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Chapter 18. 가정 방문 (1)
어떻게 ‘여보세요?’ 한마디만 듣고 내 기분이 심란하다는 걸 알았는지.
지난번에 통화한 날 이후로 한 달 반 가까이 연락 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한 건지.
그런 것들을 묻기에 앞서…… 나는 또 하나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을 꺼냈다.
“거기 지금 새벽 아냐?”
뉴욕과 서울의 시차는 열세 시간. 한국 쪽이 그만큼 더 빠르다. 여기가 지금 저녁이니 세라 쪽은 새벽 네다섯 시쯤 됐으려나. 일반적으로 깨어 있을 시간은 아니지.
이십 년을 넘게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지내오다가,
둘 중 한 명이 유학을 가기 바로 전전날 처음으로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대판 싸우고,
단 한 마디 화해조차 하지 않은 채 겉으로만 예전처럼 지내는 척하면서,
실상은 일 년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정말로 손에 꼽을 만큼만 연락을 주고받은 냉랭한 약혼자 사이.
그런 관계인데 불쑥 뜬금없이 전화할 시간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세라가 태연하게 답했다.
<맞아, 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바빠서 이쯤 자거든. 잘까 하다가, 그냥 한번 전화해봤어.>
“그래?”
<연락을 안 하는 이유는 있을 수 있어도…… 연락할 이유를 굳이 찾을 사이는 아니지 않아? 우리가.>
“……내가 뭐라고 했냐?”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정말 별 뜻 없어. 그냥 생각 나서 한 거야.>
“보통 지금 자는 거면 하루에 서너 시간은 자나? 어째 한국 있을 때보다도 더 바쁘게 사는 거 같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냐. 넌 세아 기다리는 중?>
“응, 하교할 때 거의 다 돼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렇게 답하며 따뜻한 봄 공기를 들이쉬던 그때.
세라가 마치 내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담배 피우려면 피워.>
“내가…… 그거 말했었나?”
일단 나는 기억이 없는데.
세라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차 안에 있는 것 같진 않고, 세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고, 그럼 담배 피우려고 잠깐 나왔는데 내가 전화한 거 아닌가?>
“이거 영상통화 아니지?”
얘가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좋아도 여기 CCTV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놀란 걸 넘어서 신기하단 심경까지 담아서 묻자 세라가 낮게 웃는다.
<맞나 보네. 아니었으면 좀 창피할 뻔했는데. 나 신경 쓰지 말고 피워.>
“……고마워.”
감사를 전한 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욱- 하는 숨이 흘러나왔고, 세라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목소리는 왜 안 좋았어? 이성적인 판단이야 네가 알아서 잘할 거고, 새벽 감성적인 조언은 해줄 수 있는데.>
“…….”
배려가 담긴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영웅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내가,
두 명의 영웅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둔 세라에게 고민이랍시고 뭔가 물어보는 게 맞는 일인지.
판단에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고, 나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 돼.
설령 세라가 모른다 해도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건 기만이다. 지난 십 년 동안 줄곧 이 애를 속여왔는데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순간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나는 짐짓 평온한 말투를 꾸미며 부정하려고 했고…….
“아냐, 별일-”
<아니다. 조언이라고 할 것도 없고, 오래 사귄 친구로서 참견하는 정도라고 생각해둬.>
“……뭘?”
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먼저 운을 뗀 세라가 일렀다.
<판단하기 애매한 게 있으면 정말 확실한 것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 애매했던 것도 명확해져 있잖아? 보통은.>
부정하기 어려운 정론에 나는 담담히 긍정했다.
“응, 네 말이 맞네. 근데 그건 새벽 감성적인 조언은 아니지 않나?”
굳이 따지자면 굉장히 합리적이면서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는데.
세라가 장난스럽게 반문한다.
<그런가? 원래 성격이 이런 걸 어쩌겠어. 네가 이해 좀 해줘.>
“고맙다.”
나는 그렇게만 답했다. 그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일처럼 느껴져서.
세라가 이어서 말한다.
<조언은 아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새벽 감성적인 얘기도 해보면…… 지금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드네.>
“어떤 면에서?”
<여긴 창밖이 깜깜해. 아무 소리도 안 나고, 불빛이라곤 내가 켜놓은 조명 하나뿐이거든. 근데 네 쪽은 아니잖아? 거긴 아직 해가 떠 있을 거고, 주위 소음도 들리고.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데도 서로 그런 게 달라서, 향수병 같은 건 아니지만…… 새삼스럽게 좀 신기해.>
“……세라야.”
<응?>
아련하게 자아낸 말을 듣고 나는 이런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으, 거기가 새벽이긴 한가 보다.”
<놀리는 거지?>
“부정은 안 할게.”
뻔뻔하게 긍정하니 세라가 오늘 중 가장 맑게, 수화기 너머의 나한테까지 잘 들릴 만큼 선명한 소리로 웃는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말 그냥 한번 전화해본 건데 생각지도 못하게 보람이 있었네.>
그 말에 나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세라가 내게 날 선 말들을 쏟아내고, 나도 이성을 잃어 떠오른 말을 자제하지 않고 입 밖에 냈던 재작년 어느 날.
우리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건 그때 이후로 아마 처음이다.
몇 초의 침묵.
이윽고 세라가 화제를 돌렸다.
<나 귀국 날짜 정해졌어.>
“언젠데?”
<6월 3일. 졸업식 안 보고 바로 갈 거야. 귀국해서 며칠은 정신없을 것 같은데…… 너 시간 괜찮으면, 그 주 일요일에 만날래?>
“응, 그러자.”
아까보다 조금 더 활기가 도는 듯한 목소리로 세라가 대화를 정리했다.
<그럼 그렇게 정해놓고, 귀국해서 다시 연락 줄게. 이제 자야겠다. 세아한테 안부 전해줘.>
“세라야.”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 무의식적으로 부르니 세라가 묻는다.
<왜 그래?>
차분한 목소리.
나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이 말을 해도 될까, 하면서.
그리곤 아까 세라에게 들은 조언을 떠올렸다. 확실한 것부터 하나하나씩 해나가라고.
이건 확실한 거겠지.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려 했고…….
<크게 중요한 거 아니면 만나서 얘기해. 지금 안 자면 컨디션 나쁠 것 같아서.>
“……응.”
<다음에 봐.>
이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저쪽의 소리가 끊겼다.
세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겠지. 그걸 듣고 싶지 않아서 넌지시 거부한 걸까. 나한텐 사과할 자격도 없다고.
깊은 한숨을 내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버리고 새로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던 그때.
“…….”
방금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등 뒤의 시선을 감지했다. 싸늘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걸 감지하며 뒤를 돌아보니…….
“또 피우게?”
교복 차림으로 가방을 멘 세아가 싸늘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주 부드러운 동작으로 담배를 도로 넣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언제부터 있었어?”
“‘거기가 새벽이긴 한가 보다’부터.”
뭔가 분위기 잡는 것 같은 목소리를 꾸민 대답.
유해빈 걔도 내 흉내를 이상하게 내던데 이세아 요것도 이러네. 아니면 내가 진짜 말투가 저런가?
“근데 왜 안 부르고 있었어?”
대화를 들킨 게 민망해 그렇게 묻자 세아가 새침하게 답한다.
“나도 눈치란 게 있으니까.”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내 차 쪽으로 척척 걸어갔고, 뒤따라간 내가 차 시동을 걸 때쯤에야 묻는다.
“세라 언니랑 만나게?”
“응, 귀국하면.”
최소한 두 번은 봐야 한다. 세라와 단둘이 대화부터 하고 그다음엔 한태강과도 대면해야겠지.
마침 여름에 마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약혼이 만료된다. 기한은 다 지났으니 당사자들의 결정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균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내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내가 짐작하는 것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오갔을까.
생각해봐야 의미가 없는 질문을 되뇌고 있으려니 세아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이 중얼거린다.
“최소한 세라 언니만큼 좋은 사람 아니면…… 집에 데리고 오지 마.”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냐?”
“여기부터는 더 타협 못 해.”
크지 않은 목소리지만 어조는 무척 단호했다.
얘가 눈만 높아가지고…….
“왜 웃어?”
너털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돌아온 추궁.
“아냐, 저녁 뭐 먹을래?”
“돈까스.”
곧장 나온 대답에 나는 다시 피식 웃으며 차를 몰아갔다.
***
같은 시각.
어두운 침실 안에 누워있던 한세라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새벽 다섯 시. 자야 하는 시간이고,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고 있지만 그런데도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자리한 감정들이 복잡해서.
미움, 원망, 후회, 믿음, 이해…… 그리고 애정.
한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많고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떠올린 기억.
유학 직전에 이도진과 만난 날.
한세라는 지금도 그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담담한 비난.
어떠한 해명도 없는 사과.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애원에 가까워진 비난은 사실 다른 뜻이었다. 뭐라도 말해보라고. 그러면 믿어줄 테니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둘 다 술이 많이 취했고,
결국엔 점차 언사가 격해졌고,
한세라는 너무도 소중한 친구이자 약혼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너는,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되돌릴 수 없이 뱉어진 말.
그리고…….
북받쳐오른 감정과 싸늘함이 함께 서린 듯한 목소리로 이도진이 답했다.
네가, 대체 뭘 아느냐고.
한세라는 그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이도진이 그렇게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는 게 충격인 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황이었고,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저 이도진의 말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모른다’라는 것.
이도진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틀림없이 자신일 텐데. 그도 그걸 알 텐데.
그런데도 ‘모른다’라고 답할 수 있다는 것.
한세라는 그 말에 숨은 행간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정말로 자신이 모르는 영역이 있다고.
기실 그 시점에서 의심은 상당 부분 걷혔다.
들려오는 소문과, 주위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
그게 이도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
그것만 알면 사전 정보는 충분했고,
그로부터 이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세라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도진을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도진이라는 사람의 근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역시나 자신일 거라고.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서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한세라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
5월 13일 목요일 오후.
마법역학 수업을 듣던 유해빈에게 청천벽력 같은 통고가 전해졌다.
“따라서 이번 실습은 조별로 진행할 예정이니 다들 참고해줘요.”
담담히 말하는 이도진을 응시하며 그녀는 내심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니, 저기요…… 이건 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