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Chapter 20. 대련 (3)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강한 의지를 담아 꺼낸 제안.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싫어.”
“그러니까 무슨 부탁이냐면- 어……?”
미리 준비해놓은 다음 말을 이어나가던 진유리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세아는 여전히 앞만 보며 걷고 있고, 평소보다 좀 더 새침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재차 거부한다.
“조별실습만 정하면 되잖아. 다른 내기까진 하기 싫어.”
“아…… 그래? 그래도…… 일단 들어보기라도 하지. 만약에 네가 이기면-”
“난 요즘 만족해. 딱히 갖고 싶은 거 없고, 여기서 더 하고 싶은 거도 없고, 내기해봤자 얻을 거 없어.”
‘난 있다고-!!’라는 말을 진유리는 마음속으로만 삼켰다. 심정이야 굴뚝 같지만 칼자루를 쥔 건 저쪽이니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세아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뿐.
하지만 라이벌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한 이세아는 말없이 척척 걸어 나갔고, 이미 늦은 시각이라 택시를 잡아탄 두 사람은 시계가 오후 6시 30분을 살짝 넘겼을 즈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에 벌써 3주 이상 체류 중인 샬럿 테이트가 통째로 대여하고 있는 훈련장. 옷을 갈아입고 메인 훈련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남녀가 그녀들을 맞이했다.
샬럿 테이트와 안드레이 일린.
한국에 온 이후로 할 일이 거의 없어 보이는 안드레이 일린이 동행한 건 익숙한 광경이고, 샬럿 테이트가 언뜻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둘 다 표정이 왜 그러지? 오늘 훈련은 자유 대련 위주라서 어렵지 않을 텐데.”
“…….”
“아, 별일 아니에요.”
자신보다 더 둘러대는 데 소질이 없는 이세아를 대신해 진유리가 설명했다. 어제 마법역학 수업 때 조별실습 과제를 받았다고. 서로 의견이 갈려 대련 결과로 정하기로 했다고.
멀리서 듣고 있던 안드레이 일린이 피식 웃었고, 샬럿 테이트는 더욱 흥미로워하는 기색으로 다시금 물었다.
“마법역학이면 도진이 가르치는 수업이지? 어떤 과제였는지, 너희 둘이 각각 어떤 방법을 택했는지 궁금한데.”
이번엔 두 사람이 차례대로 답했다.
한마디로 정리해 이세아는 개개인의 역량으로 이론적 이해도가 부족한 걸 보충하는 방식.
진유리는 정석적인 구성을 맞춰두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 안에서 해결을 보는 방식.
두 사람의 설명을 들은 샬럿 테이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흰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 세아는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일을 늘리고 싶어 하지?’라고, 유리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아예 과제를 하지 말지 왜 자기 멋대로 하려는 거야?’라고.”
정곡을 찔린 이세아와 진유리가 조용히 침묵하니 샬럿 테이트가 말을 이었다.
“어느 한쪽이 틀린 건 아니야. 성향의 차이, 가진 재능이 어떤 분야에서 발달했는지의 차이, 그런 거라고 보는 게 옳지. 난 세아의 방식으로 최고 수준의 강자가 된 사람도 알고, 유리의 방식으로 결국에는 자기 한계를 깨부순 사람도 알아. 그러니 너희 둘의 방식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존중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샬럿 테이트가 검지를 슬쩍 튕겼다.
피슈웅-
훈련장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연습용 검 두 자루가 쏜살같이 날아와 진유리와 이세아의 앞에 멈췄고, 두 사람이 검을 쥐자 샬럿 테이트가 도발하듯 일렀다.
“너희가 반드시 그런 경지까지 올라갈 거라는 장담은 못 하겠지?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한 번 증명해봐. 나중에 어떻게 될진 몰라도……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내 방식이 옳다고.”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들이 본래 익힌 지식과 힘. 샬럿 테이트에게 여태까지 배우며 얻은 성과.
그것들을 자신의 논리대로 활용해 대련하는 것.
“이십 분씩 진행할 거야. 처음 십 분은 대련, 다음 십 분은 피드백 겸 휴식시간. 내일은 학교에 안 가는 날이지? 밤이 샐 때까지 해도 상관없으니까 원하는 만큼 계속해봐. 확실히 승부가 나거나 둘 중 한 명이 지쳐서 포기할 때까지.”
이세아는 다짐했다.
확실하게 승부를 내서 이겨버리겠다고.
진유리는 다짐했다.
도중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먼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
오후 아홉 시 삼십 분경. 나는 아르노 뒤레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그가 흡족해하며 중얼거렸다.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끝나서 다행이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죄송한걸요.”
“아니야. 데이터 분석하는 것도 재밌었고, 진 네 구성체가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완성도가 높아지는 걸 보는 것도 재밌었지. 내가 안 그래 보여도 학구열이 높거든.”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고요.”
아르노 뒤레가 선별한 다섯 장소. 반나절이 넘게 강행군을 치른 결과로 우리는 그에 해당하는 곳을 전부 다녀왔다.
공통된 목적은 연구에 쓸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나 혼자만 가진 목적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마력흡수 스킬을 발동할 당시 검은 심장이 반응한 기현상.
다섯 곳 모두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곳도 아니었다. 짚이는 게 어느 정도 있고, 서연희와 상의를 해봐야겠지.
어둑한 도로를 달리며 나는 아르노 뒤레에게 물었다.
“저쪽은 훈련 중이랬죠?”
한 시간쯤 됐나. 세아는 연락을 안 받고, 아르노 뒤레가 샬럿 테이트에게 연락해보니 한창 훈련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맞아, 로티가 제법 흥을 내고 있던데. 어디 다시 전화해볼까?”
아르노 뒤레가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아, 로티. 지금-”
쿠아아아앙!
샬럿 테이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한테까지 들릴 만큼 커다란 굉음만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져왔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통화를 마친 아르노 뒤레가 너스레를 떨었다.
“바쁘니까 말 걸지 말라는군. 요 몇 년 동안 로티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건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처음 들인 제자들이 아주 기특한 모양이야.”
“……그래요?”
글쎄, 그건 어떨까.
일단 보이는 것만 놓고 보면 대단히 열정적으로 세아와 진유리를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나로선 그녀의 행보를 온전한 선의로만 여기기 어려운 상황.
이 부분은 앞으로도 면밀히 살필 필요성이 있었다.
“아, 다 왔네요.”
저 멀리 샬럿 테이트가 대여한 훈련장이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댄 나와 아르노 뒤레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메인 훈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쿵! 쿠웅!
방음이 잘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도까지 소리가 울렸고, 나는 걱정과 기대에 찬 마음으로 훈련실의 문을 열었다.
“그만! 둘 다 이쪽으로 와.”
때마침 휴식시간인지 샬럿 테이트가 크게 외치며 세아와 진유리를 불렀다. 둘 다…… 상태가 좀 엉망이네.
상당히 튼튼한 소재로 제작된 훈련복이건만 군데군데 찢겨나간 데가 보이고, 얼굴과 목덜미는 온통 땀범벅, 질끈 묶은 머리칼이 반쯤 풀려서 뺨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지친 발걸음으로 샬럿 테이트를 향해 가던 두 사람이 문득 시선을 돌린다. 방금 들어온 내 쪽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보는 사람이 있으니 괜히 부끄러운지 얼굴이 조금 빨개진 세아와 진유리가 샬럿 테이트의 피드백을 듣는다.
그때 안드레이 일린이 나와 아르노 뒤레에게 다가왔다.
“일은 잘 끝났나?”
“물론이죠, 앤디. 나야 한 게 없지만 연구는 순조로울 거예요. 그렇지, 진?”
“열심히 해야죠.”
나는 겸손한 어조로 말을 아꼈다.
안드레이 일린. 현재로선 진정한 배신자일 가능성이 가장 큰 영웅.
워낙 과묵한 자이기에 뚜렷한 단서를 당장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오늘은 무리일 것 같지만 그래도 실마리를 찾아봐야 하는데…….
셋이서 잡담 비슷한 걸 나누고 있으려니 샬럿 테이트가 손뼉을 쳤다.
“피드백은 다 됐고, 조금만 더 휴식하고 계속해.”
그녀의 말에 세아와 진유리가 연습용 검을 내려놓았다. 스포츠음료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마시더니 내게로 졸래졸래 걸어온다.
세아가 앞장섰고, 진유리는 혼자 있기 머쓱해서인지 두어 걸음 뒤에서.
이마와 뺨에 흐른 땀을 훔친 세아가 내게 물었다.
“방금 왔어?”
“응, 들어보니까 한참 더 남았다며? 아침까지 안 끝날지도 모른다던데.”
훈련 마치고 세아랑 같이 치킨 먹고 들어가기로 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들은 것도 그렇고, 안드레이 일린에게 들은 것도 그렇고, 세아와 진유리 둘이 원하면 아침까지 훈련할지도 모른다니까. 여기는 수면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태워서 집에 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러면 치킨은 못 먹고 들어가지 싶었다.
한데…… 세아가 굳은 각오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대련만 끝나고 갈 거야.”
“너 누구 마음대로-”
나한테 나직이 인사만 하고 멀뚱히 서 있던 진유리가 발끈하자 세아가 태연하게 일렀다.
“이번엔 안 멈추고 끝까지 하면 되잖아. 결정 날 때까지.”
“……그런 거면 괜찮은데.”
하긴 내가 보기에도 둘 다 굉장히 많이 지친 듯하니 이쯤 하고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는 진유리에게 일렀다.
“유리도 집에 태워다줄게. 시간 많이 늦었는데.”
“아…… 그으, 고맙습니다…….”
“아니면 배고플 텐데 세아랑 나는 뭐 좀 먹고 들어가려고 하거든. 너도 괜찮으면 셋이 먹고 들어갈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좀 그러려나?”
“어?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집에 간다고?”
“아, 아뇨……. 밥 먹고 들어가도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때 샬럿 테이트가 두 사람을 불렀다.
“휴식 끝! 그러면 이번 대련이 마지막이지? 내가 말해준 거 숙지하고, 제대로 해봐.”
“……네. 갔다 올게.”
“네! 교수님, 근데…… 그게, 그러니까…… 뭐 드시려고요……?”
“치킨.”
“아, 저 치킨 좋아해요! 엄청 좋아해요! 저도 꼭 먹고 집에 갈래요.”
나를 똑바로 보면서 치킨 좋아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한 진유리가 꾸벅 인사하곤 세아의 뒤를 따라서 걸어갔다.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
대련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표현해야 하려나.
잠깐 고민한 나는 곧 적합한 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 거의 그때 느낌인데. 세아랑 진유리가 강의실에서 치고받고 싸웠을 때. 오히려 그때보다 스산한 느낌은 더 많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 ----.”
“-- -- ---.”
나란히 걸으며 세아와 진유리가 들리지 않게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둘이 그래도 친해졌으니 치킨집 어디를 갈지 정하는 거려나.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며 검을 들었다.
“시작!”
샬럿 테이트가 외친 직후.
콰아아아앙!
서로를 향해 돌진한 세아와 진유리에게서 굉음이라고 해야 할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
“너 진짜 올 거야?”
“……뭐가?”
흠칫하면서도 되받아치는 진유리를 이세아는 넌지시 바라봤다. 둘러서 전하면 듣지 않을 것 같으니 직접적으로 말해야겠지.
“이제 열 신데 늦었잖아.”
“언제 들어갈지 모른다고 집에 전화해놨어. 그리고 교수님이 나한테 먼저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
이세아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예의상 말한 거다’라고 받아치고 싶었으나 이도진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진유리를 되게 아끼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세아는 이대로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훈련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둘이 맛있는 걸 먹고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솔직히 셋이라고 달라지는 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둘이 더 나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
“너 나한테 내기하자고 한 거.”
“응?”
“오기 전에 학교에서, 내기해서 부탁 들어달라고 했잖아.”
“아, 응. ……그게 왜?”
“그거 해. 너 무슨 부탁 들어달라고 할 거였어?”
“…….”
진유리가 머뭇거린다.
그대로 몇 초쯤 망설이다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일렀다.
“그으, 이번 달 말에 우리 아빠 생신인데…….”
“그래서?”
“아직 선물을 못 사서, 근데 뭐 사드릴지 잘 모르겠고…… 근데 교수님은 어른이시니까…… 그래서 교수님이 선물 골라주시면-”
“선물을 어떻게 골라줘?”
“같이 사러 가서…… 아, 둘이 간다는 건 아니고, 너도 같이 가서, 밥도 먹고, 시간 되면 영화도 하나 보고, 주말에 그러면 좋겠다 싶어서…….”
“…….”
이세아는 이겨서 얻을 이득과 져서 입을 손해를 마음속의 오른손과 왼손에 올려뒀봤다.
결과는 어렵지 않게 나왔다.
‘이기면 되잖아.’
손해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기면 되는 거니까.
판단을 마친 이세아는 진유리에게 일렀다.
“좋아, 내기해.”
“진짜지? 말 바꾸지 마.”
“맘대로 해. 내가 이기면 넌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고 자.”
“나 밤에 라면 잘 안 먹는데. 눈 붓는 거 싫어서.”
“……어쨌든.”
“그럼 내가 이기면…… 내 말대로 해주는 거고?”
“그렇게 될 일 없을 거야.”
“……어디 두고 봐.”
진유리가 분해하듯 답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훈련장 중앙에 섰다.
각자 원하는 건 달랐으나 생각하고 있는 건 같았다. 이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그리고…….
“시작!”
오늘의 마지막 대련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