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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04화 (104/207)

#104화. Chapter 25. 죄책감 (3)

<세계의 수호자>의 핵심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서른여섯 명의 영웅.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그들을 이끈 리더는 수호자 이시혁이었고, 마학의 발전과 세상의 번영에 가장 크게 공헌한 자는 대마법사 정세빈이었다.

자랑스러운 내 주인공들.

사랑하는 내 부모님 두 분.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36 영웅 중 최강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랬다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세계의 수호자>의 후반부.

구체적으로는 정세빈이 마왕 세이리스와 단신으로 대적해 승리하고, 이시혁이 마왕 레넌과 사투를 벌여 그를 쓰러뜨리기 전까지.

그 전까지는 무력으로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따로 있었다. ‘천재’라는 이명으로 불리었던 여성, 미국의 영웅 에블린 그레이스.

바로 그녀였다.

나이는 이시혁과 정세빈보다 네 살 연상.

두 사람이 아직 제일고에 다니고 있던 시점, <세계의 수호자>의 1부인 아카데미 파트. 그녀는 당시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표면적으로는 마검사로 활동한 그녀였지만 기실 그녀를 마검사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건 정확한 분류가 아니었다.

어쨌든 마검사라는 건 무기술도 마법도 전투적인 측면을 최대한 활용하는 거니까.

하지만 에블린 그레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다 잘하는 거였다. 그저 둘 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것뿐이었다.

이시혁만큼 검을 다루는 재능이 뛰어나고, 정세빈만큼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그러하기에 ‘천재’.

솔직히 나로서는 그다지 정이 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뭐든지 다 잘하고,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 최고의 각성자 명문이라 할 수 있는 그레이스 가문의 차녀.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재능이 없는 자들을 경멸하는 품성.

작중에 직접 등장하는 일도 드물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외부의 적인 악마들을 제외하고, 아군 중에 이시혁과 정세빈보다 당장은 더 강한 캐릭터가 있는데, 얘를 뛰어넘으면 이제 인간 중에는 제일 세다고 해도 무방하다…… 라는 지표 역할에 가까웠다.

일례로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직접적으로 그녀의 심리를 묘사한 적이 없으니까.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영웅도 없고, 싸움이 끝나자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십 년 후 헌터 일에서 완전히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전부터 병행해오던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마침내 대선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그녀가 은퇴해 정치인이 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강의 마검사라는 칭호는 샬럿 테이트가 아닌 그녀의 차지였을지도 모른다.

한태강과 샬럿 테이트 둘 중 세계 최강이 누구냐는 세간의 치열한 논쟁에도 한 명의 이름이 더 거론됐겠지. 에블린 그레이스는 능히 그럴 자격이 있는 강자였으니까.

아니, 실은 논쟁과 무관하게 그녀는 지금도 강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니 당연히 전성기보다 퇴보했으리라는 세간의 평가는 틀렸다.

에블린 그레이스가 배신자라는 걸 홀로그램을 통해 알아낸 내가 사용한 OX 질문.

+

OX 질문 (1/1)

-질문 내용: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가 현역 시절보다 유의미하게 강해졌는지 여부

-정답: O

+

당시 그녀는 이미 대통령에 취임한 상태였고, 그녀를 암살하려던 계획은 무기한으로 보류되어야만 했다.

너무 강하고, 왜 배신했는지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하고,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막대한 힘과 권한을 가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레이스 가문의 전력까지 염두에 둬야 하니까.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대균열을 발생시킨 배신자들.

그들을 이끈 핵심인물이 아마 그녀이리라고.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것이 확실해졌다.

안드레이 일린이 자료를 넘긴 자가 그녀라는 게 밝혀짐으로써.

나는 놈에게 다시금 물었다.

“다른 배신자들은, 네가 아는 자가 또 누구지?”

“……모른다. 내게 연락해온 것도 그녀였고, 계획 전체에 관여한 것도 그녀일 거야. 다른 자들과 어떤 식으로 협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

이후로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봤지만 아무래도 이보다 내밀한 정보를 얻을 순 없어 보였고, 나는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러시아로 돌아가면, 힘을 회복하겠다는 핑계로 칩거하고 있어. 그러다 그쪽에서 접촉해오면 내게 보고하고.”

“……알겠다.”

“네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하나야. 절대로 발각되지 않을 것. 내게 알리는 것보다도 그걸 더 신경 써야 해.”

“그들이 나를 습격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안드레이 일린의 질문.

나는 단출하게 답했다.

“그냥 죽어. 적당히, 나름대로 꽤 열심히 저항하다가 힘이 달려서 죽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폭사해. 괜히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아서 단서 주지 말고.”

“그렇게 하지.”

“좋아, 말 잘 듣네.”

나는 안드레이 일린을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그야 이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놈이다. 그러면 미끼로 쓰는 게 옳겠지. 다른 놈들까지 잡아 들이려면.

“후우…….”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영혼지배 스킬을 해제하고 병실을 나섰다.

오늘은 휴가처럼 출근하지 않은 거라서 딱히 갈 데가 없는데…… 그냥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으려나.

그때 전화가 울렸다.

우우웅-

발신인은 아르노 뒤레.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묻는다.

<진, 어디지?>

무척 쾌활한 목소리였다.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선량하기만 한 목소리.

나는 살짝 웃음기를 내비치며 답했다.

“잠깐 안드레이를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오늘은 학교에 안 가고 쉬는 날이거든요. 왜 그래요, 아르노?”

<아, 별일 없으면 잠깐 부르려고 했지. 지금 로티를 만나러 가는데, 손님이 한 명 온다길래 너도 오면 좋겠다 싶어서.>

“누군데요?”

그러자 그가 답한다.

<예니.>

“네?”

뜻밖에 거론된 단어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반문했다.

예니.

그건 아르노 뒤레가 서연희를 부르는 별칭이다.

***

‘대마법사’ 정세빈.

‘방벽’ 올리비아 윈.

‘소드 퀸’ 샬럿 테이트.

‘안개의 마녀’ 서연희.

<세계의 수호자>의 작중에서는 네 명의 젊은 여성이 한 그룹을 이루어 다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넷이서는 친구가 맞았다.

다른 세 사람 모두 정세빈을 좋아했다.

올리비아 윈은 다른 세 사람 모두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며 살갑게 챙겼다.

넷끼리는 무척 친했고, 누구 한 명이 자리를 비워 셋이 있을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정세빈이든 올리비아 윈이든 확실한 구심점이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남은 둘.

서연희와 샬럿 테이트.

그녀들이 단둘이서 친했냐고 한다면…… 그건 전혀 아니지. 둘은 어색한 사이다.

근데 둘이 또 만났다고? 전에 한 번 사적으로 만난 것만 해도 둘 다 되게 어색했을 텐데 또?

아르노 뒤레의 연락을 받고 향한 샬럿 테이트의 훈련장 외곽 정원. 그곳에서 나는 정말로 드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뭐, 그래서 부른 거야. 전에는 너무 짧게 봤잖아. 균열 때는 얘기할 경황도 없었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더 네 얼굴을 봐야겠다 싶어서.”

“아…… 그래?”

샬럿 테이트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말을 서연희가 어색하게 대꾸하고 있다.

다른 표현을 쓸 수는 없겠지.

거의 모든 순간, 매사에 여유 있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그녀가 지금은 몹시 어색해하고 있다.

샬럿 테이트도 어색해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서연희보다는 편안해 보이는 표정. 나와 함께 접근하지 않고 멀찍이 서 있던 아르노 뒤레가 슬쩍 귀띔한다.

“사람이 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라고, 로티가 요즘 많이 바뀌었거든. 얼마 전에는 나한테 이 근교에 어디 괜찮은 데가 있으면 놀러 다녀오자고 하질 않나, 드디어 저 애도 사교성이라는 걸 갖추게 된 모양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지.”

“그래요? 샬럿과 둘이서요?”

“뭐, 그렇지.”

멋쩍어하는 듯하면서도 아르노 뒤레가 긍정한다.

샬럿 테이트가 강해지기 위해서만 살아온 삶에서 다른 방식을 찾으려 한다. 해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아르노 뒤레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변화하는 걸까.

잠시 침묵이 일다가 아르노 뒤레가 말한다.

“세브도 이비도 없이 둘이 만나서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냐만…… 그래도 이만하면 아주 큰 발전 아니겠어?”

“아르노, 솔직히 말해요.”

“응? 뭘?”

“혼자만 여기 있기 어색해서 날 부른 거죠?”

“하하, 들켰군. 이건 비밀인데, 난 예니는 좀…… 껄끄럽거든.”

36 영웅 중에서 가장 사교성이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그건 단연 아르노 뒤레겠지.

하지만 그라고 모든 영웅과 친하게 지낸 건 아니었다.

가령 그는 이시혁을 좋아했고, 한태강과는 사적으로 친하진 않아도 실력을 인정했고, 윤의성과는 실제로 친한 거야 어쨌든 겉으로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으나 염의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 왠지 우울하다며 거리를 두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젊은 여성 영웅들 쪽도 마찬가지다.

샬럿 테이트와는 두말할 것 없이 가장 친한 사이.

그가 이비라고 부르던 올리비아 윈과 정세빈은 믿을 수 있는 동료.

하지만 서연희나 에블린 그레이스와는 썩 가깝지 않았다.

에블린 그레이스야 워낙 또래 영웅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만 잘났다는 느낌이 강했으니 그랬고, 서연희 쪽은 가깝지 않았다기보단…… 좀 껄끄러워하면서 피해 다녔다.

“로티도 철이 드는데 말이야, 예니는 하나도 바뀐 것 같지가 않아. 겉모습도 그대로고, 성격도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게. 아, 그렇다고 험담하는 건 아니야. 예니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 진, 너도 예니와는 가끔 본 적이 있겠지?”

“네. 가끔, 아주 가끔요.”

그즈음 서연희와 샬럿 테이트가 우리 쪽을 쳐다봤다. 손짓하며 부르길래 가다가, 나와 서연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눈빛으로 교환한 말은 이러했다.

<넌 여기 왜 왔어?>

<몰라요. 그러는 본인은 여기 왜 왔어요?>

<글쎄……?>

조금은 난처해하는 기색.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감추며 다가가서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고, 그때 샬럿 테이트가 의도치 않게, 대뜸 폭탄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 보니 세라가 귀국했다면서? 둘이 만났나?”

나를 향해 던진 질문.

서연희와 나를 중심으로, 좌중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

6월 7일 월요일,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각.

오후 첫 수업을 마친 이세아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상에 이마를 괴고 엎드렸다.

잠이 온다거나 피곤한 건 아니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시간에 이어 지금 이 순간까지 고수하고 있는, 그녀 나름대로 펼친 방어막.

아무도 내게 뭔가 물어보거나 말 걸지 말라고 무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다만 엎드려 있다고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청각은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대화를 예민하게 잡아냈다.

“맞겠지? 시누이 오피셜만 뜨면 되는데.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세아 자고 있는데?”

“뭔 소리야. 저거 자는 거 아님. 이세아 뭐 화나는 일 있으면 자주 저러잖아.”

“자는 사람 깨우는 거나 화나는 거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거나 비슷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아, 그래도 궁금한데.”

“나도 그렇긴 한데…….”

“아니면 내일 수업 때 도진쿤한테 물어볼까? 도진쿤 착해서 여론조성 잘 하면 대답해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함?”

“음…… 난 차라리 그게-”

아주 규칙적으로, 자는 사람처럼만 움직이던 이세아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 자신에게 물어보니 마니 하는 것도 모자라, 내일 오빠에게 물을 거라고? 그것도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안 쓰고, ‘도진쿤’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본인들은 거리가 먼 데다가 속닥이는 거라 안 들릴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간 신체와 마력 모두 성장한 이세아에겐 지나칠 정도로 잘 들리는 대화였다.

“후우…….”

이세아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 일단 저것들이 더는 입을 열지 못하도록. 그리고 같은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른 애들도 모두 입을 다물도록.

한데 그녀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의외의 구원군이 나타났다.

“너희는 어? 교수님이 너희 친구야? 자꾸 도진쿤, 도진쿤 하는데…… 진짜 리슨 리슨 아이 캔트 리슨이다.”

“응?”

“해빈이 뭐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유해빈이 재차 일렀다.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못 들어주겠다고. 뭘 물어본대? 남이 누구 만나든 관심 가지지 말고, 너희 둘이 연애나 잘하시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연애는 무슨, 우리 그런 거 아니거든?”

“어…… 진짜로?”

“아니…… 그게, 아닌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사 년 동안 지겹게 썸만 타다가 이제야 슬슬 다음 단계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는 두 명 사이에 내전을 발생시킨 유해빈이 이세아 쪽으로 걸어왔고,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든 그녀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래서…… 어제 어땠어? 도진쿤 결혼각 날카롭게 섰나?”

“……너 한마디만 더 하면 욕할 거야.”

서슬 퍼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유해빈이 옆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음…… 반응이 애매한데. 잘 됐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잔뜩 날이 선 어조로 쏘아붙인 진유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손에 든 건 유리병에 담긴 우유. 그걸 이세아의 책상에다 올리며 이번엔 대단히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세아야, 괜찮아? 이거 따뜻한 건데 좀 마실래?”

“…….”

침묵하며 이세아는 생각했다.

얄밉게 재잘거리는 유해빈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유리도, 둘 다 혼자 있고 싶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줬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즈음엔 이미 세 사람만 제외하고 2학년 학생들 전원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궁금해서 못 참겠으니까, 내일 수업 시간에 이도진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실로 인간이 아닌 수준으로 예쁘다는 그의 외국인 여자친구. 그녀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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