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76화 (76/207)

#76화. Chapter 18. 가정 방문 (5)

***

“해빈이 너, 5월 끝날 때까진 세아랑 유리 좀 챙겨줘야겠다.”

“어…… 무슨 일로요? 이세아는 그렇다 치고, 진유리도요?”

알아서 자기 챙길 거 다 챙기는 애라고 유해빈이 험담 반 진담 반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세부 사항과 이유를 설명했다.

“애들 학교생활 챙겨주라는 말 아닌 건 알지?”

“그렇겠죠?”

“조만간 서울에 S급 균열, 꼭 균열이 아니더라도 그거랑 비슷한 규모로 사건이 터질지도 몰라. 세아랑 유리가 거기 휘말릴 것 같아서, 네가 어울려 다니면서 안 다치도록 신경 써줬으면 좋겠네. 아르노 뒤레 건은 그 사건 끝나고 나서 다시 상의해보자.”

“음, 솔직히 진유리랑 있으면 싸울 것 같은데…… 알겠어요, 교수님 말씀대로 할게요. 근데…… 아, 이거 여쭤봐도 되려나?

“왜?”

나는 물론이거니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서연희 역시 알았으리라. 유해빈이 뭘 물어볼지에 대해서.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아시는가 해서요.”

비단 이번 일만 염두에 두고 질문한 건 아닐 터.

내가 어떻게 대균열에 관여한 원수들을 아는지.

경주에서 무슨 일이 있을 걸 어떻게 알고 자기를 데려간 건지.

이런저런 의문을 마음에 품고 있다가 직접적으로 물어본 거겠지.

“나한테도 전부는 안 가르쳐주거든. 그래도 애가 되게 착하잖아? 나쁜 뜻은 없겠거니 믿고 가는 거야.”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좀 궁금하긴 해요.”

서연희가 먼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른 말.

왠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유해빈이 거든 말.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진심으로 답했다.

“별로 설득력은 없겠지만…… 말해줄 수 있는 건 다 말해주려고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보스랑 해빈이 너, 두 사람은 절대 뒤통수 맞았다는 기분 안 들도록 할 거고.”

그야 내가 떳떳한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서연희에겐 비록 사실을 감추더라도 배신감을 느낄 일은 없도록 하는 게 내 원칙 중 하나다. 최근 들어서부터 유해빈도 그 범주에 속하게 됐고.

“보스는 속이고 싶지 않고, 해빈이 너는 내가 속여서 뭐하겠냐. 그럴 이유가 없어.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못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진심이야.”

“응, 난 그거면 됐어.”

서연희는 으레 그랬듯이 선선히 수긍했으나 유해빈이 볼멘소리처럼 묻는다.

“그러니까…… 보스는 그냥 안 속이고 싶으신 거고, 저는 수지가 안 맞아서 안 속이신다는 거네요.”

“그, 뭐냐. 너한테 이런 말 하는 자체에 안 속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네.”

“에이, 알죠. 장난 좀 쳐본 거예요. 여하튼 알겠어요. 이세아 옆에서 챙겨주면서 겸사겸사 진유리도.”

그리고 유해빈이 내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냐고.

“너 목숨 오락가락하는데도 챙겨달라는 말은 아니야. 혹시 세아한테 무슨 일 있을 것 같으면 나한테 최대한 빨리 말해주는 거. 그 정도 해주면 바랄 게 없지.”

“그래도 어지간한 일은 제가 커트하면 되죠? 제 정체 안 들키는 한에서는요.”

빙긋이 웃으며 유해빈이 내게 닭다리 하나를 건넸고, 그즈음 서연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도진이 너 언제까지 가야 하니?”

“집에요?”

“응, 산책한다고 나온 거잖아? 동생 기다릴 텐데 이것만 먹고 가도 돼. 난 해빈이랑 얘기 좀 더 하다 가면 되고.”

그러자 갑자기 몸을 흠칫 떤 유해빈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앗, 어…… 그으…… 교수님 가시게요? 아직 먹을 거 많이 남았는데…… 좀 더 있으시다가 보스랑 같이 가시면 될 것 같은데…….”

“응, 얼추 열 시 다 될 때까지 있다가 같이 가려고 했지.”

뿌듯한 심경을 한껏 실어 답하자 유해빈과 서연희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자랑처럼 일렀다.

“세아한테 아까 연락 왔거든요. 집에 언제 오는지 물어보더니 금방 간다니까 늦게 와도 된댔어요. 천천히 산책하고, 커피도 마시고, 여유 있게 들어오라고. 집에서 혼자 집중해서 공부하려고 그러나, 아무튼 애가 요즘 얼마나 착하고 오빠 챙기는지 몰라요. 처음엔 저거 며칠 가겠나 했는데 수학여행 때부터 일주일이나 됐으니까 이만하면 안정세라고 봐도-”

“난 맥주 사 온 거 마셔야겠네. 해빈아, 냉장고에 넣어뒀니?”

“네, 차게 하려고 냉동실에 넣어놨어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아냐, 나 마실 건데 내가 가야지.”

“제가 찾아드릴게요. 냉동실 안쪽에 넣어뒀거든요.”

“………….”

기껏 말하고 있는데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 쪽으로 쌩하니 가버린다. 남아있는 나는 무척 섭섭하고 못마땅한 심경이었다.

뭐야, 이거. 자기들이 궁금해하더니 왜 듣기 싫어하는 건데.

***

시곗바늘이 어느덧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킬 즈음.

유해빈은 거실 한쪽에 놓인 간이 거치대를 흘끗 쳐다보곤 생각했다.

‘이대로 넘어가려나……?’

거기엔 아까까지 그녀가 착용 중이던 잠옷이 걸려 있다.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들키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데.

한데도 들키지 않았고, 유해빈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진짜 어마어마한 마법사긴 한가 봐.’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변수는 없었다.

팬텀의 보스. 그녀가 유해빈이 입고 있던 잠옷을 벗겨내 자기 몸에 걸치고, 그리고 이도진에게 건네주기까지.

그동안 뭔가를 한 게 분명했다.

심지어 초일류 마학 연구자인 이도진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이미 며칠이나 집에서 걸치고 있던 옷을 완전히 새 옷처럼 만들 수 있을 만큼 초고도의 마법을.

유해빈은 지금 눈앞에서 생긋 웃으며 이도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보스를 살피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솔직히 좀 으스스한데…….’

이도진은 알기나 할까. 자신이 모르게 보스가 신입 단원의 프라이버시를 손수 보호해줬다는 것을.

‘흥, 당연히 모르겠지. 대-단하신 빡대가리니까.’

대단하다는 건 객관적인 상찬의 의미였으나 강조하고 싶은 건 ‘빡대가리’ 쪽이었다.

게다가 이도진이 그것만 몰랐겠는가.

잘 쳐줘서 설령 알게 됐다고 한들 보스의 진정한 의도까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터였다.

‘나 배려해서 숨겨준 게 아닐 거란 말이지…….’

그저 쓸데없는 소란을 만들기 싫어서.

이도진과 유해빈 자신이 ‘그런’ 쪽 화제로 엮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서 원천적으로 분란의 소지를 봉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했다.

‘무서운 사람…….’

내심으로 중얼거린 유해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보스가 눈치를 주는 건 아니고, 이 일로 겁박을 할 생각도 없이 것 같으니 이대로 무탈하게 지나가는 듯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불만이 있었다.

‘뭐야? 우리 집인데 왜 자기들끼리 다정하게 저러고 있냐고. 나도 끼워줘, 나도!’

테이블에 놓인 치킨.

이건 셋이 다 같이 먹는 것이었으나 마실 것에선 차이가 났다.

유해빈 자신은 탄산음료.

저쪽은 둘 다 맥주.

“맞아, 그 영화 재밌어 보이던데.”

“어떤 거요?”

“예고편 보니까 뱀파이어 나오는 거던데. 줄거리 재밌어 보였어.”

“저도 그거 예고편 본 거 같은데…… 장르가 로맨스랑 스릴러 합친 거죠?”

“응, 재밌어 보이지 않았어?”

“딱 봐도 예고편에 몰아준 것 같던데요. 예고편 광고 떠서 두 번인가 봤으니까 전 그 영화 벌써 두 번 봤어요.”

“얘는? 그런 말 하면 영화 찍은 사람들이 얼마나 서운해하겠어. 직접 가서 보고 말해야지.”

“같이 보자고요?”

“너 시간 괜찮으면?”

그리곤 서로 맥주 캔을 부딪친다. 유해빈은 눈꼴 시리다는 기색을 한껏 담아 그 작태를 흘겨봤으나 이 자리에서 그녀의 시선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유해빈은 다시금 되뇌었다.

‘왜 난 안 끼워주는데? 여기 내가 장학금 받아서 관리비 내고 사는 내 집이라고! 나도 끼워줘. 해빈아, 너도 예고편 봤어? 이렇게 말 걸어 달라고!’

한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넌 그거 예고편 봤냐?”

“어, 네, 네!?”

순간적으로 당황한 탓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와버렸다. 서연희가 가늘게 웃었고, 이도진이 재차 묻는다.

“제목이 뭐더라……. 내가 보기엔 딱 봐도 예고편 몰아주기였는데.”

“어, 뭐, 저도 교수님이랑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실은 거짓말이다.

유해빈은 그 영화가 상당히 재밌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진과 그걸 보러 영화관에 갈 확률은 없을 듯하고, 그러나 보스는 확률이 있을 것 같기에 훼방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그런 얄팍한 심산.

서연희가 넌지시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낸 그녀는 슬쩍 테이블로 눈길을 주며 운을 뗐다.

“근데 교수님, 보스…….”

“왜?”

“응?”

“하나 남은 것 같은데…… 저도 마셔보고 싶은데요.”

그녀가 노리는 건 나머지는 다 마시고 남은 맥주 한 캔이었다.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지만 본래 주도는 어른들에게 배우는 것이라 했고, 한 명은 멍청하고 한 명은 경쟁자였지만 어쨌든 둘 다 어른이긴 하니 은근히 기대를 품으며 청한 말.

이도진이 단번에 거부했다.

“안 돼. 너 미성년자잖아.”

물론 유해빈은 그 정도에서 굴할 생각이 없었다.

“아닌데 도진아?”

“어머?”

“……?”

고개를 갸웃하는 서연희.

이 자식이 또 무슨 헛소린가 하는 눈빛을 보내는 이도진.

유해빈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으흠, 사실은 내가 나이를 좀 속였거든.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야.”

그야 실제 나이도 열여덟 살이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늘 워낙 놀랄 만한 일이 있었던 데다 들러리 신세인 게 몹시 열이 받아서 되는 대로 꺼낸 말.

하지만 얄밉기 짝이 없는 보스가 태연하게 말한다.

“해빈이 거짓말하면 못써. 소원 계약 맺을 때 나 다 봤잖아.”

“어쭈, 이게 어딜 맞먹으려고.”

“아…….”

단 한 번의 반격으로 격파당한 유해빈이 침울해하며 새어 나온 소리를 흘리자 이도진이 재차 일렀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도, 그래 봐야 드래곤 수명으로 보면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이잖아.”

‘똑똑한’ 빡대가리답게 또 이런 지식은 해박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팔십 세. 균열 너머 세상의 드래곤은 평균적으로 백이십 년을 산다.

유해빈의 실제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가정해도 인간의 평균 수명으로 환산해보면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

하지만 마냥 수긍하기엔 억울한 바가 있고, 유해빈은 어조를 길게 늘어뜨리며 힘없는 반론을 펼쳤다.

“아니이, 그걸 왜 또 그렇게 나눠요. 먹은 밥그릇 수로만 따져야지. 그리고 저희는 열다섯 살만 되면 성년 취급하고, 술도 마실 수 있다고요. 성장도 좀 빠르고 알에서 있는 기간도 기니까. 교수님 알면서 괜히 심술부리시는 거죠?”

“아무튼 안 돼.”

“진짜 치사하시네…….”

한데 유해빈이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치익- 캔을 여는 소리가 난 다음.

보스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 마셔 봐.”

“보스, 그래도 여기선 고등학생인데 술은 좀-”

“뭐 어때. 용은 열다섯 살부터 성년이라니까, 그렇게 치면 도진이 너랑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아니…… 그게 또 어떻게 계산이 그렇게 돼요?”

“왜? 이렇게 계산하는 게 오히려 공평하잖아?”

보스가 천연덕스럽게 되받자 이도진도 제지하지 않았고, 맥주 캔을 건네받은 유해빈은 오히려 패배감에 젖었다.

‘저 여유로운 태도…… 재수 없어. 결승선 앞이라 이거지?’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도진보다 더 얄미웠다.

보스 자체로만 보면 우아하고, 상냥하고,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긴 해도…… 그래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니까.

이세아와 상당히 흡사한 외견으로 저러고 있으니 더더욱 기분이 이상했고.

하지만 유해빈에게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뾰족한 수가 없었고, 어느덧 오후 열 시에 다다른 시각이었다.

휘익-

손을 휘둘러 어질러진 거실을 말끔히 치워낸 보스가 현관 앞에 서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빈아, 우리 가볼게. 푹 자고, 다음에 또 보자.”

“내일 학교에서 보자.”

“교수님 금요일 수업 없으시잖아요.”

“복도에서 만나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줄게.”

“비싼 거 먹을 거예요.”

“뭐, 그래라. 잘 자고.”

이윽고 문이 닫혔다.

보스가 마법으로 치워준 덕에 딱히 정리할 건 없었고, 유해빈은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가 몸을 누였다.

생각보다 맛이 없어 절반밖에 마시지 않은 맥주 한 캔만 치워지지 않고 테이블에 놓여 있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유해빈은 옷을 걸어둔 간이 거치대로 향했다. 손을 뻗어 며칠 동안 애용했던 잠옷을 집었고, 그걸 얼굴에다 가져다 댔다.

완벽히 새 옷 같았다.

새 옷 냄새밖에 안 나고, 감촉도 새 옷 같았다.

위기에서 구해준 건 고마웠지만…… 단단한 벽에 부딪힌 것만 같은 막막함.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우.

보스가 이곳을 나서기 직전에 흘려낸 마력,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것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 어어?”

당황한 유해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고, 하나로 합쳐져 형태를 이룬 마력이 허공에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슈아아아아-!

발생한 공간에서 끌어당기는 듯한 힘이 쏟아져나왔다. 목표는 유해빈이 안타깝게 쥐고 있던 이도진의 겉옷.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손을 빠져나간 옷이 공간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윽고 공간이 닫혔고, 허공에는 이제 주황색 마력으로 구성된 세 글자가 일렁이고 있다.

유해빈은 그 글자들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경고야’……?”

고개를 떨군 그녀는 거실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반쯤 남은 맥주 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이걸 왜 먹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쓰고…… 지금 느끼는 기분과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적에게 구해졌다.

함께 해온 세월과 친밀함의 차이를 여실히 실감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전리품이 원치 않게 세척된 것도 모자라 아예 뺏겨버리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고 남긴 말까지.

왜 하필 주황색이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옐로카드를 줄 정도보다는 심각하고, 그래도 레드카드는 봐준다는 뜻이겠지.

한 번 더 선을 넘으면…….

‘뭔데, 뭐, 우리 집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거야?’

주황색이었던 경고가 새빨간 피처럼 붉은색으로 화할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

유해빈은 조금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곤 굳게 다짐했다.

‘다음번엔 안 들켜야지…….’

꼭 음습한 행위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뭔가 행동에 나설 때는 보스에게 발각되지 않게.

발각된다 해도 대놓고 제재를 가하지는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들키지 않으면 죄가 아니다.

걸려도 지적받지 않는다면 이 또한 죄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해빈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자기는 왜 가져가는데?”

공간을 넘어 사라지고 만, 벌써 그리워지는 잠옷.

그걸 어디로 빼돌린 건지.

만약 보스가 본래대로 복구할 수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 건지.

유해빈은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자택에 돌아가면 곧장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릴 작정인 서연희가 알았다면 황당해할 생각이었지만.

***

한편 유해빈이 패배감을 곱씹은 그 시점보다 한 시간 정도 전인 오후 아홉 시경.

진유리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이세아…… 이세아아아……!’

이 집에 들어오고 조금만 더 있으면 두 시간째다.

산책하러 갔다던 이도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진유리는 본의 아니게 대단히 학구적인 자세로 조별과제를 해나가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이 집에 머무를 명분이 없으니까.

‘내가 갈 줄 알고? 오늘 집에 가기 전에 교수님 얼굴 무조건 보고 갈 거야.’

인사를 나누고 싶은 건 당연하나 그와 함께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이세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과일주스까지 사서 온 게 분했기에 최소한 이도진과 마주해 인사라도 나누지 않으면 오늘은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다짐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진유리는 한껏 살가운 목소리로 이세아에게 물었다.

“아, 세아 콜라 더 마실래?”

“내가 마시면 돼.”

새침하게 답한 이세아가 바닥에 놓아둔 콜라 페트병을 들고 자기 컵에 부었다. 다만 테이블에 놓인 접시는 텅 비어 있다.

집에 온 손님인 진유리에게 이세아가 대접한 건 배달로 주문한 피자.

진유리가 콜라 한 잔을 마실 동안 그녀는 두 잔을 마셨고, 진유리가 피자 한 조각을 먹을 때 그녀는 두 조각을 먹었다.

미리 접시에 옮겨둔 두 조각을 제외하면 이제는 남은 게 없었고, 진유리는 문득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저건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달라고 한 거람?’

리뷰 이벤트를 신청해 받은 듯한 치즈 오븐 스파게티. 식으면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종류의 음식이건만 기껏 달라고 해놓고선 이세아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양이 좀 모자라 보이는 듯한데도 없는 음식인 것처럼 내버려 두고 있다.

진유리는 휴대전화의 시계를 살폈다.

오후 아홉 시 십 분. 아무리 늦게까지 머무르고자 해도 열 시 정도가 한계겠지. 이미 조별실습 주제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고, 밤 열 시면 객관적으로 나가줘야 하는 시간이다. 기실 지금만 해도 늦었고.

‘일단 과제부터 마무리해야지.’

가닥은 잡혔으나 아직 주제가 확정된 건 아니다.

이세아와 진유리의 의견이 각자 나뉘어 좁혀지지 않는 답보 상태.

마음속에 스미는 초조함은 잠시 미뤄둔 진유리는 이세아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으, 세아야. 이러면 밸런스가 살짝 안 맞지 않을까? 난 그래도 교과서에 나온 이론 안에서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통합하는 게 과제 목적이랑도 맞고.”

“너랑 나랑 축 잘 세우면 이대로 진행해도 구성체 일 분 넘게 유지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건 우리 개인으로 잘 하는 거잖아. 주제는 우리가 정해도 애들 참여도가 너무 낮은 건 좀…….”

“이거보다 복잡하면 결과물 안 나올 수도 있어.”

“그래도…… 정해진 원칙 선에서 최대한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아.”

“…….”

“…….”

도무지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세아는 진유리가 답답했고,

진유리도 이세아가 답답했다.

진유리가 보기에 이세아는 자기 재능만 믿고 편하게 과제를 끝내려는 얌체였고,

이세아가 보기에 진유리는 괜히 한도 끝도 없이 일을 크게 벌리려는 내부의 적이었다.

“세아야, 내 말 한 번만 더 들어봐? 그러니까-”

“이거 장담하는데 애들 다 못 한다고, 하기 싫다고 할 거야. 너랑 내가 하는 게 맞아.”

“아니, 그렇게 단정하지 말고, 열심히 준비하면 못 할 건 아니잖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 사람 다 조금씩 언성이 커지고 있었다. 애초에 서로 이해할 생각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

초조하게 시간이 흐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진유리는 시누이(예비)를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 지난 수년간 앙숙으로 지내왔던 라이벌을 대하는 말투로 이세아에게 선전포고했다.

“그럼 내일 샬럿 선생님이랑 훈련할 때, 그거 결과로 정해.”

“……어떻게?”

“대련 누가 이기는지. 너는 네가 원하는 과제 방식으로, 나는 내 방식으로. 네가 하려는 대로 하면 자신 있잖아?”

“……맘대로 해.”

거기까지 논의가 된 다음에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세게 말했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데다 이세아는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열 시가 들이닥치고 말았다.

이젠 정말로 일어나야 할 때였고, 어쩐 일인지 이세아가 그녀에게 일렀다.

“바래다줄게.”

“……고마워.”

병 주고 약 준다더니.

속여놓고선, 자신이 초조해하는 걸 알 텐데도 이도진과 관련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선.

인제 와서 미안한 마음이라도 드는 걸까.

하지만 진유리는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이세아의 집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단지까지 빠져나와 그녀와 함께 걸으며 겨우 이런 질문만 건넸다.

“교수님…… 산책가셨다고 했잖아. 늦으시네.”

무려 세 시간 만에 언급한 사람. 그러자 이세아가 드물게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몇 년을 라이벌로 여기며 눈여겨 봐왔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세아는……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일렀다.

“많이 늦게 온댔어. 아홉 시 정도 돼서. 내가 천천히 오라고 했고.”

“……!”

진유리는 반대로 정말 화가 났다. 이건 그야말로 기만이었으니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사람을 갖고 노니까 재밌냐고.

너무 화가 나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

진유리는 이세아가 어딘가로 시선을 향하는 모습을 봤다. 평소 고저가 적은 표정에 몹시 놀란 기색이 비친다.

진유리는 무슨 일인가 하며 이세아가 보고 있는 쪽을 바라봤고…….

“아…….”

마찬가지로 놀라서 작게 소리를 냈다.

저 멀리 어두운 길 어귀.

이도진이 누군가와 걷고 있다.

체구가 가냘프고, 분명 처음 보는 데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외견의 여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