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Chapter 21. 파르투스 (1)
그러자 서연희가 묻는다.
“어딘데? 추측한 근거도 말해주면 좋겠고.”
“일단 위치부터 알려드릴게요.”
이어서 나는 세 개의 장소를 일렀다.
모두 서울이고, 각기 다른 구에 있는 지역.
오늘 아르노 뒤레와 함께 답사한 다섯 곳 중 세 곳이었다.
“이렇게 세 군데예요.”
“…….”
서연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균열의 발생지역이라더니 왜 세 곳이나 언급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선 단출하게 감상을 표했다.
“거의…… 정삼각형이네?”
“네.”
내가 답사 도중 깨달은 사실을 그녀도 듣자마자 알아낸 듯싶었다.
오늘 방문한 다섯 지역 중에 검은 심장이 반응한 곳은 도합 셋이다.
한강 위쪽의 A 지역.
한강 아래의 B 지역과 C 지역.
그리고…….
A와 B 사이의 거리.
B와 C 사이의 거리.
A와 C 사이의 거리.
그 셋은 완벽히 일치하는 정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중심부에 한강이 있어요. 거기가 균열의 핵심일 거고-”
“전체 범위는 정삼각형 바깥의 원?”
“아마도요. 대비해주실 수 있겠어요?”
내 예측대로라면 균열의 지름은 킬로미터 단위를 넘긴다. 한강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긴 하나 그래도 범위가 너무 넓다.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대피소를 만들고, 워프 게이트를 열고, 그런 방법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서연희가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것이었다.
“최대한 타이트하게 잡아서…… 발생 삼십 분 전까지 말해주면 해볼 수 있어. 적당히 구실 대서 헌터들 부르고, 몰래 마력 파동 일으키면 일반인들은 다 빠질 거잖아. 외곽이야 균열이 열린 다음에도 대피할 수 있으니까.”
“누나…….”
“응, 왜?”
생긋 웃으며 서연희가 물은 말에 나는 진심을 담아서 답했다.
“그냥, 멋있어서요.”
“이럴 때만?”
“평소에 생각하던 걸 이럴 때 표현하는 거예요.”
장난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는 진심이었다.
역시 지능 수치 9점대. 소질 포인트 써서 억지로 올린 나보다 훨씬 나았다.
“삼십 분 전까지 말해주면 되는 거죠? 그 정도는 될 것 같아요.”
<킬 더 이블> 2권의 진행률 추이에 신경을 기울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해야 할 이야기는 얼추 정리된 듯싶었고, 이제 서연희가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묻는다.
“근데 저보다 어리시죠?”
“……?”
갑자기 무슨 말인가 의아했으나 한쪽 눈을 찡긋하는 서연희를 보고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담배 피우다 우연히 만나서 몇 마디 나눈 사이라는 거지.
마침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게 보이고, 비밀 유지 겸 원하는 대로 상황극을 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답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그쪽이 몇 살이신데요?”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전 스물아홉이요.”
“……스물아홉?”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서연희를 나는 뻔뻔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뭐 어때서. 처음 보는 여자가 ‘딱 봐도 나보다 어리겠네’라는 느낌으로 나이 묻는데 실제보다 몇 살 높게 부를 수도 있는 거지.
“네, 스물아홉이요. 그쪽은요?”
“저도…… 그쯤 돼요.”
한데 그때.
자기들끼리 담배를 피우러 온 남녀 몇 명의 말수가 확 줄더니 이내 흥미로워하는 눈길이 우리를 향한다.
그리고 서연희가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여자친구 있어요?”
“아뇨.”
“만날 생각은 있고요?”
“당분간은 없어요. 좀 바빠서.”
“무슨 일 하시는데요?”
“애들 가르쳐요.”
“선생님?”
“그 비슷한 거요. 그쪽은 무슨 일 하시는데요?”
“어떨 거 같아요?”
“글쎄요? 돈 많은 백수?”
“칭찬이에요?”
피식 웃은 서연희가 다 태운 담배를 버리고는 내 왼손, 정확히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내려다본다. 이어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산뜻한 목소리로 묻는다.
“좀 뜬금없긴 한데…… 번호 받아갈래요?”
“저 누구 만날 생각 없는데.”
“누가 만나래요? 번호 찍어줄 테니까 연락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서 비치는 흥미가 극에 치달았고, 아무래도 여기서 매몰차게 거절해버리면 서연희가 꽤 토라질 듯해 나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열한 자리 번호를 입력한 서연희가 내게 일렀다.
“전화도 안 걸었으니까 내키면 그쪽이 연락해요.”
그러고선 무척 태가 나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난다. 번호까지 준 걸 보면 앞으론 저 모습을 유지하려나 싶은데.
일단 저장을 해두고 아까 나왔던 가게 쪽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수군대는 말이 들려왔다.
“진짜 신기하네. 저렇게 생기면 담배 피우다가도 번호 받나?”
“저 언니 티는 안 내도 은근 창피해하는 거 같더라.”
아마 서연희 본인은 부정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되뇌며 나는 가게 앞에 다다랐고, 그대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는데…….
“응?”
저만치 안쪽의 테이블. 세아와 진유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한편 가게 내부에서는 벌써 일 분째 말없이 눈싸움에 가까운 시선 교환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쿠욱!
상당히 날카롭게 들리는 소리.
이세아가 포크로 치킨 무를 세게 찍는 소리였다.
“…….”
그 행동에 흠칫한 진유리가 이세아를 쳐다봤고, 치킨 무를 베어 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이어서 콜라까지 한 모금 마신 이세아가 일렀다.
“할 말 있으면 해.”
“그으, 그러니까…….”
기실 어떤 말이 오갈지는 두 사람 다 알고 있다.
이세아는 먼저 언급하기 싫고, 진유리는 자기 쪽에서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침묵하고 있을 뿐.
그러나 곧 이도진이 돌아올 테니 더 지체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진유리가 마침내 서두를 뗐다.
“아까 대련 있잖아……. 우리 내기한 거…….”
“응.”
조별실습에 관련한 사안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 대련에 들어가기 직전에 나눈 이야기에 관한 것일 터였다.
이세아가 이기면 진유리는 이 자리에 끼지 않고 집에 돌아가기로. 진유리가 이기면 그녀가 원하는 부탁을 이세아가 들어주기로.
비록 승리했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기에 여전히 이세아의 눈치를 살피며 진유리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해봤는데…… 교수님한테 내가 말씀드리는 건 좀 그렇고…… 그래서 세아 네가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어떤 식으로?”
“아, 무슨 말이냐면-”
눈에 띄게 화색이 돈 진유리가 부연했고, 우선은 잠자코 들으며 이세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잔머리…….’
들어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진유리 자신은 아무런 리스크도 없고, 오로지 이세아 자신의 도움에만 의존해 원하는 걸 홀라당 가져가겠다는 앙큼한 생각.
이세아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진유리는 머뭇거리면서도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이겼으니까…….”
“네가 이긴 거 맞아.”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던 이세아가 즉답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자신이 더 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승리한 건 진유리고, 이세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며 패인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얘가 더 치열했어.’
자신도 자만한 건 아니지만 전력의 차이를 넘어설 정도로 진유리가 간절했다.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였든 라이벌에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든.
물론 승패를 인정하는 것과 원치 않는 도움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제공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고.
“네가 직접 말하면 되잖아.”
“교수님이 이상하게 보실 것 같아서…… 이기면 내 말대로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게 너 시키는 대로 다 해줘야 한다는 뜻이었어?”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
이세아는 잠시 고민했다.
진유리의 말대로 해주기 싫은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애써 이긴 사람한테 치사하고 냉담한 답만 들려주는 것도 그리 내키지는 않아서.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가도…… 얘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오빠만 보면 기겁하던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으나 아직도 당황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요즘은 이세아 자신에게도 몹시 쩔쩔매고 있으니 셋이 가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기는 힘들겠지. 애초에 이도진이 그런 생각을 할 리도 없고.
해서 이세아는 짧게 답했다.
“알았어.”
“진짜? 진짜지?”
“대신 되고 나서 말해줄 테니까 그때까지 물어보지 마.”
“응! 나 이번 달 주말 약속도 없고 너랑 훈련하러만 가니까 당일 아침까지만 말해주면 돼!”
“아버지 생신이 언제신데?”
“28일 금요일!”
“그러면…… 그 전주 주말로 생각하면 될 거야.”
“응, 응! 고마워, 세아야!”
“…….”
이세아는 진유리가 이렇게 환한 웃음을 짓는 걸 제일중 입학 이후로 사 년 만에 처음 봤다.
그렇게나 오빠가 좋은 걸까. 당장 떠오르는 나쁜 점을 열 가지도 넘게 말해줄 수 있는데.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진유리가 모르는 이도진의 장점도 최소한 그만큼은 될 테니 결국 원점일지도 모르겠다.
“휴우…….”
한숨을 내쉰 이세아는 여태 먹던 치킨 무가 아닌 치킨으로 포크를 뻗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결정이 되고 나니 식욕이 돌아오는 느낌. 진유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접시를 밀어줬다.
“너 많이 먹어. 더 시킬까?”
“……오빠가 사는 건데.”
“아…… 이거 내가 사면 안 될까?”
“…….”
이세아는 굳이 ‘잘도 오빠가 네 돈 쓰게 하겠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진유리가 알고 보니 맹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만 했다.
친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 원래도 이런 면이 있는 애였을까. 아니면 품고 있는 감정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걸까.
전자든 후자든 보기 싫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저 후자라면 심술이 좀 나는 정도.
이세아가 자각하는 자신의 마음은 그랬고, 그즈음 이도진이 돌아왔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사이좋게 하고 있었어?”
“별 얘기 안 했어.”
새침하게 둘러댄 이세아가 공격적으로 포크를 뻗어냈다.
닭 한 마리는 고등학생 두 명과 성인 한 명이 먹기엔 너무 적은 양이었고, 이도진이 메뉴판을 펼치는 걸 보곤 진유리가 이른다.
“저기, 교수님.”
“왜?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러니까, 다리랑 날개만 된 거로, 제가 골랐으니까 제가 사도 되는데…….”
이후로 이세아가 생각하기엔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도진이 웃음기를 담아 ‘설마 너한테 돈 내라고 하겠냐’라고 물었고, 진유리가 얼굴이 새빨개져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이세아는 진유리가 메뉴를 고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이세아 자신이 잘 먹는 것 같으니 말해준 거겠지.
앙큼한 속셈이 있는 호의였지만…… 그리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
5월 15일과 16일의 주말.
세아는 토·일요일 연속으로 샬럿 테이트에게 훈련을 받으러 갔다.
스승의 날 선물도 줬다고 하고,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와선 넌지시 자랑하듯 말했다.
토요일은 확실히 승리. 일요일은 판정승이라나 뭐라나.
5월 17일 월요일.
서연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준비는 하고 있어. 안 들키도록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고마워요.”
<근데…… 번호 받아가 놓고 왜 연락을 안 해?>
“제가 받은 거예요?”
<어머, 너도 거부 안 했잖아?>
이 부분은 잠시 유예를 두기로 했다. 일전에 세아에게 목격당해서 난리가 난 것도 있고, 6월까지 상황을 지켜보자고.
5월 18일과 19일, 화·수요일.
이 이틀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학교에서 수업하고, 아르노 뒤레와 서상욱 교수를 불러서 연구를 진행하고.
배신자를 찾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단서는 얻지 못했다.
5월 20일 목요일, 조별실습 발표날.
세아와 진유리의 1조부터 유해빈의 5조까지 결과물을 선보였다.
1조에 대한 내 평가는 전체적인 짜임새 부분에선 10점 만점에 8.5점, 실질적인 결과물은 10점 만점에 7점.
제일 잘한 조는 유해빈이 조장인 5조였다.
짜임새는 9점에 실질적인 결과물도 8점 이상.
“이상으로…… 5조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각 조원들의 역할 분담은…… ppt에 적은 대로 진행했습니다…….”
1. 자료조사: 배건우, 백지윤, 신하은, 유해빈
2. ppt 제작: 김상훈, 유해빈, 황지안
3. 발표: 유해빈
4. 보고서 작성: 유해빈, 최지민
5. 구성체 형성: 7인 전원
나는 냉철하게 평가했다.
유해빈은 가점이고, 너네는 감점이야.
그리고 오늘, 5월 21일 금요일.
수업을 마친 세아와 함께 귀가하던 도중에 뜻밖의 부탁을 받았다.
“일요일에 시간 돼?”
“응?”
내가 되묻자 세아가 조용히 일렀다.
일요일은 오전만 훈련하고 오후엔 진유리와 약속이 있다고.
“걔 아버지가 좀 있다가 생신이시라는데…… 선물 고르는 거 내가 같이 가주기로 했거든.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가서 밥 먹고, 선물 고르는 거 도와줄 수 있나 해서. 영화 볼 수도 있어서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바쁜 일 있으면 안 가도 상관없어.”
“일요일은 괜찮지.”
“진짜…… 괜찮아?”
“응, 근데 내가 가면 유리가 부담스럽지 않으려나?”
“……그러게. 근데, 내가, 오빠 같이 가서 고르는 거 도와주는 거는 어떠냐니까…… 걔는 괜찮댔어.”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 유리한테 말해주고.”
“……알겠어.”
되게 작은 목소리로 답한 세아가 고개를 돌려 유리창 바깥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차를 몰아나가며 나는 내심으로 가늠했다.
<킬 더 이블> 2권의 현재 진행률 퍼센트는 칠십 대 중후반. 화수로 환산하면 남은 건 6화 정도다.
그러면 슬슬 때가 됐으려나.
집에 돌아와 할 일을 마친 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제대로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상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용용아, 너 주말에 일 좀 해줘야겠다.”
<용용이요……? 그거 저 부르는 거죠?>
“왜, 별로야?”
<아뇨, 어감은 귀엽긴 한데…….>
수화기 너머의 상대, 유해빈이 어쩐지 석연치 않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
균열 너머의 세상.
옥좌에 앉은 파르투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눈앞에 일렁이는, 칠흑처럼 새까만 구체.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때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