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Chapter 20. 대련 (1)
[가장 위대한 마왕, 군주 중의 군주 되신 파르투스께 아뢰나이다. 분부하신 명을 이행하게 될 날이 머지않았사옵니다.]
부복한 악마들의 선두에 자리한 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말. 파르투스는 표정과 몸짓에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명했다.
[차질이 있다면 지금 고하라.]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모든 악마가 입을 모아 부정했고, 처음 보고한 수하가 벅찬 어조로 그를 칭송했다.
[가장 강하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용맹한 마왕이시여. 당신께 티끌보다 보잘것없는 도움이나마 드릴 수 있어 무한한 영광이나이다!]
두려움과 경외감에서 우러나온 예찬. 파르투스는 빙긋 웃으며 일렀다.
[네 말이 과장되어 가히 듣기가 거북스럽구나.]
물론 한 점 거짓조차 없는 진심임을 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였다.
가장 강한 마왕.
가장 현명한 마왕.
가장 용맹한 마왕.
그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따위 것들은 바라지도 않았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일개 존재의 알량한 자질은 시간과 공간 앞에 무력하다. 그것을 모르거나 부정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 역사란 그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승리한 과정을 일컫는 것이야.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리 흘러갔느니라.]
이 세상을 침공하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파르투스는 무수한 세월을 살아왔으며 그간 태어나고 죽은 마왕의 수는 무려 일백에 가까웠다.
그 모두를 통틀어 파르투스 자신이 가장 강대했다고 말할 순 없다. 가장 지혜로운 마왕도, 가장 용감한 마왕도 그가 아니었다.
그런 자들은 따로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자들일수록 일찍 죽음을 맞이했고.
무려 이천 년을 살아온 파르투스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일신의 무력, 쌓아온 지식, 흠잡을 데 없는 품성.
그런 요소들은 사실 생존에 크게 유리하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해를 끼치는 요소일 뿐이다.
강한 마왕은 그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적을 지나치게 많이 만든다.
현명한 마왕은 아무리 길어도 천 년을 넘기지 못하고 미친다.
용맹한 마왕은 자신을 과신하기에 기실 무모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그런 자들은 이미 다 죽어 나자빠졌고…….
이제 살아남은 이들 중에선 파르투스가 으뜸이었다. 더는 새로운 마왕이 태어나지 않는 작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은 자들은 그것을 그럭저럭 알고 있기에 목숨을 이어온 게야.]
본디 악마의 군주, 마왕이라 불러야 할 존재는 도합 열넷이었다. 죽는 만큼 새로 태어났기에 수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의 싸움이 있고부터 양상이 달라졌다. 당시 생존한 마왕은 열넷의 절반 이하인 여섯. 이후로는 단 하나도 새로 태어나지 못했다.
마왕들 사이의 다툼에는 개입하지 않고 새로운 마왕을 탄생시켜주기만 했던 신적인 존재가 소멸했으니까.
마왕이라 불릴 만한 자질을 갖춘 악마가 자연적으로 태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개화시키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지 알 수 없으며, 지난 이십여 년은 턱도 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오십 년, 백 년, 어쩌면 이백 년이나 삼백 년 이상. 그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하겠지. 그리고 파르투스를 비롯해 살아남은 여섯 마왕은 새로운 경쟁자의 탄생을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마왕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악마를 죽이고, 현재 살아있는 경쟁자들을 제거한다. 그것이야말로 여섯 마왕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이번 계획은 그것을 이루고자 공을 들여 마련한 것이었고.
파르투스는 느릿하게 옥좌에서 일어섰다.
아름답고 다시 아름다운 사내의 외견. 2M에 이르는 신장은 조각상처럼 날렵했다.
슈우우우…….
그의 주위로 공간을 왜곡시키며 일렁이는 마기가 짙게 서린다.
티익-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안개처럼 휘돌던 마기가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자그마한 구슬 같은 형체를 이루었고, 파르투스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열 번의 밤을 맞이할 만큼 여유를 주겠다. 나를 적의 땅으로 인도할 이 힘을 가다듬어 완성에 이르게 하라.]
과거 기이한 불운이 연속해서 찾아와 패배해야 했던 벌레 같은 적, 인간들이 균열이라 부르는 현상을 확장할 힘이었다.
다른 다섯 마왕이 알지 못하게 파르투스는 균열 너머의 세상으로 강림해야 했다.
[내게는 느껴진다. 옛 신의 흔적이 나를 부르고 있도다.]
소멸한 신의 파편이 그곳에 있을 것이기에.
***
5월 14일 금요일, 정오를 넘긴 시각.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실로 향하던 유해빈은 기묘한 이변을 감지했다.
‘……뭐지?’
그녀는 앞장서 가는 두 사람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겼다.
이세아와 진유리.
근래 상당히 가까워진 터라 이렇게 함께 밥 먹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됐고, 그럴 때면 둘이서 훈련이니 뭐니 얘기를 나누는 터라 배신감과 소외감을 맛봐야 했는데…… 오늘은 어째 한마디도 대화가 오가지 않고 있다. 그냥,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한다.
‘그러고 보니까 얘네들 오늘 얘기한 적 있나?’
금요일은 여타 고등학교처럼 일반 교과 과목의 수업이 있는 날. 1분반 교실에서 방금까지 내내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도 쉬는 시간에 둘이 대화하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 급식실로 가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대화가 없다 보니 걸음걸이는 자연히 빨라졌다.
차라리 따로 먹으러 갈 것이지 그러진 않고, 서로 의식하는 게 빤히 보이는 태도로 앞만 보며 걸어가는 게 유해빈으로선 황당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휘적휘적 뒤를 따라가던 그녀는 작게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뭔진 몰라도 그냥 얘들이랑 따로 먹을까?’
오늘 점심 메뉴가 제법 괜찮아서 기대 중인데 저 불편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먹으면 맛을 제대로 느끼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유해빈은 은근슬쩍 걸음을 늦춰 앞서가는 친구들과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때마침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해빈이 너, 5월 끝날 때까진 세아랑 유리 좀 챙겨줘야겠다.>
어젯밤 이도진에게 들은 부탁.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내가 우리 도진 씨 부탁이라 참는다…….’
투덜거리면서도 성큼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봤으나 진유리는 물론이고 이세아도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둘이 싸운 건 확실해 보이고, 왜 싸웠는지 이유가 궁금해지는 상황. 이윽고 급식실에 다다른 세 사람은 각자 식판과 수저를 들었다.
메인 반찬으로 나온 소갈비를 식판에 가득 쌓은 유해빈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 앉을까.’
남은 자리는 넉넉했으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쪽이 좋겠지.
그리고…….
앉을 곳을 고르던 그녀는 몹시 의아한 장면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쟤 뭐야?’
이세아가 주저 없는 걸음으로 급식실 제일 안쪽에 다가서고 있다.
목적지는 명확해 보였다.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이도진. 자기 오빠가 식사하고 있는 그 테이블이다.
‘진짜 어제 무슨 일 있었나?’
3월 초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변화.
그때는 가능한 한 이도진에게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로 골라서 앉곤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근처에 빈자리가 보이면 앉았고.
그리고 지금.
이젠 아예 오빠랑 같이 밥을 먹으려고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유해빈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되뇌었다.
‘그 뭐냐, 무슨 쬐끄만한 동물이랑 친해지는 것 같네.’
처음엔 사납게 굴다가 점차 마음을 열고, 마침내 곁을 허락하는 모습.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극적인 변화였다.
‘일단 고양이는 아니고, 강아지도 좀 이미지가 안 맞고, 음…….’
그보다 더 작고 앙증맞은 동물이 어울릴 텐데 당장 생각나는 건 없었다.
어쨌든 이세아는 이미 이도진의 근처까지 다다라 있고, 흘끗 눈치를 보던 진유리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잽싸게 합류한 유해빈보다 먼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이세아는 이도진의 정면.
일 초쯤 고민하는 듯하던 진유리는 이세아의 옆, 다시 말해서 이도진의 대각선 자리.
‘히히, 바보들.’
내심 쾌재를 부른 유해빈은 냉큼 이도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교수님, 오늘 밥 어때요?”
“맛있네요.”
“평점으로는 몇 점?”
“별 네 개 반 정도?”
갑자기 세 명이 오니 놀란 듯하면서도 이도진이 답했고, 이세아와 진유리가 흘겨보듯 쳐다보는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유해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교수님은 오늘 수업도 없으신데 출근 귀찮으셨겠다. 저도 금요일은 힘든 건 없는데 귀찮거든요. 다른 애들은 클럽활동 하는데 학생회라서 회의나 실컷 해야 하고.”
“난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처리할 일도 좀 있고, 점심 먹고 퇴근해도 상관없어서.”
“아, 그럼 이거 밥 다 드시고 나서 저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퇴근하시기 전에.”
“해빈 학생 나한테 아이스크림 맡겨둔 것처럼 말하네?”
“에이, 저번에 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유해빈이 의도한 바는 어젯밤 들은 약속이었다. 지나가다 만나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겠다고.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혹시 이세아나 진유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라고 묻더라도 둘러댈 답이야 많으니까. 특별히 위험한 발언도 아닐 테고, 이도진도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세아에게서 돌발적인 추궁이 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왜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니고 섞어서 해?”
정면에 마주 앉은 오빠를 또렷이 쳐다보며 물은 말. 유해빈도 아차 싶었고, 이도진도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좀 너무 나갔나?’
학교 안에서 이도진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동생인 이세아조차 예외는 아니다. 다행히 완전히 반말을 쓴 건 아니었으나 비밀을 모르는 이들에겐 너무 격의 없어 보이는 대화였겠지.
젓가락으로 갈빗대를 하나 집은 이세아가 그걸 앙 베어 물면서 싸늘하게 일렀다.
“다른 사람들이 흉봐.”
“음…… 나랑 해빈 학생 수학여행 때 같은 방 쓰면서 친해지긴 했는데.”
“흉본다고.”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경고.
이도진도 유해빈도 그때부터는 잠자코 밥만 먹었고, 유해빈은 조금쯤 어이가 없다는 심경으로 생각했다.
‘얘는 나 남자인 줄 아는 애가 나한테까지 질투를 하네…….’
어쩌면 이세아에겐 성별을 초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사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 자신과 나눌 수 있는 교감. 그런 것들을 가로채 가는 모든 것을 경계하는 수준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해빈은 들릴 듯 말 듯이 나직하지만 또한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중석에서 반칙을 쓰고 있다…….”
“응? 해빈 학생 뭐라고?”
“또 반말.”
“……그으, 해빈 학생 뭐라고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지 웃기게 들리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유해빈은 정면 자리를 확인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진유리.
그녀는 거의 울상을 지으며 젓가락으로 쓸쓸히 밥알만 세고 있었다.
이세아는 몰라도 이쪽은 어떤 동물로 표현해야 할지 확실했다.
도도한 척하던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 꾹꾹이를 하는데도 알아주지 않는 애처로운 광경.
솔직히 측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유해빈은 냉엄하게 되뇌었다.
‘이게 다 벌 받는 거로 생각해야지 방법이 없다, 유리야…….’
***
점심 식사 이후 애들한테 아이스크림까지 사주고 연구실에 돌아오니 오후 수업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다.
서상욱 교수는 바쁜 일이 있다고 점심도 먹지 않고 퇴근했다. 나는 여기 있어도 되고 집에 가도 되는 자유로운 여건.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애들이 하교할 때까지는 여기 있기로 했다.
세아랑 진유리는 수업을 마치고 샬럿 테이트에게 갈 테니 그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남는 시간엔 내가 두 번째로 발표할 논문을 연구하면 되는 거고.
마력 속성과 특정 공간의 상관관계.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걸 밝혀내면…… 다른 건 몰라도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지역이 더러 있을 건 확실하겠지.
마력 훈련의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뀔 발견일 거다. 그런 걸 그냥 세간에 공개할 수는 없으니 나중을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하고.
연구 내적인 거야 순조롭게 진척되는 중이니 내겐 그쪽이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오후 한 시 반을 넘겼을 무렵.
우웅-
책상 한쪽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아르노 뒤레.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으니…… 그가 다짜고짜 들뜬 목소리로 일렀다.
<진, 아주 괜찮은 곳을 발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