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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74화 (74/207)

#74화. Chapter 18. 가정 방문 (3)

“균열 기준으로 S급 이상. 그 정도로 상정해야 할 거예요.”

마력의 출현은 이 세상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폐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저울에 둘을 나란히 올려두면 전자 쪽으로 기울 터였다. 그 예시 중 하나로 자연재해의 극복 같은 걸 들 수 있겠고.

화산, 지진, 해일, 태풍.

그야 위협적인 현상들이지만 마력이 없는 세상과 동등한 수준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별의 인류는 마력을 이용해 화산을 잠재울 수 있다. 지진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다. 해일을 막아내고, 태풍을 소멸시킬 수 있다.

마력은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하는 힘이고, <세계의 수호자>를 집필하며 나는 어떤 문제를 생각했다.

마력이 한순간에 사라지면…… 너무 많은 혼란과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악마의 수장을 무찔렀다고 마력이 곧장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작가인 내가 원치 않는 것과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균열 너머 세상에서 천 년 이상 공을 들인 작업이니까. 연결이 끊어지는 것도 오래 걸리는 게 당연했다.

짧으면 오십 년.

길면 백 년 이상.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겠지.

그동안 인류는 대비하며 부단히 연구할 거고, 수백 년이 지나 마침내 이 별에서 마력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할 순간이 와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을 거다. 마력의 순기능을 대체할 힘을 이미 갖추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세계의 수호자>의 결말은 분명 해피엔딩이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미래가 흘러갔다면.

하지만 대균열 이후로 십 년.

이젠 마력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게 정설이고, 균열 현상도 예전처럼 활발하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

현재의 균열은 출현을 예측할 수 없이 자연재해처럼 나타나니까.

마력을 각성한 인류는 기존의 재해를 극복했으나 균열이라는 새로운 재해를 맞이하게 된 거다.

그래서 나는 배신한 자들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그러면 모든 게 잘 풀렸을 텐데.

놈들은 마력이 갑자기 사라질 걸 두려워해 일을 꾸몄고, 대균열이 발생해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곧 서울에 거대한 규모의 균열이 출현하리라 짐작하고 있다.

<킬 더 이블> 2권 후반부에 있을 메인 에피소드.

‘검은 심장’의 파생 스킬을 한 가지 습득해 발동하라는 서브 퀘스트와 지나치게 과한 퀘스트 보상.

<마신의 탄생>이라는 후속 외전의 제목.

<킬 더 이블>이라는 정식 속편의 제목.

만약 검은 심장이 악마와 연관된 힘이라면…….

균열, 그리고 악마.

<킬 더 이블> 2권의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그 둘과 맞닥뜨릴 거라 예상할 수 있기에.

“균열…… S급?”

혼잣말처럼 되뇌던 서연희가 나를 올려다본다.

우리는 느리게 걷고 있었고,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S급 균열이라는 건 확실한 거야?”

“아뇨, 어떤 일일지는 몰라요. 아마 균열 아닐까 싶지만요.”

“서울에서?”

“수도권까지 범위를 넓히는 게 맞겠네요. 다른 지역일 수도 있지만 확률은 낮아요.”

균열이 발생한다면 세아와 진유리는 그 영향권에 들어가겠지. 거기에 더해 유럽에서 온 영웅들까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상황만 아니면 서울, 넓게 잡아도 수도권으로 좁힐 수 있을 거다.

서연희가 작게 중얼거린다.

“최대한 티가 안 나게…… 준비를 해둬야겠네.”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녀는 지금도 각성자 업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정보의 출처를 감추고,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대비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이윽고 그녀가 아쉬워하듯 물었다.

“네 능력 말인데…… 더 구체적으로 살필 순 없니? 시기랑 장소 같은 거.”

“되면 벌써 말씀드렸죠.”

“그래도 좀 더 힘을 써보면 안 돼? 으음…… 이런 건 어때? 예쁜 누나가 응원하면 기운이 솟아난다든가.”

“우주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장생종 차대 여왕 일레-”

“어머?”

재빨리 손을 뻗은 서연희가 검지와 중지로 내 입술을 막았다. 부드러운 감촉으로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이 입술과 맞닿다 떨어졌고, 나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이 응원해줘도 안 돼요.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 정도로는 어림없죠.”

“와…… 얘 말하는 것 봐. 나 상처받으려고 하는데.”

나도 서연희도 투덜대는 말투였다. 저쪽은 장난처럼 속상해했지만 나는 그보다는 진심. 누가 모르고 싶어서 모르냐고.

다만 본뜻이 독촉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이번엔 감사를 담아 말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거 저도 아니까…… 마음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그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서연희가 되묻는다.

나를 대견해하고, 기특해하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자책할까 봐.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만 알고 위치도 시기도 알지 못해서 죄책감을 품을까 봐.

그걸 걱정해 나를 일깨워주려 한 거다.

당장 알 수 없는 것에 나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사실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거죠?”

“너 요즘 눈치가 더 빨라졌어. 뭐랄까…….”

잠시 단어를 고르던 서연희가 일렀다.

“좀 건방져. 말하기도 전에 알아버리면 내가 민망하잖아?”

“칭찬으로 들을게요.”

피식 웃으며 발길을 이어나가는데 팔 안쪽과 바깥쪽에 감촉이 느껴졌다. 한 걸음 더 내 옆으로 붙은 서연희가 팔짱을 끼고 있다. 그리곤 상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네 잘못 아니야.”

“……알아요.”

“응, 그래도 신경을 쓸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네 덕분에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거야. 도진이 네가 그걸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 다 떨쳐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책감이 들려고 할 때 내 말을 떠올려보라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는 거야.”

‘이 정도까지 참견할 줄은 몰랐지?’라며 그녀가 맑게 웃는다.

온전히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지만 무척 위로가 되는 웃음이었고, 나는 다음으로 해야 할 말을 이었다.

“아르노 뒤레 말인데요.”

“응, 걔가 왜?”

“착오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배신자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정말? 네가 이렇게 취소한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되묻는 서연희의 어조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얻은 정보가 명확하지 않았던 적은 많지만 한번 얻은 정보를 백지화에 가깝게 되돌리는 건 이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관련 계획도 당분간은 보류하려고 해요. 해빈이도 주말에 따로 불러서 설명해줘야 할 것 같고요.”

“따로 부른다고? 꼭 그럴 필요가 있어?”

태연한 어조로 제기된 의문.

걔도 은마산에 데려가려 했으니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데. 왜 저런 걸 묻나 싶어 의아해하자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이른다.

“기왕 나온 김에 지금 말해도 되잖아.”

“전화나 마법으로요?”

“얘도 참, 중요한 일인데 얼굴 보면서 말해야지. 나랑 같이 그 애 집에 가면 되잖아?”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되묻자 서연희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너 혼자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도 나랑 같이 가는 건 조직 보스와 이인자, 귀여운 신입 단원까지 셋이서 만나는 거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애 집에 놀러 가보고 싶기도 했고.”

“그럼 연락부터 해두고-”

“난 기습적으로 가고 싶은데?”

마침 주위에 인적이 없었다.

쉬익- 서연희가 손을 휘둘렀고, 우리 둘 다 외견이 바뀌었다.

여전히 왼손의 팔짱은 풀지 않은 그녀가 목표를 향하듯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다. 아무래도 진짜 가려는 것 같은데…….

“먹을 것도 좀 사서 가자. 걔 집에 있으려나?”

“그럴 거예요. 그래도 연락은 하고 가는 게-”

“안 돼. 보스 명령이야.”

“……이럴 때만 보스지.”

핀잔처럼 말한 나는 포기하고 서연희와 걸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그녀가 묻는다.

“근데 아까 했던 말.”

“어떤 거요?”

“장생종 차대 여왕, 이라고 했나? 난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서 제일 예쁘다면서. 그거 진짜야?”

“……사실이긴 하죠.”

“어머, 미적 기준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잖아. 도진이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제 미적 감각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그럼 네가 보기에 그 사람이 제일 예쁜 거야? 확실히 말해야지.”

“후우…….”

어쩔 수 없겠네.

한숨을 쉰 나는 서연희에게 되물었다.

“진짜 알고 싶어요?”

“응, 대답 여하에 따라서 오늘 지출은 내가 다 부담해줄 수도 있는데.”

“음…… 제 눈에는요.”

“네 눈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어떤 면에선 가장 진심에 가까운 답을 일렀다.

“제 눈에는 세아가 제일 예쁘고 귀엽죠.”

“…….”

“왜 말이 없으세요?”

“도진아…….”

“네?”

“너…… 그거도 병이야.”

서연희로선 드물게 싸늘한 어조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게 적당히 살길은 주고 놀렸어야지.

그리고, 이후 들른 가게에서 산 음식과 마실 것들은 전부 내가 계산했다.

***

5월 13일, 오후 여덟 시에 다다른 시각.

잠옷을 입은 유해빈은 하릴없이 소파 위를 뒹굴고 있었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고, 굳이 찾아서 하려면 꽤 많다고 볼 수도 있겠지.

공부라거나.

마력 훈련이라거나.

아니면…….

“조별과제…… 죽어…….”

원망 서린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한은 일주일. 그 안에 자료조사부터 발표와 보고서까지 죄다 해치워야 한다.

그걸 총괄할 조장은 바로 유해빈 자신이었고.

“이도진…… 이조딘…… 이 못된 놈…….”

이 암담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 데 상당한 책임이 있다 여기는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린 유해빈은 불현듯 밀려온 부끄러움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치는 빨라가지고…….’

캡처한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건데 수정 / 삭제 버튼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아본 건지.

졸업한 주제에 제타 계정은 왜 있는 건지.

불합리하고, 부끄럽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고생한테 부끄러운 말 시키는 게 취미인 변태 자식…….’

한 시간 전쯤의 일이다.

여론 조작을 들킨 그녀에게 시켰던 말.

‘나 유해빈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더 착하고 바른 고등학생으로 살 것을 맹세합니다.’

그냥 보기엔 윤리 선서 같은 문장이지만 말한 당사자인 유해빈은 결코 그리 생각지 않았다.

‘그것도 재능이야, 재능. 자각 못 하면서 이상한 말 시키는 재능.’

예전에 강요했던 육체적 굴복 선언.

오늘 강요한 정신적 반성.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를 통틀어 그녀를 지배하려는 시커먼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비단 억측만은 아니리라.

누운 상태에서 흘끗 고개를 내리깐 유해빈은 입고 있는 잠옷을 쥐며 말을 걸었다.

“야, 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으나 그녀는 푸념과 원망이 서린 어조로 계속 말했다.

“네 전 주인, 이도진 씨. 왜 그렇게 사람이 음습하고 음탕해? 어? 어떻게 된 거야. 자기 집에서도 그러나? 말 좀 해봐.”

스륵-

쥐고 있던 옷이 흐트러지며 작게 소리를 내는 게 마치 이렇게 답하는 것 같았다.

누가 누구보고 음습하고 음탕하다는 거냐고.

내 전 주인은 적어도 옷 몰래 훔쳐서 잠옷으로 쓰지는 않았다고.

“뭐, 그렇긴 하지.”

유해빈은 담담히 수긍했고, 그러나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복수하리라 마음먹었을 뿐이다.

“음…… 너한테 뭘 해야 간접적으로라도 갚아줄 수 있을까?”

소파에서 상반신만 일으키며 중얼거린 말.

쓸려나간 옷깃에서 다시금 애원처럼 소리가 났다.

여기서 뭘 더 할 생각이냐고.

존재로서의 존엄을 더는 잃지 말라고.

유해빈은 사뿐히 무시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배가 출출해서 치킨이나 시켜 먹으려고.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택배입니다.>

“아, 문 앞에 놔두고 가주세요!”

유해빈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 택배가 몇 개 왔는데 아직 수거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나고, 택배 기사가 내려갔으리라 짐작된 다음 그녀는 현관문을 열었고…….

“안녕?”

처음 보는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한다. 그 옆엔 남자가 한 명 있다. 역시나 처음 보는 외견.

쉬이익-!

여성이 손을 휘두르자 퍼져나간 마력.

이제 유해빈의 앞에는 익히 아는 두 사람이 서 있다.

팬텀의 보스.

그녀의 충실한 하수인인 이도진.

이 상황 자체도 몹시 당황스러웠고…….

유해빈은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 내가 지금 옷이…….’

시선을 내려보니 바뀐 건 없다. 잠옷으로 삼고 있는 겉옷이 몸에 걸쳐져 있다.

스륵- 옷이 스치며 소리가 난다. 이번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날 괴롭혔으니.

내 전 주인을 속였으니.

이제……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시간이라고.

“응?”

“……어?”

보스와 이도진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눈길은 유해빈의 상반신으로 향해 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은 옷으로.

유해빈은 살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간절히 되뇌었다.

‘위대하신 드래곤의 시조시여…… 부디 이 위기를 이겨낼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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