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Chapter 20. 대련 (4)
***
타앙! 쿠우웅!
대결이 시작되고 어느새 오 분.
샬럿 테이트는 신중한 눈길로 전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세아가 좀 더 낫네.’
기실 세 시간 이상 이어진 오늘의 대련 내내 그러했다.
진유리가 공세일 때야 이세아도 수세에 몰렸으나 엄밀히 말해서 그건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크게 타격을 입지 않는 선에서 공격을 받아내며 빈틈이 보이면 곧바로 반격했으니까.
반면에 이세아가 공격할 때 진유리는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버티고 버티다 겨우 공격권에서 벗어나 숨을 고르는 일이 잦았다.
‘6대4보다는 불리하고 7대3보다는 할 만한 정도려나.’
지난달에 처음 둘을 가르칠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땐 5대5와 6대4의 중간쯤이었을까. 굳이 우위를 나눈다면 이세아의 손을 들어줬겠지만 이만큼 격차가 나진 않았다.
지난 3주 동안 진유리는 많이 발전했으나 이세아는 그보다 더 앞서나간 것이다. 면역체 보유자인 자신의 가르침은 진유리 쪽에 훨씬 도움이 됐을 텐데도.
‘마력 보유량의 문제가 아니야.’
수학여행 때 기연을 얻어 둘 다 마력 총량이 크게 상승한 것은 알고 있다. 이세아는 A급 기준치. 진유리는 A급과 B급의 경계쯤.
차이가 없다곤 못 해도 승부를 결정지을 만큼의 격차는 아니고, 이렇게 우열이 나뉘는 이유를 마력 보유량에서 찾는 건 어폐가 있겠지.
‘그냥…… 세아가 더 뛰어난 거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감응력, 활용력, 그 외에도 마력을 운용하는 모든 감각까지 전부 이세아가 앞선다. 진유리도 뛰어난 편이긴 하나 면역체를 활성화하지 않는다면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이세아와 비견할 수 없다.
일반적인 기준에선 둘 다 천재.
진유리의 기준에서도 이세아는 천재.
하지만 이세아의 기준에서 진유리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수재 이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진 재능 사이엔 그만한 간극이 존재하고…… 그래서 샬럿 테이트는 내심으로 진유리를 응원했다.
‘재능만이 재능의 전부가 아니란 걸 보여줘 봐.’
일견 모순되는 말 같지만 그건 샬럿 테이트가 오래도록 품어온 마음가짐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도 그랬다.
정세빈, 서연희, 그리고 또 한 사람.
세 명의 천재와 비교하면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 샬럿 테이트는 자신할 수 있다.
서연희를 능가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푸른 눈과 금빛 머리칼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한 여성. 그녀의 최전성기를 지나, 그녀가 죽지 않고 건재했다면 다다랐을 경지보다도 자신이 강하다.
심지어 네 사람 중 가장 뛰어났던 대마법사 정세빈도…… 언젠가는 넘어설 수 있으리라.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걸 논하기엔 너무 힘든 길이니까.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느냐. 아니면 그곳에 이르기 전에 포기해버리느냐.
단지 그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은 진유리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십오 분째에 접어든 대련. 진유리가 거친 숨을 내쉰다.
“하아, 하아…….”
“후우…….”
그녀를 훈련실 안쪽까지 몰아붙인 이세아도 호흡을 고른다. 두 사람 다 지친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세아는 여력이 있었다.
족히 두 배 가까운 차이. 이 시점에서 전세는 7대3을 훌쩍 넘어 9대1 이상으로 기울어졌다. 아마 다음 공방이 마지막이겠지.
“……조심해.”
짧게 경고한 이세아가 발을 세차게 굴렸다.
콰아앙-!
그녀가 박찬 바닥에서 불길 같은 마력이 솟구쳤고, 공기를 찢어내며 쇄도한 이세아는 진유리의 지척에 다다랐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검에선 수 미터를 훌쩍 넘긴 빛무리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이세아가 선택한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최대치까지 발현한 마력.
샬럿 테이트가 알기로 진유리에게는 저런 공격을 받아낼 힘과 기술이 없었다. 면역체를 활성화하지 않고서야 패배가 확정적인 상황이겠지.
‘안 되나?’
공격에 맞서 진유리도 검을 들어 올렸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세아보다 미약한 마력이 실린 검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부러질 테고, 면역체가 활성화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원한다고 자유자재로 꺼내는 힘이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하지만 샬럿 테이트는 진유리의 눈빛에 그 어떤 좌절도 비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그녀의 시선이 한순간 훈련실 정반대 편으로 향한 것도 발견했다.
아주 잠깐 이도진에게 가닿은 눈길. 이제 진유리가 검을 휘둘렀다.
콰앙!
타이밍이 맞게 면역체가 발현된다던가 하는 형편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살짝 늦었다.
퍼걱!
진유리의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뒤늦게 발현된 강화 계통의 면역체가…… 이세아의 검을 힘겹게 튕겨냈다.
“아……!”
이세아가 놀라서 눈을 치뜬다. 공격에 밀려 나간 진유리는 이미 벽에 세게 부딪쳐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그때라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면 승리한 건 역시나 이세아였겠지. 승부는 마음가짐에서 갈렸다.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벽에 튕겨 나간 그 순간에도 포기하는 기색 없이 눈빛이 살아있던 진유리.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간 검을 보느라 한 박자 반응이 늦었던 이세아.
“아아악-!”
악을 쓰며 등 뒤로 마력을 발산해 벽에서 멀어진 진유리가 양손을 몇 번이고 허공에 내질렀다.
이세아에게 닿을 리 없는 공격이었고, 그러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노리는 목표는 자신이 쥐고 있다가 부서진, 지금은 허공에 휘날리고 있는 연습용 검의 파편.
피잉! 피슈웅!
진유리의 주먹에 닿은 파편들이 마치 투척용 무기처럼 이세아를 향해 날았다. 이세아는 그제야 손에서 놓친 검을 잡아가는 중이었고, 파편을 튕겨내는 것만도 벅찼다.
쉬익, 타앙! 탕!
두어 개는 피하고, 두어 개는 겨우 막아냈다.
하지만 진유리는 이미 이세아의 옆쪽으로 돌아서 들어간 상태.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열세에도 그녀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려 이세아를 들이받았다.
퍼억!
진유리의 어깨에 직격당한 이세아의 몸이 땅을 굴렀다. 손에 쥔 검은 놓치지 않고 있으나 진유리가 미세하게 빨랐다.
왼발로 검을 차서 날려버린 다음, 이세아의 몸에 자신을 겹치듯 마운트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양손 주먹이 굳게 쥐어지는 걸 보고서 샬럿 테이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
막 이세아에게 주먹을 내리치려 하던 진유리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일어서다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긴장이 풀린 탓에 탈력감이 찾아온 거겠지.
아직은 힘이 남은 듯한 이세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더 할 수 있었어요.”
인정할 수 없다고, 분한 마음이 가득 담긴 말에 샬럿 테이트는 단호하게 답했다.
“조건이 있었지? 유리는 유리의 방식대로, 세아는 세아의 방식대로.”
진유리는 정석대로. 이세아는 효율을 중시해서.
대련의 전제조건이 그것이었다.
“검을 놓친 건 내버려 두고 유리를 추격했어야 해. 그게 네 방식이었고, 그랬으면 이겼을 거야. 반대로 유리는 정석을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너희 둘 다 마지막 순간에는 상대방의 방식을 택했지만, 누가 더 능동적으로 활용했냐고 묻는다면…… 오늘은 유리였어.”
“감사…… 합니다.”
기진맥진한 상태임에도 겨우 몸을 일으킨 진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의 이세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고, 샬럿 테이트는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말투로 제자들에게 일렀다.
“물론 대련을 계속했다면 누가 이겼을지는 몰라. 오늘은 유리가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야. 유리는 자만하지 말고, 세아는 낙담하지 말고. 자, 이걸로 오늘 훈련은 끝이니 씻고 돌아가도 좋아. 내일도 올 거지?”
“네!”
“……네.”
한 명은 기합이 들어가 있고 한 명은 의기소침해 있으나 어쨌든 둘 다 긍정의 의사를 보였고, 훈련실 입구 쪽으로 걸어간 샬럿 테이트에게 이도진이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응?”
“세아도 유리도, 잘 가르쳐주셔서요.”
“아, 그거?”
대수롭지 않게 답한 샬럿 테이트였으나 내심으론 당황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니 자신이 정말 열정적이었다 싶어서.
하지만 그런 심정을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는 이도진에게 일렀다.
“오늘은 세아한테 신경 좀 써줘. 네가 해주는 게 효과가 좋을 테니까.”
그녀가 전하기엔 너무 상냥한 배려였을까. 언뜻 놀란 듯하던 이도진이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삼십 분가량이 지나 이도진도, 이세아와 진유리도, 안드레이 일린까지도 훈련장을 떠난 뒤.
적막함이 흐르는 훈련실 내부에서 샬럿 테이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진유리에 관한 것.
‘트리거가 두 개인 게 오히려 효과적이었다고?’
확실한 건 아니었다.
대련의 마지막 무렵 활성화한 면역체는 분명 이도진을 트리거로 한 것일 테지만, 그게 복수의 트리거가 더 효율적임을 증명하는 건 아니겠지.
트리거가 하나였다면.
이세아, 혹은 이도진에 관한 것 하나로 한정됐다면.
그랬다면 타이밍이 늦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정은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은 진유리가 패배의 위기에서 두 개의 트리거를 활용해 승리했다는 것뿐이다.
이어서 든 생각.
이도진과 이세아.
‘둘 다 좋은 애들이야.’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오빠이자 그 자신은 천재적인 마학 연구자.
조용한 성격이지만 알고 보면 승부욕도 있는 제자이자 오빠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동생.
옛 동료들의 아들과 딸.
이 착한 애들을 굳이 해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든 생각.
샬럿 자신에 관한 것.
‘내가…… 바뀌었나?’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신이 있어 이도진과 이세아, 진유리를 해치는 대가로 모든 한계를 깨부술 만큼 강한 트리거를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증한다면.
그러면 절대로 망설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확실치 않고 불분명한 문제라면.
설령 진유리의 성장이 생각보다 더뎌서, 그녀를 이용해 샬럿 자신의 트리거를 강화할 수 없게 된다 해도, 이도진과 이세아라는 두 개의 트리거를 가진 탓이라는 게 명확하지 않다면.
단지 가능성에 머무르는 문제라면…… 자신은 이세아나 이도진을 해칠까?
현재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엔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여태까진 트리거를 강화하는 데 쓸 제물이 차고 넘쳤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범죄조직.
귀찮은 방식으로 자신을 옭아매려 하는 정적들.
겉으론 호의로 다가오는 듯했으나 그녀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던 자들.
그런 자들만 솎아내서 죽이고, 실각시키고, 폐인으로 만들어도 충분했다.
의도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내고, 쓰레기들을 무대 위에 세워서, 놈들이 행하는 작태를 보며 트리거를 강화하는 것만 해도 성장에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일 년쯤 됐다.
자신에게 그따위 하찮은 수작을 부릴 자가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게. 유럽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자신을 해하거나 이용하려는 자가 더는 없고, 샬럿 테이트는 고민했다.
강화한 트리거로도 부족하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희생시킬 범위를 늘려야 할까. 오로지 선의로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 가령 아르노 뒤레 같은 이들까지도 후보에 포함해야 할까.
그때 샬럿 테이트는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자고.
그로부터 일 년.
아직은 트리거가 한계에 이르지 않았고, 슬슬 그 시점이 다가온다 싶을 때쯤 이 나라에 왔다.
진유리를 만났다. 이세아와 이도진, 기억 가장자리에 머무르던 남매와 재회했다.
그들을 희생시킬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필요하다면 선한 자들까지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
그래서 샬럿 테이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나라에 와서 바뀐 건지.
아니면 각오했다는 건 원래부터 말뿐이었고 실은 나약한 마음가짐이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걸 넘어서면 정말로 더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며 역시 망설이지 않는 게 옳은 듯하다고 여기려 했지만…….
“거봐. 그것도 딱 맞아떨어지는 길은 아니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말.
양손에 맥주 캔을 든 아르노 뒤레가 빙긋 웃으며 다가온다. 샬럿 테이트는 애써 태연한 말투를 꾸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로티, 너 자신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아르노 뒤레가 말을 이었다.
“넌, 네 생각보다 훨씬 착해.”
그리곤 맥주 캔 하나를 그녀에게 던져준다.
아르노 뒤레는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트리거에 관한 이야기. 희생에 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믿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샬럿 테이트는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고, 해서 물어봤다.
“아르노, 날 사랑해?”
사랑한다고 답한다면.
이미 트리거의 중심이 되는 그지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트리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아르노 뒤레가 표정을 찡그리며 답했다.
“아니, 전혀. 그야 내 연인이었던 누구보다도 로티 네가 소중하지만…… 그건 네가 말하는 사랑은 아니지. 원하는 답이 아니어서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왜 내가 거절당한 것처럼 말하는 거야?”
“아, 그건 예의가 아니었군. 어쨌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스레를 떠는 아르노 뒤레를 보며 그녀도 마주 웃었다.
확실하다. 아르노 뒤레는 이 이상 트리거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한계가 찾아온 건 아니니까.
건네받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쉬익-
수백 평 넓이의 훈련실에 빛무리가 어린다.
현재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초고밀도의 마력이 검의 형태를 이룬다.
하나나 둘이 아니다. 수백 수천 개의 검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기세로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젓자 무수한 검이 하나의 검으로 합쳐졌다.
슈아아아…….
찬란하게 빛나는 검.
그것이야말로 소드 퀸 샬럿 테이트의 본령이다.
트리거를 위해 희생시킨 제물, 처단한 몬스터와 범죄자들, 그녀가 살아온 인생 전부를 단 한 자루의 검으로 승화시킨 초능(超能).
샬럿 테이트는 다시 진유리를 생각했다.
두 개의 트리거를 가졌는데도,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며 성장하고 있는 아이.
혼잣말처럼 질문이 나왔다.
“둘이…… 하나보다 강할 수도 있을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네 주위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잖아.”
아르노 뒤레가 즉답한 말을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오후 열한 시 무렵.
치킨이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는 상당히 난처한 심경이었다.
“저기…… 세아야. 이거 먹어.”
내 대각선 맞은편, 흘끗흘끗 눈치를 보던 진유리가 닭다리를 세아의 접시로 건넸다. 세아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콜라만 연거푸 들이켰고,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나로선 의아하기만 했다.
애들 맛있는 거 먹이려고 데려온 건데 진유리는 세아 눈치를 보느라 잘 먹지도 않는다. 세아는 식욕이 없는지 콜라랑 치킨 무만 먹는 중이고.
그때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거의 다 왔다는 메시지였고, 어떻게 자리를 나설까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세아가 물었다.
“담배 안 피워도 돼?”
“응?”
“그냥, 오늘 피우는 거 못 봐서.”
이거 나한테 자리 좀 비켜달라는 말인 것 같은데.
나야 잘된 일이라 진유리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유리야, 미안한데 선생님 잠깐만 나갔다 와도 되려나?”
“아…… 그으, 네. 세아랑…… 먹고 있을게요.”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가게 바깥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담배를 피우기 좋은 외진 곳.
다행히 인적이 없었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죄송한데 라이터 좀 빌려줄래요?”
나보다 서너 살 연상일까.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키는 170cm 정도에 얼굴 생김새와 체형, 복장까지 모두 성숙한 성인 여성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외견이지만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연희겠지.
“이번엔 그 모습이에요?”
“네? 라이터 빌려달라는데 무슨 말이세요?”
“어?”
아닌가? 혹시 착각한 거라면…….
하지만 그때.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여자가 놀리듯이 내게 말했다.
“잘 속네?”
“그러면 그렇지…….”
내게 라이터를 넘겨받은 서연희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물었다.
“그래서, 왜 갑자기 부른 거야?”
“빨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곧장 본론을 일렀다.
“어제 말씀드렸던 일, 균열이 맞을 거예요.”
<킬 더 이블> 2권의 클라이맥스 사건.
그리고 한 가지 더 짐작하고 있는 바를 말했다.
“발생할 위치까지도 알아낸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