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98화 (98/207)

#98화. Chapter 24. 한세라 (2)

-한세라: 이제 비행기 탈 거야.

-한세라: 우리 일요일에 보기로 했지? 전날 다시 연락할게. (20:35)

시간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느리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간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오래 기다린 느낌도 든다.

그건 아마도, 내 마음과 감정을 나 자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라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도진: 응 조심해서 들어와

-이도진: 세아한테는 연락했고?

재작년 여름에 유학을 떠난 세라가 다시 이 년이 지나 찾아온 여름에 귀국한다.

나와는 그동안 서먹했지만 세아랑은 꽤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던데.

어쩌면 나한테 연락하기 전에 먼저 보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둘이 더 가깝게 지내는 듯했다.

-한세라: 응, 어제, 그쪽 시간으로는 오늘 낮이었겠다. 나 짐 다 챙겨놓고 연락했어. 세아랑은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는데, 너한테 말 안 해줬어?

-이도진: ? (20:36)

-한세라: 아, 말 안 해줬구나? ㅋㅋ 나 한국 가서 처음으로 만날 사람이 세아야. 도진이 넌 두 번째.

-이도진: 놀랍고 새롭네;

-한세라: 아무튼, 우리 세 시쯤 만나면 되려나? 예전에 자주 보던 데서. 그러고 보니까 거기는 아직 그대로야? (20:37)

-이도진: 나도 자주 가진 않았는데 지나가다 보니까 별로 바뀐 거 없이 그대로더라

-이도진: 그렇게 해

-한세라: 그래, 연락할게. (20:38)

“…….”

대화를 마친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내 방 저편의 책상 쪽을 바라봤다. 불쑥 내 방에 쳐들어와서 기말시험 공부를 하겠다던 세아가 어느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물어온다.

“세라 언니?”

“어떻게 알았어?”

“이상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길게 누구랑 연락하길래. 지금 누구 안 만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세라 언니겠다 싶었어.”

“이상하게 웃었다고? 내가 언제?”

“그랬어.”

새침하게 답한 세아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더니 책상을 보고 앉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세아에게 다가가며 일렀다.

“근데 너 세라랑 토요일에 만난다며.”

“응.”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왜 말해야 하는데?”

“어…… 그러네?”

듣고 보니 옳은 소리였다. 걔가 나랑 약혼한 사이지만 세아랑도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니까.

친한 언니 이 년 만에 만난다고 시시콜콜 나한테 알려야 할 의무는…… 생각해 보니까 딱히 없지.

뭐라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그저 책상 위에 펼쳐진 교과서와 노트를 내려다봤다.

등을 돌린 상태로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세아는 방해되니까 빨리 침대로 복귀하라는 의사를 무언으로만 전달하고 있었고, 여기가 내 방이니 꿀릴 게 없는 나는 검지로 노트 한쪽을 가리키며 지적했다.

“어? 여기 계산 틀렸다.”

“지금 고치려고 했어.”

세아가 지우개를 들어서 줄 하나를 슥슥 지웠고, 나는 조금 난처한 심정으로 정정해줬다.

“거기 말고, 그 아랫줄.”

“……나도 알고 있었는데.”

“아, 음……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스윽- 툭.

세아가 왼팔을 아주 약하게 뒤편으로 휘두른다. 그쪽에 서 있던 내 복부와 팔꿈치가 맞닿았고, 이내 쌀쌀맞은 경고가 들렸다.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안 말해줘도 돼. 아니, 말해주지 마.”

“저기요, 이세아 씨. 그럴 거면 제 방에는 왜 오셨어요……?”

일단 명분상으로는 마법역학 공부를 할 건데 의문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겠다고 들어온 거면서.

“나중에 한꺼번에 물어볼 거야.”

“그래?”

그럴 거면 자기 방에서 공부하다가 와서 물어봤어도 됐을 텐데.

물론 그렇다고 쫓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던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서 침대에 누웠고, 세아가 나직하지만 꽤 힘이 실린 목소리로 내게 이른다.

“토요일에 세라 언니 만나면 내가 잘 말해놓을 테니까…… 알아서 잘해.”

“…….”

“왜 대답 안 해?”

“아, 뭐…… 그래.”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언니한테 하고 싶은 말 제대로 하고, 그렇다고 막 그때처럼 욕 듣고 그러진 말고. ……세라 언니는 그러지도 않겠지만.”

잔소리하듯이 조곤조곤 당부한 세아가 다시 시험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세아가 귀엽기도 하고, 하지만 내 동생이 원하는 화해가 이루어지긴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내 생각에는…… 아마 좀 심하게 싸울 것 같은데.

그리고 세아의 기대, 내 우려와 무관하게 시간이 흘러가 맞이한 토요일 저녁.

세아보다 늦게 집을 나선 나는 마력이 일렁이는 방 안에서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추궁했다.

“저 마지막으로 물어봅니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어머, 뭘?”

“진짜로…… 이게 맞아요?”

어두컴컴한 실내.

나는 수술대를 떠오르게 하는 간이침대에 누워 있다. 본래 입고 있던 옷은 벗고 굉장히 얇고 새하얀 환자복 같은 것만 착용한 상태. 그런 나를 옆에서 내려다보며 서연희가 산뜻한 어조로 말한다.

“너 지금 입은 옷도 벗어야 해. 술식 흘러 들어갈 때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

어쩐지 기시감 같은 게 든다. 수학여행 때 내가 유해빈에게 옷 벗으라고 강요했던 일. 걔도 나랑 비슷한 심정이었으려나.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나는 몰랐고, 서연희는 안다는 것.

“이거 입은 상태에서 하는 건요?”

“그렇게 해도 되긴 한데, 벗은 상태에서 하는 거랑 효율에서 차이가 좀 날 거야.”

“얼마나요?”

“100이랑 97 정도의 차이?”

“좀 많이 큰데요.”

다른 것도 아니고 검은 심장을 봉인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게 봉인하는 게 옳겠지.

“알겠어요.”

결국 상황을 받아들인 나는 입고 있던 환자복까지도 벗어서 바닥에 놓아뒀다. 제법 찬 공기가 전신에 그대로 닿았고, 서연희가 자기 오른손을 내 왼쪽 가슴, 심장 바로 옆에다 올렸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감촉. 그녀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어루만진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그러길 십여 초, 이제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내 가슴을 누르듯이 자극했다.

두근, 하는 감각이 심장 부근에서 울린다. D 랭크까지 하락한 검은 심장이 힘겹게 반응하는 것이다.

파지직-

검은빛의 스파크가 미약하게 발생했고, 서연희가 자아낸 붉은 마력이 검은빛을 사그라뜨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작업.

스윽.

오른손은 내 가슴에다 얹은 상태로, 서연희가 왼손을 내 배꼽 아래로 가져간다. 거기서부터 복부를 지나 명치와 가슴팍까지, 마력을 운용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신체 중심부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다가…… 마침내 왼손과 오른손이 겹쳐졌다.

위유우웅-

신비롭게 피어오르는 붉은 마력. 그것이 내 심장 주위를 맴돌았고, 이내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스으으으…….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심장이 자리해 있을 가슴 왼편. 그곳에 붉은 문양 같은 것이 나타나고 있다.

새빨간 보름달을 닮은 문신. 그것이 완성된 직후,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의 랭크가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랭크 D -> 랭크 ---)

+

그리고 내 몸에서 손을 뗀 서연희가 조금쯤 지친 듯한 목소리로 일렀다.

“휴우…… 끝났어. 이제 옷 입어도 돼.”

“네.”

서연희가 뒤돌아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나는 벗어뒀던 옷을 챙겨 입었다. 벽에 걸린 거울로 확인한 모습.

손바닥의 절반 크기쯤 되는 붉은색 달 모양의 문신이 내 왼쪽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이거 안 보이게 할 수도 있어요?”

“응, 마력으로 컨트롤하면 가라앉을 거야.”

들은 말대로 해보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문양의 붉은색이 희미해지더니 점차 몸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진다.

“그래도 네가 그걸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사용할 때는 드러나니까 조심하고, 지금은 만월 형태지만 갈수록 줄어들어서 삭월까지 작아질 수도 있는데…… 그건 차후에 생각하자. 보수공사 하는 건 품이 들 거니까 미리미리 말해주고.”

“네, 고마워요.”

옷을 다 입고 나니 서연희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 궁금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근데…… 그건 언제부터 가지게 된 거야? 맨 처음부터?”

‘맨 처음’이라는 건 그때를 가리키는 거겠지. 내 부모님의 장례식, 서연희와 거래한 그때부터.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아뇨, 얼마 안 됐어요.”

“그래?”

이어서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감돈다. 할 말을 찾는 침묵이 아니라 편안한 적막감. 그리고 서연희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맞다, 도진아. 그거 알아?”

“어떤 거요?”

“왜, 그때 장례식 날. 네가 나 따라 나오기 전에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글쎄요.”

정세빈과 이시혁의 예기치 못한 죽음. 서연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알지 못했고, 그녀가 답을 말한다.

“이 신분, 이제 바꾸려고 생각했어. 그때도 꽤 오래 유지하고 있었고, 학교생활 다시 하려고 했다?”

“그거…….”

서연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고, 상냥한 말이 이어졌다.

“제일중에 전학 온 학생, 그러려고 했지. 너랑 세아가 걱정돼서.”

“그건…… 또 몰랐네요.”

그녀가 웃으며 재잘거리듯 말한다.

“그랬어도 재밌었을 것 같아. 나랑 너랑 세라, 셋이 학교 같이 다니면서 세아도 챙기고, 그렇게. 만약의 일이라는 건 의미는 없지만.”

“……네.”

홀로그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런 미래가 있었을까. 정체를 감춘 서연희와 나와 세라가 친구로 지내면서 세아를 열심히 돌봤을까.

서연희의 말대로 의미는 없는 가정이다. 난 그런 걸 바라지도 않고.

이제 그녀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있잖아, 네가 가진 비밀들. 그거…… 언젠가는, 내가 전부 다 알게 될 날도 오려나?”

“…….”

나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런 미래가 내게 허락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확답이 아닌, 내가 바라는 희망 사항뿐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응.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서연희가 맑게 웃었다.

***

집에 돌아오니 오후 아홉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나보다 일찍 나가서 일찍 귀가한 세아가 소파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길래 물었다.

“재밌게 놀고 왔어?”

“응.”

“세라랑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어떻게 지냈는지, 예전 얘기도 하고, 그랬어.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고.”

“스카우트?”

“세라 언니가 나 졸업하면 영원 오는 건 어떠냐고 하길래.”

“얼씨구.”

그냥 만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목적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

“뭐라고 답했는데?”

“아직 졸업하려면 많이 남았으니까, 생각해 보겠다고.”

“잘했어.”

지금 섣불리 길드와 계약해서 좋을 게 없다. 잘 따져가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흐뭇해하며 고개를 주억인 내가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세아가 갑자기 말했다.

“세라 언니 있잖아.”

“응, 걔가 왜?”

소파에 누운 세아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몽롱해 보인다. 그리곤 꿈결을 보듯 감탄이 스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짜 엄청, 엄청 예뻐졌어. ……예전보다 훨씬 더.”

“그건 또, 신기하네.”

나는 그렇게 답하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걔가 더 예뻐졌다고?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려나 싶네.

다음 날 오후.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 할 때,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세아가 내게 당부했다.

“진짜, 제대로 해.”

“알겠다니까.”

“그렇다고…… 생각 없는데 그렇게 하지는 말고.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그거 응원하는 거야, 말리는 거야?”

“맘대로 생각해.”

그렇게만 답한 세아가 자기 방에 들어갔고, 나는 상의한 시각에 맞춰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학생 때는 자주 찾아왔던 번화가. 그때마다 대개 내 옆에 함께 있던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 오십 분이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건만, 상대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나는, 세아가 어제 한 발언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여름에 알맞은 화사한 옷차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성이 저편에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음에도 의식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살며시 웃음 띤 얼굴로 서 있을 뿐이다.

다음 순간.

내 시선을 알아챈 건지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햇빛에 반사된 머리칼이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푸른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머금고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녀가, 내 오랜 친구이자 약혼녀인 한세라가 내게 말한다.

“잘 지냈어?”

내게 무척 익숙한, 예전에 그랬듯이 편안한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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