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Chapter 21. 파르투스 (5)
36 영웅의 일인, ‘소드 퀸’ 샬럿 테이트.
살아남은 여섯 군주 가운데 으뜸, 가장 오래 산 마왕 파르투스.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할 수 있는 두 존재였으나 기실 그들은 같은 국면을 바라고 있었다.
‘조금은 여유를 두어야겠지.’
‘……시간을 끌어야 해.’
샬럿 테이트에겐 대치 상태를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르노 뒤레와 안드레이 일린, 그리고 이도진이 지금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균열을 분석해내고, 바깥과 연결되는 통로를 뚫을 때까지.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을, 서연희를 비롯한 영웅들이 참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파르투스의 의도는 샬럿 테이트와 달랐다.
그는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강림했고, 여유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또한 그 목적 때문이었다.
‘필시 이 근처에 있을 터인데…… 쉬이 짚이지는 않는구나.’
소멸한 신의 흔적. 혹은 그의 파편.
그것이 균열의 범위 내에 머무르고 있단 건 알겠으나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 힘이 스스로 생명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세부적인 조건은 가늠되지 않았고, 마기를 흩뿌려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직접 찾아 나선다면 숨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마기를 발산해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도록 맞서 싸울 자가 있어야 했다. 샬럿 테이트는 그것을 실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패였고.
적당히 강해서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여겨지지는 않을 강자이면서, 그와 동시에 파르투스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자였다.
‘셋이 힘을 합치지 않은 것은 저들 나름대로 속내가 있는 듯하나 그것은 개의치 않아도 될 터.’
아마 균열에 뭔가를 하려는 거겠지만 신경 쓸 일까진 아니다. 제아무리 궁리해본들 인간의 마학자 몇 명 따위가 단시간에 파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까.
그보다는 자신이 신의 파편을 찾아내는 게 더 빠를 터.
그리고 이 지점이 마왕 파르투스와 영웅 샬럿 테이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쓰러뜨려야 할, 침공해온 적과 싸우고 있음에도 시간을 끄는 것을 최선의 결과로 두는 샬럿 테이트.
원한다면 언제든지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국면을 고착화하려는 파르투스.
그들의 전력 차는 첫 공방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콰아아아앙-!
검은 마기와 새하얀 마력이 충돌해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스으으으…….
회색빛이 점차 검게 물들어 가고 있다. 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샬럿 테이트의 마력보다 파르투스의 마기가 유의미하게 강하기에 발생한 현상.
일순간 눈살을 찌푸린 샬럿 테이트가 다시 손을 휘둘렀다.
파아아아! 콰아앙!
그녀 쪽으로 밀려오던, 검은색에 가까워진 빛무리가 재차 쏘아낸 마력과 맞닿았다.
퍼어어어엉!
힘과 힘의 격돌을 버티지 못한 빛무리가 마침내 폭발했다.
‘두 번이면 내가 조금 우세한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가늠한 샬럿 테이트가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가 힘껏 펼쳤다.
위유웅-
외부로 발출한 마력 가운데 아직 그녀의 통제하에 있는 힘이 또 한 번 자그마한 검의 형태를 이루며 십수 개로 나뉘었다.
피슝! 슈아아아-!
커허억! 그아아악!
여러 자루의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그 검들에 목과 심장, 머리가 관통당한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비명.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여유롭게 서 있는 파르투스를 노려보며 샬럿 테이트가 손을 떨쳤다.
위잉, 위유우웅-
마왕과 그녀의 주위, 상하와 전후좌우 전방위로 각양각색의 마법진이 일렁인다.
콰앙!
마력으로 구성한 지지대를 박차고 허공을 날아간 샬럿 테이트는 순식간에 파르투스의 위편에 자리했다.
“Shot!”
쿠아아아앙!
위쪽의 마법진 열 곳에서 마탄이 쏟아져 나오며 파르투스를 노렸다. 그와 동시에 이번엔 아래의 마법진이 가동됐다.
화아아아-!
새파란 불길로 화한 마력 구성체들이 위쪽으로 치고 올라가며 파르투스의 퇴로를 막았다. 이어진 폭발.
퍼어어엉!
마탄과 불길이 합쳐지며 극히 미세한 먼지까지도 송두리째 태워갔다.
그러고도 아직 끝이 아니었고, 샬럿 테이트는 마지막으로 크게 펼쳤던 양팔을 정면으로 모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위이이잉-
파르투스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마법진 모두가 검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날아가며 마왕을 노렸고…….
[실로 하찮은 힘이로다.]
나직한 말과 함께 그 모든 공격이 없던 것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마탄, 불길, 검격.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각성자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파르투스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한 듯했다.
경멸 어린 눈길로 영웅을 올려다보던 마왕이 대수롭잖게 손을 위쪽으로 뻗었다.
투아아앙!
그의 손에서 발출된 아주 자그마한 마기. 그것이 샬럿 테이트에게 향하며 급격히 크기를 키워갔다.
일 미터, 오 미터, 십 미터. 어느덧 몇 층짜리 건물에 가깝게 팽창한 마기를 눈앞에 둔 샬럿 테이트가 바삐 허공을 박찼다.
콰앙! 피유우우웅-!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그녀를 검은 마기가 쫓았다. 좌우로 방향을 바꿔가며 공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마기 역시 그녀가 가는 쪽을 향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단순히 피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달은 샬럿 테이트가 힘을 모았다.
투웅!
양손을 모아 마기를 받아내자 그녀의 몸이 위로 크게 밀려났다.
채 일 초도 되지 못하는 여유. 샬럿 테이트는 두 주먹에 급히 마력을 모아 마기를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앙-!
수백 미터 상공에 마치 불꽃놀이처럼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일었다.
반동이 만만치 않아 샬럿 테이트가 이를 악문 그때, 파르투스는 이미 그녀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
차갑게 전한 말에 이어 마왕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내리친 주먹이 샬럿 테이트의 방어를 무산시키며 그녀를 지상으로 튕겨 냈다.
파아아앙!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물결치고 있던 강물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곳에 처박힌 샬럿 테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파르투스는 조용히 아래를 응시하며 기다렸다.
키에엑!
그륵, 그르륵.
지금도 균열을 통해 몬스터 무리가 이 세상으로 닥쳐오고 있다.
기존의 S급 균열처럼 대단위 군단까지 동원할 순 없지만 백여 마리 정도 데려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군주의 명에 따라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향했고, 헌터들이 나서며 그들과 맞서 싸운다.
그러는 와중에도 샬럿 테이트는 여전히 물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
[이게 전부는 아닐 터인데.]
파르투스가 말을 건네듯 읊조렸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지금 그와 대적하고 있는 여자의 진정한 힘은 이따위 잔재주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지배적인, 마력의 본질에까지 간섭하는 능력.
비록 미약하나마 그러한 힘을 다루는 자였는데.
‘설마 겁을 먹은 것인가.’
그건 파르투스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숨으려 하는 것이라면 강제로라도 싸우게 해야겠지.
결론을 내린 그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샬럿 테이트를 억지로라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고 바로 그때.
쿠구구궁-
넓은 한강의 물결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이 일렁이던 물결이 한 곳으로 모인다.
수천수만 톤의 강물이 모이고, 합쳐지면서 믿기 힘든 기현상을 이루어냈다.
가뭄에 말라버린 것처럼 바닥을 보이는 강의 중심부에 검 한 자루가 푸른빛을 내고 있다.
물과 마력이 하나로 화한 검.
그것을 손에 쥔 샬럿 테이트가 나직이 선언한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흙, 공기, 수분 등 마력을 머금고 있는 모든 것이 그녀의 지배하에 놓인다.
자신의 마력을 넘어 자연과 물리법칙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초능.
그것이야말로 면역체 보유자, 소드 퀸 샬럿 테이트가 지닌 진정한 힘이었다.
자신을 감싼 공기가 적대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음을 감지하며 파르투스는 싱긋 웃었다.
[훌륭하다. 이십 년 전보다 월등히 낫노라. 네게 백 년이 더 주어진다면 나와 비등한 경지에 올라설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인간의 짧은 수명이 나조차도 못내 아쉽구나.]
“백 년? 웃기는 소리.”
터엉.
손에 쥔 차가운 검의 감촉을 선명히 느끼며 샬럿 테이트가 말을 이었다.
“삼십 분이면 충분해.”
가장 오래 산 마왕.
역사상 최강의 면역체 보유자.
그들이 마침내 진정한 싸움을 맞이했다.
***
“최대한 서둘러야 해. 어서 가자고.”
아르노 뒤레가 재촉하듯 말했다. 저 멀리 공중에서는 샬럿 테이트와 파르투스가 격전을 벌이는 중이고, 균열을 타고 나타난 몬스터들은 헌터들이 맞서 싸우고 있다.
균열 외곽으로 향하기에 앞서 나는 마지막으로 세아에게 일렀다.
“오빠 다녀올게. 위험하니까 안에 들어가 있어.”
샬럿 테이트는 자기가 싸우는 걸 보라고 했지만 그딴 거야 내가 알게 뭔가. 그러자 세아가 다른 말은 않고 짧게만 답한다.
“나도…… 같이 가.”
“안 돼. 위험하기도 하고, 사람 많이 가서 좋을 거 없어. 정말로 금방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세아의 표정이 슬프게 흐려졌다. 따라나설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런데도 나만 보내는 걸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진유리의 표정도 무척 좋지 않았고, 유해빈만이 짐짓 쾌활한 말투를 꾸며서 내게 이른다.
“얘들은 제가 어디 안 가게 감시하고 있을게요. 교수님 힘내세요!”
“그래, 고맙다.”
그 정도가 허락된 여유의 전부.
나와 아르노 뒤레, 안드레이 일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대피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균열의 가장 외곽 지역.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현상을 분석해 바깥과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곳은 인적이 아예 없고 사방이 캄캄한 공터였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다. 몬스터들과 헌터들이 싸우며 내지르는 함성, 샬럿 테이트와 파르투스의 싸움에서 발생한 것이리라 짐작되는 충격음, 그런 소리들만 멀리서 들려온다.
아르노 뒤레가 손바닥을 정면으로 뻗었다.
투웅.
균열의 가장 외곽, 검은 벽에 가로막혀 손이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가 굳은 결의를 담아 일렀다.
“시작하지.”
위이잉-
아르노 뒤레의 앞에 대단히 복잡한 구조의 마력 구성체가 나타났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비밀리에 연구해온 이론.
균열의 출현과 성질을 다루기 위한 구성체였다.
“진에게는 계산을 부탁하지. 앤디는 어려울 것 없어요. 힘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마력만 전해주면 됩니다. 그럼 다들 잘해보자고.”
그의 말에 이어 마력 구성체가 느리게 운동하며 서서히 빛을 내뿜는다. 흘러나온 빛이 균열 내부와 바깥을 구분하는 벽에 맞닿았고, 이내 아르노 뒤레가 내게 물었다.
“7번 회로, 계통, 속성, 힘의 조정.”
“반탄입니다. 지(地) 속성이고 마력은 지금의 열 배는 더 필요해요. 순도는 집적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높게.”
“으음…….”
낮게 침음한 안드레이 일린이 마력을 건넨다.
아르노 뒤레는 어려울 것 없다고 했으나 이런 고순도의 마력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바깥에 있는 영웅들도 아직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슈우우…….
마력 구성체가 조금 형태를 바꿨고, 아르노 뒤레가 연이어 내게 물었다.
어떤 회로에,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흘려야 할지.
엿보는 눈 특성과 나 자신의 감각, 통찰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나도 빠르게 답을 일렀고, 안드레이 일린이 그에 맞춰 계속해서 마력을 건넸다.
이윽고 생겨난 변화.
위이이잉-
둥글었던 마력 구성체가 삼각뿔 형태를 이루었다. 현재 우리를 가두고 있는 균열과 정확히 같은 모양.
아르노 뒤레가 기뻐하며 외쳤다.
“됐어! 이제 구조를 역산해서 중화할 수 있게만 만들면-”
한데 다음 순간.
“아…….”
후반부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할 아르노 뒤레가 갑자기 나직한 소리를 흘리며 뒤를 돌아본다.
옆에 있는 내가 아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자리한 사람은 안드레이 일린이었다.
“아르노,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진행하지.”
내 질문을 거부하듯 답한 그가 삼각뿔 모양의 구성체를 유심히 쳐다본다.
나는 드러나지 않게 기감을 끌어올려 뒤편을 살폈다.
안드레이 일린이 말없이 침묵하며 아르노 뒤레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