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Chapter 22. 이름 모를 악마 (4)
***
스승의 위기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 이세아와 진유리가 파르투스에게 마탄을 쏘아낸 직후. 두 사람을 따라온 유해빈이 짧게 일렀다.
“저기, 얘들아. 내가 있잖아…… 사실은 그 뭐냐, 힘을 숨긴 천재? 그런 거거든.”
“뭐래.”
“……천재?”
긴장한 표정의 진유리는 짧게 답했을 뿐이나 이세아가 질문처럼 대꾸했다. 그런 와중에도 셋의 시선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파르투스에게 집중되어 있고, 유해빈이 장난스러운 기색이면서도 평소보다 퍽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그러니까, 이게 힘을 숨겼는데도 천재라서 힘숨찐은 아닌데……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타앙!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파르투스가 접근해온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유해빈이 나직이 일렀다.
“딱 한 번은 막을 수 있으니까, 너네 빨리 튀어.”
쿠아아아아앙-!
그녀가 뻗은 양손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탄이 생성돼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피슈우우…….
파르투스를 타격하기도 전에 검은 마기에 흩어져버렸다.
이제 유해빈이 힘껏 발을 굴렀다.
쿠우웅.
세 사람이 발 디디고 선 곳의 정면 수십 미터까지 지반이 거세게 요동친다.
퍼엉! 콰아앙!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땅이 유해빈의 마력을 머금고 솟구쳐 방어벽을 이룬다. 다만 이조차 파르투스의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는 방해물이었고, 이제 마왕과 세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이십 미터 이내.
유해빈이 뛰쳐나가며 외쳤다.
“말 뒤지게 안 듣네! 빨리 가라니까!”
그리고 파르투스와 충돌.
퍼억!
단번에 튕겨 나간 유해빈이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그리곤 다시 본래 자리로 날아들며 마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장이 쿵쿵 뛰며 드는 생각.
‘이건 진짜, 최소 1박 2일 둘만의 사제 여행 요구 가능이다…….’
이도진 본인도 아니고, 그의 여동생과 그녀의 친구를 지키고자 마왕과 맞선다니. 심지어 그 마왕이 파르투스라니.
마왕 파르투스의 악명은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왔다. 겁쟁이라고 비방에 가까운 별칭이 있을 만큼 직접 행차하는 적이 드물지만, 그가 나선 일에 실패란 없다고. 그리고 이렇게 맞닥뜨리니 상상 이상이었다.
‘쫄르투스는 무슨…… 당신들이 보고 말해, 그런 소리가 나오나.’
물론 겁쟁이라고 한 자들은 있어도 첫 글자를 그렇게 바꿔 부른 건 유해빈 자신뿐이었지만 여하튼 그녀는 내심으로 투덜댔고, 파르투스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귀찮구나.]
퍼엉!
그가 쏘아낸 마기가 대응할 틈도 없이 유해빈을 가뒀다. 단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게 아니다. 마기가 점차 범위를 좁히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짓눌러 형체도 남지 않게 소멸시키려는 것이었다.
탈출할 방법은 오직 하나.
그녀는 반쯤 각오를 굳히며 되뇌었다.
‘……해야 하나?’
본신으로 되돌아간다면 이 마기의 감옥을 어렵게나마 깨뜨릴 수 있다. 그에 따른 파장이 적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세아를 죽게 놔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결심한 유해빈이 힘을 끌어올리며 다시 강어귀로 향하는 파르투스를 추격하려던 그때.
스아악-!
별안간 날아든 칼날 같은 마력이 마기의 감옥을 베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쿠아아아앙!
눈부신 빛무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쇄도하며 파르투스의 등 뒤로 접근했다. 마왕이 쳐다보지도 않으며 짜증스럽게 손을 떨쳐낸다.
콰앙!
“으윽!”
낮은 침음성. 전신을 피로 물들인 샬럿 테이트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며 물러섰고, 마왕이 그녀에게 묻는다.
[움직일 힘이 남아있었는가.]
“하아, 하아…….”
극심한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샬럿 테이트가 파르투스를 노려봤다.
힘줄이 잘린 사지는 원활하게 쓸 수 없다. 마력을 운용해 간신히 거동만 하는 수준. 이세아와 진유리 쪽을 흘끗 확인한 파르투스가 담담히 일렀다.
[순서가 바뀌는 것에 불과하니라.]
자꾸 성가시게 구는 걸 내버려 둘 바에는 이 둘을 먼저 죽이는 편이 낫겠지. 파르투스의 마기가 실체화된 물질처럼 넘실거렸고, 저 멀리서 전황을 바라보던 이세아가 진유리에게 말했다.
“넌 다른 데로 가.”
“……뭐?”
이세아가 손에 든 검을 강하게 쥔다. 붉은 마력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나직한 말이 이어졌다.
“혹시 잘 안 되면…… 오빠한테, 괜히 심술부려서 미안했다고, 그것만 전해줘.”
콰앙!
바닥을 무너뜨리다시피 발을 굴러 하늘로 솟구친 이세아가 싸움터로 향한다.
재능이 있다곤 하나 고등학교 2학년. 마력은 A급 기준치에 불과하며 마왕은커녕 악마와 싸워본 적도 없는 그녀다. 하지만…… 이세아는 결코 무작정 참전하려는 게 아니었다.
두근, 두근.
가슴이 뛴다.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샘솟는 게 선명히 느껴진다.
‘이게 뭘까…….’
잘은 모르겠고, 그러나 분명한 게 두 가지 있다.
“크읏!”
“으갸악!”
첫 번째로, 저곳에서 스승인 샬럿 테이트와 친구인 유해빈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살아온 어느 순간보다도 잘 싸울 수 있으리라고.
그런 예감이 들었다.
퍼엉!
샬럿 테이트와 유해빈이 마기에 맞아 수백 미터를 날았고, 이세아는 그들을 추격하려는 마왕의 진로를 막아섰다.
“…….”
[일이 편하게 되었구나.]
흡족하게 중얼거린 파르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피유웅!
한 시간 전까지의 이세아라면 우연히라도 막아낼 수 없었을 공격.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공격의 경로가 아주 잘 보였고, 어떻게 하면 저걸 받아칠 수 있을지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힘의 총량은 부족하다. 그렇다면 순도를 올리면 되는 일이겠지.
터엉!
[으음?]
마왕이 눈가를 좁히며 말을 흘렸다. 지닌 재능과 무관하게 현재 가진 힘으론 절대로 방어할 수 없는 공격이었을 텐데.
한데도 절묘한 동작으로 마기를 빗겨냈다.
[…….]
파르투스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체구가 작은 여아를 유심히 살폈다.
상당한 재능과 보잘것없는 힘.
그리고…….
‘도무지 모를 일이로다…….’
그가 이 여아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직감. 장차 모든 악마를 살해할 대적으로 자라날 것이라는 불길한 확신.
여전히 그것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이따위 재능으로?’
천운이 몇 번을 따라주더라도 이 여아는 그렇게까지 강해지기 어려울 터였다. 애초에 인간이 도달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경지이기도 하고, 저 정도의 재능으로는 더욱 요원한 일이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건가…….’
재능과 지닌 힘이 어떻든, 악마를 멸하기로 운명지어진 아이.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방금 그의 공격을 막아냈을 때 저 여아는 본인의 수준을 월등히 넘어선 기술을 구사했으니까.
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리 해선 안 되겠지.’
직감이 그에게 사납게 외친다.
당장 죽여야 한다고. 구태여 까닭을 알 필요 없이, 그저 이 자리에서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경고에 따른 파르투스는 작은 공 모양의 마기를 생성했고…….
“이세아-!”
“세아!”
양쪽으로 튕겨 나간 유해빈과 샬럿 테이트가 소리치며 날아온다.
그리고 그즈음, 진유리는 무력한 자신에게 치를 떨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지가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계속 싸우려는 샬럿 테이트.
놀랍게도 S급 각성자에 상당하는 힘을 발휘하는 중인 유해빈.
저 강대한 악마의 공격을 막아낸,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이세아.
그러나 자신은 다르다.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되려 걸리적거리기만 하겠지.
싸우려는 의지는 있는데.
재능이 있다고 그녀를 믿어준 남자가 있는데.
열심히 노력해왔는데.
정작 실제로 해내야 하는 순간엔 능력이 부족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면역체.
그걸 꺼낸다면 달라질까.
진유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안 돼.’
설령 면역체를 활성화해낸다고 쳐도 저 싸움에서 유의미한 힘은 아니겠지. 정말 단 하나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퍼억!
콰아앙!
샬럿 테이트가 피를 토하며 말라버린 강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유해빈은 마기에 묶여 움직이지 못한다. 남은 사람은 이세아 한 명.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세아야-!”
그런데도 진유리는 있는 힘껏 달렸다.
문득 드는 생각.
‘나 뭐 하는 거지?’
가봤자 방해인데.
파르투스의 가장 가벼운 공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단숨에 죽을 텐데.
한데 무슨 자신감으로 검에 마력을 두르고,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가는 걸까.
진유리는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와 동시에 그따위 생각들은 모조리 무시했다.
그녀가 지닌 두 개의 트리거.
자신의 재능을 믿어준 이도진. 이세아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들은 당연히 진유리의 마음에 확고히 자리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못 보겠어.’
비록 능력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냥, 몇 년이나 앙숙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아주 조금은 가까워진 이세아의, 친구의 위기를 두고 보지 못하겠다.
소중한 은인의 믿음에 부응해 노력하려는 마음.
라이벌을 바라보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향상심.
그리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 다른 말로는 우정.
타앙!
옅은 소리와 함께 진유리의 검에서 발출된 구성체가 날았다. 방패를 닮은 구성체는, 세 개의 회전축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다.
한 개의 트리거로는 도저히 담아내지 못하고, 두 개의 트리거마저 온전히 감당하기엔 부족했던, 아득하리만치 거대한 재능.
그것이 세 개의 트리거를 통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
슈아아아- 파아앙!
방어 마법이 파르투스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걸 보며 샬럿 테이트는 경악에 찬 혼잣말을 흘렸다.
“아…….”
얼굴이 새빨개진 진유리가 이세아의 옆에 선다.
파르투스의 마기를 막아내고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무려 세 개의 축을 지닌 방어 구성체. 면역체의 권위자인 샬럿 테이트는 어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유리는…… 저 아이는…….’
그녀는 장담할 수 있었다.
천 년의 마학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의, 그야말로 역대 최고라 칭해야 할 천재가 저기에 있다고.
만약 면역체 보유자가 아니었다면 진유리가 현시점에 이미 이루어냈을 성취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샬럿 테이트는 그걸 가늠할 수가 없었고, 떨리는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잘 몰랐던 거야.’
노력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대견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트리거가 두 개면 성장이 더디리라 생각했다.
모두 크나큰 착각이었다.
세 개의 트리거를 통해서 간신히 본모습을 보인, 철옹성 같은 면역체.
이제껏 얼마나 고생했을까.
샬럿 테이트가 짐작했던 노력은 진유리가 실제로 쏟은 눈물의 십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감히 타인이 대견하다는 말을 건네기조차 어려운 나날들이었으리라.
트리거가 두 개면 성장에 방해가 될 거라니 가당찮은 헛소리였다. 진유리는 자신의 재능이 요구하는 만큼, 심지어 세 개의 트리거까지 다뤄냈으니까.
‘그런데 나는…… 나는 어땠지?’
샬럿 테이트는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봤다.
버리고, 또 버리기만 했다.
단 하나의 트리거. 강해지고 싶다는 순수한 목표. 그것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자 모든 것을 지워내고 버렸다. 희로애락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라고 여겼다.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겠지. 그녀의 방법도 무의미했던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저기 친구를 구하고자 두려움을 이겨내고 달려온 아이가 그녀에게 말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강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해도, 수단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샬럿 테이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진유리와 이세아, 두 제자와 또 한 명의 친구가 한 곳에 모여 파르투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이제 생각나는 얼굴.
‘아르노.’
다른 것들은 다 버리고 떠나 보냈다. 남은 거라곤 그 정도였다.
아르노 뒤레.
트리거의 핵심축. 아니…… 그녀에게 남은 단 한 사람.
‘강해지고 싶어.’
그녀는 강해지고 싶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단순히 강해지는 것만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스아아아아-
샬럿 테이트의 주위로 새하얀 빛무리가 어린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간다.
그녀의 트리거에…… ‘감정’이라는 색채가 스며들었기에.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마력을 몸에 두른 여성이 하늘로 날았다.
숨죽이고 방어 마법을 준비하던 세 명의 아이를 지키듯이 서며 파르투스에게 선언했다.
“날 죽이기 전에는, 이 애들을 털끝만큼도 다치게 하지 못할 거야.”
[의미가 없는 말이로구나.]
빙긋 웃으며 답한 파르투스가 휘황찬란한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는 이미 결심을 마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
마왕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아이.
악마를 죽이기로 운명지어진 아이.
거기에 과거의 영웅까지 넷 다 한꺼번에 죽여 없애기로.
‘다 죽이면 그만일 터.’
죽은 자가 얼마나 빛나는 재능을 지녔고 정체가 무엇이었든 그런 건 무의미하다. 앞으로 몇 초 후면 그리되겠지.
[죽은 자가 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니.]
담담하게 읊조린 파르투스가 공격을 완성했다.
저들을 소멸시키고, 이 일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릴 힘.
터엉!
그것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고…….
쿠아아아아앙-!
하늘 저편에서 다가온 검은빛이 그의 마기를 탐욕스럽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