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Chapter 20. 대련 (2)
이번 연구에 참고할 데이터를 얻기 위한 장소들.
아르노 뒤레 자신이 찾아준다곤 했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고작해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놀랄 만큼 빠른 일 처리였고, 그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내일이라도 만나서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일단 내가 먼저 둘러보고 있는데 마력도 풍부하고 아주 괜찮은 곳이야. 주위가 번잡하긴 해도 서울엔 안 그런 곳이 드물잖아? 데이터를 도출하기 괜찮아 보이는데, 연구 책임자는 너니까 네가 봐야 가닥이 나오겠지.>
“고마워요, 아르노. 그래서 거기가 어디쯤이죠?”
아르노 뒤레가 정확한 주소를 일러줬다. 제일고에서 차로 이삼십 분쯤 걸리는 번화가. 그 근처의 공원이라고 했다.
“제가 지금 가도 될까요? 오늘 수업도 없고 바로 갈 수 있어요.”
<오, 그러면 좋지. 사실 다섯 곳 정도 찾아뒀는데 나도 답사를 온 건 여기가 처음이거든. 일정만 여유로우면 두어 곳 더 둘러보자고.>
“네, 그럼 그리로 갈게요. 도착할 때쯤에 다시 전화드리고요.”
<천천히 와도 돼. 여긴 걷기만 해도 분위기가 좋은 곳이라 산책 겸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정말 고마워요.”
통화를 마친 나는 세아에게 메시지부터 보냈다.
훈련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야겠다고.
한데 내가 연락하고 일 분도 안 돼서 답장이 돌아왔다.
-세아: 괜찮아 알아서 갈게
-이도진: 너 수업 듣고 있을 애가 왜 이렇게 빨리 답장해 (13:37)
-세아: (귀여운 눈사람이 해맑게 웃는 이모티콘)
-이도진: 답장하지 마
-세아: 할 건데
-세아: (귀여운 곰돌이가 옆으로 누워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이모티콘)
-이도진: ......
-이도진: 그러다 걸리면 난 모른다 (13:38)
내가 알기로 세아 반 금요일 오후 첫 수업은 담임인데, 나 고등학생 땐 그 사람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 쓰다가 걸리면 벌이 상당히 엄했다.
남은 얘기는 하교할 때쯤 다시 해야겠다 싶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몇 번 더 메시지가 왔다.
수업 들으라는 의도로 나는 확인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곧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진동음이 멈췄다.
드디어 수업에 집중을 좀 하나 싶었는데…… 세아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이유는 연구실을 나선 이후에 밝혀졌다.
-유해빈: 속보) 이세아 (18세, 여) 담임 수업 때 폰 만지다가 걸려서 압수당함
-유해빈: 담임이 세 번 넘게 눈치 줬는데 꿋꿋이 무시하다가 제대로 혼남
-유해빈: 얼굴 완전히 새빨개져서 담임이 종례 시간에 준다는 거 지금 돌려달라는 중임
-이도진: 그거 나한테 연락하는 거였다
-유해빈: 앗... (13:51)
-유해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도진: 웃기냐?
-유해빈: 아뇨 손으로만 웃고 입은 심각한데요;
-이도진: 손으로도 웃지 말고
-이도진: 세아한테 나 일 먼저 끝나면 그쪽으로 간다고 전해줘라
-이도진: 아 아니다
-유해빈: ??? 제가요?
-이도진: 내가 실수했네
-이도진: 절대 말하지 마 (13:52)
-유해빈: 교수님 저희 조심해야겠어요
-유해빈: 이거 무슨 비밀연애 느낌으로 자꾸 빈틈이 보이는데
-이도진: 그러게
-이도진: 조심하자
-유해빈: 네 ㅎㅎ
-유해빈: 이세아 방금 폰 돌려받았어요 (13:53)
아니나 다를까 세아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전화를 건 나는 저녁쯤 훈련장에 데리러 가겠단 의사를 전달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세아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 치킨 먹고 싶어.>
“먹고 들어가자고?”
<치킨집은 늦게까지 문 열잖아. 내일 주말이고.>
먹고 싶다는데 사줘야지. 내가 흔쾌히 동의하자 만족한 듯한 세아에게 남은 수업과 이후의 훈련도 열심히 하라고 말한 다음 차를 몰아나갔다.
그리고 시계가 오후 두 시 반을 넘길 즈음.
“자, 가보자고.”
어디 등산하러 온 사람처럼 활동적인 차림에 부피가 큰 가방을 멘 아르노 뒤레가 나를 공원 외진 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두 번째로 발표할 연구를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대기 중의 자연 마력이 평균치 이상으로 풍부한 곳들을 찾는다.
해당 지역들의 마력은 각성자의 고유한 마력으로 변환되는데, 이때 자연히 나타나는 마력 속성의 분화를 살핀다.
그 과정에서 개별 지역마다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특정 마력 속성의 감응력 효율을 끌어올릴 단서가 된다.
발상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엿보는 눈 특성의 도움 없인 세밀한 분석을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고, 그래서 이건 나 이외에 누구도 진행하지 못할 연구였다.
탐색을 위한 마법이자 개별 각성자의 마력 속성 숙련도를 올리게 해줄 구성체의 프로토타입은 이미 마련해두었고.
내가 펼친 오른손 손바닥. 그 위로 느리게 일렁이는 마력 구성체를 바라보며 아르노 뒤레가 감탄을 흘렸다.
“……대단하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해. 진, 네가 발현한 이 구성체만으로도 응용하기에 따라서 A급 상당의 마법이 열 가지는 넘게 새로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부수적인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이걸 제대로 완성만 하면 마력 속성과 연관된 분야가 두 배 이상 커질 테니까. 학문적 연구, 경제적 효과, 각성자들의 실력까지 죄다 통틀어서 말이야.”
“그 정도까지 되려나 싶기는 한데…… 아, 다행히 반응은 하네요.”
우웅- 우우웅-
마력 구성체가 작게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 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으으-
마력 구성체가 허공으로 빛을 발산했다.
다양한 색이 합쳐진 무지갯빛. 다만 자연스러운 무지갯빛은 아니었다.
“붉은색이…… 특히 눈에 띄는군. 진, 내가 환상 같은 걸 보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어서 말해줘.”
아르노 뒤레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봐 차마 어깨를 부여잡거나 가까이 오진 못하면서도 그가 재촉했고, 나는 보이고 느끼는 그대로 답을 일렀다.
“환상이 아니에요. 저한테도 붉은색만 강하게 나타나는 게 보여요.”
이제 연구는 7할 이상 성공했다고 봐도 좋았다. 내가 고안한 마력 구성체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통찰해낼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까.
특정 지역의 자연적인 마력. 그것에서 이미 특정한 마력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지.
이 부분이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걸 알아낸 이상 남은 건 하나뿐이다. 개별 각성자들에게 접목해 속성의 숙련도를 올릴 방법까지 구체화하는 것.
아르노 뒤레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
-스킬 ‘마력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
+
검은 심장에서 파생된 마력흡수. 이 스킬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필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연구를 세간에 공개하기 위해 숨겨둔 안전장치.
간단한 이야기다.
내가 마력 구성체와 관련 이론을 공개하고, 그걸 받아들인 각성자들이 훈련해 마력 속성의 숙련도를 올린다면…….
그 마력은 결코 내게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힘으로 흡수당할 뿐이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마력흡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회로를 감춰놨으니까.
그 어떤 초고도 마법이라 해도 동력이 상실되면 소멸하기에 그들의 마법은 한낱 먹잇감으로 전락하겠지.
“음?”
아르노 뒤레가 고개를 갸웃한다.
마력 구성체가 뿜어내고 있는 무지갯빛이 잠깐이나마 옅어진 걸 목격한 거려나.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 아직 구성이 완벽하지는 않아서요.”
“그래? 하기야 연구에 투자한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까. 그걸 고려하면 이 정도 완성도만 해도 놀랍지.”
“격려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더 해봐야죠.”
성공했다.
36 영웅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마법사.
나 자신만 제외하면 이 마력 구성체를 가장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을 사람.
아르노 뒤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마력흡수를 발동했는데도 그는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 그 누구에게 보여도 의문을 갖지 않을 거다.
이 마력 구성체를 통해 훈련할 각성자들의 모든 속성 마법은…… 이 순간부터 내게 무의미해졌다.
이만하면 오늘 여기 온 성과는 넘칠 만큼 충분하다고 해도-
그리고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한 홀로그램 메시지가 내 시야에 나타났다.
+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반응합니다. (랭크 SS)
+
“응? 진, 왜 그러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해하는 아르노 뒤레에게 답하며 나는 재빨리 생각했다.
검은 심장이 반응했다는 메시지.
저게…… 왜 보이는 거지?
단순히 마력흡수 스킬을 발동해서 그런 건 아닐 터였다. 여기 오기 이전에도 구성체를 고안하며 몇 번이나 발동해봤으니까.
뭔가…… 다른 변수가 있다.
내 마력 구성체가 아니다.
마력흡수 스킬 자체도 아니다.
달라진 거라곤 단 하나였다. 데이터를 얻기 위해 찾아온 이 공원.
이 장소와…… 마력흡수 스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심장이 연관되어 있다고,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정신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아르노 뒤레에게 말했다.
“아르노, 다섯 곳 정도 봐두셨다고 했죠? 여기가 첫 번째고요.”
“응, 그렇지.”
“다른 네 곳도…… 기왕 찾아온 김에 빠르게 둘러봤으면 해서요.”
<킬 더 이블> 2권의 클라이맥스에 있을 메인 에피소드.
검은 심장의 파생 스킬을 하나 습득해서 발동하라는 서브 퀘스트.
현재로선 확실한 실마리가 없는 그 둘과 관련된 정보를…… 어쩌면 오늘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다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종례 끝.”
담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일고 2학년 1반 학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한 일이 있는지 곧장 교실을 박차고 나가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친한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 어디에 놀러 갈 건지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세아와 진유리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무런 말 없이 가방을 챙긴 두 사람은 각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유리는 맨 앞자리.
이세아는 맨 뒤의 창가 자리.
두 사람이 서로의 중간 지점, 교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마치 지금부터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비장한 기운이 그녀들에게서 흘러나왔고, 들고 가기 귀찮아 사물함에 가방을 집어넣고 있던 유해빈은 이젠 해탈했다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차라리 서로 욕을 하지,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오늘 아침.
그리고 점심시간.
그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아까 전의 클럽활동 시간, 이세아·진유리·유해빈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학생회에 가야 하는 그 시간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더욱 격화된 것 같았다.
‘유리멘탈 쟤는 평소에는 자기가 척척 알아서 다 하더니 오늘은 까칠하게 굴고.’
원래는 그래서 학생회 시간이 편했다. 2학년들과 관련한 사안은 대부분 진유리가 말끔하게 처리하곤 했으니까.
한데 오늘은 안건마다 이세아에게 의견을 물으며 불꽃 튀는 토의를 벌였고, 처음엔 피하려 하던 이세아도 슬슬 부아가 치미는지 지지 않고 맞서며 의견을 개진했다.
덕분에 느긋하고 평화롭던 학생회 분위기가 오늘따라 얼음장처럼 싸했고.
다만 유해빈이 보기엔…… 그렇다고 아예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예전엔 유리멘탈 쟤가 일방적으로 시비 거는 거였는데…… 지금은 이세아 쟤도 좀 많이 의식하지 않나?’
시비를 건다기보다 지금은 서로를 의식하는 라이벌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상황. 다만 참견하기 싫었던 유해빈은 가방을 사물함에 넣고선 혀를 차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쟤들 가는 데는 내가 가지도 못하니까.’
저 둘은 36 영웅의 한 사람인 샬럿 테이트에게 훈련을 받으러 갈 거다.
이도진도 거기까지 따라가서 챙겨달라는 건 아니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빠져도 되겠지.
그때 문득 드는 예감이 있었다.
‘저러다가 또 사이좋아지려나?’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이 갈등이 마무리되고 나면 진유리와 이세아가 지금보다 훨씬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확신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관중석에서 선수 야유나 해대는 저 못된 시누이가 유리멘탈 밀어주진 않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세아와 친한 사람은 유해빈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요즘 들어 소외되는 일이 늘어나는 듯해 그 부분은 조금 섭섭했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먹으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유해빈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뭐, 괜찮아. 난 우리 도진 씨랑 비밀연애 하고 있으니까.’
남들 모르게 반말 쓰면서 친하게 지내고, 이 정도면 비밀연애의 바로 전 단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게다가 아까 슬쩍 ‘비밀연애’를 언급했을 때 이도진도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으니 청신호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신호는 아니겠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생각을 하며 유해빈은 쾌활한 걸음으로 학교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같은 시점.
이세아와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진유리가 입을 뗐다.
“오늘 우리 대련하는 거.”
“그게 왜?”
쿵, 쿵.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진유리는 말을 이었다.
“나랑 내기해서 내가 이기면……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