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Chapter 19. 언쟁 (2)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고, 눈과 귀에 거슬렸다.
자기가 뭔데 죄지은 사람 대하듯 이도진에게 비난을 쏟아낸 걸까. 자세한 상황이야 모르지만 오빠는 대화할 의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본인이 들을 생각도 안 했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소리를 지르고 심한 말을 퍼부어댄 걸까.
기껏 해 봐야 잠깐 만나는 여자친구였던 주제에.
아무리 길어도 두세 달을 넘기지 못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 주제에.
자기가 뭐라고.
함부로 언성을 높이며 이도진을 비난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화가 났고, 그 내용도 황당해서 따져 묻고 싶었다.
<계속 그딴 식으로 하면 평생 동생이랑 같이 살게 될 테니까…… 어디 잘해봐.>
오빠가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 전 여자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이세아 자신까지 거론한 것이다.
그리고 이세아는 여자가 한 말이 너무너무, 치가 떨리게 거슬렸다.
‘그쪽이 뭔데?’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말을 지껄인 걸까.
오빠가 일곱 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챙기는 게 뭐가 어때서.
겨우 서로 이만큼 관계를 회복했는데. 그간 남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부 다 알지도 못할 거면서.
가족과 같이 사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걸 비꼬듯이 말하고 뺨까지 후려친단 말인가.
그러니 비난을 들은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세아는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여자를 마땅히 응징해야 했다.
‘사과받을 거야.’
화해를 시키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자기가 몰지각한 언행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깨닫도록.
그걸 깨달아서, 괜히 새벽에 싱숭생숭해졌답시고 ‘뭐해?’ 같이 웃기지도 않은 연락을 보내지 않도록.
혼자 실컷 반성하면서 이도진·이세아 남매가 앞으로 행복하게 살길 마음으로만 응원하도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정도면 족했다.
“후우…….”
수십 미터 앞에 있는 이도진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흘리더니 근처의 흡연구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세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오빠에게 들키지 않고 저 여자를 쫓아갈 수 있을지.
‘빙 돌아서 가는 건…….’
제일 먼저 생각난 방법이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자칫하다간 놓쳐버릴지도 모르고.
이어서 두 번째로 떠오른 방법은 시간이 덜 걸리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위로 뛰면 안 보이니까.’
흡연구역은 나무에 가려져 있다. 거기 있는 이도진이 볼 수 없는 지점에서 높이 뛰면 눈에 띄지 않겠지. 방법을 찾았으니 결단을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미안, 여기까지만 바래다줄게.”
“뭐?”
진유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이세아는 땅을 박찼다.
타앙!
소리는 희미하게만 났다.
위로는 오 미터 이상. 앞으로는 단번에 십 미터도 넘게 이동한 그녀는 흡연구역을 가뿐히 지나쳤다.
여자는 벌써 저만치 걸어 도로 쪽에 근접한 상황.
한발 뒤늦게, 같은 방식으로 도약해 쫓아온 진유리가 묻는다.
“어쩌려고.”
“……몰라.”
말 그대로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확실하지만 뭐라고 쏘아붙일지는 정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면 무슨 말이든 나오겠지.
기실 이세아는 지금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이성적이지 않았다.
이도진의 시야에서 벗어났으니 들키지 않게 주의할 필요는 없었고, 빠르게 걸은 이세아는 이제 막 모퉁이를 돌려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운을 뗐다.
“저기요.”
여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대로 일이 초쯤을 침묵한다. 돌아볼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이세아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응?”
그제야 여자가 뒤돌아본다. 조명이 밝은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이세아가 떠올린 감상은 두 가지.
‘……비슷해.’
멀리서 얼핏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층 그런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기이한 감각.
이도진의 전 여자친구는, 이세아 자신과 상당히 닮은 외견이었다.
‘진짜 예쁜 사람이랑만 만나는 줄 알았는데…….’
딱 한 번, 예전에 그의 여자친구를 목격했을 때는 틀림없이 그랬다. 물론 한세라와 비교하긴 어려웠지만 그거야 거의 물리법칙 같은 거니까. 그 사람 한 명만 놓고 보면 굉장한 미인이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오는 목격담을 봐도 그랬는데.
한데 이번엔 아니었다.
‘이제 얼굴 많이 안 보나 봐.’
이 여자는 기껏해야 좀 괜찮은 정도에 불과하다. 이세아 자신도 몇 년만 지나면 저만큼은 되겠지. 그러니 눈이 낮아졌다는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
어깨너머로 보고 듣기로 이도진은 이번 여자친구에게 푹 빠져 있는 듯했다. 그래서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내심 궁금했고.
한데 고작 이 정도라니.
외모도 그저 그렇고, 성격도 오늘 본 바에 따르면 썩 좋지 않았다.
겉보기만으론 알 수 없는 장점이 있는 걸까.
이도진이 깊이 빠질 만큼 어마어마한 매력이 숨겨져 있는 걸까.
다만 당장은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라 이세아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 아시죠?”
형식상으로는 질문이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추궁.
그리 생각한 근거가 있었다. 이 여자와 대면해서 떠올린 두 번째 감상.
‘되게 당황스러워하네.’
얼굴을 보기 전에 이세아의 목소리만 듣고도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본 이후의 표정에도 당황이 스며 있고.
이세아의 얼굴과 목소리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거라고 짐작해야겠지.
얼굴이야 이도진이 사진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고, 목소리는 같이 있을 때 전화하는 걸 들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듯한 여자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도진 씨…… 동생?”
“…….”
이세아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길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울 때는 ‘오빠’.
뺨을 때리고선 이별을 고할 때는 ‘너’라고 반말.
지금은 또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진 씨’.
호칭이 멋대로 오락가락하는 걸 보니 정신 쪽도 오락가락하는 게 아닐까.
이세아는 단출하게 답했다.
“네, 동생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여자의 표정이 확연히 바뀌었다.
무척 당황스러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안색을 굳힌다.
“아…… 그래요?”
싸늘하게 대답한 여자 쪽에서 돌연히 휘잉- 하고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마력을 실어서 보낸, 다급한 SOS 신호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세아는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갈무리하며 일렀다.
“죄송한데, 오빠랑 말씀하시는 거 들었거든요.”
“그래서요?”
“오빠랑 헤어지시는 건 괜찮은데-”
“가만히 있는 사람 뺨은 왜 때리셨어요?”
옆에 있던 진유리가 따지듯이 끼어든 말.
이세아가 그녀를 흘겨봤고, 여자 쪽도 왠지 모르게 어이없어하는 듯한 어조로 묻는다.
“학생은 누군데 나한테 그런 걸 물어요?”
“저랑 같은 반-”
“교수님 제자요.”
대답이 엇갈리니 여자가 대강 알겠단 것처럼 고개를 주억인다. 왠지 모르게 상대의 페이스대로 대화가 진행되는 듯해 경계심을 올리며 이세아가 말을 이었다.
“오빠랑 헤어지는 건 상관없는데…… 그래도-”
“미안하게 됐어요.”
“……?”
이렇게 곧바로 사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눈곱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 어조일 줄도 더더욱 몰랐고.
이세아가 황당해하고 있으려니 여자가 냉기가 풀풀 휘날리는 목소리로 일렀다.
“학생 이름이 이세아 맞죠? 설마 듣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도진 씨랑 나랑 둘 문제인데 실수했네요.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다음에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렇게 되면 그때 다시 정중하게 사과할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거슬리는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사과였으나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네가 지금 나 쫓아와서 이러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함께 있는 진유리도 불쾌해하는 걸 보면 마냥 곡해해서 나쁘게 들은 건 아니겠지.
짧은 순간 동안 열심히 반격할 말을 찾은 이세아는 물었다.
“오빠한테는요?”
“뺨까지 때린 건 심한 거 아니에요?”
이번에도 진유리가 끼어들었고, 이세아에게서 시선을 뗀 여자가 무척이나 싸늘한 어조로 되받는다.
“도진 씨 동생은 몰라도…… 도진 씨가 가르치는 학생한테까지 지적받고 싶진 않은데.”
말투야 어쨌든 여자가 하는 말은 죄다 반박하기 어려운 정론이었다. 그러더니 심지어 자기 쪽에서 공격해오기까지 한다.
“근데…… 학생들이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 도진 씨가 알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
이세아의 약점을 절묘하게 찌른 말. 물론 오빠가 길 한복판에서 욕을 얻어먹고 뺨까지 맞았는데 동생으로서 참견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도진이 이걸 반길 거란 생각도 할 수 없다.
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또다시 진유리가 끼어들었다. 기대도 하지 않은 활약까지 보이면서.
“그러는 자기도 딱 봐도 대학생이잖아. 왜 말끝마다 학생, 학생이래?”
“…….”
예상치 못한 반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여자가 주춤한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세아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오빠한테도 제대로 사과하고, 앞으로 볼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볼 일이 있게 될지 없게 될지는 도진 씨랑 내가 결정할 문제-”
“흥, 딱 봐도 없을 거 뻔한데 무슨.”
아군이 된 적이라는 게 이리도 든든한 존재일까.
진유리의 적절한 견제에 여자가 입을 꾹 다문다.
이세아는 이제 한마디만 더 하고 물러나려 했다.
‘알아서 사과해요’라고, 하고 싶은 말만 해버리곤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변수가 찾아왔다.
“이세아!”
등 뒤에서 들려온 외침.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이세아는 뒤를 돌아봤다. 이도진이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 있다.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진유리와 이세아에 대한 타박이 아니었다.
이 짧은 순간에 사태를 파악한 걸까.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이 여자에게 사과했다.
“미안. 얘들 내가 데려갈 테니까 가 봐도 돼. 미안하다.”
“아니, 그러지 말고 이 학생들 보내고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나도 제대로 안 끝낸 것 같아서 찝찝했거든.”
이제 이도진이 여동생과 제자를 본다. 그리고는 조금 엄한 말투로 일렀다.
“둘 다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줄래?”
뺨 맞은 당사자가 하는 말인데 여기서 무턱대고 안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진유리가 이도진에게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세아 너는 유리 역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어디 가지 말고 집에 들어가고.”
“……알겠어.”
진유리와 함께 물러난 이세아는 고개를 돌려 떠나온 뒤편을 바라봤다. 근처의 벤치에 나란히 앉은 이도진과 여자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까 싸울 때보다는 훨씬 차분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좋은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역까지 걸어가는 데 십 분쯤.
그동안 진유리와 이세아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둘 다 머릿속이 복잡했고, 서로에게 불만이라 느끼는 점이 최소한 한 가지씩은 있으니까.
이세아는 진유리의 적절했으나 또한 과도했던 참견이 신경 쓰였다. 진유리는 아직 속아 넘어간 데 대한 앙금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조별과제의 주제 선정에서 겪은 갈등은 기본 베이스로 깔려있고.
결국 두 사람은 역 앞에 이르러서야 짧은 인사만 나누었다.
“잘 가.”
“내일 샬럿 선생님한테 같이 갈 거지?”
“……그래.”
내일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두 사람은 샬럿 테이트에게 훈련을 받으러 갈 것이다. 그 자리에서 대련을 진행하겠지. 그걸 인지한 진유리와 이세아는 굳게 다짐했다.
짜증이 나니까…… 내일 대련에서 얘한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
“……미안해요.”
어느덧 세 번째로 전하는 사과. 서연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질풍노도의 시기잖아. 난 이해해. 응…… 그럴 수도 있지.”
“진짜, 걔들이 쫓아갔을 줄은 몰랐어요. 일부러 담배 피우면서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갔는지…….”
마법으로 보내온 구원 요청을 받고서야 알았다. 재빨리 달려갔을 땐 이미 상황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서연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도 놀라긴 했어. 갑자기 둘이 와서 다다다 쏘아붙이는데…… 그래도 공동의 적을 만들어줬으니까 도진이 넌 괜찮을 거야. 그 공동의 적은 이제 나타날 일도 없고.”
“진짜 고맙고 미안해요…….”
아마 일부러 세아와 진유리에게 시비를 거는 듯 되받았겠지. 그러는 편이 오히려 수습하기 편하니까.
서연희 본인은 이대로 신분을 바꿀 거고, 나는 뺨을 얻어맞고 욕만 들어먹은 선량한 피해자로만 남게 된다.
고마운데, 진짜 되게 고마운데…… 근데 또 엄청 미안했다.
나를 쳐다보던 서연희가 살며시 웃는다. 그리곤 농담처럼 말한다.
“괜찮아. 이런 것도 음…… 신선해서 나쁘진 않았어.”
“누나…… 왜 이렇게 천사세요?”
“그거야 네 일이니까. 그리고 이래저래 오늘 일로 얻은 게 있어서 난 만족스러운데?”
“네?”
묻는 말에도 서연희는 뭘 얻었는지 답해주지 않았고, 작별 인사를 나누기 전에 장난스레 말했다.
“이번에 도와준 건 나중에 크게 받을 거야.”
“어떻게요?”
“글쎄? 내가 해달라는 거 무조건 한 번은 해주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믿을게요.”
적당한 거로 해달라는 부탁.
의미심장한 표정만 지으며 자리를 떠난 서연희를 배웅하고 나도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어락을 열어 현관에서 맞이한 광경.
“……왔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앞치마까지 차려입은 세아가 열심히 집을 치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