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Chapter 21. 파르투스 (2)
곧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연결하는 공간, 인간들이 균열이라 일컫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그 규모는 또한 인간들의 기준으로 S급. 마왕 파르투스의 강림을 감당하기엔 좁고 갑갑한 통로일 뿐이다.
[이 힘이 없었다면 그러했겠지.]
부복한 채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부하들을 내려다보며 그가 중얼거린 말.
자그마치 십 년이 걸렸다.
대균열의 발생 이후, 그 현상에서 도출한 정보를 분석해 이렇듯 사용 가능한 힘으로 구체화하는 데.
신이 존재했던 과거엔 미치지 못하나 그나마 균열을 자의적으로 다루고 그 범위를 확장해내는 데.
가장 오래 산 마왕 파르투스가 휘하의 세력과 자원을 총동원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그 땅에 숨 쉬고 있는 쓰레기들의 숫자가 몇이라 했더냐.]
파르투스의 물음에 수하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나서며 보고했다.
이십여 년 전까지 악마와 맞섰던 벌레 중 마왕들조차 그럭저럭 쓸 만하다 평했던 자들. 균열이 열릴 도시에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자들의 수는 총 일곱이었다.
‘천리안’ 심정웅.
‘무신’ 한태강.
‘곡예사’ 윤의성.
‘안개의 마녀’ 서연희.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
‘몽상가’ 아르노 뒤레.
‘소드 퀸’ 샬럿 테이트.
심지어 파르투스의 기억 속에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이름들.
그가 담담한 어조로 일렀다.
[일곱이라면…… 내 감당하기 버거움이 있도다.]
하나나 둘은 별반 대수롭지 않다. 셋이라도 능히 목숨을 거두어낼 수 있다.
하지만 넷부터는 우세를 점하기 힘들 테고, 다섯이라면 파르투스라 해도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여섯이나 일곱은 말할 것도 없겠지. 정면대결로 상대한다면 무조건 필패다.
하지만…….
[그렇다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불러들이면 될 일이겠지.]
이천 년을 살아온 마왕 파르투스는, 결코 그것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았다.
그가 개별적인 존재를 구분하는 네 가지 방식에 의하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능력이 없고 생각도 없는 자는 단순한 쓰레기다.
능력 없이 생각만 많은 자는 곁에 두어선 안 될 버러지다.
능력이 있으나 생각이 부족한 자는 적당히 부리다 팽하기 좋은 소모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능력이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확실히 알며, 목표에 도달할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하는 자.
파르투스는 그런 자들을 총애했고, 이 드넓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서도 그 자신이 그러한 부류의 으뜸이었다.
능력 있는 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담대함이다.
능력 있는 자가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신중함이다.
파르투스는 그리 살아왔고, 이번에도 그러한 원칙을 지키려 한다.
신중하고, 담대하게.
[넷부터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라.]
균열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삼각형을 이루는 세 장소.
꼭 그만큼의 침입자만 내부로 들일 작정이었다.
설령 일곱 모두가 몰려온다 해도 전원이 개입하도록 놔두진 않을 것이다.
소멸한 신의 파편을 찾아내고, 파르투스 자신이 그것에 담긴 권능을 흡수하기 전까지는.
[머지않았음이야…….]
드물게도 격정이 담긴 목소리로 파르투스가 되뇌었다.
실로 긴 세월이고, 앞으로 한 걸음이면 족하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마왕은…… 이제 마신(魔神)이 된다.
***
5월 23일, 일요일 오후.
집에서 얼마간 떨어진 번화가로 향하며 유해빈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용용이 소녀♪ 빰빠밤! 용용이 소녀♪ 빰빠밤!”
“용용이 학교 갈 때 뽀뽀뽀~ 도진이 퇴근해서 뽀뽀뽀~ 세아는 까까 먹다 뽀뽀뽀~”
“토실토실 아기 해빈이~ 밥 달라고 용용용~ 남편 도진 오냐오냐~ 알았다고……♪ 음…… 으음…….”
의식의 흐름대로 노랫말을 이어나가던 유해빈이 침음했다.
‘그러고 보니까 인간은 무슨 소리로 표현하지?’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고, 이내 유해빈은 제법 비판적인 시각을 이어나갔다.
‘이게 잘 생각해 보면 은근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지…….’
돼지는 꿀꿀, 고양이는 야옹야옹, 강아지는 멍멍.
그렇게 규정하면서 자기들 종족은 그런 게 없다. 응애응애를 비롯해 몇 가지 있긴 하나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의성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서 상기한, 금요일 저녁에 이도진과 나눈 대화.
<용용이요……? 그거 저 부르는 거죠?>
<왜, 별로야?>
<아뇨, 어감은 귀엽긴 한데…… 근데 저희 그런 소리 안 낸단 말이에요.>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와…… 알면서도 그렇게 불렀단 말이네요? 이거 이거, 이도진 씨 알고 보니까 종족 차별주의자셨네. 으흠, 으흐음! 실망이 상당히 큽니다.>
<그으,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이제부턴 조심해서->
<아니 뭐, 그렇다고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요.>
은근한 어조로 유해빈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 그녀가 의도한 흐름 그대로였고, 이어질 대화의 흐름을 그려나가며 유해빈은 본심을 일렀다.
<저한테만 쓰시면 저는 상관없죠. 나중에 저희 일이 잘 풀려서 교수님이 제 가족이나 다른 용 만나게 돼도, 저한테만 용용이라고 부르면 그건 제가 허락한 거니까 애칭의 범주에 들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이름 부르는 게->
<아니이…… 잘 들으세요, 이도진 씨. 저는 괜찮다니까요? 딱 저한테만 쓰면 된다고요. 오케이? 언더스탠?>
<어…… 그래. 알겠다.>
여기까지도 순조로웠고, 유해빈은 끝으로 염두에 두고 있던 복수 겸 어필을 실행하기로 했다.
<자, 그러면 교수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따라서 해보세요.>
<……뭘?>
이어질 상황을 예감한 것인지 이도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으나 유해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히 일렀다.
<‘나 이도진은.’>
<해빈아……. 그냥 용용이라고 안 부르고 말지->
<어? 안 해요? 차별주의자 ON?>
<후우…… 나 이도진은.>
<‘용용이라는 표현에 어떠한 차별의 의미를 담지 않았고.’>
<용용이…… 라는 표현에…… 어떠한 차별의 의미를 담지 않았고…….>
<‘오직 유해빈에게만 신뢰와 애정을 담아 부르는 애칭이라는 것을 엄숙하고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직 유해빈…… 아니, 야, 너 솔직히 사실 기분 별로 안 나쁜데 복수하고 싶어서->
<어허, 처음부터 다시 할래요?>
<하…… 오직 유해빈에게만…… 신뢰와 애정을 담아->
<히히.>
<……너 왜 웃냐? 웃겨?>
<아뇨,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려고 해서. 그리고 제가 이게 웃기겠어요? 네? 괜히 뜸 들이지 마시고 빨리 계속 말씀하세요.>
<……부르는 애칭이라는 것을, 엄숙하고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짝짝짝.
유해빈이 흡족하단 의미로 손뼉을 쳤고, 자기가 강요했던 것과 같은 선언을 강요당한 이도진이 빠르게 지시사항을 일렀다.
<일요일 오후, 장소는 결정되면 따로 알려줄 테니까 그쪽으로 오면 돼. 전에 말했던 부탁, 세아랑 유리 챙겨달라는 그 건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들어가라.>
<용용!>
<………….>
<아, 교수님도 오늘 푹 쉬시고 좋은 꿈 꾸시라는 뜻이에요.>
<야, 너 진짜 하나도 기분 안 나빴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이도진이 거센 추궁을 쏟아내기 직전에 유해빈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전달받은 건 어제, 토요일 저녁 늦은 시각.
그에 맞춰 이렇게 외출한 그녀는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기억을 떠올리며 휴대전화를 켰다.
배경화면으로 날개 달린 귀여운 용 인형이 보인다.
그저께 전화를 끊자마자 ‘용용이’라고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온 인형 중에 가장 귀여운 걸 골라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둔 것이다.
‘난 이렇게까지 작진 않은데.’
물론 용의 본신에는 정해진 크기가 없다. 신체가 큰 것은 큰 것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작은 게 장점인 상황도 있으니까.
해서 굳이 조정하려면 저런 인형 같은 크기로 변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체구는 강아지로 치면 골든 리트리버 정도였다.
‘뭐, 그 정도면 한집에서 사는 건 지장 없겠지?’
침대만 좀 크면 같이 누워서 잘 수도 있으리라.
정말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게 된다면…….
‘먼저 키우는 동물처럼 부른 건 그쪽이니까. 책임감이 있으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것저것 다 해주겠지.’
균열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여섯 마왕.
대균열을 열어 작금의 사태를 초래한 과거의 영웅들.
그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나면…… 그러고 나서 있을 미래엔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동화의 상투적인 맺음말. Happily Ever After.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처럼.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강하게 원하는 마음.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가능성이 현재로선 크지 않다는 판단.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는 가운데 유해빈은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슬슬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고, 저 멀리 높게 세워진 쇼핑센터가 보였다.
이도진과 이세아, 그리고 진유리. 세 사람이 자리해 있을 건물이었다.
***
“어?”
문득 몇 미터 밖에서 들려온 소리. 쇼핑센터 안을 걸으며 어떤 선물이 좋을지를 의논하고 있던 나와 세아, 진유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셋이 왜 같이 있어요?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유해빈이 내게 인사했고, 세아가 눈가를 살짝 좁히며 물었다.
“너는?”
“나? 옷 좀 사러 왔는데. 아니, 근데 이거 무슨 조합이야? 교수님이랑 이세아 너는 같이 놀러 나온 거라고 치고…… 유리멘탈 너는?”
“몰라도 돼.”
진유리가 쌀쌀맞게 답했다. 아까까지 발그레하던 안색은 그대로였으나 눈으로 유해빈에게 욕을 하는 것만 같았다. 끼어들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라는 식으로.
이대로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듯해 내가 유해빈에게 설명했다.
“선물 고를 일이 좀 있어서. 아, 학교 밖인데 반말 써도 되려나?”
“얘랑 오빠랑 학교에서 안 거잖아.”
세아가 찌르듯이 반대 의사를 표했으나 유해빈이 선선한 태도로 받아넘겼다.
“에이, 학교 밖인데 뭘 그러냐? 여기 보니까 우리 학교 애들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누구 선물 사시는 건데요? 저 혼자 다니기 심심했는데 같이 다니면서 골라드려도 돼요?”
“……우리 아빠 생신이니까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더욱 싸늘해진 말투로 답한 진유리가 세아 쪽을 바라본다.
나한테 동의를 구하긴 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세아에게 지원을 요청한 거겠지. 한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치던 세아가 이윽고 말했다.
“봐줄 사람 한 명 더 있으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 그래……?”
“그치? 유리멘탈 너 깜짝 놀라지 마라. 내가 보는 눈이 좀 있어서, 제대로 도와줄게.”
“그러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리 네가 결정하는 게 맞지. 근데 수학여행 때 보니까 해빈이 안목이 괜찮긴 하더라.”
“봐, 3대 1이잖아. 고마워할 필요까진 없는데, 거부는 하지 마라.”
“……그러든지.”
마땅치 않아 하는 듯하면서도 진유리가 수긍함에 따라 우리 일행은 넷으로 늘었고, 나는 홀로그램을 살폈다.
+
<킬 더 이블> 2권, ‘영웅의 제자들’이 진행 중입니다.
-2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성장]
-진행률: 78.6%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2권 종료 시점, 36 영웅을 한 명 이상 살해하면서도 테러조직 팬텀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것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유지)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유해빈이 말을 걸어온 시점부터 진행률의 상승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 봐도 되겠지.
<킬 더 이블> 2권의 메인 사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자리를 뜬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작게 손을 휘둘렀다.
내게서 흘러나온 마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날아갔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마력으로 구성된 문장들이 내 시야에 일렁였다.
<이쪽은 준비 끝났어. 조심하고.>
서연희가 보낸 대답.
그걸 염두에 두며 나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가늠했다.
여러 가지고, 어려운 일들이고, 복잡하다.
배신자와 관련한 사안을 명확히 밝혀내야 한다.
그놈을 비밀리에 살해해야 한다.
서울을 침공해올 균열 너머의 악마들을 막아내야 한다.
검은 심장의 파생 스킬을 한 가지 습득해서 완전한 형태로 발동해야 한다.
그 외에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놓치지 않고 얻어내야 한다.
“후우…….”
심호흡하며 갈무리한 긴장감.
그리고 이어서…….
위이이이잉-
이곳 쇼핑센터 전역에 걸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