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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79화 (79/207)

#79화. Chapter 19. 언쟁 (3)

저 앞치마가…… 분명히 그건데.

대학 다닐 때 내가 사놓곤 입을 일이 별로 없어서 부엌 서랍에 넣어놨던 거다.

부엌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애가 저걸 어떻게 찾은 건지 신기했고, 심지어 직접 입고 있는 건 거의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자기 딴엔 나름대로 유니폼이랍시고 의상을 갖춰 입으려 했던 걸까. 얘한테는 치수가 너무 큰데.

“…….”

하도 황당해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선 채로 나는 세아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거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탁자를 닦고 있던 세아가 내 시선을 감지했는지 살짝 고개를 올린다.

자연히 나와 눈이 마주쳤고…….

불과 일 초도 지나기 전에 휙- 하고 눈을 피한다.

그리곤 이미 여러 번 닦아 물기가 묻어나오는 탁자를 괜히 두어 번 더 행주로 닦더니,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를 흘려낸다.

“오셨어요…… 오빠.”

“………….”

이젠 황당한 걸 넘어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빠가 여자친구랑 싸우는 장면을 훔쳐보고, 그 여자친구한테 가서 시비를 걸다가 들킨 거니 안절부절못할 만도 한데…… 실상은 내 쪽에서 세아를 속인 거니까.

하지만 세아는 내 침묵을 분노의 표현이라 여겼나 보다. 반질반질한 탁자를 닦는 무의미한 행동을 멈추곤 살며시 몸을 일으켰고,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배 안 고파……? 피자 남은 거 있는데…….”

“…….”

“먹고 남은 건 아니고 미리 덜어놓은 건데…… 아니면 먼저 씻고 오면 내가 따뜻하게 데워놨다가-”

“안 먹어. 배불러.”

“아…….”

“그리고 오빠 화 안 났어.”

“……?”

세아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확인 못 하지만 지금 내 표정이 굉장히 미묘할 듯싶다.

당황, 안쓰러움, 귀여움, 그래도 오빠가 뺨 맞았다고 화를 내며 달려가 줬다는 데서 느끼는 고마움, 그 외에 이래저래 드는 생각들.

어느 것 하나 세아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향하는 건 없고,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여상스럽게 물었다.

“집에 유리 왔다 갔어?”

“……과제 때문에.”

“유리 바래다주다가 본 거고?”

“응……. 얘기는 잘 끝났어?”

세아가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궁금해하는 심정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서연희와 상의한 대로, 아마도 세아가 반길 답을 일렀다.

“그래도 좋게 끝냈어.”

“화해는…… 안 했어?”

“나도 요즘 바쁘고, 그쪽도 더 만나 봐야 똑같을 것 같대. 악수하고 헤어졌지.”

“그래도 돼?”

“저기요, 오빠 연애에 왜 이리 관심이 많으실까.”

“안 사귄다고 맨날 발뺌했으면서.”

“으흠……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깔끔하게 헤어졌어. 당분간 누구 만날 생각도 없고.”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나 이제 씻으러 간다.”

“피자는 안 먹고?”

졸래졸래 부엌으로 향한 세아가 식탁 위에 있는 접시를 가리킨다. 그 옆엔 ‘리뷰 이벤트’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스파게티도 보인다. 저건 면 종류라 이미 다 불었을 것 같은데…….

“그건 왜 안 먹었어?”

“그냥, 배불러서.”

“혹시 나 좋아하는 거라고 남겨둔 건가?”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쌀쌀맞게 대답하는 세아에게 나는 기꺼운 마음을 한껏 담아서 일렀다.

“피자는 내일 먹어도 스파게티는 먹고 잘게. 치즈만 살리면 그래도 맛있을걸?”

“……맘대로 해.”

나를 지나쳐 간 세아가 자기 방으로 가려 하다가,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좀 괜찮은 사람 만나. 아까 그 언니는 성격도 되게 별로 같았고…….”

“성격도 별로 같고?”

내 반문에 잠시 말을 멈췄던 세아가, 새초롬하게 험담을 일렀다.

“못생겼어.”

“못생겼다고? 걔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었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세아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다시금 말한다.

“평범했어.”

“아니, 그걸 떠나서 외모가 전부도 아니고-”

“이때까지 예쁜 사람만 만났잖아.”

“…….”

도저히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세아랑 닮아서 기분이 이상하긴 했어도 외모만 놓고 본다면 이번 서연희의 신분은 정말 예뻤는데.

그걸 평범하다고 하면서 나는 예쁜 사람만 만나왔다고 하니까.

예쁜 애였다고 해도 세아는 의견을 바꾸지 않겠지. 표면적으론 헤어졌는데 반론하는 것도 웃기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라는 식인데.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는 의문.

저러면 본인 외모도 낮게 평가하는 것 아닌가? 엄청 닮았으니까.

다행히 그 부분은 크게 주목하지 않고 넘어가는 듯했지만 예쁘지 않다는 말은 놀라웠다. 얘는 자기 방 거울도 안 보고 사나.

“당분간 연애 생각 없다고 했으니까, 잘 보고 좋은 사람 만나. 길에서 뺨 때리는 사람은 진짜 싫어.”

그건 내가 시킨 건데…….

하지만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고, 세아가 마지막으로 일렀다.

“세라 언니 한국 오면…… 둘이 얘기도 해보고.”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세아가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욕실에서 더운물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이 부분도 더 많이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신의 탄생>을 진행하던 땐 내게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일상 속의 작은 여유를 틈타 전 세계를 바삐 돌아다녀야 했고, 서울 내에서 외견을 바꾸는 건 대개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철저히 감춘다 해도 언젠가 나도 모르는 빈틈을 보여서 발각될지도 모르니까.

최소한 열 번 중에 여덟 번 이상. 못 해도 그 정도는 이도진이라는 사람이 집이 아닌 특정 장소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

술집 중에도 외부와 단절돼 있어 나와 서연희 외엔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밀폐된 공간.

그런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팬텀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나와 반대로 가짜 신분인 서연희는 같은 외견을 오래 유지할수록 리스크가 더 커지는 터라 자주 모습을 바꿔야 했고.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간의 조롱을 듣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고, 세아가 실망하게 하고, 세라를 상처입혔으니까.

다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고,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거다.

<킬 더 이블>로 넘어오면서 홀로그램의 퀘스트와 내 주변 정황이 상당히 바뀌었다.

세라가 귀국해 예정대로 파혼하게 되면 지금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터. 나를 아껴줬던 사람들이 적어도 지금보단 상처를 덜 받게 되도록.

세라한테는 진심 어린 사과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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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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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률은 어제부터 단 1%도 올라가지 않았다.

조별실습과 관련한 일.

진유리가 이 집에 방문한 것.

아까의 사건까지.

상당히 다사다난했는데도 조금의 변동조차 없다.

이후 시점에 서술되거나 아예 넘어가는 부분이라는 뜻이겠지.

내게는 그게 꼭 무기질적인 위로처럼 느껴졌다.

<킬 더 이블> 따위와는 연관이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도…… 세아는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내 동생의 모든 나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때로는 나 자신이 그것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앞으론 더 잘 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 혹은 기만.

어쩌면 둘 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자가 후자보다는 많은 비중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거겠지.

오늘 밤은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식탁에 접시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앞치마와 마찬가지로 쓸 일이 많지 않은, 찬장에 둔 예쁜 접시. 거기엔 심각한 비주얼의 스파게티가 담겨 있다.

전자레인지로 데운 게 아니라 팬에 볶은 건지 치즈는 소스와 섞여 형체도 찾아보기 힘들고, 면은 불어서 통통하게 살이 찐 상태다.

하지만 사람 매력이 외모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듯 음식도 맛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이럴 때 중요한 건 마음이다.

내가 나올 시간을 맞춰서 자기가 직접 면을 살려보려 한 세아의 마음이 고마웠다. 팬 쓰고 설거지까지 한 건 감격스럽기까지 했고.

면발이 툭툭 끊기는 게 상태가 좀 안 좋긴 해도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열다섯 살 이후로 내가 먹은 음식을 모두 다 통틀어서 이게 제일 맛있다고.

***

한편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이세아는 지금 자신의 기분이 아주 좋다는 걸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이유도 안다. 애초에 그녀의 기분을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고.

‘이상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와 관련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기에.

과정에서 속상할 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잘 돼가고 있다.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이번 학기 전까진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정말 좋았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이세아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분간은 누구 만날 생각 없다고 했지……?’

이도진은 그렇게 확언했다. 당장 순순히 믿을 순 없으나 확신 같은 예감이 든다.

되는대로 한 말은 아닐 거라고.

요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기가 한 말을 결국엔 지킬 거라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라고.

어쩌면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겠지.

오빠가 만나는 사람이 없으면 밖에 나갈 일도 줄어들 테고, 그러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테니까. 그래서 기분이 들떴다고.

이도진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좋아.’

누굴 함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 자체도 마음에 들었다. 이젠 한세라와 연락할 때 조금은 덜 미안하겠지.

‘세라 언니랑 파혼 안 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한세라.

그게 아니면 그 못된 여자가 한 말처럼 이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도 좋을 거고.

‘아니면 세라 언니랑 결혼하고 셋이서 같이 사는 건…… 너무 민폐려나……?’

이도진도 한세라도 겉으론 싫다고 안 해도 마음속으론 꺼릴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흐으…….”

무심결에 하품이 나왔다.

아직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도 아닌데.

이 집을 지금까지보다 더 마음 편한 장소로 여길 이유가 생겨서일까. 몸이 노곤해지고, 잠이 쏟아지려 한다.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뜨려 하지 않으니 잠이 들려고 했다.

이제 의식은 몽롱했고,

이세아는 잠이 들기 직전에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못 들었네.’

오늘 헤어진 이도진의 여자친구.

성격도 외모도 별로였는데 어떤 매력이 있길래 좋아한 건지.

궁금했는데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꿈결처럼 희미하게 든 생각.

‘나랑 닮아서?’

그게 왜 매력인진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였을까.

정답은 알 수 없고, 이세아는 그것에 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딱히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들기 직전이어서.

정말로 별다른 생각이 없어서.

혹은…… 그런 부분을 의식하지 못해서.

이내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녀는 무척 행복한 꿈을 꿨다.

***

이곳은 아주 큰 성이다.

성의 이름은 영원궁(永遠宮).

세워진 지 천 년을 넘긴 오래된 성이고, 그 앞에 선 존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위압적인 성이다.

수십 수백만에 이르는 노예가 이 성을 짓고자 피땀을 흘렸다.

다친 자도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다.

하지만 영혼이 종속당한 노예들의 죽음엔 아무런 가치도 없기에, 그들의 생명이 담긴 이 성은 높고도 아름답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영원궁의 유일하고 오롯한 지배자가, 옥좌에 앉아 무심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드넓은 공간에 엎드린 모든 악마가 두려워하며 따르는 그의 이름은 파르투스.

순서로는 악마의 군주 열넷 가운데 열세 번째.

그러나 이 세상을 침략해오기 이전부터, 실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그는 어느덧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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