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05화 (105/207)

#105화. Chapter 25. 죄책감 (4)

***

“아, 그러고 보니 세라가 귀국했다면서? 둘이 만났나?”

샬럿 테이트가 언뜻 궁금해하며 내게 던진 질문.

저쪽이야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 것이겠지만 내겐 특정 상황에서는 아주 조심해야 할, 미리 대비하지 않고선 섣불리 답할 수 없는 종류의 습격이고, 공교롭게도 지금이 바로 그 ‘아주 조심해야 할 특정 상황’이었다.

“…….”

침묵하는 나를 서연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 없이, 그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그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싸늘한 기운은……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나 한 사람만 감지한 듯싶다.

뭐, 서연희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지. 단순히 알기만 한 것과 실제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만.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샬럿 테이트가 다시금 묻는다.

“만나지 않았나? 너와 세라는 친한 친구인 데다가 오래 약혼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말에 이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아르노 뒤레까지 추궁하듯 물었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둘 중 하나겠군. 아주 잘 풀렸거나, 아니면 아주 엉망이 됐거나. 진, 내 말이 맞지?”

더 대답을 미룰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최소한의 정보만을 그들에게 일렀다.

“네, 어제 잠깐.”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봐도 되나? 내가 적절하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어. 말했잖나, 네 부모님, 리와 세브도 내 조언으로 화해를 했다고. 너도 이제 연구자로 자리를 잡아가니 슬슬 방황에서 벗어나서-”

“아르노, 방정맞게 좀 굴지 마.”

샬럿 테이트의 면박.

그리고 타악- 하고, 그리 크지 않은데도 뭔가 날카롭게 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서연희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왠지 이상하다 싶었는지 아르노 뒤레가 분위기를 살피듯 말한다.

“이거…… 내가 좀 실수를 했나?”

“그런 것보다 더 생산적인 얘기도 있지 않겠어? 도진과 세라 일은 둘이 알아서 할 문제고.”

샬럿 테이트는 아르노 뒤레보다는 감이 좋았다.

내가 굉장히 난처해하는 걸 깨달았는지 이쯤에서 이 화제를 마무리하려 한다. 애초에 당신이 안 물어봤으면 수습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고맙긴 하네.

하지만 그녀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아르노 뒤레가 기어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주절거렸다.

“알아서라……. 내가 보기에 진은 내버려 두면 앞으로도 가엾은 희생자를 많이 만들 듯한데. 우리가 어른으로서 조언해주는 게 옳은 일 아닐까, 로티?”

결국에 서연희가 나섰다.

“나도 샬럿 생각에 동의하는데. 도진이가 알아서 하겠지.”

“예니까지 그렇게 말하면야…….”

자기 빼고는 전부 다 그만하라는 실정. 당사자인 나야 그렇다 쳐도, 아끼는 동생이자 친구에서 이제는 조금 다른 관계가 되어가려는 듯한 샬럿 테이트, 워낙 대하기 껄끄러워 한자리에 있어도 말도 잘 걸지 않는 서연희까지 그를 책하듯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되자 아르노 뒤레도 더 참견할 순 없었고, 짐짓 헛기침한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학구적인 얘기라도 해볼까?”

당장 떠오르는 게 그것이었던지 그가 복잡한 전문 용어를 써가면서 내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복합 속성의 방어 구성체에 이어 내가 두 번째로 세간에 발표할 논문. 마력 속성과 관련한 연구 결과물에 대해서.

“내가 출국하기 전까지 준비는 얼추 끝내놓자고. 발표는 언제로 생각하고 있지?”

“방학 때는 방어 구성체 보급 문제부터 끝내놓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서, 여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샬럿에겐 결과물이 나오면 정리해서 알려드릴게요.”

“그래, 지금은 들어도 어차피 이해 못 하니까. 연희 넌 어때?”

“나?”

“응. 너도 마법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잖아? 도진의 연구에 흥미가 있지 않아?”

가만히 지켜보다 지목당한 서연희가 나를 넌지시 보면서 답한다.

“들어보니까 꽤 흥미로운 주제긴 한데…… 난 딱히 관심은 없네. 도진이도 내가, ‘외부인’이 들어도 되는 만큼만 언급하는 것 같고.”

“뭐…… 외부인까지는 아니지 않나요?”

“그러니?”

방금 눈치챘다.

내 대답을 듣고, 서연희의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리곤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도진이도 같이 갈래? 너도 피우잖아?”

“아, 네. 그래요.”

염의준의 장례식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야 맞담배 피우면 ‘저거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면서 흉볼 사람이 아주 많았겠지만 여긴 샬럿 테이트와 아르노 뒤레밖에 없으니까. 이 둘은 그런 거로 안 좋게 생각하진 않을 테고.

한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샬럿 테이트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갈까?”

“네?”

당신 비흡연자잖아. 담배는커녕 술도 몸에 안 좋다고 사양하는 사람이 왜 뜬금없이?

나와 서연희가 의아함을 담아서 쳐다보자 그녀가 약간 멋쩍어하며 답한다.

“뭐, 이제 그런 거 철저하게 관리 안 하려고. 술은 저번에 아르노랑 같이 마셔봤고, 지금까지 안 해본 거, 겪어보지 않았던 거, 이것저것 해볼 생각이야. 그래서 담배도 한 번쯤 피워보려고-”

“진, 예니. 너희가 이해해. 로티가 이제야 사춘기가 오는 거니까, 무시하고 둘이 다녀오라고.”

“아르노, 왜 네가 참견이야?”

“참견할 만하니까 하지. 술도 마셔보고 싶다길래 줬더니 취해서 이상한 행동을 했잖아? 담배는 나도 안 피우니까-”

“그럼 너도 이번 기회에-”

“돌아가서, 적절한 시기에-”

“술은 마셔보겠다니까 반색하더니 왜 오늘은 또 날 구속하는 거야?”

“그거야, 으음…… 아무튼 우린 됐으니 너희끼리 다녀오라고.”

서로 가까워진 거리감을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는 듯한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나와 서연희는 정원 외곽으로 향했다.

테이블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도착하니 서연희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기색은 자취를 감추고, 난감해하는 웃음기가 스민 말투로 내게 담뱃갑을 건넸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같이 피우는 건가?”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판단하는 관점에 따라선 역사적인 첫 맞담배라고 볼 수도 있겠네. 햇빛을 가려주는 나무 아래에 서서 연기를 흘려보내길 두어 번. 서연희가 투덜거리듯 말한다.

“적당히 타이밍 봐서 나랑 같이 나가자. 난 여기 어색해서 못 있겠어.”

“그러게 오늘은 웬일로 나왔네요?”

평소엔 인적 없는 저택에 은둔하다시피 하는 사람인데, 설마 샬럿 테이트가 부른다고 나올 줄이야.

그러자 서연희가 답한다.

“그냥, 혹시라도 도움 될 게 있을까 봐서.”

“도움이 될 거요?”

“응, 너랑 나랑, 우리 일에.”

“아…….”

그렇게 깊고도 위대한 뜻이. 저러니까 괜히 미안해지네. 서연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쪽은 둘 다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아르노는 좀 더 봐야 하긴 하는데…… 저도 뭐, 비슷한 생각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내심 긴장하며 세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걸 각오했지만 그러진 않았고, 담배를 다 피운 우리가 테이블로 복귀한 직후.

앞으로 일탈은 둘이 있을 때만 하자고 자기들끼리 어느 정도는 합의가 된 듯한 아르노 뒤레와 샬럿 테이트, 그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진은 예니를 보통 어떻게 부르지? 나와 로티, 앤디는 이름으로 부른다만 한국은 그게 아니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면박을 주던 샬럿 테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궁금해한다고 실례가 되는 일까진 아니라고 여기는 것처럼.

나는 서연희의 표정을 살폈다. 입가가 아래로 기울고 있다. 기분이…… 좀 많이, 심각하게 안 좋아 보이는데.

그리고…….

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른 내 말이 결정타였다.

“그으, 일단 호칭으로는 이모(aunt)라고 부르는데…….”

“오, 역시 그랬군.”

“하긴 넌 세빈의 아들이니까 연희와도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예상이 맞았다며 웃는 아르노 뒤레와 흐뭇해하며 기뻐하는 샬럿 테이트가 한마디씩 한 말. 서연희가 도저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대단히 차가운 어조로,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일렀다.

“자주 들을 일은…… 없어. 그렇게 자주 볼 일도 없으니까. 그렇지, 도진아?”

“네, 그렇죠…….”

답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샬럿 테이트, 아르노 뒤레.

당신들 둘 다 최대한 빨리, 어서 유럽으로 떠나버리라고.

그리고 시계가 어느덧 오후 네 시로 향해갈 무렵.

관계가 묘하게 변화할 기미가 보이는 샬럿 테이트와 아르노 뒤레는 뭘 하든 알아서 하라고 남겨두고서 훈련장을 나선 나와 서연희는 각자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인적 드문 곳에 내려 둘 다 말없이 걷기를 일 분쯤.

굉장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누나.”

“…….”

나름대로 필살기를 썼건만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필살기보다 강한, 초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연희 누나.”

“응, 왜?”

그제야 서연희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괜히 어색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일렀다.

“아, 무슨 생각 하나 해서요. 말이 없길래.”

“글쎄? 이럴 줄 알았으면 거절하고 나오지 말걸, 그런 생각?”

“……제가 미안해요.”

솔직히 엄밀히 따지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사과를 전했고, 서연희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니야, 이 모습으론 너랑 볼 일이 많이 없잖아? 그렇게 치면 또…… 나쁘진 않았어.”

그래도 초필살기가 효과가 있긴 했는지 서연희의 목소리에는 이제 언짢아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녀와 나란히 걷기를 얼마간.

문득 서연희가 묻는다.

“어제는 잘 만나고 왔어?”

세라와 이 년 만에 만난 자리.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좀 심하게 싸웠어요.”

“응.”

서연희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자세히 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내게 부담을 주기 싫은 걸까.

그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세라도 좋은 앤데. ……나랑 성격은 안 맞지만.”

“몇 번 본 적 없지 않아요?”

대균열 전까지는 나도 서연희를 그렇게 자주 본 건 아니다. 세라는 나보다 더 드물게 봤을 거고,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을 텐데.

서연희가 재잘거리듯 말한다.

“뭐, 몇 번 봤냐를 떠나서 느낌상 그런 게 있거든. 분명 좋은 앤데 나랑 성격이 잘 맞을 것 같진 않다는 정도? 그래서 예전에 생각한 것처럼, 만약 이 신분이 아니라 너랑 세라랑 같은 나이로 제일중에 전학 왔으면…… 좀 많이 재밌었을 것 같아.”

“성격이 안 맞는데요?”

“응, 그거랑 그건 또 별개거든.”

생긋 웃으며 답하는 그녀에게, 나는 다른 말 없이 그저 사실을 알렸다.

“파혼, 하게 될 거 같아요.”

“그래?”

서연희는 단출하게 답할 뿐이었다.

기뻐한다고도, 안타깝게 여긴다고도 할 수 없는 표정과 말투.

이내 그녀가 말한다.

“세라, 정말 좋은 애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가 좋은 애라는 거.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더 미안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일견 차분히 말하는 듯한 서연희가, 사실은 세라에게 몹시 미안해하고 있다고.

의미 없는 가정으로 셋이 같이 학교에 다녔다면 어땠을지를 말하고, 세라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자꾸 언급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겠지.

나는 당연히 세라에게 미안해해야 하지만…… 서연희까지 죄책감을 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세라도, 설령 그 애가 모든 진상을 안다고 해도, 나와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이 미안해하는 건 달가워하지 않을 테고.

“괜찮아요.”

“응?”

“누나, 괜찮아요.”

단지 괜찮다고만 전한 말. 하지만 의미가 전달되었는지 서연희가 옅게 웃었고, 마치 뭔가를 다짐하듯이 이른다.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 전부 기억하고 있을게.”

서연희답지 않게 내게 짐을 지우는 듯한 말. 나는 그걸 조금은 생경하다고 여기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와 세라에게 정말 많이 미안해하는 기색이, 그녀의 맑은 눈빛에서 읽혔다.

***

한편 같은 시각.

영원 길드의 한태강은 초라한 목조 건물에서 ‘천리안’ 심정웅과 마주하고 있었다.

상대를 뚫어낼 듯한 눈빛이 늙수그레한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와 그를 향했고, 곧 나직한 말이 이어졌다.

“뭔가 있음이야.”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심정웅이 답한다.

“자네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이 서울에서 계속 되먹잖은 일을 꾸미고 있는 듯싶구먼. 염의준이가 죽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말일세.”

“팬텀이라면 지금도 추적하고 있잖습니까.”

한태강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지난 3월 염의준을 살해하고, 4월에는 대명 그룹의 경매에까지 난입해 악마의 손을 탈취해간 범죄조직 팬텀.

한태강과 심정웅은 여러 수단으로 그들의 흔적을 쫓는 중이었다.

영원 길드와 한국 최고의 마도 명문가인 심씨 가문의 세력까지 동원해 때로는 독자적으로, 또 때로는 협력하며 팬텀에 관한 정보를 모으려 애쓰고 있다.

다만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 좀처럼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팬텀의 행사는 지극히 비밀스러워 자신들의 테러 행각에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사실상 추적이 어렵다고 해도 좋은 상황이며, 그나마 단서가 있다면 팬텀의 수장이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 현대에 와선 전설로만 남게 된 인간의 오랜 숙적, 장생종일지도 모른다는 것. 겨우 그것뿐이었다.

“최근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듯한데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한태강은 그렇게 물었다.

그가 알기로 심정웅이 거론할 만한 자들이라고는 그들 팬텀뿐이었고, 심씨 가문의 정보망에 놈들의 움직임이 잡힌 것인가 하며. 그러나 노인이 느릿한 어조로 일렀다.

“아닐세. 내가 말하는 자는 고작해야 테러리스트 정도가 아니야.”

“그렇다면…….”

“물론 팬텀과도 연관이 있을 순 있겠지. 놈들이 근래 서울에 자주 다녀갔으니. 하지만…… 어째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구먼. 한 대표, 자네는 이번의 균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태강의 진심이었다.

S급 균열, 마왕 파르투스의 강림.

사망자가 없다는 것 하나만 해도 기적이고, 천운이다.

비록 파르투스의 행방이나 놈과 싸운 악마의 신원을 밝혀낼 수는 없었지만 그걸 아쉬워하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욕심이겠지.

서울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영웅으로서 굳건하게 답하는 그를 심정웅은 적막한 눈길로 응시했다.

수십 년의 세월은 젊고 심지가 곧은 청년 영웅을 제 손익을 따질 줄 아는 한 세력의 수장으로 바꾸어냈으나 그 본질까지 침범하진 못했다.

대견하고, 기껍고, 부럽고, 그리고…… 아직도 건재한 모습에 시샘이 난다.

그런 마음을 능숙하게 숨겨내며 노인이 답했다.

“염의준의 죽음, 악마의 손, 팬텀, 장생종, S급의 균열, 파르투스, 정체 모를 악마, 그 외에도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을 사건들까지. 만에 하나 말일세,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나의 배후를 통해 벌어진 일이라면? 나는, 그럴 가능성이 썩 작지 않다고 본다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팔십 년을 살아오며 체득한 직감. 그것이 심정웅에게 강렬한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그것들 모두 다, 전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테러조직 팬텀.

장생종.

마왕 파르투스.

S급의 균열.

영웅의 살해.

죄다 관련이 있을 터였고, 기껏해야 팬텀의 보스, 다시 말해 장생종 하나가 그 모든 일을 주도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보다도 상위자.

팬텀이라는 조직을 움직이며 심지어 악마까지 끌어들이고,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배후가 틀림없이 존재하리라고, 심정웅의 직감은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이제 한태강이 묻는다.

“정말 그렇다면…… 어찌 대응하실 작정이신지.”

“우선 한 대표, 자네 생각부터 듣고 싶구먼.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질문에 한태강은 굳건하게 답했다.

“온다면 있는 힘껏 싸울 뿐입니다. 과거에 제 아내와 제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요.”

“…….”

심정웅은 침묵하며 한태강을 바라봤다. 한 점 그늘도, 그 어떤 부끄러움도 비치지 않는 낯빛. 이 나라와 세상을 지켜낸 영웅, 무신 한태강은 능히 그럴 자격이 있는 자였다.

노인이 탄식처럼 되뇌었다.

“그래……. 한 대표 자네는, 태강이 너는, 그렇게 살아왔었지…….”

그들은 이후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팬텀을 추적하기 위한 방책과 정보.

서울의 경계를 더욱 강화할 수단들.

베일에 감춰진, 혹여 실재한다면 마왕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일 배후를 쫓고, 싸우게 된다면 상대할 방법까지.

거기까지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태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의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한 그가 말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어르신도 조심하시고,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언제든 직통으로 연락을 주시지요.”

한태강은 심정웅을 완전히 믿진 않는다. 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의 절반만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그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천리안’ 심정웅은 이십여 년 전 다른 이들과 함께 싸우며 세상을 구해낸 영웅의 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가 목조 건물을 나서려 하던 바로 그때.

“아, 이걸 묻는 걸 깜빡했구먼.”

“예?”

한태강은 몸을 돌려 심정웅을 마주 봤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표정.

굳어 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탐내는 듯한 기색이 노인의 얼굴에서 읽혔고, 그가 한태강에게 일렀다.

“이시혁이와 정세빈이 아들, 그리고 자네 딸 말일세.”

“……네. 한데 그 아이들은 왜 거론하시는지.”

한태강이 속내를 탐색하듯 답했고, 노인이 빙긋 웃으며 묻는다.

“둘이 큰일이 없으면 올여름에 파혼할 거란 말이 들리더구먼. 사실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한태강은 답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환영해야 할까, 낙담해야 할까. 어느 쪽도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심정웅이 뜻밖의 의사를 알려왔다.

“예정대로 파혼이 된다면…… 이시혁이와 정세빈이 아들놈, 이름이 이도진이었나? 그 아이를 내가 좀 데려다 키워볼까 하는데…… 자네, 정말로 괜찮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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