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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77화 (77/207)

#77화. Chapter 19. 언쟁 (1)

‘교수님 여자친구인가?’

나란히 걷고 있는 두 남녀를 보자마자 진유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생각. 이어서 안타까움에 닮은 말이 마음에 일렁였다.

‘지금 여자친구 있으셨구나…….’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다. 제일고 연구교수직을 맡기 전까지 이도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명그룹의 후계자로서 알음알음 듣게 되는 말들이 있고, 그와 실제로 안면을 튼 다음에는 아예 직접 알아보기까지 했으니까.

성격은 서글서글하고 사교성이 좋다며 평판이 썩 나쁘지 않았으나 여자관계라는 측면에선…… 그야말로 생긴 값을 하는 사람이라고.

본래도 인지도가 있었던 터라 목격담은 찾아보면 꽤 많았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미인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목격되는 일이 잦은 데다 심지어 상대가 굉장히 자주 바뀐다고.

약혼녀인 한세라와 사실상 허울뿐인 관계라는 추측의 신빙성에는 그런 목격담이 들리는 것도 한몫했고.

그래서 교수와 제자로 만나기 전까지 진유리가 이도진에게 가진 이미지는 단연 부정적인 면이 컸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를 제대로 알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이고.

‘교수님은 그런 사람 아니야.’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람’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해야겠지.

올해로 열여덟 살.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진유리는 이도진을 알게 되고서야 사람이 다면적이라는 말을, 어느 한 면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을 체감하게 됐다.

소문으로 들은 그는 방탕한 사람이며 그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가 직접 보고 겪은 이도진은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하기야 진유리가 그에게 품은 감정 또한 다면적이다.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는 열정적인 교수.

보고 있으면 저절로 상쾌한 기분이 들 만큼 무척이나 성격이 좋은 사람.

한때 그를 보며 왠지 모르게 들던 두려움.

라이벌로 생각하는 이세아의 오빠.

존경하는 이시혁과 정세빈의 아들.

샬럿 테이트에게 진유리 자신을 소개해주며 해줄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은인.

그것들 외에…… 이제는 이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정까지.

올해 3월부터 두 달 반.

짧다면 짧겠지만 밀도로는 절대 옅다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이도진을 알아오며 그녀가 품은 감정과 생각들이 그러했고, 진유리가 그를 향해 품은 마음의 총체적인 크기는 이미 너무나 커져 있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

진유리는 자신이 모르는 이도진의 일면도 존재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실감하게 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말로만 들었지 정말 여자친구랑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충격이 작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한층 더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는 사실도 있고.

‘닮지 않았나?’

진유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바로 옆을 흘끗 바라봤다. 이세아가 자신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뚫어져라 저쪽만 쳐다보는 중이고, 진유리는 다시 이세아가 보고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진짜 닮았어.’

자신의 옆에 있는 이세아.

이도진의 옆에 있는 처음 보는 성인 여성.

두 사람이…… 굉장히 많이 닮았다.

쌍둥이처럼 완벽히 닮은 수준은 아니지만 저 여자의 외견을 설명하려면 이런 표현을 써야 할 터였다. ‘이세아 계열’이라고.

‘얘 진짜 예뻐지네…….’

깜짝 놀란 것과 별개로 문득 그런 감탄이 들었다.

별로 꾸미고 다니지도 않건만 제일고 내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이라고 대부분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이세아였다.

지금도 이목구비, 표정과 말투, 체구와 전체적인 분위기 등 다양한 면에서 특유의 매력을 자아내는 앤데.

제일중 입학 당시부터 예쁘긴 했으나 해가 지날수록 점점 더 예뻐지길래 내심 그런 쪽으로도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저렇게나 예쁘게 성장한단 건 의외였다. 그만큼 이도진의 옆에서 걷고 있는 정체 모를 여성이 매력적인 외견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근데 자세히 보니까 이세아랑 다르긴 해.’

어두운 길인 데다 멀리서 보는 거라 확실친 않지만 이목구비와 체구 같은 측면은 정말 비슷했다. 저쪽이 몇 년 더 성숙해 보이나 그 정도는 오차 범위 이내.

하지만 표정과 분위기 쪽은 거의 딴판이었다.

‘훨씬 성격 좋을 것 같아.’

상냥하고 사근사근해 보인다. 키는 이도진보다 훨씬 작지만 오히려 저쪽이 연상 같은 느낌이다.

한데 바로 그때.

“…….”

이세아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진유리 쪽을 본다. 험담 아닌 험담을 하는 걸 들켰을 리 없는데도 진유리는 흠칫했고,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이세아가 척척 걸어간다.

‘뭐 하려고 저래?’

의문스러워하면서도 진유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도로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 이도진과 그의 여자친구가 걷고 있는 상황. 그리고 위치상 그들을 지나칠 즈음까지 걸은 이세아가…… 돌연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쯤 되니 진유리도 이세아의 의도를 깨달았고,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는 친구를 향해 작게 물었다.

“봐서 뭐 하려고.”

“…….”

이세아는 답하지 않고 눈짓으로 전했다. 따라올 거면 조용히 하라고.

예의상 상식적인 의견을 내봤던 진유리도 잠자코 수긍했다.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들은 감시 대상의 뒤를 은밀히 밟아나갔다.

두 일행 사이의 거리는 오십 미터가량.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멀어서 안 들리는 건지 이도진과 그의 여자친구 쪽에서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살금살금 걸어가는 진유리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세아에게 속아 몇 시간이나 허탕을 친 것만 해도 화가 치미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도진이 여자친구와 있는 장면을 보게 됐고, 심지어 그걸 몰래 훔쳐보고 있다.

‘이게 뭐야…….’

그가 파혼하면 새로운 약혼자가 되니 뭐니, 이세아와 시누이-올케 관계가 되면 서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니 뭐니, 돌이켜 보니 죄다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적어도 현재로선 올케 포지션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저기서 이도진과 다정하게 걷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단념한다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실의에 빠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즈음부터였다.

‘어……?’

진유리는 문득 들려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입을 꾹 다물고 걷던 이세아의 표정도 바뀌었다.

“---!”

“---- --.”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람결에 희미하게만 전해져오는 대화.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뉘앙스는 파악할 수 있었다.

‘……싸우는 거 아닌가?’

이도진과 그의 여자친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언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

“우리 들켰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서연희가 갑자기 전한 말. 나는 즉시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들켰다’라는 건 우리에겐 아주 좋지 않은 의미일 가능성이 크니까.

대체 누굴까.

샬럿 테이트? 아르노 뒤레? 안드레이 일린? 한태강? 아니면 다른 누군가?

여러 후보를 머릿속에 담으며 생각을 이어나가는데…… 서연희가 몹시 곤혹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재차 일렀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러면요?”

“반대편 길에…… 세아 있어.”

“아…….”

“그 옆에 진유리인가 걔도 있고. 고개 돌리지 마. 모른 척해.”

경계하던 마음은 자취를 감췄으나 이젠 막막함이 밀려온다.

세아가 여기 왜 있지? 진유리는 또 뭐고.

서연희가 말한 대로 고개는 돌리지 않고 기감만 반대쪽 길로 집중하니 내게도 느껴진다. 여자애 두 명, 세아와 진유리가 가만히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곤 둘 다 저만치 걸어가더니 횡단보도를 건너서 나와 서연희가 걷고 있는 길 쪽으로 왔다.

인사를 하려는 것 같진 않다. 거리를 좁히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니까.

서연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쩐담……?”

“…….”

나는 침묵하며 생각했다.

예기치 않게 세아와 맞닥뜨리게 됐을 때 어떤 대응을 할지 서연희와 전부터 상의해둔 바가 있었다.

우선 플랜 A.

그냥 인사하는 것.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솔직히 내키진 않는다.

그다음은 플랜 B.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인지하게 하는 것.

이것도 무리가 있다. 세아 걔가 안 믿을 게 뻔하니까.

그리고 마지막.

“플랜 C로 가죠.”

“뭐……?”

작게 이르니 서연희가 당혹스러워하며 되묻는다.

도저히 그건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나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금 청했다.

“지금 그 모습으로 오래 지냈잖아요. 마침 바꿀 때도 됐죠.”

“……그게 목적이지?”

“부정은 안 하겠는데…… 지금 제일 나은 방법인 것도 사실이잖아요.”

나는 정직히 답했다.

서연희가 세아랑 비슷한 외견으로 지내는 거…… 솔직히 난 좀 부담스러웠어.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란 의지를 보이자 마침내 서연희도 받아들였다.

“후우…… 그러면 한다?”

“마음속으로 셋 세고, 그다음부터 시작해요.”

하나, 둘, 셋.

그리고 그 직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아.”

“하…… 또 왜 그러는데?”

“몰라서 물어?”

“아까 얘기 끝났잖아. 잘 정리됐는데 또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서.”

“오빠는 그게 잘 정리가 된 거였나 보네. 난 아니었거든.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난 항상 그랬어.”

“제발 부탁인데…… 지금 얘기만 하고 예전에 있었던 일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면 안 돼?”

“그걸 ‘예전 얘기’라고 하는 것부터 이미 오빠는 나랑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거야.”

“지금 너랑 나랑 하는 건 대화 아니야?”

“아니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들을 생각도 안 하는데 이게 어떻게 대화야?”

“난 들을 생각 있어. 내 생각 말할 생각도 있고.”

“그럼 오빠는 나만 나쁘다는 거네? 내가 잘못한 거라고-”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서연희와 나는……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가 아니고 연기로.

세아에게 목격당했을 때를 위해 준비한 대응책.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플랜 C.

간단한 거였다.

그냥…… 세아한테 들리게 대판 싸우고 서연희가 다른 신분으로 바꾸는 거다.

근데 이 사람 연기 진짜 잘하네…….

얼굴이 새빨개진 서연희의 눈가가 물기에 젖어있다. 순 거짓말인 걸 아는 내가 봐도 감정이 격앙돼 눈가가 그렁그렁해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한 표정 연기다.

그리고 얼마간 언쟁을 벌였을까.

나는 서연희에게 눈빛으로 부탁했다.

<해줘요.>

<그거……?>

<네, 대충 됐잖아요. 어서 해요.>

<……안 하면 안 돼? 이 정도로 마무리해도 되잖아.>

난처해하면서 작게 고개를 젓는 서연희에게 나는 힘주어 일렀다.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죠. 빨리요.>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봐.>

서연희가 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며 전한 말.

그리고…….

짜악-!

순간적으로 뺨이 화끈거린다.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선 내 뺨을 세차게 후려친 서연희가 싸늘하게 선언했다.

“너랑은 오늘부로 끝이야. 계속 그딴 식으로 하면 평생 동생이랑 같이 살게 될 테니까…… 어디 잘해봐.”

그러더니 나를 내버려 두고 혼자 빠른 속도로 길을 걸어 나간다. 홀로 남은 나는 얻어맞은 뺨을 손으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방금 그 말…… 순수하게 연기로만 한 거 맞나?

아마 연기 맞겠지. 그래, 그럴 거야.

애써 부정한 나는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시선을 감지했다.

세아와 진유리는 우두커니 멈춰 서 있다.

워낙 놀랐는지 움직일 생각도 않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듯했다.

문득 마음에 깊고 깊은 회의감이 밀려온다.

내가 진짜 이렇게 살아야 하나…….

***

지금 이세아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는 여자.

아까까지는 오빠의 여자친구였지만 그의 뺨을 때리고 날 선 독설을 퍼부으며 관계의 종말을 고한 여자.

‘제정신이야……?’

저 정신 나간 여자가 저지른 폭언과 만행을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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