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Chapter 18. 가정 방문 (4)
기실 본인도 믿지 않는 기도였다.
드래곤의 시조 격인 존재들이 있긴 하나 그들이 세봐야 얼마나 세겠는가.
균열 너머 세상에서도 마학은 갈수록 발전했으며 자연스러운 이치로 고대의 드래곤보다 현대의 드래곤이 더 강하다.
천몇백 년 전까진 분명히 그랬고, 악마들에게 패배해 몰락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옛날 고리짝 시절 드래곤보단 유해빈 자신이 훨씬 강할 거다. 맞서야 할 적인 악마들이 지나치게 강한 게 문제지.
해서 유해빈은 무의미하고 헛된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이 별의 인간들도 신께 기도는 올리지만 무덤에서 발굴한 고대인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
유해빈에게 고대의 드래곤은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고, 그녀에겐 기도를 드릴 신조차도 없다. 그나마 신에 제일 근접한 존재는 이십여 년 전 소멸한 악마의 수장이지만 그자에게 소원을 빌 순 없는 노릇.
믿을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할 수 있어. 나 유해빈, 18세 군필 여고생. 할 수 있다, 화이팅!’
이쪽 세상에 오기 전엔 나이가 어리긴 해도 저항군 소속이었고, 전역을 안 했으니 군필은 아니지만 어쨌든 군인이기는 했던 현직 여고생 유해빈. 그녀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뻐하고 있단 기색을 꾸미며 이도진과 서연희에게 물었다.
“어…… 저야 좋은데…… 오셔도 괜찮은 거죠?”
“응. 여기 오면서는 변장했고, CCTV 같은 거도 안심해도 돼. 우리 지금 대화하는 거도 아무한테도 안 들릴 거야. 깜짝 놀라게 해주려다가 마침 택배가 쌓여 있길래 연기했는데…… 놀랐니?”
생긋 웃으며 서연희가 답한 말. 유해빈은 안심했다는 목소리로, 남들의 의심을 사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그들에게 일렀다.
“네, 놀랐죠. 어서 들어오세요. 근데 그거 다 저랑 드시려고 사신 거예요?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다.”
이도진이 들고 있는 봉투를 살피며 한 말이었다.
그래도 불쑥 방문한단 자각은 있었는지 여기저기 가게에서 음식과 마실 것들을 잔뜩 산 듯했고, 먼저 집 안에 들어선 유해빈은 기습적인 방문자 두 사람을 등진 채 조용히 자신을 응원했다.
‘일단 첫 고비는 넘긴 것 같네.’
어디까지나 의연하고 담대해야 한다.
혹시 이도진이 물으면 그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저번에 보니 옷이 예뻐서 나도 샀다고.
‘승산이 있어.’
유해빈은 이도진을 믿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멍청함을 믿었다.
그라면 아마 이런 헛소리나 해대지 않을까.
너도 그 옷 샀냐고. 옷 예쁘지 않냐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은마산 안에서 왜 옷을 산 매장 위치를 물었는지 알겠다는 정도는 언급하겠지.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닐 터였다.
‘도진쿤 A.K.A. The 똑똑한 빡대가리……. 난 당신을 믿어요…….’
6월에 들이닥칠 또 한 명의 강적, 약혼녀 한세라.
그녀가 지은 별명 ‘착한 쓰레기’에 이어 하나 더 모순적이지만 잘 어울리는 별명을 떠올린 유해빈은 이도진에게 다가가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건 저한테 주세요. 두 분 다 저녁 안 드셨죠? 제가 정리해서 가지고 올게요.”
“아…… 그래.”
왠지 미심쩍게 들리는 이도진의 목소리가 불안했으나 지금은 그에게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정말로 주의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팬텀의 보스. 그녀만 속여 넘길 수 있다면 이도진 본인은 큰 문제도 아니겠지.
‘보스는 알고 있을 거야.’
현재 유해빈이 입고 있는 옷을 이도진도 가지고 있단 걸 알 거다. 그와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고, 아까 이 옷에 주목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한들 유해빈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까지 하긴 어려울 터였다.
‘왜냐면……진짜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짓이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만큼 음습한 행위이기에 오히려 그들을 속일 수 있다. 그래야만 하고.
그리고…….
결의를 되새긴 유해빈이 음식을 담을 접시를 가져오려던 그때.
“근데 해빈아.”
“네?”
문득 이도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소파에 앉아 있는 서연희와 달리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 유해빈은 조금씩 스며들던 불안감이 급격히 팽배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이도진의 표정을 단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이런 표현을 써야 하겠지.
‘의심하는 거 같은데…….’
유해빈이 입고 있는 겉옷이 사실 자기 옷일 수도 있다고, 확신까진 아니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야? 어떻게?’
별다른 단서도 없으니 그저 같은 옷을 샀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텐데. 그게 정상일 텐데.
어째서 이도진 주제에 이렇게 날카로운 추리력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고, 그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으…… 너도 그 옷 산 건가?”
“아, 네. 저번에 빌려서 입어보니까 예쁘더라고요. 촉감도 좋고. 매장 위치 알려주신 대로 가봤는데 있길래 하나 샀어요. 따라 사서 죄송합니다!”
유해빈은 지금 가능한 한 가장 태연하고 밝은 목소리를 꾸미며 답했다. 물론 머릿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최종보스를 속여 넘기긴커녕 시작지점 마을만 지나면 출현하는 다람쥐나 토끼 같은 초보 몬스터를 상대로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린 듯한 이 느낌.
서연희는 흥미로움과 불쾌함이 함께 담긴 듯한 눈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이도진이 이어서 묻는다.
“근데…… 너 입기엔 치수가 좀 큰 것 같다?”
유해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사락거리는 옷이 마치 그녀에게 묻는 것만 같다.
자, 이제 빡대가리는 누구지? 라고.
***
“근데…… 너 입기엔 치수가 좀 큰 것 같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민망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해빈 저 자식 키가 168인가 169인가…… 아무튼 170은 안 된다. 진유리보다 아주 약간 더 큰 정도니까.
근데 왜 내가 산 옷이랑 정확히 같은 치수, 제일 큰 옷을 입고 있냐는 거지.
옷 아랫부분은 허벅지를 절반 이상 가릴 정도로 내려와 있고, 소매는 몇 번이나 접어서 조금 부풀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저 옷 치수가 다양한 편인데. 어째서 제일 큰 치수로 골라 샀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야 나로서도 유해빈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세아 친구.
팬텀 후배.
나름대로 비밀을 터놓는 사이.
이런 걸 전부 제외하고서라도…….
정말로 저게 내 옷이고 유해빈이 의도적으로 바꿔치기한 거라면, 집 떠나 외롭게 살아온 터라 마음 한편으론 안쓰럽게 여겨오던 이 애가 실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
만약 유해빈이 결백한데 내가 뭘 의심했는지 알아채면 날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겠지.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냐는 식으로.
그리고 내 추측이 사실일 땐…… 문제가 심각하다.
굳이 따지면 내 쪽에서 화를 내야 할 상황이지만, 너무 황당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추궁이 아니라 궁금해하듯 물어본 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수습할 여지를 남겨보려고.
이내 유해빈이 답을 일렀다.
“그으, 오버핏으로 입으려고 한 건데…… 이상해 보여요? 아직 밖에 입고 나간 적은 없다가 지금 편의점 가려고 입었는데 마침 교수님이랑 보스 오신 거라서…… 그렇게 이상해요?”
오버핏이라…….
그렇게 우기면 아예 못 우길 건 없겠지만, 그래도 좀 많이 크잖아.
서연희가 나선 건 그때였다.
“나도 입어봐도 돼? 예전부터 입어보고 싶었는데.”
“네?”
뜬금없는 요청에 놀라며 되묻는 유해빈에게 척척 다가간 그녀가 자기 손으로 직접 옷을 벗기더니 본인 몸에 걸쳤다. 그리곤 내 쪽을 돌아보며 묻는다.
“이 모습으로 입기는 좀 큰가?”
“보스는 심각해요. 무슨 원피스도 아니고.”
“그래? 해빈이가 입은 것도 귀엽긴 한데 도진이 네가 입는 게 몸에도 맞고 잘 어울리긴 한 거 같아.”
그러더니 다시 옷을 벗고는 나한테 건네줬다. 왜 주냐는 식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서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전에 입었을 때 보기 좋았거든. 보고 싶어서.”
“나 입어봐도 되냐?”
“아…… 네.”
유해빈에게 확인차 묻자 뜨뜻미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손에 쥔 옷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척 보기에도 새 옷이니까.
가까이서 보니 착용감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새 옷 특유의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다.
몸에 걸치니 온전하게 확신이 든다. 옷 가게에서 직원이 새로 꺼내준 옷 입어볼 때의 그 느낌과 아주 흡사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미친 변태 새끼’는…… 유해빈이 아니라 나였다.
도로 옷을 벗어주며 나는 무척 친절하게 물었다.
“해빈아, 뭐 먹고 싶냐?”
“네? 저거 사 오신 거 중에서요?”
“아니, 그거 말고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배달시켜도 되고 내가 나가서 사 와도 되고. 배고팠다면서.”
“어…… 저기 사 오신 것만 해도 저 혼자 먹으면 주말까지 먹을걸요.”
“그래?”
다행히 들키진 않았지만 말 같지도 않은 의심을 한 게 미안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요즘 워낙 경황이 없어 내 정신이 회까닥한 듯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나한테 호감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건 둘째 치고.
얘가 은근히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긴 해도.
설마 옷 바꿔치기하는 그런…… 차마 표준어로는 형용 못 할 심각한 성향을 가지고 있진 않을 텐데.
“그럼 일단 먹자. 해빈이 앉아 있고, 보스도 앉아 계세요. 차려서 가지고 갈게요.”
“아뇨, 제가 대접해야-”
“어머, 도진이가 해준다잖아? 나랑 얘기하고 있으면 되지.”
“네…….”
서연희의 말은 잘 듣는 유해빈이 잠자코 소파에 앉았다. 둘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거실에서 기다렸고, 그즈음 내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세아: 언제 와? (19:57)
-이도진: 금방 갈게
-이도진: 늦어도 아홉 시 안에
산책간다고 나와서 벌써 한 시간도 넘게 지난 시각. 혹시 몰라서 아홉 시까지로 말해뒀지만 가능하면 그보다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다.
한데 세아가 여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뉘앙스의 답장을 보내왔다.
-세아: 열 시 넘어도 돼
-세아: 천천히 산책하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세아: 그러다 들어와 (19:58)
“……?”
세아 얘가 요즘 순해지긴 했어도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하지만 괜히 되물어봤다가 쓸데없이 역효과를 일으키면 안 되기에 나는 다른 걸 질문했다.
-이도진: 야식으로 먹을 거 사갈까?
-세아: 괜찮아
-세아: 피자 먹고 있어
-이도진: 응 그러면 오빠 알아서 사갈게
-세아: 안 먹는다고...... (19:59)
주면 또 먹을 테니 엄밀히 말하면 본심은 아니겠지. 나는 접시에다 음식들을 담아 거실로 돌아갔다.
내가 건네준 닭다리를 왠지 소극적으로 쥔 유해빈이 묻는다.
“보스한테 들었어요. 좀 변동이 있다면서요?”
“어, 아르노 뒤레는 보류.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어.”
“그러면 다른 건요?”
나는 단출하게 답했다.
“해빈이 너, 5월 끝날 때까진 세아랑 유리 좀 챙겨줘야겠다.”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오후 일곱 시 무렵.
집을 나선 진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괜찮나?’
오늘 컨셉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청순한 스타일.
고양이상인 눈매는 아이라인을 공들여 그리는 것으로 커버해 여려 보이게 했다.
입술은 색이 옅은 틴트를 살짝만.
피부는 희고 뽀얀 느낌을 주도록.
전체적으로 화장한 티가 너무 나지 않게 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인 메이크업이었고, 옷차림도 그와 어울리게 장신구 없이 산뜻한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었다.
가방, 신발, 하다못해 양말까지 완벽 그 자체다.
꾸미는 데 관심은 많으나 아직 열여덟 살인 진유리로선 이게 할 수 있는 최선.
현시점에선 이보다 더 예쁜 모습을 보일 수 없고, 그래서 진유리는 만족했지만…… 또 한편으론 불안했다.
‘시간이 늦었긴 해.’
오후 7시 15분. 친구 집에 방문하기엔 조금 늦은 시각이다.
심지어 친구만 사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함께 사는 집이라면.
조별실습 회의는 핑계일 뿐이며 사실은 그 선생님이 사는 집이 궁금하고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같이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라는 개인적인 사심이 진정한 방문 목적이라면.
그러면 떨리고 불안하지 않은 게 되려 이상한 일이겠지.
엘리베이터의 표시가 10층을 넘어선 시점, 진유리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곧 도착할 집에 사는 친구와 나눈 메시지가 화면에 펼쳐져 있다.
-진유리: ㅎㅎ
-진유리: 세아야 뭐해?? (18:05)
-이세아: 집에 왔어 (18:12)
-진유리: 아 ㅎㅎ 다른 게 아니라
-진유리: 우리 조별과제 있잖아
-진유리: 애들이 주제는 우리 둘이 결정하라고 했고 금요일까지는 정해야 주말부터 시작할 수 있잖아 (18:13)
-이세아: 응 (18:18)
-진유리: 근데 우리 내일은 샬럿 선생님이랑 훈련하니까 오늘 정해두는 게 편할 거 같아서!
-진유리: 아까 말하려다 깜빡했네 ㅠㅠ
논리적으로는 타당했다.
진유리 자신이 조장이고 실습 주제는 이세아와 상의해야 한다. 본래 오늘 주제 선정까지 끝내뒀어야겠지.
하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고 싶었던 터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집으로 오는 중에 생각이 난 것이다.
‘조별과제 때문에 친구 집 가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진유리: 이거 얼굴 안 보고 결정은 못 하니까 너 괜찮으면 잠깐 만나고 싶은데
-진유리: 시간 괜찮아? (18:19)
-이세아: 난 상관없어 (18:25)
-진유리: 우리 집이랑 너희 집 별로 안 머니까 내가 너희 집 가도 되는데
-진유리: 바로 준비하면 일곱 시까지 갈 수 있어
-진유리: 너 괜찮고 교수님한테도 실례 안 되면 준비해서 갈까?? (18:26)
이때 진유리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혹시 이세아가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면서.
명분이야 확실했으나 이 얄미운 시누이(예비)의 방어를 그것만으로 돌파할 수 있을지 염려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읽고도 십 분 넘게 답장이 없던 이세아는 의외로 그녀의 제안을 선선히 수락했다.
-이세아: 와도 돼
-이세아: 오빠도 신경 안 써도 돼 (18:39)
-진유리: 정말?
-진유리: 그럼 나 바로 준비해서 갈게 ㅎㅎ
-진유리: 집에서 나가면서 전화할게!! (18:40)
이어진 삼십여 분.
진유리는 속도와 퀄리티를 함께 준수하며 최선을 다해 꾸몄고, 택시를 타고 이세아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
띠잉-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세아의 집 앞에 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세아야, 나 유리.”
현관문을 열고 진유리를 맞이한 건 반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이세아였다.
“빨리 왔네.”
“응, 너무 늦으면 좀 그래서 서둘렀어. 아, 이거.”
사근사근하게 답한 진유리는 집주인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런 걸 사 가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안 사는 것보단 나을 듯해 편의점에서 급히 구매한 과일주스.
“고마워.”
담담히 받아든 이세아를 흘끗 살피며 진유리는 생각했다.
‘얘 집에서는 엄청 편하게 입네.’
이미지와 달리 굉장히 격식 없는 옷차림이었다.
물론 중요한 건 아니었고, 진유리는 마침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상당한 감회가 느껴진다.
수호자 이시혁.
대마법사 정세빈.
세상을 구한 영웅들이 살았던 집이며 지금은 그들의 자식들이 사는 집.
그리고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어?’
진유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집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세아 혼자 있는 것처럼. 논리적인 의문이 머릿속에 스친다.
‘교수님도 나와 보셨을 텐데.’
집에 손님이 왔는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가르치는 학생인데.
당연히 나와서 반겨줬을 이도진이, 보이지 않는다.
진유리는 얼떨떨한 심정을 가누며 물었다.
“근데…… 교수님은 안 계셔?”
“산책한다고 나갔어.”
평온한 어조로 돌아온 충격적인 답.
진유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겨우 되묻는 말이 흘러나왔다.
“산……책?”
“응, 좀 늦게 올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아…… 산책…….”
이제 진유리는 진상을 깨달았다. 이도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던 메시지의 진짜 의미.
말 그대로였다.
‘집에 없으니까.’
그래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집에 와도 된다고 한 것일 테고.
그야 이세아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사실을 감춘 것뿐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했기에…… 진유리는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이세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