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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94화 (94/207)

#94화. Chapter 23. 장기말 (2)

***

한강 한복판을 중심으로 펼쳐진 S급 균열과 인접한 외부. 그곳에서 조용히 검은 벽을 바라보고 있던 서연희는 칼날처럼 벼려진 노인의 음성을 들었다.

“자네도 뾰족한 수가 없겠나?”

“네, 어르신도 알고 계시겠지만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벽이 아니에요. 저 안과 이곳은 지금 완전히 분리됐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공간 마법에 관한 것이라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마법사를 모두 그러모아도 서연희보다 뛰어난 권위자는 없다. 그런 그녀의 확언인 만큼 외부에서 발현한 수단을 통해 침입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고, 36 영웅의 최연장자 심정웅이 무겁게 침음했다.

“피해가…… 클 수도 있겠어.”

그 말을 받은 건 마찬가지로 36 영웅의 일인이자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의 수장인 윤의성이었다.

“걱정한다고 나아질 건 없잖습니까. 안에서 잘해주길 바라야지요. 몬스터 몇 마리 나오는 거야 내부에도 헌터들이 꽤 있으니 걱정할 건 없고, 문제라면 파르투스인데…… 아르노 그 인간한테 달려 있겠어요.”

균열이 완성되어 내부와 통하는 시야가 가려지기 전까지 그들이 파악한 정보.

이 균열로 강림한 자는 마왕 파르투스다. 그자만 해도 허용량이 한계치에 가까울 테니 고위 몬스터들이 나오긴 어렵고, 인명피해가 발생할 염려는 없다. 그러니까…… 파르투스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윤의성이 말을 이었다.

“샬럿이랑 안드레이가 놈을 상대로 버텨주는 사이에 아르노가 통로를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정도 못 하면…… 영웅 때려치워야죠.”

“네 일 아니라고 막말하지 마라.”

“아, 한 선배가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시는데 나라도 침착해야지요.”

“뭐가 어째?”

차갑게 면박을 줬다가 불손한 대꾸로 되돌려받은 사내, 한태강이 눈을 치켜뜨며 윤의성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언쟁을 벌인지 벌써 수십 년. 아랑곳도 하지 않은 윤의성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일이 아니긴 왜 아닙니까. 협회장이 난데 욕을 들어도 내가 들어먹지. 거 참, 안 된다니까요? 괜히 힘 빼지 마시고 통로 열리면 파르투스 잡을 생각이나-”

“후우…… 흐읍!”

크게 들이마신 호흡을 한 번에 내뱉은 한태강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쇄도한 마력이 균열 외벽을 타격했다.

하지만 벽을 깨뜨리지는 못했고, 이내 한태강의 마력이 삼각뿔 모양의 외벽 전체로 넓게 퍼져갔다.

외부에서 들이닥친 힘을 분산하는 초고위 마법이 균열을 보호하는 것이다.

혀를 끌끌 차던 윤의성이 서연희 쪽으로 와서 험담처럼 말했다.

“저 안에 예비 사위 있다고 더 저러는 거 같은데. 어휴, 저럴 거면 평소에나 좀 살갑게 대할 것이지.”

“……예비 사위요?”

“음? 너도 알지 않나? 도진이 저 근처 사는 거. 어디 밖에 쏘다니는 거 아니면 안에 있을 텐데.”

“도진이랑 세라 곧 파혼할 거라고 들었는데요.”

흥미가 없다는 듯 단조롭게 답한 서연희를 보며 윤의성이 고개를 저었다.

“넌 한 선배랑 안 친해서 잘 모르나 본데…… 저 인간 성격이 어떤데, 정말 파혼시키고 싶었으면 진작에 난리 쳤겠지. 투자하는 사람처럼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이러면서 계속 기다려준 거잖냐. 그러다 드디어 대박 친 거고.”

“…….”

서연희는 더 대꾸하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썩 달가운 주제도 아니고, 윤의성과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검게 물든 벽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잘하고 있지?’

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벽을 찢어내고 싶었다. 균열 내부에 있는 이도진. 그가 너무도 걱정스러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힘으로 돌파할 수 없다고 심정웅에게 답한 건 절반은 사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른다’라고 해야겠지.

‘안개의 마녀’ 서연희는 이 균열을 돌파할 수 없으나 장생종으로서 지닌 힘을 개방한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오늘은 만월에 상당히 근접한 날. 전력을 발휘한다면 그깟 마왕이 공을 들인 균열 따위야 충분히 찢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계획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크다 해도, 서연희는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이도진을 보호하고 싶었다.

당사자인 이도진이 그녀에게 전한 말이 없었다면 벌써 그리 했겠지.

‘오 분은 아까 지났는데…….’

안에서 통로를 열릴 거라고 소식을 전한 그가 부탁한 것. 통로가 열리면 눈치채는 사람이 없게 가려달라고 했었다.

서연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도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 분 안에 마무리하고 연락을 준다더니 아직도 감감무소식.

‘지금이라도…….’

서연희는 무심결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균열을 산산이 부수어내고 이도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건 그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감정적인 문제. 그냥, 걱정돼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나, 제 말 들리죠?>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이도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응, 들려. 괜찮아?>

걱정이 담긴 물음.

이도진이 차분하게 일렀다.

<네. 여긴 괜찮고, 도와주셔야 할 일부터 알려드릴게요.>

***

<네. 여긴 괜찮고, 도와주셔야 할 일부터 알려드릴게요.>

나는 서연희에게 빠르게 부탁을 전했다.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입증하기 위한 준비. 그리고 곧바로 홀로그램을 열었다.

+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이 환호합니다! (랭크 SSS)

-스킬 ‘마력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

-스킬 ‘존재흡수’를 발동합니다. (랭크 SS)

-스킬 ‘영혼지배’를 발동합니다. (랭크 SSS)

+

내게 힘을 빌려주겠다며 되먹잖은 개소리를 지껄이던 검은 심장의 개입. 파르투스가 괴성을 지르며 저항하고 있다.

[끄흑, 크아아아악!]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시금 마음에 새긴 나는 마력을 움직였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

9.0까지 올린 감각.

S 랭크로 상승한 엿보는 눈.

그것들을 총동원해서 현재 이어지고 있는 흐름을 살폈다.

파르투스와 검은 심장의 대결은 거의 대등한 상황이었다. 조금씩 주도권이 검은 심장 쪽으로 넘어가고 있으나 현시점에선 누가 우위라고 할 수 없는 국면.

문득 떠오르는 우화가 있다. 숲속에 사는 동물들이 모두 모여 커다란 바위를 밀어내려 했으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 사슴이 힘을 보태자 비로소 바위가 밀려났고, 비록 작은 힘이라 해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결과를 바꿀 수도 있으니 서로 존중하고 자존감 있게 행동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도 그것과 얼마간 유사점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정반대의 방향이라고 봐야겠지만.

[으으윽, 커흑, 으아아아악!]

파르투스의 비명을 배경음처럼 들으며 나는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내 감각에 무언가가 실낱처럼 잡힌다.

마왕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초고순도의 마기가 계속해서 놈의 육신 깊숙이 침잠하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하지만 검은 심장의 권능도 놈을 쫓았고, 거기서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거다.

그 모든 상황을 면밀히 파악한 나 역시 그곳으로 마력을 흘려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나는 어느새 환상 같은 검은 벽 앞에 서 있었다.

절반쯤은 초월자라 칭할 수 있는 마왕의 영혼 그 자체가 만들어낸 심상 공간.

<세계의 수호자> 작중에서는 마신과 직접 소통하고 힘을 전달받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엄숙한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공간 너머의 내게 들려오는 소리라곤 파르투스가 저항하며 내뱉는 고함과 검은 심장의 조소, 대화라 하기도 어려운 소음뿐. 그리고 파르투스도, 검은 심장도,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둘 다 그 정도까진 여유가 없는 거겠지. 나는 조롱을 담아 일렀다.

[패배자 둘이서 재밌게 노네.]

이어서 마력을 담은 손을 새까만 벽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공간이 갈라지며 내 앞에 펼쳐진 광경.

파르투스와 검은 구름 같은 마기가 뒤엉켜 있다.

두 놈 다 내게로 시선을 집중했고, 나는 여유롭게 그들 쪽으로 걸어가며 조소했다.

[내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나 봐?]

알고 있었다.

검은 심장이 마신의 잔재라면, 나를 숙주로 부활하려는 게 놈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알고 있었다.

놈이 내게 힘을 빌려준다고 한 건 당연히 호의로 건네는 제안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검은 심장이 어느 정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균열 너머에서 파르투스가 나타난 그 시점에 깨달았다.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세 곳에서 검은 심장이 반응했던 이유. 그건 애초에 마왕을 끌어들이고자 놈이 파둔 함정이라고.

알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가는 검은 심장. 이대로 두면 완전히 각성하는 건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니고, 파르투스까지 흡수한다면 당장 오늘이 될 수도 있다고.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놈의 제안에 응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쉬익-

나는 손을 휘둘렀다.

내게서 날아간 마력이 파르투스 쪽에 조금 힘을 실어줬다.

두 놈의 대치가 정확히 백중세를 이뤘고, 그 이상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지.

둘 다 조금 더 힘을 내봐.

피유웅, 슈아아아!

나는 연이어서 마력을 날렸다.

파르투스와 검은 심장 쪽에 각각 번갈아 가면서.

놈들은 움직일 수 없다. 조금이라도 힘을 거두면 서로 잡아먹힐 테니까.

자유로운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즈음 파르투스가 뭔가를 알았단 것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눈썰미가 좋네?]

하긴 내가 봐도 엄청 닮았지. 무척 뿌듯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파르투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설마…… 그자들이 남긴-]

콰아앙!

내가 쏘아낸 마력이 파르투스의 입을 지져냈다.

[크윽!]

낮게 침음하는 놈에게 나는 경고했다.

[버러지 새끼가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네깟 놈들이 거론할 분들이 아니야.

이시혁과 정세빈.

<세계의 수호자>의 주인공과 히로인.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

나는 이제 검은 심장을 향해 물었다.

[내가 네 장기말이 될 줄 알았나?]

[너…… 네, 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새끼가 꿈만 크게 잡았네.]

나는 검은 심장의 숙주가 아니다.

놈의 소유자다.

장기말이라면 저놈이 내 장기말이지. 특성 쪼가리가 어딜 주인을 넘봐.

어처구니가 없어서 놈을 잠시 바라본 나는 경멸조로 일렀다.

[너희 두 놈 모두, 마왕이니 마신이니 해봤자 패배자들이잖아?]

이시혁과 정세빈.

내 부모님이 너희를 쓰러뜨렸어. 마신을 소멸시키고, 마왕들을 죽이고, 겁을 집어먹은 파르투스가 제 영지에 은둔하도록 만드셨다.

내가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적었어.

<세계의 수호자>의 작가였던 내가 너희들의 패배와 그분들의 승리를 온 힘을 다해서 글로 적어냈어.

[그런데 겁쟁이 새끼는 다 끝나고 이제야 뭐 건질 게 없나 이 세상에 기웃거리고, 저 새끼는 지금 보니까 아직 제정신도 아닌 것 같고. 둘이 서로 잡아먹겠다고 노는 거 보니까, 너희 꼴이 되게 웃기네.]

내 힘이 몇 차례 더해진 놈들의 대치가 점차 임계점으로 치달아갔다.

파르투스의 영혼을 지배해서 꼭두각시로 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해버리면 검은 심장이 더욱 성장할 테니까.

온전히 돌려보낼 수도 없다. 놈은 사건의 진상을 상당 부분 알아냈고, 여기서 처리해야 한다. 마땅한 제물이 있어야 목표한 바를 다 이룰 수 있기도 하고.

나는 마력을 끌어냈다.

엿보는 눈.

9.0에 달하는 감각.

이어서 마력 구성체 하나를 놈들에게 쏘아냈다.

어버이날 추모 광장에 갔을 때 세아에게 보여준 간섭 마법. 그것으로 놈들의 대치를 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

+

-스킬 ‘제어폭발’을 발동합니다. (랭크 S)

+

안드레이 일린에게서 빼앗은 놈의 최고 기술.

거대한 마력을 폭주시키는 그 능력을 저쪽 편의 패배자들에게 발동했다.

[끄윽, 끄아아아아아악-!]

[너…… 너, 따위, 가……!]

파르투스의 비명.

검은 심장의 분노 어린 말.

모두 내겐 대수롭지 않은 패배 선언처럼 들렸다.

나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넌 그냥 죽고, 넌 앞으로 안 보면 좋겠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볼 일 없겠네. 난 할 말 끝났으니까, 둘 다 빨리 꺼져.]

엿보는 눈과 감각으로 파악하고, 간섭 마법으로 폭주하기 좋은 여건을 만든 놈들의 마력 대결에 제어폭발 스킬이 개입한다.

쿠아아아아아앙!

새까만 빛무리가 미친 듯이 날뛰며 터져 나간다.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가며, 나는 선언처럼 되뇌었다.

<킬 더 이블>.

이 소설의 최종보스는 나야.

전작에서 이미 패배한 너희가 끼어들 곳은 없어.

쿠오오오오오-

마왕 파르투스의 존재를 불사르며 피어난 폭발이 하늘 저편, 균열까지 솟구쳐 올랐다.

내 시야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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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랭크 SSS -> 랭크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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