진 어조로 장난스레 일렀다.
“그렇다고 내가 로티를 여자로 보는 건 아냐. 나한테는 동생 같은 애지. 오해는 하지 말라고.”
다만 이도진은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듯했다. 십여 초를 침묵하다가…… 겨우 그에게 묻는다.
“살짝 정신이 없네요. 그나저나 맨 처음에, 방금 말씀해주신 계획을 실질적으로는 말한 적이 없다고 하셨죠? 그러면 제가 첫 번째가 되는 건가요?”
“그렇지. 이걸 누구한테 말하겠어. 균열이 특정한 지역에만 발생한다? 좀 어두운 얘기지만 좋아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을 거야. 각국 정부, 기업, 대형 길드까지. 이렇게 상세하게 털어놓은 건 네가 처음이고, 일정 단계 이상 연구가 진행되면 기습적으로 발표할 생각이야. 그러면 방해하려고 해도 세간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까. 어때, 괜찮은 계획 아닌가?”
아르노 뒤레는 뿌듯한 심경을 한껏 담아 이도진에게 물었다.
이시혁과 정세빈의 아들이자 성품과 재능이 극히 훌륭한 연구자. 그라면 자신의 꿈 같은 목표를 이해하고 동참하리라 기대하면서.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모두 사실이라면.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영웅, 이네요.”
“응?”
무심결에 흘려낸 말에 반문하며 아르노 뒤레가 일렀다.
“글쎄…… 리와 세브 정도라면 인정하겠지만 난 내가 영웅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다곤 생각 안 하는걸. 아까 네가 스스로의 재능을 부정했을 때 내가 느낀 기분이 지금 네 기분과 비슷했을 거야.”
“그러면 부정하지 마세요. 아르노, 당신은 영웅이 맞으니까.”
저자가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자신의 발상과 이론을 이 순간까지 감춰왔다면.
순전히 선의로 생명을 구하려고, 그래서 마력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소망을 품고, 대균열의 발생이 자신의 연구에서 파생된 걸 꿈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면.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아르노 뒤레는 진짜 영웅이었다.
몽상가(夢想家).
원대한 뜻을 품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걸 이루어내려 하는 영웅.
이시혁과 정세빈의 사인.
광의적 관점에서의 타살.
나는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거다.
의도치 않았으나 아르노 뒤레가 남몰래 진행하던 연구가 활용돼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이자를 배신자라 칭할 수 있나?
그게 합당한가?
누군가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총을 다른 자가 빼돌려 그들의 공통된 친구를 쐈다면.
그러고서 총을 쏜 자가, 총을 가지고 있던 자 모르게 조용히 그걸 제자리에 되돌려놨다면.
그러면…… 총의 주인도 배신자인가?
나는, 내 상식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유럽의 확인된 배신자: ‘몽상가’ 아르노 뒤레
+
내게 힘과 정보를 안겨줬던 홀로그램. 나는 그걸 전방위적으로 신뢰하진 않는다.
감추고 싶은 걸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나를 예정된 곳으로 이끌려 하니까.
그래도 하나만은 믿었다.
진실을 감출 순 있어도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고.
그런 면에서만큼은 나는 홀로그램을 신뢰해왔다.
하지만 이건 아냐.
광의적 의미의 타살.
그 범위가 너무나도 넓다.
아르노 뒤레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번 일만큼은 홀로그램으로 얻은 정보를 상당 부분 배제해야 한다.
명백히 악의적인 의도가 보이고, 지금껏 배신자라는 단어만을 사용해 뭉뚱그린 이유도 알겠다.
아마도 이번 일을 위해서.
내가 아르노 뒤레를 죽이도록.
<킬 더 이블> 2권의 메인 사건이 있기 전에 그를 죽이도록.
홀로그램의 목적은 그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왜 그가 현시점에서 사라져야 할 필요가 있지?
홀로그램과 내 관계는 대결에 가까웠다.
홀로그램은 나를 조종하려 하고, 나는 그걸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며 이득을 취했다.
그리고 지난 십 년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결과적으로 모두 내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어떨까.
하마터면 질 뻔했다. 난 그걸 <킬 더 이블> 2권의 최후반부에야 깨달았겠지.
그러나 나로선 다행스럽게도 승패는 보류됐고, 지금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한 가지였다.
“그런데 아르노.”
“응?”
“‘실질적’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건…… 어쨌든 얘기한 사람은 있다는 뜻인가요?”
대균열이 그의 연구에서 모티브를 얻은 거라면.
하지만 아르노 뒤레는 그걸 모르고 있다면.
그러면 그걸 빼돌린 자는…….
“그렇지. 한 명 있긴 해. 그쪽은 연구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실질적인 의미는 없지만. 연구소에 찾아왔길래 술을 좀 마시고 얘기가 나와서 자료를 보여줬더니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던걸. 그래도 응원은 하겠다고.”
“그게…… 누구죠?”
아르노 뒤레가 답했다.
“앤디. 진 네가 실질적인 동료라면, 그는 마음으로나마 응원해주는 아군이지.”
앤디라는 건 애칭이다.
과거엔 유럽에서 가장 강했던 각성자. 샬럿 테이트보다도 강했던 남자.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
어쩌면 그가…… 확인되지 않은 배신자이리라.
바로 그때.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킬 더 이블> 2권의 마지막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