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Chapter 24. 한세라 (5)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단조롭고 차갑기만 한 대답. 되려 그러하기에 한세라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저 대답은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정말 이도진이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 그랬다면 결코 저런 식으로 답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십여 년을 쌓아온,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했던 관계가 한순간에 흩어지려 하는 상황에서 저렇게나 무감한 표정만 지을 리는 없을 테니까.
설령 이성적으로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인간 한세라를 좋아했던 이도진은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슬퍼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거짓말이야.’
차라리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을 터였다.
친구로서 좋아한 마음보다도, 오히려 이성으로서 좋아한 마음이 더 컸다고. 그래서 그걸 감추려면, 한세라라는 사람에 대해 그가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을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전부 다 내비치지 않아야 했다고.
자기 편의적인 해석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자신만큼 이도진이라는 사람의 내면을 잘 이해하는 존재는 없고, 오직 둘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그것이 진실이리라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세라는 이제 고요한 어조로 이도진에게 말했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어떤 면에서?”
이도진은 옅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일견 짜증스러워하는 듯한 얼굴. 하지만 그게 본심을 감추는, 억지로 고통을 참는 표정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고, 일상적으로 가벼운 책망을 건네듯 그에게 답했다.
“다신 안 보겠다는 건, 난 좀 많이 서운해서. 본다 안 본다를 떠나서, 그것까지 네가 결정하는 건 너무 너 좋을 대로만 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나한테 결정권을 줄 수 있잖아?”
“……그런가?”
“응. 난 솔직히 파혼 자체보다도, 네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게 더 화나거든. 우리 서약 만료되는 날이 언제였더라?”
“8월 28일 정오.”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마치 한순간도 마음에서 잊어본 적이 없다는 것처럼.
한세라는 이도진이 그러하듯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렀다.
“두 달 넘게 남았네. 아빠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나도 바쁘고, 너도 바쁘고, 만료되기 전까지만 처리하면 되니까,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고.”
지금으로부터 십일 년 전의 여름, 정확히는 8월 28일 정오. 한세라와 이도진의 약혼은 네 명의 입회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대마법사 정세빈과 수호자 이시혁.
방벽 올리비아 윈과 무신 한태강.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자 두 사람의 부모인 그들이 공을 들여서 준비한, 마법적이면서 또한 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계약이었다.
네 명의 입회자와 두 사람의 계약 당사자. 도중에 계약을 파기하는 건 당사자들의 뜻에 달려 있지만, 그걸 실제로 진행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건 지금은 한태강 한 명만 남아있는 입회자들이다.
만약 파혼하려 한다면 기한이 만료되는 올해 8월 28일 정오 이전까지. 그 기한을 넘기면 그때부터는 되돌릴 수 없다.
약혼 서약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에 이르고, 이도진과 한세라는 법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니까.
그래서 본래 올해의 8월 28일은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기도 했겠지만…….
“뭐, 그건 안 될 것 같고…… 그전까지 가끔 불러도 돼? 자주는 아니고.”
“네가 원할 때?”
“응, 내가 원할 때. 우리가 파혼하고 나서도 친구로 지낼 수 있는지, 아니면 네 말대로 다신 안 보는 게 맞는 건지…… 그거 알아보고 싶거든.”
이도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해.”
제안의 형식을 빌린 강요.
그리고 그 안에 담아낸 배려.
한세라는 이게 옳다고 여겼다. 이도진이 아는 자신은 이렇게 제안했을 테고, 또한 이것이 그가 가장 부담을 덜 느끼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도진은 아마 이렇게 이해하고 있겠지.
단번에 멀어지진 말고, 서서히 멀어지자고.
조금은 여유를 둬서, 서로가 그나마 덜 힘든 방식으로 관계를 끝내자고.
물론 이것조차도 이도진의 입장에서는 아주 많이 배려를 받은 것이다.
한세라 자신이 원할 때 가끔 부르겠다는 말. 그건 이도진 혼자만 이기적이지 않게 해주겠다는 배려이기도 했으니까. 책임을 나누어지려는 의도 또한 있다고 여기겠지.
거기서 느낄 미안함까지는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이야기가 정리되자 그가 말한다.
“이 상황에서 이런 말 하려니까 민망한데…….”
“뭔데?”
“저녁, 먹으러 가야 하나?”
저녁 시간이니 뜬금없는 제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말. 한세라는 이도진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 그녀가 후려친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얼굴이 부을 것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세라는 상당히 난처하다는 기색으로 답했다.
“글쎄, 그건 좀 그런데…… 오늘은 이만하고 가는 게 맞지 않으려나?”
“그럼…… 집까지 태워다 줄게.”
그녀도 이것까지 거절하진 않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이시혁과 정세빈의 동상에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리러 온답시고 와놓고선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죄송하다는 뜻을 담아서.
이내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주차장 쪽으로 걷기만 하다가, 주차장에 다 와서야 한세라가 말했다.
“담배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가.”
“어떻게 알았대?”
조금 놀란 눈치로 묻는 이도진에게 그녀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냥, 자꾸 주머니 흘끗흘끗 보길래. 그리고…… 너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한 표정이었거든. 나 유학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아…….”
이도진이 다시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보다도 훨씬 격렬했던 당시의 언쟁. 싸움이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두 사람은 외진 곳에 함께 선 채로 정면만 바라봤다.
그때 한세라가 말했다.
담배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나도 한 대만 피워보고 싶다고.
“……오늘도 줄까?”
“거절은 안 할게.”
두 사람은 이도진의 차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섰다.
치익, 스으…….
한쪽은 소리가 제대로 났지만 다른 한쪽은 잘 타지 않고 헛돌듯 희미한 연기만 났고, 이도진이 한세라에게 일렀다.
“불붙일 때 빨아들여야 한다니까.”
“하고 있어.”
“목으로 넘겨서.”
“다시 붙여줄래?”
스읍- 이번엔 그런대로 아까보다는 나았다. 이도진의 것과 비교하면 썩 기운이 없어 보이나 그래도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고, 한세라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딱히 모르겠네. 왜 피우는지.”
“모르는 게 백 배는 좋지.”
이도진의 말에 문득 떠오른 궁금증. 직접적으로 물어서 확인한 적은 없으나 마음속으로는 직감하고 있는 바를 떠올리며 한세라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넌 이거 누구한테 배웠어? 고등학교 때까지는 안 피웠지?”
그러자 이도진이 태연하게, 거짓말하듯 답한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래?”
필터 부근까지 다 피운 담배와 두어 모금 피우는 시늉만 한 담배를 주차장 한쪽의 재떨이에 버린 두 사람은 이도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이번에도 딱히 대화는 오가지 않았고, 한세라는 운전 중인 그의 오른쪽 옆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티 많이 나네.’
이렇게 보니 차이가 확연히 난다. 아까 본 얼굴 왼쪽, 다시 말해 그녀가 뺨을 때린 쪽은 상당히 많이 부은 상태였다.
집 근처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직전. 한세라는 이도진에게 말했다.
“세아가 보면 화내겠다.”
“그거보다는 잘 맞았다고 하지 않을까?”
“……그건 아닐걸?”
부우웅…….
그즈음 차가 고급 주택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길가에 멈춰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한세라는 그에게 일렀다.
“또 연락할게. ……가끔 생각날 때.”
“응, 부르고 싶을 때 불러.”
이제 이도진이 방향을 돌리기 직전, 한세라는 마지막으로 사과를 건넸다.
“때린 거, 미안해.”
“음…… 사과하면 내가 더 곤란한데.”
“왜?”
“네가 그거 미안해하면…… 난 너 볼 때마다 물구나무서서 다녀야 하거든.”
예기치 못한 말에 한세라가 피식 웃음을 지었고, 이도진이 차를 몰아 반대편 도로 쪽으로 멀어져간다.
그리고 오 분쯤 지난 다음.
“다녀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한세라는 거실에서 대단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는 아버지 한태강과 마주쳤다.
그가 짤막하게 이른다.
“일찍 왔구나.”
“아, 좀 피곤해서요.”
“저녁은?”
“먹고 왔어요. 아빠는요?”
“방금 먹으려고 했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넌 들어가서 쉬어라.”
“……알겠어요.”
뭔가 미심쩍다는 듯이, 그리고 이도진에 대한 분노가 실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한태강을 지나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짐은 귀국한 당일 이미 말끔하게 정리해두었고,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아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가 감도는 정경이 방 주인을 맞이했다. 먼저 화장대 의자에 앉은 그녀는 얼굴에 바른 것들을 꼼꼼히 지워나갔다.
곧 드러난, 본연의 모습 그대로임에도 여전히 세련되고 청초함까지 깃들어 있는 용모. 한세라는 가만히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
‘잘 해낸 걸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선에 가까웠다는 생각은 든다.
파혼 얘기 따윈 나오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이도진과 그저 즐겁게 시간을 보낼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가 지닌 마음의 부담감이 커지기만 했겠지.
약혼에 관련한 얘기가 나왔다 해도, 파혼 자체를 백지화로 돌릴 방법도 있었다. 한세라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그녀는 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버리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걸 놓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속인 건 아니야.’
그렇다고 한세라가 속내를 감추고 이도진을 속였는가 하면,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과는 다르다.
그녀는 연기와 진심과 배려와 원망을 또렷이 구분할 수 없었다.
단지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한세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면처럼 얼굴을 가린 사이, 손가락 틈으로 드러난 눈이 그녀 자신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에게 맹세하듯 되뇌었다.
‘나는…… 도진이를 구해줄 수 있어.’
그에게 해줘야 하는 말.
여태까지 있는 힘껏 준비해오고, 말해줄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온 한마디.
한세라는 단 한 번, 이도진의 마음을 구할 수 있다.
***
띡, 띠리릭-
“나 왔어.”
“일찍 왔- ………….”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에서 나온 세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집에서 공부할 때만 쓴다는 도수 없는 안경. 편한 복장에다 머리카락도 위로 질끈 묶은 채로 계속 내 얼굴만 살피다가…… 마침내 대뜸 묻는다.
“뺨이 왜 부어 있어?”
“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부기를 뺀다고 뺀 건데도 완전히 가라앉히진 못한 모양이었다. 워낙 세게 맞기도 했고, 세아가 의외로 눈썰미가 좋았던 것도 있을 테고.
이윽고 세아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것처럼 묻는다.
“세라 언니가…… 때렸어?”
“아니, 전혀, 사실이 아닌데-”
“……맞았어?”
추궁하는 세아의 눈빛에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