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Chapter 22. 이름 모를 악마 (2)
균열 전역에 흩뿌려둔 마기를 매개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필시 이 우주에서 가장 고등한 종족일 악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존재. 심지어 열네 군주조차 마신(魔神)이라 일컬으며 섬겼던 초월자.
비록 소멸하기 이전엔 턱없이 못 미치겠으나 그런데도 아득히 높은 순도인, 그가 이곳에 남긴 파편으로 추측되는 힘을 감지한 것이다.
‘곧 가겠나이다.’
파르투스는 격동하는 심정을 가다듬으며 그렇게 읊조렸다.
물론 가서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마신의 파편을 흡수해 그 자신의 힘으로 삼는 것.
숭배와 욕망은 양립할 수 있다.
그는 마신을 섬겼으나 또한 그자의 힘을 탐냈다.
균열 너머 세상에서 하지 못할 일이 드물 파르투스조차도, 안온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욕심을 죄악으로 여기는 그조차도 차마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권능이니까.
‘저 힘을 얻는다면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욕심이 아닌 안온일 것이니.’
그만큼이나 초월적인 힘이다.
조금 재능이 있고 운이 좋았다 한들, 어찌 인간들 따위가 소멸시킬 수 있었는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일 정도로.
해서 파르투스는 오래도록 지켜온 원칙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어기기로 했다. 단 한 번 탐욕을 드러내서 얻게 될 영광이 너무도 아득하니까.
[이만 놀이를 끝내야겠구나.]
“뭐?”
강물과 공기, 흙과 건물의 잔해까지 모든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파르투스와 맞서던 샬럿 테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오오오오오-
마왕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마기가 몇 배나 강해졌다.
자신을 적대시하던, 마력을 머금은 대기가 겁을 집어먹은 듯이 움츠러드는 것에 빙긋 웃은 파르투스가 일렀다.
[그만하면 애를 쓴 것이니라. 네 성장이 자못 기특하나 너와 나의 세상이 엄연히 다름을 깨닫거라.]
“개소리하지 마. 누구도 내게 그따위 말을 지껄일 자격은 없어.”
샬럿 테이트가 이를 악물며 되받았다.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저런 것이었다.
애초부터 정해져 있다고.
오르지 못할 곳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고.
면역체 보유자, 소드 퀸 샬럿 테이트는 그런 말을 지껄이는 자들을 하나하나 뛰어넘으며 성장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여태 헤쳐온 과거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만큼은…….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
슈우우우…….
둥글고 검은 막이 파르투스의 주위를 감싼 직후. 샬럿 테이트는 단번에 감지할 수 있었다.
‘옅어지고 있어.’
면역체를 활성화해 이 일대의 물과 대기를 조종하던 자신의 지배력이 약해져 간다. 특히나 파르투스가 구현해낸 에너지 막의 근처로 갈수록 더더욱.
어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도 그녀는 함께 깨달았다.
‘순도가…… 너무 높아.’
단순한 원리였다.
자연 마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면역체 보유자로서 그녀가 가진 능력. 그것보다 파르투스가 내뿜는 마기의 순도가 유의미하게 높은 것이다.
[짧은 수명에 지대한 가능성을 담아내려 정진한 아이야. 네 생은 아름다우나 실로 덧없는 것이었도다.]
선고하듯 이른 파르투스가 아래로, 그녀를 향해 급강하했다.
콰아아아아-!
마력으로 조종한 물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며 마왕의 접근을 가로막았으나…….
촤아악!
마기에 닿은 순간 다시금 미약한 물결이 되어 스러졌다.
타악.
강물이 사라진 공간에 파르투스가 발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이제 그와 샬럿 테이트 사이엔 그 무엇도 존재치 않았다.
“흐아아아압!”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기합성을 낸 영웅이 양손으로 쥔 마력의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거기에 새하얀 빛무리가 넘실거리며 스며든다.
마력 자가면역반응 구성체의 최대 개방.
휘황찬란한 빛의 검을 내리그을 준비를 끝마친 샬럿 테이트는 자신의 트리거를 되새겼다.
강해지고 싶다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리라고.
“후우…….”
그녀가 숨을 길게 내쉰 직후.
콰앙!
흙바닥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마왕이 달렸고, 샬럿 테이트는 온 힘을 다해 빛의 검을 내리쳤다.
퍼걱-!
움푹 들어가는 감촉.
그녀의 검을 맨손으로 부여잡은 파르투스의 오른손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스으으으…….
존재의 정수라 할 만한 마기가 타격을 받아 흩어지고 있음에도 마왕은 그것을 대수롭잖게 여겼다. 이제 수십 배의 힘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
[부족한 세월을 탓하거라.]
짧은 말을 건넨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쩌적, 쩌저적-
빛의 검에 금이 가며 당장이라도 깨어지려 한다.
그리고…….
파아앗!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침내 검이 부서졌다.
이어진 공격.
퍼억!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소모한 영웅은 대처할 수 없었다. 비명조차 내지 못하며 샬럿 테이트가 허공을 날았고, 파르투스가 재차 손을 움직였다.
쿠웅! 터어엉!
네 번의 공격. 칼날 같은 마기에 팔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어졌다. 사지를 잘라내지 않은 건 시체만은 온전히 남겨주려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자에 대한 마왕의 배려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 샬럿 테이트라는 존재를 살아있게 해주는 심장.
[죽어라.]
읊조리듯 전한 파르투스가 송곳처럼 구성한 검은 마기를 내던지려 하던 그때.
퍼엉!
별안간 날아든 마탄 두 개가 그의 등을 때렸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힘. 그러나 마왕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저 멀리 강의 가장자리와 이어진 땅.
그곳에 어린 인간 셋이 서 있었다.
그중 여아로 보이는 둘이 그를 공격한 듯싶었고, 파르투스는 쉬이 가늠되지 않는 의문을 품었다.
‘저것들은…… 무엇이지?’
우선 비교적 머리칼이 짧은, 성별이 불분명한 아이.
존재 파장이 흐릿했다. 내재해 있는 마력이 상당했고, 잘 감추고 있었을 그것을 드러내려 하고 있기에 알아챌 수 있는 사실.
정확히 알 순 없으나 저것이 본모습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리라.
그리고 두 번째.
여아 중에서 조금 더 키가 큰 아이.
파르투스는 그녀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 아이보다도 월등하구나.’
방금까지 감히 단신으로 자신과 대적했던 샬럿 테이트. 저 여아는 그녀와 같은 능력을 설익게나마 품고 있으며, 향후의 잠재력을 논하자면 아예 비할 바가 못 되게 위였다.
두 배, 혹은 세 배 이상.
재능에 걸맞은 삶을 살아간다면 십 년 안에 샬럿 테이트를 넘어서리라.
죽여 없애야 할 싹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체구가 작은 여아.
파르투스는 그녀를 눈여겨봤다.
‘너는…….’
문득 떠오르는 자들이 있었다.
마신을 소멸시키는 데 가장 공헌한, 인간의 영웅들을 이끌었던 남녀.
긴장에 굳은 표정이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여아의 모습에서, 파르투스는 저주해 마땅할 그들을 떠올렸다.
이시혁과 정세빈.
그들을 보며 느꼈던 것과 동등한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반드시…… 반드시 지금 죽여야 한다.’
그리 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다면…….
‘멸망하는 것은 우리가 될진저.’
미래에 맞이할 언젠가.
살아있는 모든 악마가 그녀의 손에 살해당하리라.
터엉!
결심을 마친 마왕이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 깃든 마기가 검게 빛났다.
***
“캐물을 게 줄어든 건 편해서 좋네. 그냥 죽여줄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무척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안드레이 일린, 놈이 균열 이론을 빼돌리고 대균열을 발생시킨 이유를 굳이 알 필요가 없으니까.
재물욕과 명예욕. 이끄는 세력의 중흥. 마력의 보전.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딴 건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그것들 모두에 다른 이유까지 더해진다 해도 욕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
별로 묻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도 하나 알아내야 할 게 있다면…….
“네가 빼돌린 자료, 누구에게 넘겨줬지?”
아르노 뒤레와 안드레이 일린을 제외하고 확실히 아는, 현재 살아있는 배신자의 수는 다섯이다.
한국의 한 놈.
북미와 중남미의 둘.
중국과 일본에서 하나.
그 외의 나라에서 하나.
그중에 주도한 자가 누굴까. 누구에게 자료를 넘겨줬는지를 알면 그것의 실마리도 잡힐 터였다.
“내가 말해줄 것 같나?”
“하긴.”
예상한 바라 더 추궁하지 않고 마력을 움직였다.
위유웅-
아까 기습으로 제어권을 뺏어낸 구성체. 그걸 균열의 벽으로 내쏘았다.
터엉!
중화 작업이 시작되며 미세한 틈새가 생겨났고, 나는 마법적인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들려요?>
<어떻게 돼가고 있어?>
<곧 통로 열릴 건데 눈치채는 사람 없게 가려줘요. 누나도 제가 말하기 전까진 안 들어와도 돼요.>
<……이렇게 걱정시켜놓고?>
근심이 스민 어조로 서연희가 묻는다. 척 보기에도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 있는 상태라 달래듯이 말했다.
<여긴 괜찮아요.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샬럿 테이트는 그런대로 파르투스와 엇비슷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중이며 헌터들의 전력도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대 몬스터 전투의 제일 원칙은 각성자 자신을 희생하지 말 것. 지금처럼 우세한 상황에서 사상자가 나오진 않을 테니 빨리 끝내면 된다.
<오 분 안에 마무리할게요. 부탁해요.>
거기까지 이른 나는 다시 안드레이 일린에게 다가서며 조소했다.
“앞으로 오 분 안에 날 못 죽이면, 너는 끝이야.”
“…….”
실은 거짓말에 가까웠다. 들키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걸 알지 못한다면 시간제한에 압박감을 받을 터. 물론 나는 오 분씩 끌 생각도 없었고, 도발하듯 놈에게 말했다.
“덤벼봐.”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
놈은 대단히 강하다.
<세계의 수호자> 작중 시점에선 36 영웅 중 10위권에 들었던 강자.
전성기보다 약해졌다곤 하나 정면대결로 맞붙으면 승산은 30%를 넘지 못하겠지. 방금 내가 기습해서 입힌 관통상과 시간제한이라는 조건까지 고려해야 비로소 백중세.
쿠아아아앙-!
놈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웅혼하게 치솟았다.
전해져 오는 투기는 그 자체로 이미 위압감을 넘어선 무기였다.
“네깟 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일 분 안에 시체로 만들어주지.”
“벌써 5초 지났어.”
조롱처럼 전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이 거친 기세로 돌진해오며 주먹을 내질렀다.
슈아아아악!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오로지 가진 힘을 집중한 일격.
+
-스킬 ‘인식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A+)
-스킬 ‘형상화’를 발동합니다. (랭크 A)
+
놈의 주먹과 맞닿은 내 몸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형상화 스킬로 구현한 신체 변화.
안드레이 일린이 미심쩍은 듯이 눈가를 좁힌다.
인식지배 스킬로 강요한 판단력 저하.
“허억!”
오장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이어 나는 핏덩어리를 울컥 뱉어냈다.
제아무리 공격을 비스듬히 흘려냈다손 치더라도 피하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타격이 컸던 탓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어느새 놈의 목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피싯!
아슬아슬하게 목을 잘라내지 못했고, 울대 쪽의 살점만 절반쯤 뜯어냈다.
“크, 으윽…….”
안드레이 일린이 급히 물러서며 언어화되지 못한 소리를 흘렸다. 이어서 왼손으론 목을 감싸며 지혈하고, 오른손은 내뻗으며 마력을 연속해 발산했다.
콰앙! 퍼어엉!
상처를 다스리는 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공격. 나는 피하는 데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
-스킬 ‘마력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
+
처음 두세 번은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아앙!
마탄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안드레이 일린이 종전의 열 배 이상 힘으로 마탄을 내쏘았다.
+
-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A)
+
이걸 모두 흡수하진 못해. 마력흡수 스킬의 단위 허용량을 넘어선다.
피하거나 튕겨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목표를 따라오다가 접촉하자마자 폭발하는 성질의 마력이다.
그냥 맞고 견디는 것도 여의치 않다. 일순간 전투 능력이 70% 이상 급감할 테고, 놈은 우세를 놓치지 않겠지.
그러니 방법은 하나.
전부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
파아아아앙-!
내 양쪽 어깨로 검은빛 마력이 날개처럼 뻗었다.
지척에 이른 마탄을 감싸듯 끌어당겨 오히려 가까이에 두었다.
마탄이 폭발하기까지 남은 찰나,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마력흡수. 복합 계통의 배리어. 형상화. 대응하기 위한 마탄. 내 마력을 활용한 신체 능력의 상승 등.
콰아아아앙!
놈의 마탄이 푸른빛을 내며 폭발했다. 내가 구현해낸 날개 안에서만.
“으아악!”
형언할 수 없는 격통이 밀려온다. 검은 날개 안은 이미 내 몸에서 나온 피로 가득했고, 탈력감이 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나는 안드레이 일린의 코앞에 다가설 수 있었고, 마탄의 반동으로 움직임이 지체된 놈보다 내가 조금 빨랐다.
푸욱!
뻗어낸 손이 놈의 어깻죽지를 움푹 파고 들어갔다. 손가락 끝에 잡히는 뼈와 신경을 모두 끊었다.
부우웅!
놈이 주먹을 휘두른다. 팔꿈치와 무릎을 붙이며 막아냈고, 충격에 튕겨 나가기 직전에 반동으로 놈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뜯어냈다.
“크아악!”
“하아, 하아…….”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킨 나는 다시 놈에게 접근했다.
심장, 목, 아니면 머리.
급소를 노려 빨리 끝내야 한다.
겉보기엔 유리한 듯하나 실상 내 상태는 놈보다 나을 게 없으니까.
쿠웅!
전력으로 돌진한 나는 놈과 몸을 세게 맞부딪쳤고, 함께 쓰러지는 도중에 내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억!
고개가 크게 젖혔다. 살짝 빗겨내지 않았다면 목이 부러졌을지 모르는 공격. 머리가 핑핑 돌았으나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은 나는 오른쪽 허벅지와 손을 동시에 움직였다.
안드레이 일린의 왼쪽 다리가 끌어 올려졌고, 팔로 심장과 머리를 방어하던 놈이 미처 대응하기 전에 발목을 정반대 방향으로 뒤틀어버렸다.
“아아악!”
비명을 지른 놈이 다시금 주먹을 내질렀다. 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고, 몸을 틀면서 오른쪽 어깨 하나만 내줬다.
퍼걱!
뼈가 잘게 부서지는 끔찍한 감촉. 오른팔은 이제 못 쓴다. 제대로 마운트 자세를 취한 나는 왼손을 뻗었다. 노리는 것은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놈의 목 부근.
터억-
내 손끝이 상처를 헤집기 직전에 놈이 손을 들어 방어했다. 뚫느냐 뚫리느냐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길 십여 초.
“그아아아악!”
거세게 고함을 내지른 놈의 얼굴 주위가, 정확히는 두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이어진 두 줄기의 빛.
피싯!
순간예지 특성이 발동되지 않았다면 뇌가 꿰뚫려 죽었을 터. 간신히 피했으나 마운트 자세를 유지하지는 못해 놈이 멀쩡한 발로 내 가슴을 걷어찼다.
“쿨럭, 커흐윽…….”
나가떨어진 내 입에서 피거품이 섞인 내장 조각 같은 게 흘러나온다.
비틀거리며 일어서 본 광경. 안드레이 일린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다.
목과 복부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오른팔은 겨우 상체에 매달려 있는 수준이고, 왼발은 발목이 돌아가 마력으로 움직임을 보강하는 상황.
반면 나는 팔 하나만 쓰지 못하나 신체 내부적인 부상으로 따지면 놈보다 두 배는 심각했다.
놈도 나도 더 싸우고 싶어도 여력이 남지 않았다. 다음 일격으로 승부가 결정되겠지.
“허억, 허억…….”
두어 번 심호흡한 안드레이 일린이 자세를 낮추며 몸을 웅크렸다. 일견 방어하는 듯한 동작이지만 나는 놈이 뭘 할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산 하나 둘쯤은 가볍게 날려버릴 힘.
‘푸른 눈’ 안드레이 일린의 최고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공격이다.
이런 상태로 저걸 받아낼 수 있을까. 해내야 하지만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였다면.
쿠아아아아앙!
소리는 뒤늦게 들려왔고, 그보다 먼저 안드레이 일린이 내게 쇄도했다.
“사라져라!”
한태강의 진신 기술을 열화한 듯한 공격이나 이 역시 평범하게 방어해내긴 어려운 힘이다. 놈보다 마력 순도와 총량이 낮은 자라면 저 앞에서 속절없이 스러지고 마니까.
그리고 마침내 격돌하기 직전.
스아아아아-
“……!?”
안드레이 일린이 경악해 시선을 돌렸다.
공터 한쪽에 쓰러진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하던 아르노 뒤레.
그가 손을 뻗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